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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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교내 길고양이


1. 목록[편집]


  • KBS 주말드라마 오작교 형제들에서 극중 유이가 재학 중인 학교[1]로 나왔다. 유이를 보러온 남학생들 때문에 몇몇 시나리오가 즉석에서 수정됐다고 한다.

  • MBC 월화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로케장소로 체육관이 쓰인 적 있다.

  • 웹툰 무한동력에서 주인공 '장선재'가 다니는 학교가 '민국대학교'인데 이는 국민대학교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실제로 1화에 보면 장선재가 학교를 설명하는 컷에 국민대학교 사진을 그린 그림이 나온다. 동 작가의 웹툰 신과함께에서도 저승편과 이승편에서 민국대학교로 등장한다. 저승편에서는 김자홍의 출신대학[2]으로 나오고, 이승편에서는 학교 무한동력에서 사용한 학교 그림이 다시 나온다.

  • 학교의 여러 표어나 문구에서 쓸데없이 * 기호를 많이 넣는다.

  • MBC 시트콤 논스톱5의 후속작인 레인보우 로망스의 촬영지였다. 다만 학기가 진행됨에 따라 시트콤 촬영때문에 어수선하고 면학분위기를 해친다는 학생들의 항의로 인해 시트콤 후반부는 부천대학에서 촬영. [3]


  • 정릉역(국민대입구)역 개통 이전까지 학교 이름이 붙은 역이 없었다. 그래서 역명에 대한 학내 구성원의 열망이 강했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가상의 국민대입구역 간판을 입체미술과 학생들이 제작해서 2010년 예술관 대극장 입구에 설치한 바 있다. 그런데 그걸 보고 입시를 치러온 학생과 학부모가 실제로 교내에 지하철이 있는줄 알고 대거 낚이는 바람에 철거됐다.

  • 서울 버스 171 종점은 예전엔 "2번 종점"으로 불렸다. 2번 버스의 종점이었기 때문인데, 2번인 이유는 70년 서울시내버스 개편당시 청와대를 중심으로 원을 그려 시계방향 순서대로 버스노선을 정했는데 국민대 앞이 2번째라 2번이 되었다. 1번은 정릉 북한산 종점.

  • 지금은 폐선된 1112번 버스가 교내까지 운행한 적이 있다. 길음역을 기점으로 용두리, 콘서트홀 앞에 정류장이 있었고 종점은 과학관이었다. 2008년 학교측에서 교통사고 위험 및 공해를 이유로 버스의 교내 출입을 금지하면서 폐선되었다. 대신 서울 버스 1112번 버스를 개설하여 길음역~국민대학교 정문 구간을 운행했으나 현재는 폐선. 현재는 길음역~국민대학교 정문 간 학교 셔틀버스가 운행중이다.

  • 대한민국 4년제 대학교 중에서 자동차공학과를 가장 처음 만든 학교이기도하다. 공과대학 내에 기계자동차공학부가 개설되어 현재까지도 이 학교를 대표하는 학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그 이후, 기계시스템공학부와 자동차공학과로 분리되었다가 현재는 자동차융합대학으로 공과대학에서 독립, 별도 단과대까지 만들어졌다.

  • 자동차공학과는 과거에 들어가면 바로 취직이라고 불릴만큼 깡패[4]였으나 쌍용자동차가 망하면서 주춤했다. 허나 2012년을 기준으로 자동차공학과의 현대자동차 입사자 수가 한양대, 고려대에 이어 3위를 기록하면서 재조명되었다. 공채가 사라진 현재는 예전만 못하긴 하지만, 현대자동차와 GM 한국사업장에 지원하는 몇 안되는 대학들 중 하나고 취업률도 상당히 높은 편.

  • 원래 국민대학교 설립에 재정을 지원하려던 사람은 단국대학교를 세운 장형과 조희재였다. 김구이승만의 해방 후 정치적 이견차에 따라 김구 계열이었던 장형이 이승만계로 분류되던 신익희의 국민대학설립기성회에서 손을 떼고 이듬해 1947년 독자적으로 단국대학을 세웠다.

  • 개교기념일을 10월 18일로 기념하고 있는데, 맨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국민대학교의 개교일은 1946년 9월 1일이다. 그러나 미군정청이 국민대학관의 설립인가를 내주지 않고 1946년 12월 18일에 허가하는 바람에 학교측에서는 이에 12월 18일을 개교기념일로 지정하려고 했다. 그런데 방학기간이라 날씨가 좋은 가을인 10월 18일을 개교기념일로 지정했다고 한다.

  • 경상남도 창원시(구 마산시) 소재 사립대학인 경남대학교와 창학 뿌리가 같다. 국민대학관이 정규대학으로 승격되기 위해서는 재단이 필요했고 조선불교 총무부장이었던 최범술이 해사 사찰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나서면서 1948년 최범술을 재단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그런데 최범술 재단이 국민대학의 설립자이자 초대 이사장, 초대 학장이었던 신익희를 임의로 해고하자,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반발하여 '학장 유임운동'을 벌여 재단을 축출한다. 신익희 학장의 국민대학에서 떨어져 나간 최범술 재단은 마포에 똑같이 '국민대학관' 간판을 달고 학교를 운영하다가 1952년 '해인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변경, 현재의 경남대학교가 되었다. 관련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 6.25 전쟁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이 1회 졸업식이었다. 1회 졸업생이 심은 플라타너스가 구 창성동 교사 앞에 있었으나, 구 창성동 교사(정부서울청사 창성동별관)이 철거되면서 나무도 같이 베어졌다. 총동문회와 학교가 나무를 이식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이미 나무가 적정 수령(50년)을 넘어가서 이식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나무 밑동 일부를 학교에서 채취하여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은 본래 국민대학 교정으로 쓰이던 곳이다. 총동문회관이 경복궁 인근에 위치한 건 그 때문이다.

  •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당시 경복궁 옆 종로구 창성동에 있었던 국민대학의 현판을 인민대학으로 바꿔버린 자랑스러운 역사 흑역사가 있다.

  • 학교의 높으신 분들이 고려대학교와 접점이 많다. 설립자 신익희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국민대학교를 인수해 키운 쌍용그룹 회장 김성곤도 보성전문학교 출신으로, 국민대학교를 인수한 이유부터가 김성수와 같이 자신도 고려대학교와 같은 대학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김성곤의 아들(現 쌍용건설 회장 김석준)과 손자(現 학교법인 국민학원 이사장 김지용) 모두 고려대학교를 나왔다. 이 말인 즉슨 학교법인 국민학원의 실질적 소유자들이 모두 고려대학교 출신이라는 것. 이렇다보니 쌍용그룹이 잘나가던 시절 국민대학교보다 모교인 고려대학교에 오히려 더 기부를 많이 하여(...)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적도 있다.

  • 1960년대 대학입시에 '전삼국대'와 '후삼국대'라는 명칭이 있었는데, '전삼국대'는 국(國)이 앞에 들어가는 국민대학, 국제대학, 국학대학 [5]을 지칭하는 말이었고, '후삼국대'는 국(國)이 뒤에 들어가는 건국대학교, 단국대학, 동국대학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 2010년 당시 이재오 특임장관의 이력서에 '국민대학교 농업경영학과 졸업'이라고 쓴 항목이 청문회때 논란이 되어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자가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졸업증명서에는 중앙농민학교로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인데[6], 중앙농민학교와 국민대학교는 같은 재단이나 별개의 대학이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후 정권을 잡은 군부가 대학정비령 및 통폐합을 나서는 바람에 1962년 당시 국민대학을 폐지하고 초급대학으로 격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초급대학으로 격하되지는 않았지만 주간부가 폐지되고 야간대학으로 전환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학교 시설이 남아버리자 재단에서는 자구책으로 '국민여자초급대학'을 설립하고, 중앙농민학교를 인수해서 국민산업학교[7]으로 전환한 일이 있었다. 1964년 폐지된 국민대학 주간부가 부활하면서, 국민여자초급대학은 1968년에, 국민산업학교는 1972년에 각각 폐지되었고 폐지 후의 학적관리 업무는 국민대학교로 이관되었다.


  • 학교 지리와 건물구조가 무척 복잡한데, 일단 다른 학교들에도 있는 몇층을 가던 지상은 당연히 존재하며, 예술관과 경상관, 국제관이 연결되어 있다. 특히 예술관은 그 복잡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마치 미로처럼 연결된 통로와 곳곳에 숨겨진 방은 신입생으로 하여금 눈물을 뿜게 만든다. 이에 비하면 경영관은 양반.

  • 공학관 별관과 과학관 매점의 별명인 미네르바는 본래 현재 조형관 터에 있던 매점 컨테이너를 이르던 말이었다.

  • 복지관 여학생휴게실은 총여학생회실 자리였다. 2000년대 중반 총여학생회가 사라지자 여학생휴게실로 바뀐 것이다. 또한 복지관 지하에는 과거 아름다운재단이 운영하던 아름다운가게가 있었다.

  • 축제무대를 매년 대운동장 옆 농구코트에 설치하고 있다. 본래는 북악관 앞 민주광장에 설치하다가 2010년대에 들어 농구코트로 옮겨갔는데, 공연 소음으로 북악관 교수들의 항의가 심한 것이 한 몫했다.

  • 학교 축제에서 미스코리아 처럼 "국민여왕 대관식"을 연 적 있다.

  • 축제때 복지관에서 커플이 검열삭제하다가 걸린 적이 있다. 그 때문에 복지관 24시간 개방이 좌절됐다.

  • 2010년 축제 때 과음으로 7호관 난간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다.

  • 농구대잔치 대학부 창립 멤버 6개교(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한양대학교, 경희대학교, 단국대학교, 국민대학교) 중 한 곳이었다. 1980년대 최정길 감독이 지휘하던 시절엔 강호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측의 엘리트체육 지양 방침에 따라 농구특기생 선발을 92년부터 중단하였고, 농구 특기자로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하는 해부터 대학2부리그로 편입될 운명에 처한다. 결국 95년 10월 30일, 연세대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대학농구 예선탈락으로 대학1부리그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연세대학교에 이기면 팀의 생명이 하루 이틀 더 연장되기에 국민대 농구부 학생들은 사력을 다했지만 109-57로 패배. 창단 2년만에 연세대학교와 추계대학농구연맹전에서 공동 우승을 하는 등 화려했던 국민대 농구부의 추억들은 22년의 역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지금 국민대에 농구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실업농구 시절 현대전자에서 활약하고, 국가대표까지 했던 혼혈선수 김성욱이 국민대 농구부 출신의 스타 플레이어였고, 지도자까지 확대하면 이환우(91체교) 전 부천 KEB하나은행 감독이 있다.

  • 수강신청 때 인기강좌는 목요특강. 매주 외부 연사를 초청해 강연을 하는데 학점에 상관없이 들을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신청하면 용자라고 칭송받는다. 남자랑 여자랑 짝을 지을 수 있는 부모연습도 인기강좌. 단, 남자학생 수가 많아 남자끼리 커플을 지어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외에 공연관람 수업인 '공연줍기' 등도 인기 강좌에 속한다. 반대로 인기 없는 강좌는 전인교육의 사서삼경의 이해와 주역의 현대적 이해가 꼽힌다.


  •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 예술대학 연극영화과와 공과대학 건설시스템공학부가 유달리 '똥군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연영과는 신입생이 제복 입는 학과처럼 명찰을 달고 90도 인사를 했었다. 인사를 안하면 불이익이 센지[8] 긴가민가하면 다 인사하기 때문에, 타 단과대생들도 예술대 앞을 지나다보면 영문도 모르는 연영과 신입생에게 인사받기도 한다. 또한 예술대 내 극장에 신입생과 2학년을 모아놓고 기합도 심심찮게 줬던 모양. 참고로 타 단과대 생들은 이걸 매우 싫어하는데, 한번은 답답했던 타 과생이 학교 커뮤니티에 이 문화를 대놓고 깠을 정도였다.

  • 학교를 거닐다 보면 가끔 내가 중국에 유학을 온 것으로 착각이 들 정도로 중국인 유학생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재학중인 중국인 유학생 수는 2059명으로 서울시에서 8번째로 많다.#

  • 사우디아라비아 유학생 유치에 상당히 적극적이다. 2010년 기준으로 한국에 유학 온 사우디 학생의 25%가 국민대를 다니고 있을 정도. 김동억 전 수단 공화국 대사가 초빙교수로 있어 총장과 함께 몇 차례 사우디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사우디 교육부장관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기도 했고 본부관 2층에는 사우디 학생 클럽(이슬람 기도실)이 있다. 2014년에는 본부관 학술회의장에서 주한 사우디아라비아 문화원이 주최하는 제1회 아랍어권 외국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했다. 이런 국민대의 사우디 사랑을 보고 국민인닷컴에서는 '만수르 같은 왕족이 국민대를 인수해 맨체스터 시티처럼 될 수는 없을까' 하는 농담이 올라오기도 했다.


  • 콘서바토리가 2014년 설치되었으나 학부생들의 불만이 많다. 졸업장이 똑같이 총장 명의로 수여되고, 개설학과도 연극영화과-연기미디어과 시각디자인 등 학교의 간판이였던 학과들과 거의 완벽히 겹쳐 조형대생과 예술대생의 반발이 상당했었다. 학점은행제와 대학교육의 차이가 엄연하고, 가뜩이나 들어오기 힘든 조형대학인데 '졸업장을 똑같이 발급해주면 입시의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불만과 한정된 캠퍼스 내 실습시설 사용이 여러워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처음에는 모델학과 등 다른 학과들과 겹치지 않고 특성화된 학과만을 신설하겠다 이야기했으나... 결과는 아 망했어요.

  • 이 때문에 학교 커뮤니티에서 매번 콘서바토리와 갈등을 빗는 글이 올라오곤 한다. 그러나 국민대 총장 명의로 된 졸업장을 받는다는 것은 장삿속으로 하는 얘기일 뿐 4년제 학위와 동일한 졸업장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평생교육원 졸업장은 평생교육과정에 준하는 교육을 이수했다는 사실을 "평생교육원 기관장으로서" 국민대학교 총장 명의로 인증해주는 것이다. 이걸 마치 정규과정 학생과 동일한 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고 광고를 하여 오해가 일어난 것. 애초에 졸업 학위번호도 다르며, 국민대학교 졸업으로 기재할 경우 허위기재로 심할 경우 처벌 받을 수 있다.

  • 학교에 청설모랑 까치랑 까마귀, 비둘기, 고양이 등이 옹기종기 모여사는데, 사람을 많이 무서워하지 않는다. 북한산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학교공기가 맑다. 삼육대학교와 비슷하게 자연과 더불어서 사는 학교. 종종 멧돼지도 출몰하여 학생, 교직원 안전을 위해 학생지원팀에서 문자로 고지를 해준다.[9][10]


  • 2017년 학생들이 스스로 전공명과 교육목표, 교과과정을 설정하는 전공으로 ‘자기설계융합전공’을 신설했다.


  • 2018년 7월, 손흥민태그호이어 광고를 국민대학교 대운동장에서 촬영하였다. LINC+사업을 통해 영화전공 학부 및 대학원생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협동조합 나인스튜디오 소속 학생들이 촬영에 참여했다. #

  • 학교에 있는 동상, 비석은 모두 졸업생들의 모금으로 만들어졌다. 참고로 용두리 이전의 학교 상징 교수(校獸)는 백사자였다.

  • 성곡도서관을 만들어달라고 학생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본부관 모든 유리창을 박살낸 적이 있다.

  • 학교 시설 가운데 현재는 그 역할과 위치과 변경된 것들이 많다.
    • 경상홀은 원래 중화요리 식당이었다.
    • 법학관은 원래 학생회관이었다. 로스쿨 유치를 위해 리모델링하였으나 탈락하고 법학관으로 만든 것. 청향이 위치한 곳 역시 원래는 열람실으로 만들어졌으나 탈락 후 식당으로 변경한 것이다.
    • 예술관자리는 원래 노천극장이었다.
    • 북악관 엘리베이터는 건물이 나중에 리모델링을 하면서 생겼다. 참고로 북악관은 처음 건립 당시, 즉 국민학원이 인수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원래 호텔용으로 지어지고 있던 건물이었다.[11]
    • 공대 맘스터치 자리에는 와플집이 있었다.
    • 성곡동산 자리에는 성곡 김성곤 선생의 묘소가 있었다. 운동권들이 이사장 사묘가 교내 부지에 있는 것을 반대하여 강원도 평창으로 쫒겨났다가 이후에 몰래 묘비만 이전해왔다.
    • 과거 학생회관(현 법학관)의 식당은 1층에 있었다. 맛 없기로 유명해서 맨날 학보사에서 깠다.
    • 과거 학생회관(현 법학관) 3층 테라스는 본래 총학생회가 현수막을 제작하던 곳이었다.
    • 북악관 1층엔 로비 대신 극장이 있었다.[12]
    • 현재 학군단 건물 자리는 본래 외국인 기숙사 자리였다.
    • 민주광장엔 본래 나무가 없었다. 데모를 못하게 하려고 심었다는데, 정작 나무심고 나서부턴 학생들이 데모를 안했다.
    • 구 컴퓨터공학과는 무려 3개 건물(과학관, 7호관, 공학관 5층)로 나눠져 있었다.
    • 공대 지하에는 본래 동아리방이 있었다.
    • 형설관은 원래 고시반 전용 건물이었다.

  • 지하세계 관련
    • 맛짱[13]은 본래 쎄쎄양꼬치 자리에 있었다. 지금 맛짱자리는 공터였는데 장사가 잘돼서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 지하세계에는 서서갈비집이 있었다.
    • 송백식당은 국민대가 정릉으로 옮겨왔던 1971년부터 계속 있었다. 주인만 바뀌었을뿐 송백이란 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것.
    • 현주네포차는 본래 30명도 들어가기 힘들던 조그마한 식당이었다.
    • 미스터전 자리는 본래 횟집이었다. 전집으로 업종변경하고 몇 년 있다가 다시 횟집하신다 했는데 여전히 감감무소식. 세꼬시가 맛있던 집이었다.

  • 북악터널은 유료터널이었다.

  • 7호관 건너편에 방치된 폐건물은 본래 스포츠센터였다.

  • 7080년대 민주화투쟁시 지금 용두리 자리에서 큰 물체를 정문으로 굴려 교문을 부수고 도로로 진출하곤 했는데, 한번은 학교 수위실에서 그냥 문을 열어버려서 공을 굴리던 선배들이 속도를 주체하지 못해 지금의 송백식당자리까지 굴러넘어진 적이 있다. 덤으로 국민대 공대가 당시 NL세력이 강성했는데 90년대에는 꽃병을 잘 만들기로 정평이 나있었다.

  • 이효리는 졸업을 위해 경영대 모 교수에게 제발 D만이라도 달라고 요청했지만, F를 줘서 졸업을 못한 적 있다. 참고로 이 일화를 그 교수님은 굉장히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고 다니신다.

  • 교내에 와이파이망이 없었던 시절, KT NESPOT이란 무선 인터넷 시스템이 교내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걸로 노트북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학교 밖 NESPOT 구역에선 사용이 불가능했다.[14]

  • 4.19 뜀박질은 원래 학교에서 수유리까지 진짜로 뛰어갔던 행사로 본래 동북지역 운동권이 주최하던 행사이다. 다른 학교는 30~50명 정도만 왔는데, 국민대만 유독 수백에서 많게는 1000명 넘게 오는 등 인원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른 학교는 아예 다 포기하면서 우리 학교만 하고 있다.

  • 2011년, 동문이 대표를 맡고있던 모 게임사가 정규직 20명을 채용하기 위해 학교로 왔으나, 취업설명회에 20명도 안오고 원서 낸 사람은 한손에 꼽을 만큼 적어서 대표였던 동문이 꽤 실망한 채로 돌아간 적 있다.

  • 동아리방에서 찰흙 녹이려고 히터를 플라스틱막대로 비스듬히 새웠다가 동방 다 태워먹은 사람이 있었다.

  • 60년대, 70년대에도 '국민산업학교', '국민여자초급대학'이라는 콘서바토리 비슷한 교육기관이 국민대 내에 존재했다.

  • 2000년대 초반, 국민대는 입학할때 문과에선 수학 안보던 학교였다. 그래서 경영학과 신입생들이 첫학기에 피똥 많이 쌌다고.

  • 교직원 분들중에 예전 학생운동 엄청 하다 너무 열심히 한 덕에(?) 교직원으로 픽업되신 분들 몇분 계신다. 교수님 중에는 권혁기 전 춘추관장의 총학생회 선거 낙마를 위해 선본을 뛰었던 PD 출신도 있다.

  • 군사독재정권시절엔 총학생회 대신 학도호국단이 있었는데, 호국단장은 주요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직을 시켜줬다. 그런데, 한 선배는 총학생장을 하면서 취직이 됐다는 안도감에 공부대신 데모를 열심히하다가 잡혀들어갔고, 약속된 일자리는 권한대행으로 들어온 후배에게 돌아갔다. 그렇게 얼떨결에 취직한 그 분은 현재 해당 분야의 전설로 활약중이다.

  • 여성 총학생회장이 역사상 딱 한번 나온 적 있다. 그런데 난소종양에 걸려서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경찰에 잡혀갔다.[15]

  • 통합진보당 김재연 국회의원이 법대에서 강연한 적 있는데, 사람이 너무 없어서 참석자 전원에게 피자를 쐈다.

  • 예전 신입생 교외OT는 단과대별로 따로갔다. 그런데 한번은 신입생이 새벽 3시에 건물을 빠져나와 슬로프를 전전하다 얼어죽기 직전에 발견된 적이 있다. 그런 사고가 몇번 발생해서 어느새인가 통합으로 가게됐고, 언젠가부턴 안 가게 됐다.

  • 공전의 히트를 친 SBS의 모 드라마(PD가 동문)가 국민대를 배경으로 촬영하기로 하고 시나리오가 쓰여졌으나 교수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 2011년 가을 총학선거에서 여성듀오로 이뤄진 한팀이 경고 3번을 먹고 후보자리에서 짤려서 이에 반대해 점심시간에 콘서트홀 앞에서 삭발식을 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투표를 3번 했는데도 다 무효처리 돼서 선거 자체가 무산됐다. 3번째 투표가 나가리 되면서 전체 선거가 무효처리 되자 그 삭발한 듀오는 3팀의 후보를 뒤로하고 만족한 표정으로 박수치면서 개표장을 나갔다. 참고로 다함께 선본이었다.

  • 미국 월가 오큐파이 운동을 따라한다고 민주광장에 텐트 쳤던 사람이 있었다.

  • 국민저널이 처음 생겼을때 지인들에게 국민저널을 추천하며 들어가라고 꼬시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은 국민저널 안들어가고 낼름 졸업해버렸고, 들어간 사람들만 개고생했다.

  • 국민인닷컴 이전에 다음 카페에 국민대 커뮤니티가 있었는데 이름이 "국민학생들"이었다.

  • 기숙사 C동 자리엔 알박기하고 있던 집 한 채가 있었다. 이 집 때문에 현재 기숙사 구조가 기형적으로 건설된 것이다. 10억 줘도 안나간다고 했는데, 돈을 더 줬는지 결국 나갔고 C동이 세워졌다.

  • 기숙사 점호는 본래 밤 12시 이후에 이뤄졌다. 그래서 점호하는 날은 벌점맞을 각오 하지 않는 이상 외박이 불가능했다.

  • 교내기숙사 A, B동만 존재하던 시절, 총 입소인원은 고작 600명이었다. 심지어 그 중 반은 신입생이었다.

  • 새터민이 국민대 총학생회 선거 '정후보'로 출마한 적 있었는데 결국은 떨어졌다. 그러나 새터민이라서 떨어진 것은 아닌 것이 당시에는 그러한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 국민저널 역대 편집장 중 한명은 학부생때 이미 기자로 채용된적 있으며, 현재도 주요 일간지에 기명칼럼을 작성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편집장 할 당시에 멋도 모르고 저널에 깝치다가 역관광 당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 과거 언론정보학부의 모 교수가 학교 방송국이 시끄럽다고 북악방송국에 들어가 코드를 뽑은 적이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2012년 부실대학 사태 때 재단과 학교를 규탄하러 온 동문들이 집회를 열자 시끄럽다고 항의하다가 몰매 맞을뻔 했다.

  • 교양과목중에 "데모에 반드시 참석하고 감상문을 써오기"가 중간고사였던 과목이 있었다. 심지어 이 수업은 교재도 없었고, 수업시간에 처자도 시험보는데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반장하면 시험을 안쳐도 A+를 줬다. 교수(강사)님은 데모를 너무 열심히 해서 개강직전에 구속되시는 바람에 폐강될 뻔한 적도 있다. 그와 별개로 해당 교수(강사)님의 강의는 명강의라는 명성이 자자하다.

  • 70년대 국민대는 1년 전체 입학생이 500명 수준이었다. 그래서 같은 학번이면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지냈다고 한다.

  • 국민대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대학 정리 정책으로 폐교될뻔 한 적 있다. 야간부로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온 것이다.

  • 쌍용이 잘 나갈땐 학도호국단(군사정권 시절 총학생회와 비슷한 조직) 간부들은 졸업 후 쌍용에 취직되곤 했다.

  • 7호관에 있는 스튜디오는 종종 케이블 예능 또는 광고촬영에 사용되곤 한다. 한번은 하하와 정형돈이 와서 무한도전 찍는줄 알고 온 학교가 마비될뻔 한 적이 있다. 알고보니 광고촬영이다고.


  • 문재인안철수는 2012년 대선 당시 국민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안철수가 2012년 대선 당시 방문한 첫번째 대학인데, 당시 총장이 방문하기를 요청했다고 한다. 문재인은 당시 법과대학 학생회장의 요청으로 왔다고 전해진다.

  • 나는 꼼수다로 유명한 김용민은 나꼼수 녹음 당시 국민대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 때문에 경영관 1층 대형강의실에서 강연한 적도 있다. 2011년이었는데 당시 인기 때문에 강의실에 사람이 못들어가서 복도까지 들어찰 정도로 많이 왔었다.

  • 응답하라 1988의 '성노을' 역으로 유명한 배우 최성원은 연영과 출신이다. 학교 다닐 때도 노안이었다고 한다. 연영과 교수님께서 직접 이야기 해주고는 하신다.

  • 과거 모 학생회장이 선출되어 놓고선 소리소문 없이 잠수를 타는 바람에 부회장이 똥물 다 뒤집어쓰고 수습하느라 1년을 보낸 적이 있다.

  • 학교에서 약 30년을 재직한 교직원이 계셨는데, 자기 생활에 자부심이 넘치셨는지 30년 동안 겪은 회고록을 자비로 출판하셨다.

  • 2012년 부실대학 파동 당시, 학교 운동권 10여명이 본부관 로비를 점거농성한 적이 있다. 학교는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날 총동문회 정기총회가 본부관에서 있었고, 이를 지켜본 총동문회장님이 학생처장을 협상테이블로 끌고 나왔다. 학교에선 이들에게 징계를 주려했는데 유야무야됐다.

  • 복지관 1층에 있는 동아리방들이 지하 1층과 3층으로 옮겨갈뻔 한 적이 있다. 복지관 공간 개편 때문이었는데, 동아리연합회 차원에서 회의도 끝내고 공간배정도 다 끝낸 상태였지만 공사 3일 전에 북악관 엘리베이터 보수공사가 더 급하다고 해서 다 취소돼버렸다. 계획대로였다면 지금 미용실 자리는 아우성 동아리방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1.1. 교내 길고양이[편집]



국민대학교 학생들의 흔한 지각사유서 국민대 고양이 국냥이 (2018)

2014년 말부터 교내에 길고양이가 굉장히 많아졌다. 각 건물 주변마다 상주하는 고양이들이 있어서 학우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람을 경계하기는커녕 오히려 개냥이 수준으로 제 발로 와서 발라당 드러눕는다든지 다리에 부비적댄다든지 하는 애교를 보여줬다. 특히 공학관 고양이 "공냥이"는 강의실에 들어와 수업도 듣고 갔었다. 이에 공대 학우들이 뭉쳐서 고양이 집을 만들어주고 사료도 챙겨줬다.

파일:국민대고양이콘서트홀.jpg
안녕하새오 고양이애오 겨울 추어오

겨울철이 되자 건물 안으로 고양이들이 자주 들어와 문제가 되었다. 이에 누군가 콘서트홀 입구에 고양이 시점으로 쓴 해오체 편지를 적어 붙였다. 이것이 페이스북 페이지 '국민대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올라온 후 이곳저곳 공유되며 큰 인기를 끌었고, 한동안 해오체가 유행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 일화는 훗날 탄생한 교내 길고양이 동아리 '국민대 고양이 추어오'의 명칭이 정해지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2015년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던 길고양이가 학교 건물 틈 사이에 빠져 죽은 것을 계기로 교내의 고양이들을 적극 보호하기 위해 '국민대 고양이 추어오'라는 동아리가 생겼다. 추어오는 교내 고양이들의 중성화 수술, 병원 진료, 먹이, 집 등을 챙겨준다. 고양이가 건물 안에 들어오는 문제도 학내 곳곳에 집을 지어주고, 학생들에게 관련 홍보를 하는 등의 캠페인을 벌여 더 이상 건물안에 고양이가 들어가지 않는다. 여러 학교에 교내 길고양이들을 관리하고 돌보는 동아리가 있지만, 국민대의 동아리는 그중에서 운영이 상당히 원활해서 타학교에서도 꽤 유명하고 다른 고양이 동아리에서 노하우를 알아 갈 정도다. 동아리원들의 헌신과 노력도 있고, 국민대 교내에 상주하는 고양이들 성격이 상당히 느긋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편이기 때문에, 동아리원들이 치료 목적 포획 등의 활동을 할때 어려움을 상대적으로 덜 겪는 덕도 있다.

공냥이는 후에 '금공이'로 이름 지어졌고 학교 내 서열 2위 고양이였다. 안타깝게도 2016년 8월 말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2017년 7월 현재 깨비, 타짜, 유자, 치즈, 리코타, 샐러드, 두부, 생강, 까베 등의 고양이가 교내에 상주하고 있고, 2017년 6월에 어미, 새끼고양이들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교내에 영역을 잡지는 못한 듯 하다. 그리고 2018년 4월 8일에 기숙사 주변을 영역 삼고 살던 타짜가 개의 공격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서열이 낮아 영역도 자꾸 밀리고 사람 손도 많이 탔기 때문에 학생들이 유독 챙기던 고양이라 많은 학우들이 마음 아파 하고있다. 2019년 3월 30일 유자가 전신이 뒤틀린 채 죽었다는 게 알려졌다. 교내 고양이 밥그릇들마다 푸르스름한 덩어리가 들어가 있었기에 누군가의 소행으로 쥐약을 먹은 확률이 크다고 보았으나 부검 결과 신원 미상의 누군가가 지니고 있던 둔기로 유자를 패 죽였을 가능성에 초점이 맞추어져[16] 고양이 팬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게 만든 사건이다. 거기다 유자가 억울하게 고양이 별로 강제 이주된 지 8일 만에 복막염으로 몸져누운 우당이까지 숨을 거두면서 슬픔이 배가 되었다. 2021년 3월 23일 이후로 두부가 교내외에서 목격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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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극중 한국대학교라는 명칭으로 나온다[2] 1990년 민국대학교 경영학과 입학. 6화 참조.[3] 2011년 오작교 형제들의 촬영도 방학 기간을 이용해서 촬영했었다.[4] 창업주인 김성곤 회장이 사망한 후에 장남인 김석원이 쌍용그룹 회장을 승계하면서, 자동차 산업을 미래로 보고 동아자동차를 인수하여 사명을 쌍용자동차로 변경함과 동시에 쌍용차에 인재를 공급할 생각으로 국민대에 자동차공학과를 신설하였다.[5] 지금의 정릉 고려대 보건대학캠퍼스 부지가 옛 국학대학 부지였다[6] 당시 기사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3398674 참조[7] 1965년에 재단법인 국민학원이 중앙농민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다가 1969년에 전환[8] 입학식 전에 신입생들을 불러다놓고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이 때 학과 선배들에게 무조건 인사를 하라고 가르친다. 얼굴을 몰라도 인사를 해야하기 때문에 신입생들은 일단 예대 근처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다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하지 않으면 작든 크든 '집합'으로 연결된다. 후배는 선배의 얼굴을 몰라도 선배는 이름표가 달린 것을 보고 후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점은 신입생들이 한 학기가 지나기 전까지도 예대 내부에 있는 매점을 잘 갈 수 없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9] 파일:Screenshot_2017-09-28-06-11-44.png[10] 어느날 멧돼지가 과학관으로 내려왔는데, 하필이면 그 날 주한 미국 대사가 국민대를 방문해 멧돼지를 쫒아낼 도구를 사용할 수 없어서 애 먹은 적이 있다(주한 미국 대사가 뜨면 인근 지역 모든 무기고가 봉쇄된다고 한다). 결국 소방관님들이 육탄돌격으로 쫒아냈다(...).[11] 북악관은 정릉캠퍼스 본부관이 세워진 후 건설이 시작됐다. 국민학원이 국민대를 인수한 것은 1950년대고, 정릉캠퍼스에 입주한 것은 1971년이며 북악관은 1974년에 지어졌다. 정릉캠퍼스 입주 당시에는 북악관은 착공도 안된 상태였다. 호텔용으로 지어지고 있었다는 것은 낭설[12] 현재 복지관 지하 공연장과 비슷한 용도[13] 치킨집[14] 그 시절엔 KT 에서 대부분 대학에 학생들이 와이파이를 무료로 쓸수 있도록 AP를 설치해주고 학생 인증 받아 무료로 사용하수 있게 해줬다.[15] 한총련이었음.[16] 오른쪽 다리근육, 두부 피하(머리)에서 피멍 (충출혈)이 관찰되었습니다. 뇌의 피막하와 폐에서도 출혈이 관찰되었고 비장 종대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신장이 손상되었으며 그 주변으로 출혈 소견이 나왔고 오른쪽 신장 밑의 근육에서는 허리뼈의 일종인 요추골, 가로돌기의 골절과 앞쪽 복장뼈 (갈비뼈와 맞닿는 뼈)의 소실이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갈비뼈에서도 골절이 있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 추어오 페이스북 페이지 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