구축함과 기지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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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명칭
Destroyers-for-bases deal
일시
1940년 9월 2일

1. 개요
2. 배경
3. 협정 내용
4. 결과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40년 미국이 영국에 중고 구축함 50척을 공여하고 그 대가로 영국이 식민지의 해군기지들을 미국에게 양도한 사건. 향후 미국이 연합군 진영으로 참여하기 위한 본격적인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2. 배경[편집]


1940년, 프랑스를 6주 만에 항복시키고 유보트들과 루프트바페를 투입해 영국을 유린하던 나치 독일의 진격은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다. 특히 독일의 유보트들은 영국의 무역로를 완전히 마비시켰고 정치권 내부에서는 독일에게 항복을 하자는 의견이 진지하게 대두될 정도였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 수상은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문제는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울 실탄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제해권은 여전히 영국의 차지였지만 잠수함들을 저지할 구축함과 호위함이 태부족해 상선들이 나가는 족족 격침당한다는게 큰 문제였다.

그래서 처칠은 미국의 지원을 간절히 바라고 미국에게 지원을 거듭 요청했다. 그리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고립주의는 깨질 날이 머지 않았고 미국은 적극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들을 지원하며 개입해야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대통령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였다. 미 의회에는 여전히 고립주의 기조를 지닌 공화당 의원들이 루스벨트의 기조에 반발하고 있었다. 또 11월 5일에 있을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둔 입장에서 자칫 지나친 개입주의 행보는 지지층의 이탈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거기다가 주영미국대사인 조지프 케네디[1]는 영국의 항복이 머지 않았다며 독일을 자극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권고하기도 한 상황이다. 루스벨트가 고심을 하던 와중에 처칠은 자국 식민지의 해군기지들을 미국에게 양도하겠다는 초강수를 둔다. 나치 독일의 팽창에 맞서서 유럽으로 진출할 발판이 필요했던 루스벨트 입장에서도 괜찮은 거래였다. 1940년 9월 2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 의회의 반대를 우회하기 위해 대통령 행정 명령으로 해당 협정을 전격 발표한다.


3. 협정 내용[편집]




협정에 따라 미국은 영국측에 중고 칼드웰급 3척, 윅스급 27척, 클렘슨급 20척을 제공했다. 비록 1차대전 시기에 등장한 평갑판형 구축함이긴 해도 영국 입장에선 이만해도 감지덕지였다. 그리고 이중 9척은 캐나다 해군으로 양도되었으며 수상함 숫자가 적었던 캐나다 해군 입장에선 커다란 수확이었다.


4. 결과[편집]


영국은 미국으로부터 양도받은 구축함들을 통해 나치의 유보트 공세로부터 자국의 무역로를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데 성공한 윈스턴 처칠의 정치적 입지는 상승하게 되었고 이윽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루프트바페를 참패시키는데 성공하자 처칠 내각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고 나치와의 타협을 주장했던 정치인들은 정치 인생을 마감해야 했다.

동시에 이 협정을 통해 쇠퇴하는 영국과 부상하는 미국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전부터 미국이 급성장하는 와중에도 영국은 카리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협정으로 미국에게 완전히 넘어간 셈이 되었다

그리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국이 곧 "민주주의의 병기창"임을 선언하며 영국과 소련 측에 랜드리스를 하며 개입주의 행보를 밟아간다. 미국의 고립주의자들은 중립법 위반이라며 반발했지만[2] 얼마지나지 않아 진주만 공습이 터지며 루스벨트의 개입주의 행보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고 만다.

그리고 이 협정을 계기로 미국과 영국은 서로 정보공유까지 하며 밀월관계를 다져나갔고 이는 후에 파이브아이즈로 이어지게 된다.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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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유명한 존 F 케네디의 아버지이다. 전형적인 고립주의자이자 패배주의자로 논란이 되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특히 민주주의 영국이 패배한 다음은 미국일 수도 있다는 발언으로 인해 결국 1940년 10월 22일, 주영미국대사 직에서 사임하고 미국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 되려는 그의 야심도 끝이 나고 만다. 대신 그의 아들인 존 F 케네디가 아버지 대신 미국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 되었다.[2] 더군다나 나치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었던 당시 미국 분위기 상 소련에 대한 원조는 전혀 용납할 수 없었다. 어느정도였냐면 찰리 채플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가 나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일부 미국인들이 채플린을 비방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 루스벨트 행정부가 소련에 대한 본격적인 랜드리스를 시작하자 공화당 의원들이 이참에 빨갱이들이 망할 기회인데 굳이 원조해야하냐며 반발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치가 미국의 본격적인 적이 되고 나치가 저지른 추악한 실상들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루스벨트의 대소련 원조가 옳았음이 입증되었고 미국 내 친독파들은 그야말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