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군 무오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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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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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원인
3. 실상
4. 학계
4.1. 고의적으로 은폐한 경우
4.2. 국방군의 만행을 인정하면서 옹호한 경우
5. 하위 분류
5.1. 롬멜 신화
6. 유사 사례
6.1. 깨끗한 무장친위대 신화
6.2. 깨끗한 일본 해군 신화
7. 매체에서
7.1. 국방군 무오설을 부정하는 작품들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독일어: Saubere Wehrmacht, Legende von der sauberen Wehrmacht
영어: Clean Wehrmacht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들은 독일 국방군의 책임이 아니라는 주장을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영어 위키피디아한국어 위키백과는 각각 '깨끗한 국방군 신화(Myth of the clean Wehrmacht)', 국방군 무오설이라는 표제어로 등재했다. 국방군 무죄설이라고도 불리며, 일본군육군악옥론/해군선옥론에서 따와서 국방군 선옥론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선옥이라는 단어 자체가 한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일본식 한자어므로 다소 부적절한 명칭이다.[1]

이러한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나치 독일독일 국방군문민통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흔히들 나치 독일을 군사독재 국가로 생각하며 문민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나치 독일은 독일 군부가 주도하여 만든 체제가 아니다. 선거를 통해 집권한 나치당바이마르 공화국헌법수권법이라는 기괴한 방식으로 무력화함으로써 성립된 문민독재 체제였기 때문이다.

만약 나치 독일이 문민통제가 이루어지는 국가가 아닌, 군부가 주도하는 군사독재 국가였다면 국방군 무오설은 애초에 성립도 되지 못하는 주장이다. 만약 군부가 나치 독일의 주도세력이었다면, 군부는 명령을 받아 수행한 입장이 아니라 행위를 주체한 입장이므로 국방군 무오설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일단은 명목상으로는 독일 군부는 그저 히틀러의 명령대로 전쟁을 수행했을 뿐이기에 독일의 전쟁범죄의 책임은 명령을 내린 정부, 즉 나치당과 히틀러에 있다는 것이 국방군 무오설의 요지이다.

깨끗한 국방군설, 즉 국방군 무오설에 따르면 나치 독일이 자행한 잔학한 전쟁범죄들은 '사악한 나치당의 사병'인 슈츠슈타펠이 자행한 것이고, 국방군은 그저 나라를 위한 전쟁을 수행했을 뿐인 '군대'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나치즘에 입각하여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다닌 슈츠슈타펠과 달리 국방군은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며 신사적으로 전쟁을 했고, 무엇보다 국방군의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징집된 병사들이며 따라서 죄도 없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 하에서 자행된 전쟁범죄가 일본군 이상으로 잔학하고 규모가 압도적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인지라, 독일 국방군을 좋아하는 밀리터리 매니아들 중에서 독빠인 사람들은 2차 대전 당시 독일을 어떻게든 옹호하기 위해서 이 설을 믿는 경향이 강하다.[2]

2. 원인[편집]


이런 이론과 이미지가 생긴 이유중 가장 큰 것은 냉전 하에서의 반공주의자본주의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위한 프로파간다라고 볼 수 있다. 종전 후 독일이 소련을 적으로 한 미국 주도의 체제에 편입되면서 '주적'은 나치즘이 아닌 공산주의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의 피해자로서의 성격은 희미해지고 가해자로서의 성격이 부각되었고, 독일의 전쟁범죄 역시 나치당과 무장친위대에만 전가하게 되었다.

또한 나치당원이나 무장친위대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일반 관료들, 군인들은 나치 독일 시절에서 그대로 서독으로 넘어왔기에, 서독은 이것을 어떻게든 정당화하지 않으면 동독에 대해 체제의 정당함을 증명하기 어려웠다.[3]

또한 보수적 가치관(나치와는 다르다!)을 지닌 독일인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군인은 그저 명령을 따르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사도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군대와 군인은 신성한 것이라는 관념은 나치 독일이 지닌 문제점의 한 축인 국가의 군사화[4]에 대한 비판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군인정신에 입각한 국방군이 광기에 찬 무장친위대와 구별되는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그러한 배경 하에서 진행되었다. 또한 군대에 의한 범죄를 비판하게 된다면, 이는 군인들도 비판하게 되는 것인데, 징병제 하에서의 많은 국민들이 군인이 되었던 독일에서 이는 상당히 불편한 것이었다.[5] 따라서 스스로의 부채의식을 줄일 방안이 필요했다.

독일이 가장 철저하게 과거 반성을 한 부분이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유대인 학살인데, 이러한 부분은 일단 당시에 알려진 사실에 근거해 나치당과 무장친위대에게 거의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3. 실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독일의 전쟁범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독일 국방군의 홀로코스트 관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직접적인 학살 수행의 예시

폴란드 전쟁 둘째 날에 포즈난 철도역에 폭탄을 투하했어요. 폭탄 열여섯 발 중 여덟 발이 도시 안으로 떨어졌지요. 집들 한가운데로요. 마냥 즐겁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셋째날에는 아무러면 어떠냐는 심정이 되었고 넷째 날에는 즐거워졌어요. 들판에서 달아나는 군인들을 기관총으로 몰아가고 총알 몇 발로 뻗게 만드는 일 말이에요! ...(중략)... 사람들한테도 그랬지요. 길거리는 지나가는 한 무리를 습격했습니다. 우리는 삼기편대로 비행했지요 ...(중략)... 그러다가 우리 비행기가 격추를 당했지요. 너무 분했어요. 두번째 엔진이 뜨거워지기 전에 저는 단박에 어느 폴란드 마을 위로 날아갔고, 거기에다 폭탄을 퍼부어버렸어요. 폭탄 서른두 개를 모조리 그 마을에 명중시키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죠... 무방비 상태의 마을 하나에 서른두 개의 폭탄... 전부 명중했으면 분명 백 명은 죽였을 거요... 어떤 환상적인 도로에서는 차들로 가득 차 있었고 저는 20m 간격으로 폭탄을 떨어뜨리려고 했지요... 제대로만 됐다면 재밌었을 겁니다.

저는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모두 고꾸라뜨렸죠. 길거리에 오가는 버스나 포크스톤의 민간열차도 말입니다... 저는 자전거 타는 놈들까지 다 쏴버렸어요!

애슈퍼드에서 시장 광장에 무슨 집회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많았고 연설도 하고 있었죠. 그곳을 폭격했고 그놈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지요. 진짜 재밌었어요!

저는 직접 영국 남부로 비행했어요 ...(중략)... 우리는 여자들이나 유모차를 탄 아기들도 죽였죠.

저는 프랑스에서 민간인 한 명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죠.

(대화 상대: 레지스탕스였나요?)

무슨 헛소리입니까? 그저 자전거가 탐나서입니다.

친위대 중위가 저한테 같이 어딘가 가자고 하더군요. 우리는 어느 막사 같은 곳에 가서 유태인 1500명을 죽였죠. ....중략...여자와 아이들도 있었어요. 가족들은 모두 처절하게 울부짖었고, 몇 명은 돌처럼 마비되어 있었죠.[6]

출처: 《나치의 병사들: 평범했던 그들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민음사


간접적 방관의 예시

...함부르크사회조사연구소가 개최한 '국방군 범죄'전시회는 독일에서 격렬한 과거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95년에서 1999년 사이에 여러 도시에서 국방군의 전쟁 범죄 기록과 유대인 학살 가담 기록이 전시되었다. 특히 군인 출신인 노년층 관람객들은 이 전시회에 분개하곤 했다. 그 이후로 국방군은 결백하다는 신화는 완전히 무너졌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전시회를 둘러싼 논쟁에 참여한 수많은 참전 군인들이 국방군이 홀로코스트에 연루되었음을 극구 부인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도청 기록이 보여 주는 것처럼, 이는 심리적 억압 기제나 부인 기제 때문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섬멸전과 홀로코스트에 속한다고 간주하는 수많은 범죄를 당대에는 전혀 다르게 해석했던 것이다. 이런 범죄는 예컨대 빨치산 토벌 등으로 해석되었다. 여기서 당대의 프레임과 현재의 프레임 간의 차이가 극명해진다.

그러나 도청 기록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이 기록들을 보면, 대다수 군인들이 유대인 학살 과정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오늘날까지 연구자들이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측면들까지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내용과 자신의 행동을 전혀 결부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국방군 부대들이 허다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고 점령지에서 유대인의 조직적 처형에 여러 방식으로 관여했음을 대다수 군인들은 2차 세계대전 중 이미 알고 있었다. 즉 국방군 군인은 처형을 직접 수행하거나, 참관하거나, 공범이나 보조 인력이나 소문의 전달자로 거기 관여했다. 아주 드물지만 다른 방식으로 관여하기도 했는데, 가령 이를 막기 위해 장교 개개인이 항거하거나 희생자를 구하기도 했고, 또 사뭇 과감한 행동을 통해 유대인을 죽이려는 무장친위대를 방해하기도 했다.[원주268번]

물론 이는 조직적이지 않은 예외적 사례였다. 볼프람 베테는 국방군 군인 1700만 명 중 이러한 "구조를 통한 저항" 사례가 약 100건인 것으로 추산한다.[원주269번]

바비야르 협곡에서 단 이틀간 3만명 이상을 총살한 것 같은 대규모 집단 학살 중 어느 것도 국방군의 관여 없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1941년 중반 이후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들은 직접적 가해자와 참관자 집단을 넘어 널리 퍼져 나가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 전해지는 내용이 무시무시할수록, 비밀에 부칠 것을 요구할수록, 여타 정보 매체가 제한될수록, 소문은 더욱 흥미로운 매체가 되고 더욱 빨라진다. 도청 기록에서 유대인에 대한 집단 범죄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일은 드물었다. 전체 기록의 0.2%만이 이에 대한 대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군인들의 프레임 안에서 범죄라는 것 자체가 어차피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대화의 절대적 숫자가 적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런 대화들을 보면, 실로 모든 사람이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알거나 최소한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의 독자에게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런 범죄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펠베르트(Felbert): 유대인을 몰아내던 지역에 직접 있어 봤나요?

키텔(Kittel): 네.

펠베르트: 그게 아주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습니까?

키텔: 그렇지요.

펠베르트: 부녀자와 아이들까지요? 전부 다요?

키텔: 전부 다요. 끔찍하지요.

펠베르트: 그들을 기차에 태웠나요?

키텔: 그래요. 하지만 그저 기차에 태우기만 한 게 아니에요. 제가 본 건 정말 끔찍했어요! 저는 부하를 뒤따라 보내면서 말했지요. "이제 그만둘 것을 명령한다. 더 이상 참아줄 수 없다." 라고요. 예를 들면 라트비아의 다우가프필스에서 유대인 집단 학살이 있었어요.[원주270번]

친위대와 보안대가 수행했지요. ...(중략)... 일요일 이른 아침 침대에 누워 있는데, 일제사격 소리가 두 번 나고 그다음 소총을 쏘는 소리가 들렸어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와 말했죠. "왜 총을 쏜 거야?" 참모부 배속 장교가 말했죠. "대령님, 가 보셔야겠습니다.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그 근처까지만 갔지만 그래도 볼 건 다 봤어요. ...(중략)... 한 사람이 명령을 하면 스무 명의 인간이 마치 과녁처럼 넘어지면서 구덩이로 떨어졌지요. 그다음에 제일 끔찍한 일이 벌어졌죠. 이때 저는 거길 떠났어요. 그리고 말했죠. "내가 개입해야겠다" 라고.[원주271번]

이 이야기는 프랑스 메스 지역 주둔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하인리히 키텔(Heinrich Kittel) 중장이 1944년 12월 28일에 말한 것이다. 1941년 대령이던 그는 라트비아의 다우가프필스의 북부집단군 지휘관예비대에 있었다. 여기에서는 1941년 7월과 11월 사이에 약 1만 4000명의 유대인이 처형당했다. 이 처형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역사적으로 밝혀낼 수는 없다. 그 자신은 격앙된 관찰자 시점에서 이 상황을 서술한다. 키텔은 고위 장교였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개입할 여지가 상당히 컸다. 앞의 이야기 말미에 드러나듯이, 그는 일반 병사와는 달리 수동적 관망자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도 있었다. 도청 기록에서는 이런 관찰자 시점의 이야기가 흔하게 나타나지만, 사건에 능동적으로 개입했는지 여부는 대개의 경우 감춰져 있다. 화자는 이런 식으로 무고한 보고자 역할 안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목격자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 방식을 볼 수 있다. 키텔의 상세한 묘사 역시 특이한 일이 아니다. 처형은 많은 이야깃감을 제공하며, 죄와 책임에 대해 생각하고 물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물론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두 가지 사실이 놀라울 것이다. 첫째, 펠베르트처럼 꼬치꼬치 캐묻는 일은 매우 드물다. 보통의 대화를 보면 그런 이야기들이 세부적인 면에서는 대화 상대와 청자들을 놀라게 만들지만, 섬멸 행위 자체는 전반적으로 보아 놀라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펠베르트도 '기차'에 대해 묻는다. 다시 말해 그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세부 사항에 대해서 묻는다. 청자가 아연실색하거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요약하자면, 유대인 학살은 군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중 하나였다. 최근 여러 연구에서 당시 군인들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보다도 더 잘 알았다.[원주272번]

...(중략)... 이런 배경을 고려할 때 우리는 거의 모두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이 이야기들은 종종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는) 놀라운 반전을 품고 있다. 21세기의 청자인 우리는 아주 긴장하며 키텔이 어떤 식으로 학살을 막으려 했는지 듣기를 기대하지만, 그의 이야기의 요점은 이런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키텔: 저는 자동차에 앉아서 보안대원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야외에서 이런 총살을 집행하는 것을 엄금하겠다. 숲 속에서 총살하거나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한다면, 그건 너희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리고 내일 또 총살을 하는 것을 금지한다. 우리는 깊은 우물에서 먹을 물을 긷는데, 시체에서 나오는 물이 그리로 스며들 테니까." 제가 있던 곳은 온천지 메스켐프였지요.[원주273번]

다우가프필스 북쪽에 있던.[원주274번]

키텔이 그 일에서 불만스러웠던 것은 (여기저기서 끔찍하다거나 제일 끔찍한 일 같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무엇보다 기술적 문제였다. 즉 총살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자리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키텔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볼 수 있다는 점과 전염병 위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총살을 집행한 보안대원들은 식수 공급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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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치의 병사들: 평범했던 그들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민음사. 165p ~ 170p에서 발췌.


작전적 섬멸전쟁

'바르바로사 계획'은 처음부터 두 가지 차원에서의 섬멸전쟁을 지향했다. 작전적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작전적 사고의 원칙에 따라 적군을 신속하게 섬멸하고자 했다. 여기서 섬멸은 군사적 관점에서 물리적인 말살이 아닌 전투수단인 지상군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의미했다.[7]

그러나 전통적인 작전적 원칙들이 세계정복을 지행하는 전쟁 속에서 유명무실화되거나 도구화되고 말았다. 군부는 1941년 3월 30일 이후에야 비로소 이러한 진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히틀러는 매우 의미심장한 어투로 이날 장군들에게, 향후의 전쟁이 서부와 북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통상적인 전쟁'과는 전혀 다른,특별한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공표했다. 과거 나폴레옹이 시도했듯 유럽에서 러시아의 패권국가로서의 위상을 무너뜨리고 영국에서 대륙에서의 주도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 그와 동시에 소련을 붕괴시키고 나아가 소련의 주민들을 말살 또는 노예화하는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이 목표는 앞으로 다가올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전쟁 목표, 즉 사상적인 '불구대천의 원수', 볼셰비즘과 유대교를 지구상에서 소멸시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언급했다. 적군의 섬멸을 지향하던 군사적 개념이 한 국가와 사상의 소멸이라는 정치적 개념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에 히틀러는 장군들에게 유럽에서의 전쟁수행에 있어서 지금까지 적용된 전통적인 준칙과 규칙들을 폐기하라고 지시했다. 장군들은 곧 벌어질 전쟁이 인종적,사상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히틀러의 요구가 지나친 것이었음을 인지했다. 물론 히틀러가 자신의 계획을 세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폴란드 점령정책을 시행했던 친위대의 행동을 목격한 이들은 당시 생활권 확보를 위한 히틀러의 전쟁이 어떤 것이었는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군부 엘리트들은 히틀러의 '민족적 섬멸전쟁'과 '식민통치 및 착취 전쟁개념'에 열광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몇몇 장군들은 이번 전쟁의 법적인 문제들보다 오히려 자신에게 부여된 작전적 과업에 더 몰두했다. 또한 일부 인사들은 독일 군부 엘리트들의 트라우마인 양면전쟁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히틀러의 주장이 사실인가에 대해서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자료들을 근거로 판단해 보면 대다수의 장군들은 회의적인 시각보다는 승리에 대한 자신감, 적에 대한 우월감을 내보이곤 했다.

어쨌든 국방군 총사령부에서는 장차전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육군 총사령부의 장군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관점에서 적의 군사적 격멸을 작전목적으로 생각했지만, 빌헬름 카이텔 주변의 장교들은 제1차 세계대전시 연합군의 봉쇄로 인한 처절한 경험을 기초로 적군의 섬멸을 훨씬 능가하는 일종의 극단적인 총력전을 구상했다. 1938년 4월 국방부는 '조직의 문제로서의 전쟁지휘'라는 글을 썼고 이 글의 부록 '장차전이란 무엇인가?'(Was ist der Krieg der Zukunft)에서 장차 군사적 충돌이 벌어진다면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무제한성을 띠게 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선전과 경제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이 총동원되어야 한다. 전쟁의 목표는 적국의 군사력, 물질적인 원천,국민들의 정신력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필요 앞에는 법이 없다.'라는 격언이 바로 장차전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9]

이렇듯 국방군 최고사령부[10]

는 총력전의 개념을 이용하여 나치즘의 생활권 사상을 정당화했다. 당시까지의 규범과 법규를 훼손하고 급기야 무효화하고자 했으며 이것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예방전쟁의 개념을 능가하는, 결국 군사력을 이용한 국가 차원의 이른바 '그릇된 정당방위'였다. 이에 나치 독일 지도부는 소련 침공을 앞두고 법률, 규정과 명령의 보완, 폐지 또는 수정 작업을 실시하여 계획된 세계정복전쟁과 섬멸전쟁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폴란드 전역은 분명히 섬멸전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전역은 많은 영역에 걸쳐 소련에 대한 인종주의적 섬멸전의 서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육군 총사령부[11]

는 작전적 사고에 내재된 군수물자의 양과 수송능력, 병력부족의 심각성이라는 미해결의 문제를 나치가 요구하는 범죄적인 방안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신속히 전방으로 진출해야 했던 부대들은 수송능력 부족, 작전지역 확대, 도로 등 열악한 사회간접시설 때문에 물자와 식량 둘 중 하나만 보급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육군 지휘부는 단기전을 감안할 때 식량은 현지조달하지 않으면 전투부대의 보급도, 따라서 속전속결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방안 외에 근본적인 대안도 없었다. 또한 이는 독일 육군에서 수백 년 이상 적용되어온 군사적인 관습이었다. 그러나 이 관습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치 사상에 따른 동부에서의 경제전쟁과 결합되었다. 소련 침공의 계획단계에서부터 현지조달은 전쟁의 결정적인 목표 중 하나였다. 이로써 총참모부가 계획한 점령지에서 식량을 현지조달하는 전통적인 보급체계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범죄행위가 되고 말았다. 전장에서 보급을 받아야 하는 기계화부대의 보급문제도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고 육군 총사령부는 그러한 범죄행위에 대해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12] 그들은 중부유럽 일대와 국경 인근의 전쟁관념에 사로잡혀 유럽과는 판이한 소련의 농지 분포도를 간과하고 말았다. 남부와 북부집단군의 작전지역은 비옥한 경작지였던 반면 주공이었던 중부집단군은 대부분 삼림으로 형성된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그들의 현지조달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전체 작전지역을 초토화시키고 주민들에게는 온갖 만행을 일삼았다. 그런데도 총참모부는 중점을 형성한 작전지역의 군수문제를 계속 경시했고 보급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작전에만 몰두했던 지휘관들에게는 주민들의 식량도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이러한 해법도 역시 독일 작전적 사고의 전형적인 결과물이었다.

과거 알프레트 폰 슐리펜[13]

물론 군수문제를 무시했으며 식량은 현지조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14] 슐리펜은 점령지 주민들이 얼마만큼 군의 수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슐리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적국 주민들이 아군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다면 목적에 부합하는 수준의 압력을 행사하고 전투부대에 부족한 만큼 외부에서 확보해야 한다."[각주275번]

다시 말해서, 슐리펜은 식량 확보를 위해서 경우에 따라 압력, 그러니까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적국의 주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폭력을 행사할지에 대해서는 그 어디에서도 밝힌 적이 없다. 반면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기아전략과 섬멸전략으로 소련 주민들을 말살하고자 했다. 자칭 슐리펜의 후손들이라는 장군들 대부분이 실리주의를 이유로 나치의 생활권 이론의 맥락에서 이러한 과정에 동참했고 소련 주민에 대한 범죄행위를 묵인했다. 군부는 작전적 사고에 내재된 문제점을 해결하러 전쟁 중 군사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와 국제법을 어길 각오를 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전개된 데에는 인종적, 국가사회주의적,급진적 사상들이 군 수뇌부에게까지 퍼졌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종주의적 이유를 포함해서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작전수행까지 영향을 준 철저히 실용적인 군사기술적 관점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물론 군 지휘부도 아군의 제한된 전투력을 감안할 때 그 도시를 점령하는데 병력과 물량을 투입하거나 나아가 주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경제적,사상적 요인과 군사적 실용주의가 결합되어 범죄적 작전수행의 결과를 초래했다.

육군 지휘부는 엄청난 병력열세와 군수보급의 총체적 난국과 같은 작전적 교리의 구조적 취약점을 범죄적인 작전과 전쟁을 통해 부분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이에 경제전쟁,인종전쟁과 순수 군사적 작전은 모두 얽혀서 서로를 자극,선동하고 정당화시켰다. 순수한 군사작전은 인종주의적인 섬멸전쟁으로 변질되었고 작전적 사고는 전체주의화와 범죄의 도구로 전락했다. 이러한 가치관의 붕괴는 제정시대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생겨난 슬라브인과 유태인들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나치 이데올로기 시대에 이르자 슬라브인과 유태인의 인간적 존엄성 자체를 부정하고 결국 멸종을 선택하게 되었다. 동부 전역에서 이런 '열등 인종'들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국방군의 수뇌부는 스스로 이런 범죄적 행위를 묵인함으로써 작전적 사고의 취약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민간인들과 군인을 가리지 않는 물리적인 섬멸을 필요악으로 인식하고 도리 없이 학살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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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총참모부 작전적 사고의 역사, 헬무트 폰 몰트케부터 아돌프 호이징어까지》 게하르트 P.그로스 저 진중근 역 출판사:길찾기 329p ~ 338p


국방군 무오설을 믿는 사람들의 통념과는 다르게 국방군이 그저 전쟁만 수행한 깨끗한 군대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모든 국방군 병사들이 학살과 전쟁범죄에 동조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국방군, 특히 육군 병사들 대부분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전쟁범죄행위에 참여, 지원 혹은 방관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이 독일에서 그렇게 기세등등할 수 있었던 것에서 보이듯이, 당시 독일 국민의 상당수는, 심지어 여자, 병약자, 학생들마저도 친위대만큼은 아니더라도 나치 이념에 동조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폭력을 동반한 쿠데타 같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국민의 지지를 통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적 자살이었기 때문이다.[15]

나치를 지지한 국민들이 독일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었기에 나치당이 집권할 수 있었던 만큼, 당연한 원리로 이런 성향의 국민들이 징집되어 구성된 국방군 역시도 나치 신봉자 비율이 상당했다. 슈츠슈타펠 포로,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전쟁범죄를 도맡아 한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국방군 역시 무장친위대와 같은 급은 아니라도 동부전선에서 전쟁범죄들을 저질렀다. 제3제국 휘하 군대가 벌인 각종 전쟁범죄는 나치당과 슈츠슈타펠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 역시 사실이지만 어차피 친위대는 해골부대, 아인자츠그루펜 등 학살 그 자체를 목표로 작전을 수립하는게 그 조직의 존재 이유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국방군이 나치당에게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전쟁범죄를 벌인 피해자라는 소리는 어불성설이고, 결국 이들도 전쟁범죄를 일으킨 가해자들이었으며 분명 본인들은 임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양의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국방군은 슈츠슈타펠 휘하 부대들(해골부대(토텐코프 연대), 아인자츠그루펜, 게슈타포, 디를레방어 여단, 카민스키 여단,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 등등)만큼은 아니지만 국방군 휘하 부대도 상당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슈츠슈타펠에는 유대인 학살 수용소의 경비와 운영 등 아예 홀로코스트 자체를 실무적으로 도맡아 수행한 SS해골부대(SS-Totenkopfverbände)가 있었고 따로 주임무로 학살을 전담하는 아인자츠그루펜도 슈츠슈타펠 소속이었기 때문에 국방군은 슈츠슈타펠처럼 유태인 학살같은 조직적이고 직접적인 대규모 학살에 관여한 것 자체는 슈츠슈타펠'보다는' 적지만, 슈츠슈타펠이 저지른 학살이 워낙 많아서 상대적으로 묻히는 것일 뿐이지 국방군도 만만치않은 횟수의 학살 행위를 저질렀으며, 직접적인 학살 행위에 참여한 것 외에도 친위대의 학살 행위의 뒷처리를 하는 증거 인멸행위(즉 시체 소각,매장)에 주로 동원되어 이를 수행한 것도 상당하였다.

실상은 이런데도 전문적인 역사학계의 학설에 기반한 국방군 옹호론이 일반인들에게까지 상당히 퍼져 있었다. 꽤나 최근까지도 학계에서는 '더러운 SS, 깨끗한 국방군'이라는 통념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학계의 문제가 아니라 종전 직후의 국제정세에서 기인한 문제였다. 냉전 당시에는 서독의 재무장이 필요했고 독일의 종전 직후 사회분위기 자체가 공산주의와 나치당에 책임을 돌리는 풍조가 강했으며, 이에 따라 독일이라는 국가의 오점은 최소화하고 이미 패망한 나치 정권의 전범행각을 부각하는 학계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소련 역시 동독의 재무장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러자면 독일 국방군 출신들에게 어느 정도는 일을 맡겨야 했기 때문에 역시 비슷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에 양측은 비교적 소수였던 친위대만을 희생양으로 삼고 국방군에겐 면죄부를 줌으로써 신생 군대의 탄생을 위한 포석을 깐다.

이런 입장은 제2차 세계 대전 세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는 1970~80년대[16][17]가 되어 68운동이 일어나고 나서야 변화를 보였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독일군이 깨끗한 국방군 이론(Saubere Wehrmacht, Legende von der sauberen Wehrmacht)을 내려놓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18]

당시 독일인들의 인식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영국, 미국에 대한 적의가 크게 없었던 반면 폴란드소련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폴란드의 경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가 독립할 때 독일 제국의 영토 일부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적대적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폴란드 회랑이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갈라놓았으며, 여기에 기존의 폴란드를 비롯한 슬라브인에 대한 독일인들의 우월감이 1차 대전 이후 독립한 폴란드와 갈등을 치르면서 인종적 적대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차 대전 이후 독일 본토 일부가 할양되었을 때 그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나라가 폴란드였으며,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는 전쟁을 회피하려던 독일 군부조차 폴란드 침공을 적극 옹호할 정도로 독일은 폴란드에 적대적이었다.[19]

소련에 대해서는 당시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유대-공산주의의 본산인 소련이 독일인의 삶의 터전을 위협할 것이라는 생각이 독일인들 사이에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일은 거의 1천 년에 가까운 동방진출의 역사를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제3제국까지 이어지면서 동유럽을 독일이 당연히 먹어야 할 땅으로 인식했다. 여기에 앞서 말했듯이 슬라브인들에 대한 독일의 기존의 우월감까지 겹치면서 이러한 공포는 인종적 적대감으로 번졌으며, 이에 따라 저 놈들 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그러니까 죽기 전에 먼저 선빵때려서 다 먹어치우자!라는 실로 경이로운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그래서 그 소련이랑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폴란드를 갈라먹은 건가? 음?

따라서 폴란드 및 소련과의 전쟁은 생존영역을 두고 싸우는 혈투였지만, 영미 연합군과의 전쟁은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20] 이 때문에 국방군은 서부전선에서는 대체적으로 신사적으로 전투에 임했고 이것이 깨끗한 국방군 이론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다. 물론 동부전선에 비하면 미미하기는 하지만 서부전선에서도 어느 정도 전쟁범죄가 있었다.[21]

이러한 실태와 달리 깨끗한 국방군론이 퍼질 수 있게 된 원인은 종전 직후의 국제정세에서 기인한 문제였다. 종전 이후 독일은 군이 완전히 해체당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의 낙인을 받고 군대를 조직할 수 없게 되었지만, 당장 미국과 소련 모두 추축국이고 뭐고 간에 일단 유럽의 방패막이로써의 독일군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독일군'의 재건이 필요했고, 이를 위한 과정에서 국방군의 전쟁범죄는 대부분 슈츠슈타펠에게 뒤집어 씌워지게 된 것이다. 슈츠슈타펠이 옹호할만한 조직은 결코 아니지만 남이 한 일까지 덮어쓴 셈이다.[22]

전후에 살아남은 국방군 복무자나 장성들, 전쟁을 겪은 독일 민간인들 역시도 회고록을 비롯한 서적들을 집필하면서 모든 책임 히틀러와 나치당, 슈츠슈타펠에게 돌리는 책임전가자기합리화의 진수를 시전했는데, 이들의 의견 역시도 깨끗한 국방군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이들 가운데 오직 나라를 위해 복무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들도 본의든 아니든 결국 침략전쟁을 수행한 일원임에는 분명하며, 독일군의 전쟁범죄는 이러한 '깨끗한 일부'로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변호하자면 슈츠슈타펠 중 일부가 전범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바펜(Waffen)-슈츠슈타펠이 전쟁범죄 집단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국방군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연방군(서독군)은 자신들이야말로 이런 "국방군 무죄설"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국방군의 모든 것들을 흑역사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전통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물론 국방군의 군국주의의 원천이었던 구프로이센 영역이 모조리 공산국가인 동독이나 폴란드나 소련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더이상의 인적 유입이 없어진지라, 서독군이 전통을 내세우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냉전시대에는 오히려 동독군이 거위걸음을 채택하고 프로이센 시절의 행진곡을 사용하는 등 프로이센군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강조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그리하여 국방군으로부터 내려오는 군복, 군기, 부대, 조직의 전통은 깡그리 부정하고 전후 거의 모든 것을 미군식으로 바꿔 새롭게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러한 '깨끗한 국방군'을 비판하는 서적으로는 볼프랑 베테가 저술한 <독일 국방군 - 2차 대전과 깨끗한 독일군의 신화>가 있다.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출판되어 있다. 다만 해당 서적은 역자 후기에서 비판했듯이, 자료를 잘못 인용한 경우도 많으며 본문에서도 '~~했을 것이다' 하는 식으로 추측식 서술로 인한 무리한 논리 전개와 치우친 관점으로 공정성의 논란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국방군이 학살에 조직적으로 개입, 방관했다는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23]

2차 대전 당시 육군 원수였던 발터 모델은 "군대는 반드시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하며 무력으로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책무는 전선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강조하며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비판한 바 있다. 군인은 당연히 현 정부에 대하여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믿어온 만큼 정치적 발언조차 금기시켰으며, 정 하고 싶으면 군복을 벗은 다음에 하면 된다고 자신의 부관에게 말할 정도였다. 한 예로 1944년에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에서 SS 국가지도자 겸 보충군 사령관인 하인리히 힘러 장군이 진압 병력을 바르샤바로 파견할 것을 명령했을 때 모델은 "바르샤바 봉기는 폴란드인에 대한 나치당의 가혹한 통치로 인한 것이며, 이러한 후방 지역의 민간인 소요 사태에 절대로 군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며 거절한 바 있다.

그러나 죽기 하루 전인 1945년 4월 20일, "진정으로 내가 범죄에 종사해왔음을 믿게 되었네. 나는 양심적으로 부하들을 이끌었지… [24]하지만,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어."라고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히틀러 정권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모델의 군적은 루르의 B집단군이 해산한 4월 17일 자로 말소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정치적 발언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외에 국방군에서 고위 계급에서 전쟁범죄에서 자유로웠던 사람[25]을 찾아본다면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상급대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26], 빌헬름 카나리스 대장, 헬무트 그로스쿠르트 대령,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원수[27]정도. 덜한 사람도 넣으면 헤닝 폰 트레슈코프 소장과 페도어 폰 보크 원수 정도. 이 둘은 폴란드에서 '어쨌든' 민간인을 해치는 명령을 내렸다. 나머지는 뭐...[28]

여담으로 인터넷에 보이는 일부 밀덕들이 독일 국방군을 옹호하고 있는데, 위에 서술한 것들이 전부 무효라고 쳐도, 국방군은 물론 후방에 남은 독일 여자와 노인, 병약자, 아이들 역시 히틀러의 만행에 침묵/방관하거나, 마음속이나 말로만 히틀러를 반대하거나, 설령 행동을 하더라도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들고일어나 나서지 않은 건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방관은 악을 꽃피우는 법이다. 법적으로 따지자면 범죄의 방관, 은폐 행위도 충분한 범죄 행위였고, 독일인들에게 나치 독일은 지울 수 없는 범죄의 증거가 되었다.

물론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모든 국방군 군인과 독일 민간인들이 전쟁범죄자는 아니었다. 다만 대다수의 국방군 병사들은 전쟁범죄를 긍정 내지 필요악으로 생각했으며, 그러한 생각을 본인들이 거기에 참가하거나 방관하면서 입증했다.[29] 소수의 국방군 군인들만이 이러한 행위들과 무관했으며[30] 전쟁범죄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이들은 더욱 적었다. 그리고 첫 번째 내지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들은 전범이 아닐 수도 있으나 이들의 이러한 태도로 이어진 결과는 국방군을 변호해줄 만한 선을 넘고 말았고, 따라서 이들이 속했던 독일 국방군이라는 조직은 전쟁범죄를 저지른 집단으로 평생 까이는 결과로 돌아오게 되었다.


4. 학계[편집]



4.1. 고의적으로 은폐한 경우[편집]


대표적인 학자가 바실 리델 하트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 국방군의 유명 인사들이 자신의 제자였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대가로 국방군의 전범 행위를 은폐했다. 롬멜 신화가 바로 대표적인 산물이다.

이 글의 목적은 영국의 저명한 군사 전문가 바실 리델 하트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전쟁범죄 재판에 회부된 독일국방군 고위 장교들을 옹호한 까닭과 그가 “결백한 독일국방군” 신화의 형성에서 한 역할을 밝히는 것이다. 리델 하트는 1930년대부터 자기의 기동전 이론을 포기하고 진지전의 효율성을 강조했고, 1940년에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독일의 패배와 프랑스의 승리를 예측했다. 따라서 그의 평판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리델 하트는 수감된 독일 장성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았고, 전범 재판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그들을 옹호했으며, 그들이 전쟁범죄와 무관한 동시에 나치 체제가 아닌 조국 독일을 위해 싸운 명예로운 군인이라고 단언했다. 리델 하트는 이러한 변호의 반대급부로 독일의 유명한 장군들이 자기의 저술에 착안해서 기갑부대를 창설하고 “전격전”이라는 기동전을 구상했다는 발언을 하도록 유도했다. 구데리안 장군을 비롯한 여러 독일 고위 장교가 그의 은밀한 요청에 응하면서 리델 하트는 독일 기갑전의 “스승”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써 전후에 그는 바라던 대로 명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리델 하트가 독일군의 기갑부대 편성과 운용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인식은 사실과 어긋난다. 또한 만슈타인을 비롯한 독일국방군 고위 장교들이 유럽 동부전선에서 자행된 전쟁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진실을 희생해서 명성을 얻은 리델 하트는 “결백한 독일국방군” 신화의 탄생을 도운 산파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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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수 교수님의 새로운 논문이 공개되었습니다.


4.2. 국방군의 만행을 인정하면서 옹호한 경우[편집]


대표적인 학자로 안드레아스 힐그루버가 있다.

힐그루버는 저서 『이중의 몰락』(Zweierei Untergang, 1986)을 통해 독일동방군이 독소전쟁에서 수백 년간 독일인의 거주지였던 지역을 소련붉은 군대로부터 보호할 “보호막”을 제공했으며, 따라서 독일동방군이 수행한 전쟁은 독일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어전이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힐그루버는 결국 독일 동부지역의 방어가 문제였기 때문에 집권세력인 파시즘의 테러라도 참아내어야 했으며, 또 파시즘은 독일의 이익을 넘어 유럽의 이익을 대변했기 때문에 보다 높은 차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출처: 김성희·이덕형, 「역사의 정상화, 국가의 정상화: 독일 '역사가논쟁'(1986)을 중심으로」, 『독일어문학』 제29집 (2005년 6월), p.10을 수정.

안드레아스 힐그루버가 독일국방군이 나치화되었으며 절멸전쟁의 일부였음을 인정하는 학자라는 점에서 저건 매우 깨는 주장입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힐그루버의 논리가 결국 힐그루버가 1945년에 징집되어 동프로이센 전투에 참전했던 경험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작성자:РККА☭갤로그이동 독일 역사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의 수정주의적 주장 요약 (군사 마이너 갤러리)



5. 하위 분류[편집]



5.1. 롬멜 신화[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에르빈 롬멜/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유사 사례[편집]



6.1. 깨끗한 무장친위대 신화[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무장친위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2. 깨끗한 일본 해군 신화[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해군선옥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매체에서[편집]


이에 영향을 받아 2차 세계대전 관련 매체에서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임하는 개념인 국방군 병사와 사악한 나치 광신도 친위대원을 대비시키는 클리셰가 꽤 많이 있다.

국방군 옹호론의 모습을 보이는 작품들 중 상당수는 대중들에게 각인된 이미지를 반영한 것일 뿐이지 진짜 옹호론을 펼치는 것이 아닌 경우도 많다. 아무래도 국방군보다는 SS를 악역으로 만드는 게 주인공들 편에서 잔혹한 짓을 해도 훨씬 덜 비난받는 편이기 때문이다.


7.1. 국방군 무오설을 부정하는 작품들[편집]


실존인물인 빌리 파울 헤롤트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슈츠슈타펠 소속이 아닌 평범한 독일 공군 공수부대 탈영병이었던 헤롤트가 우연히 얻은 공군 대위의 근무복을 입고 주변 분위기와 위계권력에 취해 탈영병을 즉결처분하는 등 독단과 전횡을 일삼으며 전범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생생히 묘사한다.

작중 자신을 살려준 미육군 밀러 대위를 사살하는 독일 육군 병사와, 반대로 업햄을 살려주는 무장친위대 병사가 함께 등장한다.[31] 무장친위대의 사악함이 드러나지 않으며 오히려 독일국방군이 더 나쁘게 나오는 (물론 이것도 고의는 아니다.) 드문 영화.

작중 무장친위대의 학살이 더 비중이 많은데 그거야 어디나 실제 역사적 사이 그런 것이고[32] 국방군도 전혀 무고하게 나오지 않는다. 후반에 주인공을 살려주는 독일 육군 병사가 나오기는 한다만 그 병사는 폴란드인들이 나서서 목숨을 구해준 군인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병사들의 동료들은 민간인이 대량학살된 현장에서 "야 신난다"며 교성 지르고 즐거워하며 수색을 한다.

마지막 티거 시나리오에서 국방군 소속 티거 전차장인 주인공이 자신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지만 베를린 공방전중 파괴된 도시와 버려진 민간인, 그와중에도 전쟁 범죄를 저지르며 자신에게 경례하는 무장친위대원 등을 보며 자신의 사상에 대해 회의를 가지기 시작하고 종국에는 연합군에 투항 시도를 하다가 자신이 사상교육한 부하의 총격에 사망한다.

독일 육군 병력들이 수술이 진행중이던 병원에 처들어가 의사와 간호사를 폭행하거나 유대인, 정치장교를 총살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주인공인 에른스트 그래버 병장이 소속된 중대는 소련 민간인들을 무고하게 빨치산으로 몰아 처형하곤 한다. 물론 주인공인 그래버와 그의 동료인 임머만, 사우어, 베르닝, 슈나이더 등이 모두 '꼭 이렇게 해야만 할까?' 라면서 처형하기를 꺼리고, 히른쉬란트라는 병사는 소련 민간인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자살하는 장면까지 나오며, 슈츠슈타펠 출신 병사인 슈타인브레너만이 학살하기를 매우 찬성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국방군의 전쟁 범죄를 부정하는 작품 아니냐 하겠지만 일단 국방군 병사들이 민간인들을 처형하는 명을 받는다는 장면이 나오고, 병사들의 심정이야 어떻든 일단 민간인들을 쏴 죽이긴 죽였으니까 국방군 옹호론을 부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중대장인 라에와 소대장인 뮬러, 주임원사인 뮤케 등은 모두 국방군이면서 나치즘에 잔뜩 중독된 인물들로 묘사된다. 또한 이 작품의 원작을 쓴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매우 극렬한 반나치주의자이다. 당연히 그가 국방군 옹호론이 담긴 작품을 쓸 리가 없다.

영화 후반에 주인공인 한스 폰 비츨란트 소위가 소속된 사단이 러시아인들이 살던 마을의 집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총살하는 명령에[33] 비츨란트와 그의 소대원들도 강제로 가담하게 된다. 이에 폰 비츨란트와 그의 부하인 프리츠 라이저 병장은 학살 명령을 수행하는 사단 헌병대 대위인 할러에게 항의하고 소대원들도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34] 할러 대위는 비츨란트의 항의를 씹은 것도 모자라 만약 그가 쏜 총알이 러시아인에게 맞지 않으면 너도 벽에 세운 뒤 쏴 죽이겠다고 협박한 뒤에 총살을 집행한다. 이후엔 자기 휘하의 병사를 시켜 총을 맞은 주민들을 권총으로 쏘아 확실하게 죽여버린다. 그 외에도 영화 초반에 스탈린그라드 근교의 기차역에서 독일군 헌병 병사가 소련군 포로를 학대하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면[35], 러시아인들을 악인으로 선전하는 군종장교[36], 아군 부상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소규모의 소련군 부대와 잠시 맺은 휴전(참고로 이들도 부상자들을 데려오길 원했다. 그래서 잠시나마 휴전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을 깨고 멋대로 소련군에게 발포했다 본인이 소속된 소대원 여럿 죽일 뻔 한 폰 비츨란트 소대의 하급 병사 뮐러[37][38]등 장군부터 말단 병사까지 전부 기존의 통설과는 거리가 먼 국방군 육군 군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인 육군 전차장 요한이 대전 초기 자신의 행적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과 포로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소련 육군 포로를 일렬로 세워놓고 권총으로 직접 죽이는 장면에서는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이다.

독일공영방송 ZDF에서 만든 3부작 미니 드라마. 1화에서부터 빌헬름이 전투중 잡은 소련 육군 정치장교를 중대장이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지뢰밭을 만나자 프리트헬름이 소련의 농부들을 지뢰밭에 앞장세우자고 제안하며 다들 거기에 기꺼이 찬성한다. 2화 에선 마을 민간인을 처형하는 장면이 나온다. 3화에선 프리트헬름이 폴란드에서 주둔중에 빨치산을 도와준 마을사람들 처형하며 다닌다. 다만 도망가는 소년을 자신이 셋을 셀테니 쏴죽이라 지시한 지휘관은 SS 보안대 소속 대령이다. 제일 객관적인 독일 국방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원해서 적극 학살하는 병사들도 나오고 아예 질려서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로 기계적으로 학살에 임하는 병사들도 나온다. 중요한 것은 두 행위모두 전쟁범죄라는 것이다.

이쪽은 위의 작품들과 달리독일국방군 최정예 사단인 그로스도이칠란드 기갑척탄 사단에서 독소전쟁에 참전한 기 사예르의 회고록이다. 여기에는 국방군 병사들이 항복한 소련군병사들을 수류탄으로 묶어서 터뜨려 죽이거나 총기 난사하는 전쟁범죄 뿐만 아니라 스탈린 만세라고 부르는 민간인들에게 총을 겨누는 등, 병사들의 민간인 학살과 포로 학살에 대한 무감성적인 면이 드러나고 있다. 국방군 참전 병사로서 국방군의 전쟁범죄 가담 사실을 가감없이 고백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인데 독일군 장성들의 회고록 대부분이 전쟁 범죄를 이미 죽은 히틀러나 친위대에게 떠넘기거나, 본인은 몰랐다는 식으로 변명하고, 아예 오토 카리우스의 경우 자신의 회고록에서 '우리 국방군과 친위대는 연합국의 선전처럼 그런 범죄자 집단이 아니다!'라며 반발한 것에 크게 대비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을 다룬 영화. 작 중 악역의 대부분을 육군이 담당한다. 아직도 깨끗한 국방군 이론을 주워섬기는 사람이 많은 한국에서는 SS와 국방군을 착각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감상을 많이 내놓는다.

'미군은 정의와 자유의 용사, 독일 국방군은 적이지만 멋진 놈들, SS는 잔인한 전쟁 범죄자 놈들'이라는 원초적인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 "전쟁 속의 인간들은 과연 자신의 선함을 지킬 수 있는가"라는 교훈을 던져주는 영화이다. 극중 인물들의 심리, 상태 등의 묘사 방식에 있어서는 상술한 1993년작 스탈린그라드와 비슷하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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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무오(無誤)는 국어사전에 없는 단어이다. Biblical Inerrancy를 성서무오설로 직역할 때 쓰이는 정도이다. 이런 식으로 쓰이는 '무오'는 (판단 등의) 잘못이나 오류(誤謬)가 없다는 뜻인데, 국방군 무오설은 국방군에게 '오점(汚點)'이 없다는 의미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이쪽도 부적절한 번역이다.[2] 이는 친독 성향이 강한 일본 밀리터리계의 영향도 있고, 후술할 냉전 상황에서 이미지 세탁 때문에 상당기간 동안 학계의 주류 학설이 국방군 무오설이었기 때문이다.[3] 이는 부분적으로 근현대사 시기에 한국에서도 직면했던 난관이다.[4] 군사독재와는 다르다. 군사독재는 군부가 정치를 장악했다는 것인데, 독일은 군대가 정치는 하지 않았지만 거위걸음, 공무원 군복 착용 같은 군사 문화가 사회 분위기 전반에 아주 짙게 깔려 있었다.[5] 역시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징병제가 시행되고 많은 사람들이 '군필자'로서 스스로를 자부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는 면이 있다. 대한민국 국군이나 특수부대가 직접 개입한 학살은 말할 것도 없고, 타국의 학살에 대해서도 일본군, 북한군, 중공군 등의 민감한 경우를 제외하면, 전쟁범죄에 가담한 병사 개개인에 대해서는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게임, 소설, 웹툰, 영화 등 창작물에 대한 의견을 나눌 때도 학살에 순응하는 군인을 욕하면 '미필인가?'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것이 흔하다. 이는 스스로의 순응의 경험을 반영한다.[6] 공군 중위 프리트. 출처: SRA(공군 특별보고서) 3984,16.4[원주268번] 1942년 7월 26일로 넘어가는 한밤중에 친위대는 프셰미실(Przemyśl)의 유대인 주민들을 집에서 끌어내 모았다. 새벽 5시경 지역 사령관 막스 리트케(Max Liedtke)는 친위대 소위 아돌프 벤틴(Adolf Benthin)과 전화하면서 적어도 국방군을 위해 일하는 유대인 남자들만은 이송에서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총사령부에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위협했는데, 이미 그는 무선으로 이 사건에 대해 총사령부에 보고한 상태였다. 이 보고에 대한 총사령부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그의 부관 알베르트 바텔(Albert Battel)은 유대인 게토의 유일한 출입구를 봉쇄하고 기관총으로 위협하여 친위대가 게토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바텔은 그런 행동을 한 이유로, 자신이 그 이전에 이미 프셰미실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고 말했다. 이는 법적 하자는 없었으나 실제로는 친위대에게 쓰라린 굴욕이자 도발이었다. 친위대는 총사령부에 게토 봉쇄 해제를 요구할 높은 계급의 책임자를 크라쿠프에서 데려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친위대가 결국 뜻을 관철하리라 내다본 바텔은 이 봉쇄를 하는 동안 유대인 노동자 약 90명과 그 가족들을 사령부로 데려와 숙박시켰다. 그는 또다른 240명을 게토에서 데리고 나와 사령부 지하실로 보냈다. 바텔과 리트케는 상황을 제대로 예측했다. 봉쇄는 풀렸고, 7월 27일 이른바 '소개 작전'은 다시 시작되었다.[원주269번] Wolfram Wette, Retter in Uniform. Handlungsspielräume im Vernichtungskrieg der Wehrmacht(Frankfurt am Main, 2003).[원주270번] 1941년 7월 8월 11월 세 차례에 걸쳐 다우가프필스에서는 약 14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됐다. Enzyklopädie des Holocaust, Israel Gutman, Eberhard Jäckel, Peter Langenich and Julius H. Schoeps(eds.), vol. 1, p. 375.[원주271번] SRGG(독일 장성 특별보고서) 1086, 28. 12. 1944, TNA, WO 208/4169[원주272번] Frank Bajohr und Dieter Pohl, Der Holocaust als offenes Geheimnis. Die Deutschen, die NS-Führung und die Alliierten(München, 2006). Peter Longerich, "Davon haben wir nichts gewusst!" Die Deutschen und die Judenverfolgung 1933 ~ 1945(München, 2006). Harald Welzer, "Die Deutschen und ihr Drittes Reich", Aus Politik und Zeitgeschichte (APuZ) 14 - 15/2007.[원주273번] 메스켐프, 지금의 다우가프필스의 교외.[원주274번] SRGG 1086, 28. 12. 1944, TNA, WO 208/4169[7] 이러한 원리에 따라 1차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의 움직임이 전개되었다.[8] 히틀러가 영국에 우호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이 유럽 대륙을 장악하는 대신 영국의 식민지 지배권을 보장하겠다는 계약의 의미였다. 우리 독일이 유럽 대륙을 지배할테니 영국 너희들은 식민지나 지키는 개 노릇이나 하라는 뜻이다.[9] 한 마디로 돈만 벌 수 있으면 범죄를 저질러도 상관없다는 식의 논리다.[10] Oberkommando der Wehrmacht[11] Oberkommando des Heeres[12] 일례로 우크라이나에서는 약탈을 일삼고 농사에 필수적인 수단까지 파괴했다. 심지어 경찰들도 우크라이나의 민가를 샅샅이 뒤져 숨겨놓은 식량까지 압류해갔다. 물론 1941년의 수확량은 예상보다 아주 적었으며 운송에 차질이 생겨 애써 강탈한 식량이 엉뚱한 곳으로 수송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악랄하게 쥐어짜도 동부전선의 독일군 전체를 먹일 만큼 식량을 현지조달할 수는 없었다. 물론 우크라이나의 약탈은 러시아 도시들에 식량 공급이 끊긴다는 것이었고 나치의 계획대로 이 도시들은 30년 전쟁 이후 가장 높은 사망률을 기록했다. 출처:독일의 음식문화사 우어줄라 하인첼만 저 김후 역 니케북스 출판 482p[13] 슐리펜 계획의 그 슐리펜이다.[14] 슐리펜은 "식량은 절대 부족할 리가 없다. 풍족한 벨기에와 비옥한 북부 프랑스 땅에서 아군은 충분한 식량을 공급받게 될 것이다. 그곳 주민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식량도 부족하겠지만 적당히 압력을 행사하면 저장해둔 식량을 우리에게 내어 줄 것이다." 라고 육군의 군수문제를 단언했었고 이 적당한 압력 행사는 벨기에 학살로 이어졌다. 그리고 슐리펜이 죽고 나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그의 생각대로 유럽의 나치 독일 점령지들은 나치 독일을 위해 완벽하고 합법적인 식량창고로 여겨질 수 있음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프랑스와 노르웨이,네덜란드,그리스 등의 국가와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까지 쥐어짤대로 쥐어짜며 수많은 유럽인들을 기아와 영양실조로 몰아넣었다.[각주275번] Ritter, Der Schlieffenplan, p.158.[15] 일본 군부의 경우는 민주성이 훨씬 약했으며 평범한 일본인들이 지지해서 집권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황도파2.26 사건으로 자멸했기에 가능했다. 그런 면에서 일본인들은 독일인들보다 상대적으로 집합적 전범 취급에 대해 변명할 여지가 있다. 물론 이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전제하에서이며 당시 일반 일본인들 역시 정부의 민주성 여부와 별개로 중일전쟁 등에 호의적인 여론을 보인 바 있기에 전 국민 집단이 무조건적인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16] 이 이전까지 많은 수의 장성들이 연방군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육군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은 전후 서독 연방군 재건 자문을 맡았고,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육군상급대장 프란츠 할더 장군은 미 육군 전사연구관으로 일하며 민간 공로훈장을 받았다. 대전 말기에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육군대장 아돌프 호이징어 장군은 신생 서독 연방군의 첫 국방참모총장, 북대서양 조약 기구 군사위원회 의장직을 수행하였으며, 육군원수 에르빈 롬멜 장군의 참모장이었던 육군대장 한스 슈파이델 장군은 북대서양 조약기구 연합지상군 사령관을 지냈다. 국방군 제7야전군 참모장이었던 육군중장 막스요제프 요한 펨젤 장군은 울름 주둔 연방군 제2군단장을 역임하고 1961년 9월 30일 예편하였다. 군 생활을 이어나간 이들 뿐 아니라 몇몇 국방군 장성들은 정계에서도 활약하였는데 육군대장 핫소 폰 만토이펠은 종전 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자유민주당 당 대변인 및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일연방군 이라는 이름의 제창자이기도 하다. 육군대장 게르하르트 폰 슈베빈은 전후 콘라트 아데나워의 군사 및 안보정책 수석 보좌관을 지냈다. 이들 구 국방군 고위층이 현직에서 물러나거나 세상을 떠나고서야 국방군을 다시 보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17] 게다가 이때는 위에서 언급한 국방군의 고위 장성들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전직 국방군 병들과 부사관들, 위관/일부 젊은(대전 당시를 기준으로)영관급 장교들이 본격적으로 은퇴하거나 죽기 시작한 시기와도 겹친다. 이들은 1910년대 중후반~1920년대 초중반에 태어났던지라 왜냐면 1970~1980년대에는 최소한 50대 이상이였기 때문. 또한 이들의 뒤를 이어 사회 주류가 된 국방군 참전자들의 후손들은 대부분 나치를 절대악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들의 군대인 국방군을 긍정적으로 볼 리가 만무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점점 더 강해져서 1980년대 말~90년대 초에 냉전이 끝남과 동시에 대전 말기에 청소년 이하의 나잇대에 징집되어 국방군에 복무한 참전자 세대들이 사회 주류에서 완전히 은퇴하면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게다가 1990년대 이후 국방군 무오설이 독일을 넘어 세계 여러 국가의 일반인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할 때가 되면 이걸 막아야 할 국방군 참전자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나마 이때까지 살아있었던 국방군 참전자들은 아무리 못해도 60대 중후반의 고령인데다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18] 다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현재의 독일 정부가 어쨌건 나치 독일의 후계자로 그 유산을 그대로 갖고 출발했기 때문에 당시 독일국방군과 독일 사회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무장친위대는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나치당의 사병이었기 때문에 쉽게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19] 하지만 폴란드 입장에서는 폴란드가 독립 이후 차지한 영토는 폴란드 분할 이전에도 폴란드 영토였으며, 해당 지역은 폴란드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단, 카토비츠는 예외인데 이 지역은 폴란드가 주민투표에 불복하고 폭동과 파업을 적극 부추겨 강탈했다. 그리고 이곳은 본래 오버슐레지엔의 주도였다. 한편, 오히려 폴란드인들은 원래대로라면 폴란드 영토가 되었어야 할 그단스크(독일명 단치히)가 국제연맹 하의 자유도시가 된 것에 분통을 터뜨렸다.[20] 가령 육군 전차 에이스인 오토 카리우스 기갑중위같은 사람은 물론이고 높게는 히틀러도 연합군과 휴전하면 소련군과 싸우는데 상황이 좀 나아지겠지?라는 생각을 했으며, 이러한 인식은 종전 직전에도 변하지 않아서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대통령이었던 카를 되니츠는 상술한 논리를 갖고 연합군 서부전선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랑 협상을 시도했다. 고위 정치인들과 군인들조차 이러한 의중을 가졌던 마당에 평범한 일반인, 심지어 학생들과 어린이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하고 한판 붙었다가 밀리고 중립국이자 잠자는 사자였던 미국의 선박을 무자비하게 격침시켜놓고서 연합군이 소련과의 동맹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게 어이없기는 하지만 말이다.[21] 다만 서유럽의 연합군 포로의 사망률은 2% 수준이지만 동유럽에서는 20-57% 수준이다. 57%는 영국 학자 니얼 퍼거슨이 주장한 수치로, 이 사람이 원래 포로 사망률을 워낙 높게 잡는 편이다. 미국과 영국, 독일 등 대부분의 학자들 대부분 소련군의 포로사망률이 최소 20%, 보통은 30%는 넘었을 것으로 본다. 일본군의 경우 연합군(미국과 영연방) 사망률 27%, 중국군까지 포함하면 40% 정도이다. 중국 측에서는 70%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여부는 불명이다. 다만 다른 연합군의 사망률이 27%인데 중국군이 들어가면 40%로 상승하므로 상당히 높을 것으로 추정할 수는 있다.[22]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슈츠슈타펠은 사실은 Waffen-SS, 즉 무장친위대이다. 그냥 슈츠슈타펠이라 하면 일반 친위대인데, 냉전이 시작될 무렵에는 전쟁범죄의 책임자로 무장친위대를 상정했다.[23] 당장 폴란드 침공에 성공하여 폴란드를 분할한 이후 폴란드에서 일어난 전쟁범죄의 60%는 국방군이 저질렀으며 이때 관여한 독일 국방군 병력들이 훗날 SS로 전군을 하였고 거기서 더 훨씬 크고 잔악한 학살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히틀러가 독소전쟁을 일으키려 하자 동의한 것도, 독일군이 전쟁범죄 대부분을 저지른 독소전쟁의 신호이기도 했던 바르바로사 작전의 작전 계획을 짠 것도 바로 독일 국방군이었다. 즉, 나치 독일이 군사적 행동을 한 곳에서는 언제나 독일 국방군이 있었고, 그로 인해 벌어진 전쟁범죄의 중심에는 국방군의 말단 군인(=징집된 민간인)들과 지배층들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24] 그런데 발터 모델은 벨라루스 학살을 방관했고, 들소 작전 당시에는 소개 명령을 내렸다.[25] 단순히 침묵하는 것을 넘어 어느 정도 반대의 의사를 밝혔던 사람[26] 6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이후 전임자가 내렸던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을 폐기.[27] 나치 정부의 인종주의와 점령지에 대한 잔혹한 정책에 반대한 인물로 당시 독일 장군들 중 거의 유일하게 실제로 자원한 포로만 노동에 동원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범인 만슈타인과 달리 비참하게 옥중에서 사망한다.[28] 반대로 발터 폰 라이헤나우는 강조 명령을 내렸고,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는 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공람시켰으며,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는 레닌그라드에서 기아 현상이 일어나도록 지시, 방치하였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아인자츠그루펜에 탄약을 제공하고 학살된 이들의 소지품 일부를 자신의 부대로 가져가겠다고까지 했으며, 국방군의 최고 원수인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히틀러의 전쟁범죄 지시를 적극 이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빌헬름 폰 리스트 원수 역시 대표적인 친나치 융커로 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29] 이 시점에서 국방군 무오설은 허상이 확정되었다.[30] 그마저도 이들 대부분이 양심적이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독일 본토에서 근무하거나 전투에서 부상이 악화되어 전방으로 차출될 수 없었거나 혹은 독일이 본토 방어에 들어간 44년 중후반 이후에 입대하여(국민돌격대도 해당된다) 히틀러에 대한 방관 외에는 전쟁 범죄를 경험하지 못했던 등의 사정이 많았기 때문이다.[31] 아마 구석에서 벌벌떨고있으니, 큰 위험은 없다고 판단한것일수도 있고 본인의 칼로 찌른 사람이 앞에서 죽어가는것을 보았으니 살인에 이골이 나서 못 본척 한 것일수도있다.[32] 바르샤바 봉기 진압 당시, 악명을 떨친 디를레방어 여단, 카민스키 여단이 무장친위대 소속이었고 이후 봉기 생존자와 폴란드 민간인 20명이 학살당한 불라 학살을 저지른 에리히 폰 뎀 바흐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역시 무장친위대 소속이다.(참고로 이 자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바르샤바에 보내진 독일군 부대들을 현장에서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이었다.) 특히 폰 뎀 바흐 장군은 아예 작중에서 언급이 된다.[33] 겉으로는 러시아인들이 사보타주를 했던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사단의 식량이 부족하여 그들이 관할하는 지역의 러시아 민간인들에게 약탈하려고 한(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원인이었다.[34] 그도 그럴만한 것이 소대원들이 직접 총살하는 주민들 중에 자신들과 인연이 있는 러시아 소년인 콜랴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비츨란트가 할러에게 항의하는 이유가 총살 대상에서 콜랴를 빼주길 바랐기 때문이다.[35] 이를 본 비츨란트가 그 헌병 병사를 제지하려고 하다가 되려 맞고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현장 근처에 있던 헌병 대위인 할러에게 소련군 포로를 학대하고 자신에게 주먹을 날린 병사를 고발하려고 했으나 냉소적인 말만 듣고 말았다.[36] 그때 비츨란트는 사단의 고급 장교들을 만나서 부대에 새로 온 부사관을 소개받은 뒤에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가 기차역에서의 사건을 말하자 그 장교들은 비츨란트의 편을 들기는 커넝 사건을 덮고 만다.[37] 이후 그는 비츨란트에게 욕을 먹자 따지다가 자신의 선임이던 프리츠가 너는 사망자가 되어서 신문의 1면에 나올 것이라는 독설을 들은 뒤에 얼굴에 침을 맞는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비츨란트 본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소대원이 징계를 받아서 형벌부대로 전출되자 그들을 이끄는 소대장으로 다시 등장해서 자신의 부하가 된 이들을 못살게 굴다가 뮐러와 비츨란트의 상관이자 중대장인 무스크 대위의 명령으로 소련군 소속의 Т-34/85 전차 몇 대와 열 명 이상의 보병들과 교전하던 도중 전차의 포격에 맞아 죽고 만다. 참고로 뮐러와 같이 교전에 참여했던 비츨란트 소위와 소대원들은 생존에 성공함과 동시에 공훈이 인정되어 징계가 종료된 건 물론이고, 명예회복에도 성공한다.[38] 참고로 극중 이 병사와 동명이인이 있는데, 그는 비츨란트 부대에 새로 들어 온 신병으로 소련군을 죽이는 것을 꺼리거나 맞선임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전쟁 범죄와는 무관한 모습을 보이며, 소대의 고참병인 프리츠 역시 뮐러를 좋게 봐서 그에게 정말 위험한 뮐러라는 별명을 붙여주는 등의 모습을 보이며 잘 대해준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비행기로 공수된 보급품(철십자 훈장과 쇼카콜라 초콜릿)을 빼앗으려는 할러 대위를 동료 소대원들이 말리던 도중에 대위가 쏜 권총에 맞고 숨지고 만다. 이후 뮐러에게 총을 쏜 할러 대위는 그 동안 자신에게 당한 것 때문에 분노가 쌓일대로 쌓인 소대원들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바람에 목숨만 살려주면 물자가 가득 있는 비밀 창고에 안내하겠다고 하지만 묵살당했고, 결국 과거 장교 출신이었던 병사이자 비츨란트가 형벌부대에서 있었을 당시에 만난 이후 자기 소대원으로 삼은 군인인 오토의 총을 맞아 죽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