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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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의 도성 및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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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본도읍기
동명성왕 ~ 유리명왕

국내도읍기
유리명왕 ~ 장수왕

졸본성[1\]
국내성
환도성
하고성자토성 / 나합성[2\]
오녀산성
평양도읍기
장수왕 ~ 평원왕
평원왕 ~ 보장왕
안학궁 / 청암리 토성[3\]
대성산성
장안성

별궁
전설
두곡 이궁
구제궁
수정성

[1] 졸본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곽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음
[2] 졸본의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토성
[3]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던 평양의 평지성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 화이트.svg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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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환런시
오녀산성
지안시
국내성 | 환도산성
왕릉
우산하 고분군
장군총 장군총 1호 배총 | 태왕릉 광개토대왕릉비 | 임강총 | 우산하 992호 | 우산하 2110호
마선구 고분군
천추총 | 서대총 | 마선구 626호 | 마선구 2100호 | 마선구 2378호
산성하 고분군
산성하 전창 36호
칠성산 고분군
칠성산 211호 | 칠성산 871호
귀족묘 및
벽화분

우산하 고분군
우산하 3319호 ■ | 산연화총 ■ | 마조총 ■ | 오회분 1호 | 오회분 2호 | 오회분 3호 | 오회분 4호 ■ | 오회분 5호 ■ | 사회분 1호 | 사회분 2호 | 사회분 3호 | 사회분 4호 | 우산하 2112호 | 사신총 ■ | 각저총 ■ | 무용총
산성하 고분군
절천정총 ■ | 귀갑총 ■ | 형총 | 제총 | 왕자묘
하해방 고분군
환문총 ■ | 모두루총
장천 고분군
장천 1호 ■ | 장천 2호 ■ | 장천 4호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않은 왕릉, 귀족묘, 벽화묘 등에 대해서는 통구 고분군, 고구려왕릉 문서를 참고.
※ 각 고분군 구분에 대해서는 통구 고분군 문서를 참고.

둘러보기 틀 : 중국의 세계유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영어
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중국어
高句丽王城、王陵及贵族墓葬
프랑스어
Capitales et tombes
de l’ancien royaume de Koguryo
국가·위치
중국 지린성 지안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4년
등재기준
(i)[1], (ii)[2], (iii)[3], (iv)[4], (v)[5]
지정번호
1135


파일:external/pic.pimg.tw/1441966055-3556259104_n.jpg

정비, 복원된 국내성 성벽의 모습.

국내성(國內城) / 통구성(通溝城)

실제로 중국 춘추시대만 해도 도읍의 국인과 그 바깥의 야인을 구분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도시가 곧 국가였다. 고구려도 4세기 중후반 이전까지는 '고구려민'과 그 외의 '속민'을[6]

구분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사정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춘추전국 이야기》' 및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참조


1. 개요
2. 역사
3. 유적지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국내성 일대.jpg
파일:goguryeo_seong.jpg
국내성의 외성인 환도성의 터(좌측 상단)와 국내성 터(중앙 하단)
고구려 지도와 국내성의 위치.

고구려도읍지. 현재 위치는 중국 지린성 지안시 일대의 통구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졸본성에 이은 고구려 왕조의 두 번째 수도이자 두 번째 이중수도이다. 국내성은 평지성 수도였으며 짝으로 산성 수도인 환도성이 있었다. 한때 국내성과 환도성 중 어느 쪽이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가에 대해 말이 많았으나 현재는 안학궁-대성산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성인 국내성과 산성인 환도성을 통틀어서 묶는 편이다. 즉, 당시 고구려는 평지성인 국내성이 뚫리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위나암성으로 비정되는 근처의 환도산에 위치한 산성인 환도성으로 도피하여 외세에 저항했다.[7]

‘말 달리는 만주 벌판'의 이미지로 알려진 고구려의 이미지와 달리 초기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 주변의 지형은 산골짜기 속의 압록강변 작은 평지다. 구글 지도에서 지형 레이어로 보면 국내성이 위치한 지안시 주변 지방에서 시가지가 들어설 수 있는 평지는 신라의 수도 경주고려의 수도 개성보다도 훨씬 좁다. 현대 도시와 비교하면 부산광역시 1~2개 정도 면적밖에 안 된다. 더군다나 기후 역시 매우 혹독해서 작은 성읍국가면 모를까 대국의 수도로서는 걸맞지 않다. 굳이 이런 지역을 수도로 사용한 것은 미약했던 초기 고구려가 여기서 시작했고 오랜 세월 기득권이 뿌리박혀서 쉽게 옮기지 못했던 거였지만,[8] 제20대 장수왕대에 이르면 국내성을 중심으로 운영하기에는 나라가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에 결국 훨씬 넓은 평야가 있는 평양성으로 천도하게 된다. 지도만 보면 만주가 넓어보이니까 왜 고구려가 만주를 두고 한반도로 천도했는지 의아해하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평양 천도에는 국내성의 지형이라는 속사정도 있었던 것이다. 또 고구려의 핵심은 후기에 가까워질수록 만주가 아닌 한반도 북부 패서지역으로 중심이 이동되었고 평양성 천도가 패서지역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쐐기가 되었다

2. 역사[편집]


제2대 유리명왕 22년(서기 3)에 수도를 졸본성(=오녀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이후 남하정책을 펼쳐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긴 제20대 장수왕 15년(427)까지 총 424년간 고구려의 도읍지였고, 이는 고구려 역사 704년의 약 60%에 해당하는 오랜 기간이었다. 또한 제2대 유리명왕부터 제20대 장수왕에 이르기까지 28명의 고구려 군주 중 무려 19명의 군주가 이곳에 정도했다.[9]

제11대 동천왕조위의 장수 관구검이 이끄는 위군의 공격으로 국내성과 환도성이 함락당하고, 동천왕 자신은 북옥저까지 몽진했던 흑역사가 있었다. 제16대 고국원왕 때는 전연모용황이 쳐들어와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기고 태후와 왕후가 모두 납치당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남만주의 하곡분지, 산악지대와 압록강과 송화강의 중상류 수계, 개마고원, 요동에 이르기까지 교통로를 감제하면서 수비에 유리한 입지를 가진 곳이다. 이후 제19대 광개토대왕, 제20대 장수왕 시대를 거치면서 제국의 체급을 갖추면서 인프라와 입지가 더 좋은 평양성으로 천도했다.

그래도 옛 수도라서 그런지 국내성은 지리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 도시로 남았다. 평양성, 한성(現 황해도 재령군 부근)과 함께 고구려의 3경이라고 불렸다.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날 때 연남생이 주둔했던 성이 국내성이었을 정도로 고구려가 멸망에 이를 때까지 그 위용을 잃지 않았다. 연남생이 국내성을 들고 당나라에 항복하면서 당군은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이 곳은 몰락하여 잊혀졌다. 졸본성 같은 산악지역이 아니라 평야 지형이라고 하지만 거의 산골짜기 속 분지에 가까운 데다가,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중강진이 부근에 있을 정도로[10] 겨울이 상당히 혹독한 지역이다. 초기 고구려가 수도로 삼지 않았다면 더 빨리 쇠락했을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예 존재감병풍인 졸본성과 달리 국내성은 꽤나 오랫동안 수도여서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발해의 5경 중 서경압록부가 여기라고 보기도 하지만, 압록강 상류로 좀 더 올라간 위치의 임강[11]이 더 유력하다. 문헌기록의 설명에서도 린장이 더 부합하고, 고고학적으로도 지안에 고구려 유적은 말 그대로 널려있지만 발해 유물은 많지 않기 때문에 밀린다.

3. 유적지[편집]




백제의 궁성인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 내부에 현대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성 내부에 대한 발굴조사는 일부분에 한해서만 이루어졌다. 헌데 현재까지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국내성이 축조된 시기는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삼국사기》 등에 나오는 천도 기사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향후 추가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3세기 이전에 해당하는 자료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루어진 발굴조사 중 성벽 절개조사를 통해 보았을 때 적어도 현재의 국내성 성벽은 3세기 이전으로 올려볼 수 없다는 점을 토대로 성 내부에서 3세기 이전의 자료가 나올 가능성이 적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렇게 된다면 고구려 국내성의 위치가 어디인지 다시 상고해보아야할 문제이다.[12] 다만 현실적으로 중국의 심화되는 동북공정 경향을 고려하면 앞으로라도 고구려 극초반 유적의 발굴이 희망적이이라 보기는 힘든 실정이다.

파일:지안 고구려 유적 분포도_조무용.jpg
지안(集安)시에 소재하는 고구려 유적의 분포도. 좌측 하단이 마선구 고분군이 소재하는 곳으로 하안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렇다보니 집안시에 소재하는 여러 고구려왕릉고구려 군주의 장지명을 가진 군주 이름를 고려하여 마선구 고분군이 있는 마선향이라는 곳에 지금의 국내성 이전의 3세기대 도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마선향은 집안시에서 통구하 건너 바로 서쪽에 인접해있는 하안대지로써 마선구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다. 마선구 고분군에 소재하는 일부 왕릉들─마선구 626호분, 2378호분, 2381호분 등이 실제로 비교적 빠른 편으로 3세기 언저리에 해당하는 왕릉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건물지를 비롯한 일부 시설들이 실제로 마선하(麻線河)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건물지들이 마선구 고분군의 여러 적석총에 부속된 건물지라는 견해도 있거니와 건물지 자체가 정식으로 발굴된 것이 아니 이 설의 실체를 파헤치기에는 실물자료가 부족한 편이다.

이에 대해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1년 7월조에 묘사된 위나암성의 지세가 환도성이나 국내성보다는 환인의 오녀산성과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고구려 초기의 국내 위나암성은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과 하고성(下古城: 하고성자토성과 같은 성)이며, 고구려의 집안 천도는 환도성이 축조되고, 고구려의 도읍이 환도성으로 옮겨간 제10대 산상왕 재위기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설도 있다. 유리명왕이 천도했다는 국내와 집안의 국내를 서로 다른 곳으로 비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국내는 '국나'(國那)의 다른 표현으로, '국(國: 도읍)이 있는 나(那: 개천 혹은 땅)'를 뜻하는 일반명사로 풀이된다. 한편 이 설에 따르면 졸본성으로 비정되는 곳은 지금은 환인댐에 잠겨 수몰된 나합성(螺蛤城)이다.[13]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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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6] 안토니누스 칙령 이전 고대 로마에서 로마 시민권자와 아닌 사람을 구분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7] 조선만 하더라도 수도 한양이 뚫리면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했다. 평지성과 산성은 방어도 자체가 다른데 국가의 행정력이 집중되는 수도를 이런 산에다가 할 수 없으니 평지에 수도를 정하고 이를 보완하는 산성을 주변에 둔 것. 그 이외에도 고려와 조선은 이런 임시 수도 역할로 바다가 해자인 강화도를 활용했다.[8] 한국사에서만 따져봐도 천도를 준비하다 실패한 사례가 많다. 백제의 익산 천도, 신라의 대구 천도, 고려의 평양 천도, 대한민국의 세종시 천도 등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기존 수도의 기득권에 막혀서 결국 실패하거나 얼마 못 가 취소됐다. 천도가 성공한 사례는 국가 건국 초기에 아직 수도 기득권이 덜 잡혀있는 시기거나 백제의 웅진 천도처럼 침략에 의해 강제로 쫓겨간 것도 많다. 예를 들어 백제 웅진 천도만 해도 장수왕에게 원래 수도 한성이 함락돼 어쩔 수 없이 임시로 옮긴 수도지만 여기도 국내성처럼 좁아터진 지형이었기 때문에 곧 사비로 재천도하게 된다.[9] 단, 한국 고대사 분야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인 노태돈은 집안 지역에 2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유적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 제3대 대무신왕 11년조에 묘사된 위나암성의 묘사가 오녀산성과 유사하다는 점을 이유로 《삼국사기》의 유리명왕대 천도 기록의 국내 위나암성은 집안의 국내성과 동일한 곳이 아니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10] 다만 바로 압록강 건너편에 있지는 않다. 건너편에 있는 도시는 자강도 만포시이다.[11] 북한 자강도 중강군에서 압록강 건너편[12] 사실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고고학적 흔적이 없다는 점에서는 집안의 국내성 유적이 서울 송파구의 위례성, 경주의 신라 초기 유적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학자들이 고구려의 초기 기록을 대하는 자세가 백제, 신라와 사뭇 다른 이유는 3세기에나 중국 사서에서 실재성이 입증되는 남쪽의 두 나라와 달리 고구려는 이미 《한서》에서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그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서 현재까지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만 놓고 본다면 삼국 모두 건국 시기를 2~3세기 이전으로 소급하기 어렵지만 고구려는 백제, 신라보다 약 2~3세기 앞서 중국 기록에 의해 실존 여부가 교차검증되기에 초기 기록을 바라보는 데 있어 태도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13] 출처: 노태돈, <고구려 초기의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