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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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구려의 관직 國相
2.1. 개요
2.2. 역사
2.2.1. 국상 시기
2.2.2. 대대로 시기
2.3. 역대 국상 명단
2.4. 같이보기



1. [편집]


나라()의 상(). 국민 전체가 복상(服喪)을 하던 왕실의 초상. 태상왕(太上王), 상왕(上王), 왕, 왕세자, 왕세손 및 그 비(妃)의 상사(喪事)를 이른다.[출처] 쉽게 말해 왕이나 세자, 왕비 등 왕실의 매우 높은 인물들이 훙서[1]하면 치러지는 장례가 국상이다.

당시에는 국상을 당하면 왕실에서는 국왕은 흰 용포를 입었고, 여성들도 흰 원삼에 흰 족두리까지 흰 색으로 썼다. 백성들도 백립을 썼다. 나라가 상을 당했으니 왕부터 일개 백성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가 상복을 입은 것이다.

굳이 오늘로 따지면 국가장이나 국가애도기간에 해당한다고 볼수 있겠다. 이때는 공무원과 군인, 공공기관 직원에 한해 짙은 색 옷차림이 권장되며, 가슴에 애도를 표시하는 검은 리본을 단다.

2. 고구려의 관직 國相[편집]


파일:고구려 삼족오.png
고구려의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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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중기
후기
1등
상가(相加)
폐지
2등
대로(對盧)
1등
대대로(大對盧)
1등
대대로(大對盧)
토졸(吐捽)
3등
패자(沛者)
4등
고추(대)가(古鄒(大)加)
2등
태대형(太大兄)
2등
태대형(太大兄)
막하라지(莫何羅支)
3등
대형(大兄)
7등
대형(大兄)
힐지(纈支)
4등
소형(小兄)
10등
소형(小兄)
실지(失支)
5등
주부(主簿)
5등
의후사(意候奢)
3등
울절(鬱折)
6등
우태(于台)
6등
오졸(烏拙)
7등
(승)사자((丞)使者)
7등
태대사자(太大使者)
4등
태대(부인)사자(太大(夫人)使者)
알사(謁奢)
8등
대사자(大使者)
6등
대사(大奢)
9등
소사자(小使者)
9등
상위사자(上位使者)
계달사자(契達使者)
을사(乙奢)
10등
욕사(褥奢)
8등
발위사자(拔位使者)
유사(儒奢)
8등
조의(皂衣)
11등
예속(翳屬)
5등
(중리)조의두대형((中裏)皂衣頭大兄)
11등
제형(諸兄)
이소(伊紹)
하소환(河紹還)
12등
과절(過節)
13등
불(과)절(不(過)節)
9등
선인(先人)
12등
선인(仙人)
14등
선인(先人)
실원(失元)
서인(庶人)

지방
욕살(褥薩)





2.1. 개요[편집]


국상()은 고구려 초기의 최고 관직이다. 이후 중후기의 대대로, 대막리지로 이어진다. 제가회의 때 고구려의 국정 전반을 운용하는 최고 실력자로서, 왕권이 약했던 고구려 초기에는 실무적인 의미로 고구려를 총괄하였다.


2.2. 역사[편집]



2.2.1. 국상 시기[편집]


고구려 귀족회의체인 제가회의의 수장이다. 신라에서 화백회의를 주재한 상대등과 비슷하다 볼 수 있겠으나, 예비 왕위계승자로 여겨지던 상대등과 달리 왕족과의 연관성은 없는 편이었다. 게다가 상대등은 시중과 엎치락뒤치락했던 반면, 국상은 그 명칭이 유지되는 동안 제가회의 수장에 공고히 있었다.

고구려 초기에는 좌•우보 제도가 있었으나, 신대왕 때의 명재상명림답부가 166년 최초의 국상으로 임명된다. 다만 이 때는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명림답부의 사망시기와 이후 국상으로 임명되는 을파소와의 시기가 꽤 있는 편이다. 거기다 명림답부의 비정상적인 수명을 생각해보면... 결국 고국천왕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기존 제가회의를 태왕이 주재하던 것에서 바꿔 제가회의 수장인 국상에게 그 역할을 넘겼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다. 즉 법흥왕이 화백회의의 주재권을 왕에서 상대등으로 넘긴 것과 대동소이하다고 보면 되겠다.

국상은 제가회의를 통해 태왕의 옹립·폐위 문제, 대외적인 군사 문제, 국가 전체에 관계되는 범죄 처리 문제, 국사를 맡을 인물의 선정 등 중요한 국사를 평의(評議)·의결(議決)하는 기능 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여러모로 왕권의 강화를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귀족들이 왕권을 여전히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봐도 되겠다.

특이하게도 《삼국사기》에는 을파소부터 창조리까지 역대 국상들의 재임 연도가 잘 나와있다. 그 국상들의 업적은 잘 나와있지 않더라도 왕의 재위 연도 못지 않게 국상들의 재임 연도가 기록되어 있는 것만 봐도 당시 고구려 국상의 위치가 상당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미천왕을 옹립한 창조리 이후에는 국상의 언급이 끊기게 된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미천왕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국상의 막강한 권한을 없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2.2. 대대로 시기[편집]


그러다가 6세기 중엽 왕권이 흔들리는 시기에 대대로라는 직책이 새로운 최고 관직으로 등장하게 된다. 특히 이 대대로는 귀족들이 3년에 한 번씩 선출에 연임도 가능했고, 제가회의 각 수장끼리 마음에 안들면 도성에서 서로 싸우는데 태왕은 궁궐의 대문을 틀어 잠그고 지켜보기만 했다는 기록이 나오게 된다.[2]


2.2.3. 막리지 시기[편집]


물론 평원왕 이후 대외 원정과 전쟁이 활발해지면서 다시금 왕권이 강화가 되지만..그후 막리지 연자유, 연태조의 시기를 거치면서 점차 연씨 가문이 막리지 직위를 세습한 걸로 추정된다. 다만 연개소문이 연태조가 사망한 후 막리지에 임용되려할 때 귀족들의 반발이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절대적인 위치는 아니었던 걸로 여겨진다.

갑툭튀로 등장한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귀족연립정권이 무너져버리고 연개소문의 독주 체제가 시작되었다. 영류왕을 죽인 뒤, 보장태왕을 옹립하면서 연개소문대막리지에 취임했고, 이전 국상을 훨씬 능가하는 고구려 최고의 권력과 병권을 얻게 되었다.


2.3. 역대 국상 명단[편집]


시기
이름
재임년도
비고
신대왕
명림답부
166년 ~ 179년

고국천왕
을파소
191년 ~ 203년

산상왕
고우루
203년 ~ 230년

동천왕
명림어수
230년 ~ 254년

중천왕
음우
254년 ~ 271년
상루의 아버지
서천왕
상루
271년 ~ 294년
음우의 아들
봉상왕
창조리
295년 ~ ?

미천왕
이후 기록 없음


2.4. 같이보기[편집]




3. [편집]


나라가 좇아야 할 떳떳하고 바른길.[출처] 나라()가 항상() 가야 하는 길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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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 B 표준국어대사전[1] 왕이나 왕족, 귀족 등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2] 안원왕 문서로. 다만 신빙성이 높다는 정도지, 《일본서기》 외의 기록이 없어 아직은 불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