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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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방송 육성
1. 개요
2. 상세
3. 실제 방송 내용
3.1. 학계의 평가
4. 역사 왜곡?
5. 실제 방송 당시 배경
5.1. 6.25 전쟁 발발 당시
5.2. 특별방송 당시 방송국 현장 상황
6. 이후
6.1. 실제 라디오 연설 음성 발굴
7. 대중 매체에서
8. 베리에이션



1. 개요[편집]


2016년부터 인터넷에서 유행한 . 6.25 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 녹음이 포함된 기만적인 정부 방송을 틀어 놓고 대전으로 피난한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밈이다.[2] 관련 인터넷 유행어로는 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름과 합성하여 런승만이라는 말도 나왔으며 이 드립은 심영물에서도 자주 쓰인다. 응용으로 큰 문제가 생겼는데도 별 일 아니라며 정신승리하거나 기만하는 모습을 풍자할 때 쓰이기도 한다. 지금에 와서는 당사자가 정신승리를 하지 않아도 그냥 당사자의 언행이나 성적 등이 망했다 싶으면 갖다 붙이며 망한 당사자가 자학용으로 쓰기도 한다.

2. 상세[편집]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3]

일반적으로 알려진 방송 내용. 하지만 이 연설문은 실제 했던 연설은 아니다. 다만 매우 그럴싸한 내용[4]

덕분에 런승만 및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드립과 함께 밈화되어 자주 사용된다.

상술했듯이 이승만이 육성 방송으로 이 멘트를 쓴 적은 없다. 대전으로 피난 간 이후인 밤 10시에 한 방송이 이승만의 육성 방송이었으며 그 내용은 국군이 밀렸지만 조만간 미군이 도착해서 도와줄 테니 공산당은 지금이라도 항복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까지 이승만이 아닌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 인사들이 흔히 서울사수방송이라고 알고 있는 방송을 해 댔기 때문에 사람들이 착각했다.

특별담화 방송이 있었다는 건 당연히 1950년대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정확히 듣고 기록한 내용은 없었으나 미국의 CIA 예하 FBIS(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해외방송감청부서)의 일일 보고서에 그 내용을 기록한 보고서가 존재한다.[5] FBIS는 일본 오키나와에 소재한 감청소이며 남북한과 중국, 소련의 방송을 모니터링하여 일일 보고서를 작성하여 매일 미국에 통보했다.

일단 27일 당시 이승만은 의정부 탈환 발언을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한 건 아니다.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계속 거짓말을 했으며 북한군이 쳐들어오기 직전에도 그 거짓말을 철회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 전후로 어떤 내용이 함께 방송되었나면, 대한민국 국회가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결의한 내용에 대한 소식, 그다음 국방부 정훈국에서 의정부를 탈환했다라고 하는 소식, 일종의 사기 진작 차원에서 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러한 뉴스가 이승만 대통령 연설의 전후에 같이 나갔기 때문에 그것을 들었던 사람이 '이승만 대통령이 그렇게 이야기했구나', 이렇게 혼선을 빚을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있었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김명섭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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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38선 정리코 반격 태세 완성

의정부 북방 전차 대격퇴

1950년 6월 26일자 자유신문

국방부 보도과와 공보처가 27일 오후 1시에 특별방송을 통해서 의정부를 탈환했다는 내용을 공식 발표했다. 의정부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하였고, 상황이 좋아졌으므로 수원 천도 결정을 취소하였고, 정부는 여전히 수도에 있으며, 국회는 서울 사수를 결의하였다, 국민은 국방군을 믿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Daily Report, No.124, Korea, June 27 1950, ccc 1(RG 263, Box 330))[6]

그리고 27일 오후 4시에 국방부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은 맥아더 사령부에서 전투사령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이튿날부터는 공군을 위시하여 미군이 참전할 것이고, 국방군이 현 전선을 고수할 것이라는 특별발표를 하였다. 헌데 직후 주민들은 육군사령부가 시흥으로 남하하고 국군이 남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으나 이 방송을 직접 혹은 알음알음 전해듣고 두려움을 잠재웠다고 한다. Daily Report, No.124, Korea, June 27 1950, ccc 16(RG 263, Box 330)[7]


3. 실제 방송 내용[편집]



그러다가 갑자기 27일 밤 10시경[8]부터 이승만은 본인 육성으로 방송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과 미국 측 감청부서에서 기록한 영어 번역문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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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06월 27일 이승만의 실재 방송문 (축약)

지난 몇 달간 나는 미군의 군사 원조가 곧 올 것임을 단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한 원조를 실현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적군은 전차, 전투기와 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맞서싸울 수단이 없다시피합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 직면하여 나는 도쿄와 워싱턴에 전화하여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마침내 나는 오후에 맥아더 장군에게서 전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입니다. 이는 빠른 시일 내에 도착할 것입니다. 나는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오늘 밤 이렇게 방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습니다. 모든 우방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용감한 군경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9]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주고자 다시 한번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처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을 민국(民國)[10]의 충성스러운 시민이 되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 Daily Report, No.125, Korea, June 28 1950, ccc 5(RG 263, Records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DailyReports, 1941-1959, Box 330)

이 방송에서 국군이 의정부 지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전차의 엄호에서 진격하는 적군을 막지 못했고 적군이 서울 교외 가까이까지 진출한 상황인 건 밝혔으며 흔히 알려진 "서울 시민들은 안심하고 서울을 사수하라"등의 내용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이지만 문제는 이전 방송에서 행한 의정부 전투 승패 왜곡, 맥아더 사령부에서 전투사령부를 서울에 설치한다는 내용, 현 전선 고수, 서울 사수 내용을 철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11] 그러니 이전 방송이 왜곡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맥락을 연결해서 들으면 서울사수로 해석되는 내용이었다. 정부는 정부 전선이 무너지고 서울 함락이 임박하였음을 충분히 알았던 상태였는데도 '의정부를 탈환했다.', '서울을 사수했다',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방송을 연달아 하더니 대통령이 직접 '열심히 싸워라'고 말했다. 전후 맥락을 연결하면 북한군에게 밀려서 피난 가야 한다는 내용으로 해석되지 않는 방송이다. 이 탓에 북한군의 침략에 공포에 빠졌던 국민들은 대통령과 정부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하며 대통령과 정부를 불신하게 만들었다.[12]

즉, 이승만 본인이 직접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서울은 안전합니다"라고 발언한 적은 없더라도 이승만 정부가 맥락상 그러한 의미로 해석되는 방송을 송출해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을 기만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드립은 이러한 방송 내용을 한 줄로 압축해 표한한 문장이다.

순서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오후 1시 국방부: 의정부 탈환. 정부 수원 피난 취소. 서울 사수. 국민들은 안심해달라.

오후 4시 국방부: 맥아더 사령부가 서울에 전투사령부 설치. 국군 전선 유지


오후 9시 이승만: 미군이 참전하기로 했고 장교와 군수물자가 오고 있다. 우리는 싸우기 위한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보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지금이라도 대한민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해주겠다.


3.1. 학계의 평가[편집]


실제 장영민 교수의 논문을 보면 27일 오후 1시 공보처는 특별발표를 함. 의정부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하였고, 상황이 좋아졌으므로 수원 천도 결정을 취소하였고, 정부는 여전히 수도에 있으며, 국회는 서울 사수를 결의하였다, 국민은 국방군을 믿어야 한다고 방송했다던가 (Daily Report, No.124, Korea, June 27 1950, ccc 1(RG 263, Box 330)).[13] 27일 오후 4시 에 국방부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에 의하면 맥아더 사령부에서 전투사령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이튿날부터는 공군 을 위시하여 미군이 참전할 것이고, 국방군이 현 전선을 고수할 것이라는 특별 발표함.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이것이 주민들의 두려움을 잠재웠다던가 (Daily Report, No.124, Korea, June 27 1950, ccc 16(RG 263, Box 330)).[14] 등등 이런 방송으로 이승만 정권이 국민들을 기만했다고 대놓고 설명해 준다. 그리고 엄연히 장영민 교수의 전체적인 맥락과 요약은 이런 내용이다.

이처럼 27일의 라디오 방송은 위급한 전황을 정확히 보도하기보다는 기만적인 허위 정보로 청취자와 국민을 속였다. 더구나 이런 방송이 대통령 연설과 함께 방송되었기 때문에 청취자들은 한층 정부 발표를 신뢰하고 전세를 낙관하였다. 특별 방송에서도 의정부 전투의 승패가 명확히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청취자들이 혼동하였을 수도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하여도 승리와 서울 사수를 외치던 대통령과 정부관리가 자신들을 내팽개치고 살길을 찾아서 일찌감치 도망하였다는 사실은 국민에게 큰 충격과 배신감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그러므로 후일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부 탈환까지 말하면서 국민을 속이고 버렸다는 비난으로까지 비화되었다. 특별 방송 내용만 국한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억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 지 며칠 만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공포에 사로잡힌 국민에게 안심하고 싸우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서울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방송하였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이다. 더구나 의정부 전선이 무너지고 서울 함락이 임박하였음을 충분히 알았던 상태에서 그런 방송을 하였 다는 것은 국민의 안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무책임의 극치이다. 방송에서는 의정부 패전과 서울 사수를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실질적으로 그렇게 공언한 것과 다른 바가 없었다. 함께 싸우자는 연설을 들은 국민은 대통령이 수도와 자신들을 포기하고 탈출하였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결국 기만적인 심리전 방송은 수많은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지속된 군과 정부의 방송 심리전으로 KBS는 유엔군 사령부의 통제 아래에 들어갔고, 그 결과 방송 주권을 침해당하게 되었다.16) 이는 허위·왜곡·기만·부정·타매·위협·증오를 속성으로 하는 심리전이 초래하는 파멸적인 결과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사례이다. 또한 미디어가 언론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정부에 종속되어 심리전에 동원될 때 피할 수 없는 위험을 뼈저리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장영민,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 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12, 985-986쪽KCI 등재[15]



4. 역사 왜곡?[편집]




이 문서는 나무위키의 이 토론에서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드립과 밈은 역사왜곡이 아니다(으)로 합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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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에서 다루는 밈이 역사 왜곡이고 모함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승만 정부가 했지만 이승만 본인이 발언하지는 않았으니 왜곡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오류가 많다.

  • 국방부 방송은 명백히 정부의 방송이다.
  • 정부의 기만방송을 정부수반이 한 것으로 표현하는 건 왜곡이 아니다.
  • 이승만 본인 방송도 기만방송이다.

전시의 국방부의 방송은 명백히 정부의 방송이며 그 방송 내용은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과 일치한다. 그러니 이승만 정부가 실제 밈의 내용과 일치하는 방송을 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본 문서가 다루는 드립은 이승만 정부의 행동을 이승만 본인이 한 것으로 각색해서 밈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의 연설 자체도 기만방송이 맞다.

(27일 오후 4시 국방부) 맥아더 사령부가 서울에 전투사령부 설치. 국군 전선 유지 >>(오후 9시 이승만) 국군이 적을 막을 수 없고 적이 서울근처에 왔지만 미군 참전, 장교와 군수물자가 오고 있음. 국군이 열심히 싸운다.

보다시피 이승만 방송에서는 오후 4시 방송을 부정하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문맥을 연결하면 이전 방송을 강조하고 있다.

이승만 본인부터가 제대로 된 정보를 국민들에게 주지도 않았다. 적이 서울로 접근하고 있다고만 했지, 정확한 전황을 전달한 것도 아닌데 이전 문맥을 연결해 보라.

연설 내용을 분석해 봐도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 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며 이는 빠른 시일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고, 모든 우방국들이 우릴 지지하고 있다.'는 말은 그 자체로 해석하더라도 국민에 대한 기만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는 식으로 말하고 있으니 어떻게 방송을 들어도 '적이 서울로 오니 대피해야 한다'고 해석되지 않는다.

국군이 실시간으로 패퇴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그와는 동떨어진 긍정적인 내용의 방송을 함으로써 전황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도 기만이고 미군 지상군이 오려면 시간이 한참 걸리는 상황인데도 미군의 참전 소식만을 강조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잘못된 기대를 가지게 한 것도 기만이다.[16]

1950년 6월 27일의 흐름을 보면 이승만 정부가 충청남도지사 관저에서 특별 방송을 하기 전에 정부기관을 통해 '의정부를 탈환했다'거나 '정부는 여전히 수도에 있다'거나 '맥아더가 전투사령부를 서울에 설치했다'거나 '미군이 참전할 것이다'거나 '국군이 현 전선을 고수할 것이다'라는 왜곡방송을 했고 그 뒤에 이승만이 충남지사 관저에서 '맥아더 장군의 전보에 따르면, 미국은 우리에게 수 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며 이는 빠른 시일에 도착할 것이다.[17]',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고, 모든 우방국들이 우릴 지지하고 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는 내용의 방송을 했으며 현 전황에 대해서는 '적군은 전차, 전투기와 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싸울것들이 전무한 상황이다.' 라는 식으로 모호하게 설명하면서 '나는 도쿄와 워싱턴에 연락하여 현 상황을 설명했고, 마침내 나는 오후에 맥아더 장군의 전보(미군참전)를 받게되었다' 말을 뒤에 덧붙임으로써 '공산군이 침공해 왔지만 곧 미군이 올 것이다'라는 내용이 되어 버리니 정확한 전황을 전한 것도 아니다.

인터넷에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이승만은 직접 자기 입으로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라는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이승만 정부에서 발표한 내용이라는 것, 이승만 본인이 기만 방송을 했다는 것 등은 사실이다.

이승만에 대한 사실을 서술할 때 '이승만 본인이 저런 연설을 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명백히 역사 왜곡이지만 '전쟁 발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무책임한 도주를 표현'한단 점에선 해당 밈의 표현은 왜곡이 아니다.

5. 실제 방송 당시 배경[편집]



5.1. 6.25 전쟁 발발 당시[편집]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일어났는데 대한민국 국군은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불과 전쟁 발발 3일 후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 하루 전인 6월 27일 이미 전선은 서울 창동 근처까지 내려왔고 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에 서울을 떠나 수원을 거쳐 대전으로 내려갔다.[18] 일단 피난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게, 국난 상황에서 정부의 피난 자체는 흔한 일이었다.[19] 실제로 1, 2차 세계대전에서도 참전국들 중 정부가 위기에 처한 수도를 버리고 후퇴한 사례가 많으며 프랑스나 폴란드는 물론 네덜란드나 노르웨이 등등 독일에게 점령당한 국가는 거진 다 그랬다. 이승만은 더 많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작전상 후퇴한 군사작전 중 일환이었으며 이승만이 지켜야 할 국민은 서울 인구 150만명뿐만 아니라 남한 국민 2,150만명도 있었다.

거기에 마침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전 참전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여기에 힘을 얻은 이승만은 국민을 안심시켜 혼란을 막겠다는 생각 + 자신의 대전행을 적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연막 효과 등을 위해 대전에서 중앙 방송국을 통해 특별 방송을 실시했다. 이른바 6·27 특별방송이다. 일주일 후 7월 4일 이승만 특별방송에서 자신이 서울을 내려온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내 한 몸이 국군의 앞에 서서 죽음으로서 싸워야 옳을 것인데 피하여 나온 것은 구차히 목숨을 위해서 한 것이 결코 아니오 첫째는 성중에 있으면 군경(軍警)전투상에 도리어 곤란을 당하겠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요. 또는 내가 나와 앉아서 세계에 호소해서 공론이 일어나야 할 것을 각오한 것이 두번째의 이유인 것입니다.

전쟁 경과에 대해 대 국민 특별방송(이승만 대통령, 1950. 7. 4.) - 한국사DB


당시 프란체스카 여사나 경무대 비서 등의 회고록에 의하면 대통령은 갈 마음이 없었고 신성모가 전날 밤까지 반격에 성공했다고 허풍을 쳤다. 북한군이 1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던 걸 우려한 신성모 국방장관 겸 국무총리 대리는 적이 청량리에 왔다는 가짜 뉴스를 알려서 이승만을 떠나게 했다. 창문이 깨지고 스프링이 튀어나온 말 그대로 긴급한 상황에서 간신히 마련한 3등열차 2칸을 이은 특별열차를 타고 대구까지 갔다가 이승만은 상황이 보고와 다름을 알고 다시 서울로 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대전역에서 신 장관과 이기붕 서울시장이 더 이상의 북상은 위험하다고 만류하고 미군 참전과 결의안 통과, 정부부처들의 후퇴를 보고받고 충남도지사 공관에서 임시수도를 재건하게 된다. 그래서 충남도지사 공관을 대전 경무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개방되어 있어 관람이 가능하다.

그런데 당시 미국 대사가 보낸 전문에 따르면 이미 25일 밤 이승만은 정부가 공산당에게 잡히면 대한민국 체제에 심각한 타격이되어 안되기 때문에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려 한다고 말했으며 정작 외국인인 대사는 수도에 남아 국군의 사수를 돕겠다는 전문을 보냈다.

다음은 무초 대사가 보낸 문서의 내용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25일 밤 10시에 제게 전화를 걸어 자신과 면담할 것을 요청했습니다.대사관에 있던 신성모 국무총리서리가 저와 동행했습니다. 제가 대통령관저에 도착했을 때 이범석국무총리는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큰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룩거리면서 중간에 끊어져 뜻이 통하지 않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의정부의 상황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에 따르면 수많은 전차가 서울을 향해 쇄도하고 있으며 한국군의 능력으로는 저항할 수 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국무총리서리에게 한국어나 영어로 말을 걸었으며 가끔씩 이범석에게도 한국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내각에서 오늘 밤 정부를 대전으로 옮길것을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통령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안전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정부를 반드시 보전해야 하며 만약 대통령 자신이 공산당에게 잡힐 경우 대한민국의 체제에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이대통령은 뜬금없이 국무총리서리에게 군사지식을 가진 "유능한 사람을 여러명" 모아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고 필요한 조치를 결정하라고 지시했습니다.[21]

이대통령은 만약 신성모가 만족할수 있을 정도로 군사적인 상황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저없이 그 사람을 위해 국방부장관직을 사임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통령은 한국측은 미국이 큰 원조를 해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우리는 1천만 달러 정도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갑부인 박흥식(화신 그룹의 소유주인)이 무기 구매를 위해 백만달러를 제공하겠다고 한 것을 알고 있지만 내 생각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국무총리서리는 거듭해서 이대통령이 지시하면 상선단에서 얻은 경험에 따라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네 각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하"를 연발했습니다. 하지만 신성모도 이대통령의 결정과 명령에 대해 매우 불쾌해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신성모는 결국에는 실례하겠다고 한 뒤 의정부 지구의 전투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화로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대통령에게 무기와 병력이 있다는 점과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바주카포와 대전차포, 그리고 대전차지뢰를 사용해 싸워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정부가 서울을 지키도록 설득하려 노력했습니다. 신성모는 57mm 대전차포가 북한군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했다고 말했고 저는 대전차지뢰의 사용을 강조했습니다.(신성모의 주장은 다소 의심스럽습니다. 한국의 도로와 교량은 중전차(extremely heavy tanks)가 다닐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만약 정부가 서울을 포기한다면 전투에 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한국의 상황이 계속 악화된다면 이것을 다시 호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대통령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그는 거듭해서 자신은 개인적인 안위에는 관심이 없으며 정부가 사로잡히는 위험을 감수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대통령의 생각을 바꿀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자 자리를 뜨기로 했고 이대통령에게는 대전으로 피신하라고 한 뒤 저는 서울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미국인 여성과 어린이들은 다음날 밝는대로 일찍 철수시킬 것이며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서울 상공에 공중 엄호가 있을 것 이라고 했습니다. 이대통령은 여성과 어린이들은 피신해야 한다는데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 사절단의 남성들은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회의를 끝내고 나오려 하자 이범석은 어설픈 영어로 그가 생각하기에 북한의 원래 전략은 서울 방면으로 기만 공격을 건 뒤 동해안에 게릴라 부대를 상륙시키는 것이었으나 서울 방면으로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이 지구에 전력을 더 투입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범석은 한국군이 서울 방면으로의 공격에 대항해 완강하게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회의실을 떠나자 이범석은 대통령과 나눌 말이 더 있다고 하면서 남았습니다.

대통령관저를 나서자 신성모는 저에게 다가와 이대통령은 그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정부를 옮기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했습니다.[22]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6),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p.141~143, 번역: 길 잃은 어린 양의 놀이터( http://panzerbear.blogspot.kr/2010/06/1950-6-27.html?m=1)


966. 서울 북쪽의 북한군은 지난 밤 사이 조금 더 진격해왔습니다. 가장 신뢰할 만한 상황 평가에 따르면 서울 근방의 적군 병력과 전차 숫자가 과대평가되긴 했어도 숫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사관은 현재 고립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대통령과 대부분의 각료들은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피신했습니다.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한국군 참모부는 아직 서울을 사수할 것을 고집하고 있습니다.[24]

저는 소수의 지원자와 함께 최후의 순간까지(until bitter end) 서울에 남을 것이며 드럼라이트 참사관 및 소수의 대사관 직원을 자동차 편으로 대통령을 따르게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한국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막기 위해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핵심 요원은 사태의 추이에 따라 차량을 이용해 남쪽으로 보내고 그밖의 군사고문단 요원들은 항공기편으로 피신시켜야 합니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7),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173, 번역: 길 잃은 어린 양의 놀이터 ( http://panzerbear.blogspot.kr/2011/04/blog-post_17.html?m=1)


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 2권 '시련과 희망'(1946~1952)에 1950년 6월 26일(한국 시간 6월 27일) 당시 기록이 있다.

파일:TrialandHope.png

월요일이 되자 한국으로부터 들어오는 보고들은 어둡고 실망스러웠다. 이승만은 美 국무부의 電文 보고 형식으로 쓴 편지를 통하여 지원을 요청하였다. '6월 25일 이른 아침부터 북한공산군은 남한에 대한 무장 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 각하와 미국 의회도 잘 알다시피 우리 국민들은 이런 사태를 예상, 동양에서 민주주의의 보루를 구축,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강력한 국군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귀하께서 우리를 해방하고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도움을 주신 데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였지만 용감하게 저항하고 있으니 세계 평화를 파괴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더 강력한 지지와 효율적이고 시의적절한 지원을 호소합니다.' 李 대통령의 호소문을 가져온 한국 대사는 낙담하여 거의 울먹였다. 나는 전투가 겨우 48시간 지났을 뿐이고, 다른 나라들은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싸워서 종국적 승리를 거두어 자유를 지켜냈다고 말하여 그를 격려하였다. 나는 그에게 버티어내라면서 지원이 진행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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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 2권 '시련과 희망(Trial and Hope)'(1946~1952) 中



5.2. 특별방송 당시 방송국 현장 상황[편집]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방송 당시 상황은 당시 대전방송국에서 6·27 특별방송을 내보낸 담당책임자 유병은의 회고를 옮긴 것이다.[25] 출처는 50여 년 간 방송계에 몸담았던 이장춘(전 KBS 관재국장, 한국방송인동우회 이사)이 직접 관리하는 블로그다. 더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링크 참조.[26] 다만 해당 블로그 글에서는 27일 9시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며 서울 시민들은 안심하라는 방송을 했다고 증언하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27일 9시 담화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부 방어가 실패했음을 인정했다고 언급한다.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이 막 대전에 도착할 무렵, 당시 갓 부임한 이범구 대전 방송국장은 서울 집에 가고 없어서 당시 대전 방송국 방송과장 유병은이 사실상 방송국장 직무대리를 하고 있었다.

이 날 오후 7시 반 경 갑자기 초대형 고급승용차가 대전 방송국 정문으로 들어와서 유병은 방송국장 대리가 나가보니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온 헌병사령관 장흥 대령이 유병은을 급히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갔다. 유병은은 무슨 일로 어디로 가느냐 물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고 장흥을 따라 어디선가 내리니 그곳은 충청남도 도지사 사택이었고 당시 충남지사였던 이영진이 현관에서 마중나와 있었다.

이후 응접실로 안내되어 들어가니 이승만이 프란체스카와 선 채로 귓속말을 하고 있었고 잠시 뒤 이승만은 장흥에게 출입문을 잠그도록 지시했으며 장흥은 문을 잠근 뒤 권총을 손에 쥐고 유병은을 협박하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승만은 유병은이 방송국 책임자인 지 확인한 뒤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2.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 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3. 오늘 저녁 9시[27]

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어 전국에 중계해 온 국민이 듣게 하라.[28]

4. 내가 방송하는 것을 서울에서 녹음했다가 밤에 여러 번 재방송하라.

5. 누가 묻든 지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선 안 된다.

6. 이 대통령이 방송한다고 미리 누설해서도 안 된다.


이 지시를 듣고 유병은은 그 자리에서 대전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에 필요한 방송 기기를 보내도록 지시했으며 대전우체국에 전화를 걸어 신분을 밝힌 뒤 충남도지사 관사와 대전방송국과 서울 중앙방송국에 각각 방송 선로를 즉시 개설해 줄 것을 요청하고 다시 시외 전화를 서울 중앙방송국 조정실에 걸어 당시 담당자 왕종현에게 오늘 저녁 9시 대전에서 방송을 올려 보낼테니 아무 소리 말고 무조건 전국에 중계 방송하라고 말했다. 당연히 무조건 방송하라는 말을 들은 서울 방송국 측에선 이유를 여러 번 물었고 이에 한 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방송 예정 시간을 얼마 안 남기고 유병은은 중계방송 기기를 조심스럽게 설치하고 마이크를 대통령 전용 탁상에 설치한 뒤 마이크 시험을 끝내고 8시 40분에는 서울 중앙방송국 조정실까지 중계선로를 개통시켰지만 선로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해 필사적으로 상태를 개선시키는 등 중계방송을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9시 정각 이승만은 특별 담화를 방송했다. 서울중앙방송국이 북한군에 점령당할 때까지 이승만 특별 담화가 방송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녹음 방송 틀고 도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방송인으로서 사명을 가진 일부 직원들이 남아서 예정되어있던 임시 방송을 진행하여 이승만의 담화 방송은 자연스럽게 끝났다. 공산군 점령 직전 마지막 방송은 기사 이성실이 오전 7시 45분까지 송출한 군가 행진곡 모음이다.[29] 이성실은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 가 있을 때 송신기 조정작업 중 불의의 감전사고로 현장에서 순직하였다.


6. 이후[편집]


이후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여 미군과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이승만은 정부 인사들과 함께 도망갔다가 서울로 다시 돌아왔는데 국민들의 민심과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국회의원들이 이승만더러 서울 시민들한테 사과를 해야 한다고 권유하자 이승만은 버럭 화를 내면서 "내가 당나라 덕종마냥 덕이 없어서 이런 고초를 겪게 했다고 말하란 말이냐? 나는 사과 못한다. 사과하고 싶으면 당신들이나 해라." 라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며 사과를 거부했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부역자 색출을 한다면서 서울 시민들 중 무려 55만 명을 체포하고 그들 중 800명을 붙잡아 사형시켰지만 너무 지나친 처사라는 비판 여론이 일자 사형시키지 않은 시민들을 모두 풀어주었고 결국 이기붕이 이승만을 대신해서 "서울 시민들한테 죄송하다"고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다.

이런 이승만의 처사를 두고 검사 정희택은 "1개 사단 규모의 전향자들을 책임지고 있는 정보 검사에게까지도, 그것도 최후의 순간에 전화 문의까지 했는데도 거짓말을 하고 저희들만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배신과 기만으로 애국시민들을 내버리고 도망친 자들인데 무슨 염치로 잔류파를 재판한다고 하는 겁니까?" 라고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오늘날 일각에서는 이 기만 방송에 대해 대피 권고 방송을 했을 경우 혼란과 약탈 같은 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의견이 있지만 정작 1년 후 중공군이 쳐들어오자 이승만이 피난을 가라고 명령을 내린 일을 보면[30]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는게, 중공군이 쳐들어올 시점에는 이미 국군이 밀릴 수 있다는 것이 다 알려졌고 전시 상황도 공고해졌으니 순응이 빨라서 비교적 혼란이 없이 진행된 것이고 이 상태에서는 전쟁이라고 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별안간 국군이 밀리고 있어 도망가야 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므로 패닉이 발생할 여지는 시각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부분에선 충분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비판해야 할 부분은 전술한 대로 이승만이 사과를 안 하고 오히려 부역자들을 죽이겠다면서 적반하장식 행동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승만 대통령은 왕조 시대에 태어났을 뿐 공화주의를 주장하면서 사형당할 위기까지 몰렸고 미국으로 간 후 계속 민주주의, 자유주의, 공화주의를 외쳤다. 그러다가 본인이 대통령이 되니 갑자기 대통령 목숨이 그렇게 중요하다 외치는 건...

6.1. 실제 라디오 연설 음성 발굴[편집]



원래 본 음성은 방송 이후 한 번도 발굴된 적이 없었고 공개되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KBS에서 다큐 인사이트를 통해 한국사의 과거 영상, 음성 등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방송을 하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많은 영상과 음성들이 발굴, 복원되었다. 그런데 그 중 당시 이승만의 실제 라디오 원본 음성을 미국국립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하고 일부분의 음성을 복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물론 원래 연설 내용은 문서를 통해서 존재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미궁에 빠져 있던 실제 음성을 발굴, 복원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겠다.

유의할 것은 라디오 음성의 기록이 시간이 오래 지나서 훼손되었기 땜문에 현재 듣기로는 복원하여도 선명하지는 않고 완전히 복원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듣기에 불편함이 있어서 현재로선 듣기에 집중하며 연설을 기록한 문서와 대조하면서 들어야 알아듣기 수월할 것이다. 연설 음성의 전체를 듣고 싶지 않고 일부분만 듣고 싶을 경우에는 이 문단의 첫 번째로 첨부한 다큐 영상에서 일부분을 듣기 좋게 자막을 보여주기 때문에 바로 위의 영상을 보면 될 것이다.


위 영상은 당시 1950년 6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라디오 실제 원본 음성이다.


위 영상은 이 영상의 위에 있는 원본 음성을 일부분 복원한 영상이다.

위 문단에도 일부분 나와 있지만 당시 연설의 전문을 영문으로 적은 문서도 여기에 첨부하겠다.#

7. 대중 매체에서[편집]


6.25 전쟁 초기 과정을 다룬 드라마에서는 한 번씩은 꼭 다룬다. 이환경 작가가 쓴 야인시대영웅시대에선 실제 사실과는 다르게 개전 하루 뒤인 6월 26일에 시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이승만이 서울에서 방송을 하고 이후 도주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특히 야인시대에서 최동열이 다들 전쟁통에 피난하느라 바쁜 와중에 막상 피난은 않고 호기심 때문인지 방송국에 찾아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녹음 테이프만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 그는 테이프를 뜯어내 방송을 중단시킨다. 참고로 이 장면은 기계를 강제 고장내는 흔치 않은 장면이기 때문에 야인시대 합성물에서 나레이션을 무력화시키는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덧붙여서 이승만의 도주와 함께 쓰이기도 한다.

서울 1945에서는 실제 사실과 맞게 6월 27일 밤에 대전에서 방송한 것으로 그렸지만 이승만이 충남지사 관사가 아닌 대전 방송국에서 방송했으며 준비된 원고를 읽는다는 소소한 고증오류가 있다. 실제로는 원고 없이 방송했다.

건국전쟁에서는 소위 '런승만'이라 알려진 이 밈을 세간의 잘못 알려진 오해라고 하면서, 당시 라디오 방송 원본 어디에도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라는 말은 없었다는 정도로만 반박하고 넘어갔는데, 본 항목에 적혀있는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는 이 밈에 대한 충분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8. 베리에이션[편집]


  • 파일:IMG_20170603_100912.jpg
채색판도 존재한다.

  • 파일:external/i3.ruliweb.com/15778b6a788b7ce1.jpg
발전형으로 이미 도망치고 없는 버전도 있다. 그런데 마이크 옆 잎사귀 쪽 손이 편집자가 까먹었는지, 아니면 흑백이라 분간되지 않았는지 지워지지 않았다.[수정] 여기에 근육을 보여주는 유승준 사진을 넣은 버전도 존재한다.

  • 파일: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축음기.jpg
녹음방송만 틀고 도망간 것을 반영한 버전의 짤방이다. 축음기만 마이크 앞에 두고 도망친 뭔가 병맛 같은 장면이 포인트다. 이 버전도 위에 도망간 버전을 사용했는지 손이 남아 있다.

  • 어떤 회사나 게임, 애니메이션 등 작품이 큰 논란에 휩싸이는 사건이 터졌을 때 책임자가 "OO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OOO는 안전합니다!"라는 제목과 이 짤방이 쓰이기도 하는데 망했는데 괜찮다고 거짓말 친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박정희5.16 군사정변 일으켜 놓고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민주주의는 안전합니다!"라고 한다던가 등이 있었다.

파일:새마을금고 알림.jpg



  • 파일:2019수능특강.jpg
2019학년도 수능특강 한국사에서 문제 내의 삽화로 나왔다. 말풍선 안의 내용들은 읽어 볼 필요가 없을 정도. 문제의 정답은 체크되어 있는 4번이 맞다. 1번은 조소앙, 2번은 김구, 3번은 박정희, 5번은 김규식. 전술했듯 삽화는 1950년 10월에 평양 탈환 후 평양에서 연설하던 장면이고 말풍선의 내용은 1946년 정읍발언의 내용이다. 즉, 이승만이 말풍선 속 내용을 말하면서 저 포즈를 잡은 것은 아니다.[31]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의 기습 침공을 맞이하자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우리는 모두 여기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영상#을 공개하였는데, 이승만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말을 지키며 수도에서 결사항전을 하여 군의 사기를 다시 세우고 국가 존망의 위기를 극복해내며 러시아군의 침공을 이겨내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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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이 사진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평양 탈환작전 후 이승만이 평양에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그 유명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어록이 이 연설에서 나왔다.# 이 문서의 제목과 같은 발언은 해당 연설에서 없었다. 사실 6.25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은 일주일 동안 임시 수도를 3번이나 바꾸면서 부산까지 파천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일반인들 앞에 나서서 연설이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승만이 연설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바로 연상되어 곧잘 쓰이고 있다. 이 짤만 붙으면 어떤 주장이라도, 심지어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인이나 증거 등이 있어도 신빙성이 증발하는 마법의 짤방이다.[2] 대구까지 도망갔다가 보고 받은 후 대전으로 올라왔다[3] 이 연설은 영화 부산행의 안전행정부 장관의 연설의 모티브가 되었다.[4] 북진 통일을 원했으며 국민들에게도 그것을 약속으로 내걸었던 이승만의 역사적 행보와 매우 어울린다는 점에서 역사를 어느 정도만 알고 자세히 실증 자료를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연설이라고 보일 정도다.[5] FBIS Daily Report, No.125, Korea, June 28 1950, ccc 5[6] 장영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12, 985쪽[7] 장영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12, 985쪽[8] 아래 문서에서도 방송시간을 한국시간 10시 10분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9] 이런 조건으로 만들어진 조직이 전향한 공산주의자들을 모은 보도연맹이다. 실제로 보도연맹이 창설되었을 때 법무부장관과 경찰청장 같은 고위직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한다면 모든 죄를 사면하고 앞으로 결코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정작 이승만 본인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국군과 경찰에 보도연맹 회원들을 모두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 회원들은 국군과 경찰에 의해 끔찍한 대량학살을 당했다.[10]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남한을 뜻하는 명칭으로 '민국'을 자주 사용했음을 감안한 번역이다. 초창기 대한민국에서 국호에 들어가는 republic의 번역어로 '공화국' 사용을 기피했던 것은 대한'민국'으로서의 정통성 문제도 있지만 북측이 자칭한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식해 기피했기 때문이다.[11] 장영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12, 982;985-986쪽[12] 장영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12, 985-986쪽[13] 장영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12, 985쪽[14] 장영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12, 985쪽[15] 참고로 장영민 교수는 역사학 전공자로(동학농민운동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그가 재직 중인 상지대학교에 사학과가 없는 관계로 방송 영상학과 소속으로 되어 있다.[16] 사실 오후 4시 방송 내용을 배제하고 9시 방송 내용 자체만 보더로도 문제가 있는 것은 맞다. 저 방송 당시 이승만은 이미 도망와 있었고 불과 5시간 후인 28일 새벽 2시에 국간은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폭파했으며 서울은 이날 북한에게 함락되었다. 즉 저 방송을 할 당시 일반 국민은 급히 피난해야 하는 시점이었으나 방송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승만은 국민에게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으며 피난해야 한다고 하지도 않았다. 전황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는 일반 국민 입장에선 정부의 지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대통령이 '급히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란 사실을 얘기하지 않은 것이다. 거짓 정보를 직접 얘기하지 않더라도 필요한 정보를 누락하는 "작위에 의한 거짓말(lying by ommission)"도 거짓말이다. 결국 이승만이 "우리군이 이기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진 않았더라도 국민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음으로서 국민을 속인 것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17] 그나마도 지금 당장 올 것이라고는 하지 않았으며 '내가 미국으로부터 원조가 올 것이라고 얘기는 해 왔다만,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라서 원조를 보낼 때도 절차상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라는 식으로 앞에 전제를 깔고 있다. 사실상 미국의 지원이 당장 도착하지는 못할 것임을 시인한 셈이다.[18] 처음엔 대구까지 내려갔으나 이승만이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 다시 올라오던 중 대전역에서 다른 각료들의 만류로 내려서 대전에 임시수도를 세웠다.[19] 정부요인들이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서 포로로 잡혔다면 이후 국정은 미증유의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누가 직위를 승계하느냐부터 시작해서 그 혼란을 틈타 북한만 웃었을 것이다.[20] 구한말시기 군인들 중 엘리트들을 뽑아서 일본에서 위탁교육을 받게 하였다.[21] 실제로 국방장관 신성모,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김홍일, 유동열, 지청천, 이범석, 김석원, 이종찬으로 구성된 군사원로자문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여기서 신성모는 군경력이 없고, 채병덕은 병참이 주특기였다. 이들 두 명에 유동열과 이종찬이 결전을 주장했는데, 유동열은 광복군출신 중 가장 연장자로 무려 1903년에 기병병과로 일본육사를 졸업[20]한 인물이며, 이종찬은 해당 회의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였다. 이들 8명 외에 참여할 만한 인물이던 일본군 출신 중 가장 연장자인 이응준 준장은 5사단장으로 올라오고 있었다.[22] 25일 뒤늦게야 전쟁발발에 경악한 채병덕이 오전 7시에야 전군에 비상을 걸고나서 국방장관 공관에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았는데, 이유는 영국에서 오래 사셔서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기때문이다. 이에 채병덕이 직접 상황보고를 하고 나서인 10시 30분에야 이승만한테 가서 보고를 했으나, 이때도 크게 걱정하실 것 없다라는 소리만 하였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오전에 각료들과 26일 오후 9시 김태선 치안국장 및 27일 새벽 2시 신성모, 조병옥, 이기붕의 피난건의를 모두 거절하다가, 북한군이 청량리까지 왔다는 허위보고에 떠났다.[23] 그러나 정작 군사원로자문회의에서는 의정부 방면 역습이냐, 한강선 방어냐를 두고 반으로 갈라졌으나 신성모와 채병덕이 현실 파악 하지 못하는 축차투입으로 후방의 병력만 갈아버리고 말았다.[24] 그러나 실제로는 26일 채병덕과 함께 국회에 출석한 신성모는 "국군이 걱정없이 물리친다. 해주를 접수하고 3~5일이면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라며 거짓 보고를 했으며, 27일 새벽 1시에 비상국회를 연 신익희 의장은 신성모 국무총리서리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전황을 물어보았을 때에는 신성모는 수도 이전을, 채병덕은 수도 사수를 주장하면서 결국 수도사수결의가 채택되었으나,[23] 이후 서울을 몰래 빠져나갔다.[25] 청원방송박물관을 설립했으며 2009년 8월 24일에 사망했다.[26] 이 블로그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방송 역사의 자료들이 남아있다.[27]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불과 5시간 반 전이다![28] 즉, 서울 시민들이 방송을 들은 것이 아니다.[29] 참고로 당일 오전 2시에 한강대교폭파되었고 오전 6시경에는 인민군이 서울의 주요 시설들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방송국을 점령한 후에는 당연히 북한의 선전방송이 송출되었다.[30] 이 기만 방송으로 인해 이승만이 하도 욕을 먹어서 어쩔 수 없이 피난가라고 했다.[수정] 파일:15778b6a788b7ce1.png[31] 출처가 밝혀지기 전에는 정읍발언에서 찍힌 사진으로 추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