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량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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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의 군량미.jpg
1. 개요
2. 어형
3. 중요성
4. 구성
4.1. 반찬
5. 군량미가 떨어졌을 때
6. 보급의 어려움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軍糧米

군대는 잘 먹어야 진격한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군량은 군인들의 식량으로 사용하는 곡물을 일컫는 단어이며, 동아시아에서는 주식이 이었던 환경에 걸맞게 쌀 미가 붙어 군대에서 식량으로 이용되는 쌀을 의미하게 되었다.


2. 어형[편집]


군량미란 말 그대로 군대에서 쓰는 쌀이라는 뜻이니 군대 밖에서는 쓸 일이 없다. 요즘에도 군대 1종 창고에 있는 쌀 포대들에는 '군량미'라고 인쇄되어 있다.

군대 밖에서도 텔레비전 사극이나 영화, 근대 이전을 배경으로 삼은 게임 등등 대중매체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라서 의외로 세간에서도 쌀이든 밀가루든, 라면이든 장기 저장이 가능한 양식이 들어오면 재미삼아 은근히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다. 특히 사극을 즐기거나, 삼국지 등의 동양 전쟁소설 독자층들은 군량미란 표현이 매우 친숙한 편이다.장군, 적군에게 군량을 빼앗겼습니다!


3. 중요성[편집]


고려 말 공민왕 시대 때 벌어진 요동 공략에서도 요동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철수한 여러 이유 중 하나도, 성은 점령했지만 군량미가 모조리 불타버렸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보급선도 없이 무작정 적에게서 뺏을 생각으로 일본군의 태평양 전쟁 당시 임팔 작전을 계획했던 무타구치 렌야마냥 '우리는 초식 동물이니 풀만 뜯어먹고 살 수 있으며 필요한 자원은 약탈로 충당하면 된다.'는 안이하게 전투에 임했다가 전황이 불리해져 가진 식량마저 바닥나면 교전은 고사하고, 아사자까지 발생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상기한 수나라의 사례처럼 적군이 청야전술을 계획했을 수도 있으며, 약탈로 필요한 군량을 충당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무엇보다도 점령지의 민심 획득이 싸움이 끝난 후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할 일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점령 지역의 안정을 위해 군대에서 교전으로 피해를 입은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아예 식량과 물자를 배급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특히 미군은 장기적인 점령지 안정이라는 전략적인 목적 하에 점령지에 구호물자를 나누어주는 등 대민지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군량미는 병사들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조조가 군량 담당을 벤 역사적 사례는 군량미가 떨어졌음을 알게 될 병사들이 느낄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패한 것도 마찬가지로 원소의 병사들이 당장 며칠 먹을 식량은 지니고 있었겠지만, 긴 교착상태를 견뎌낼 자신감(이겨도 굶는다)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조조는 허유가 투항했을 때 그의 면전에서 '군량이 아직 며칠 분은 남아 있다'며 연거푸 거짓말을 했다. 군벌들이 군량미 확보에 목을 맨 것도(연의 초반부를 보면 병량을 빌려주네, 빼앗네 하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군대의 유지와 사기 문제도 있었겠지만, 식량 확보를 함으로써 이를 이용하여 전란에 흩어진 유랑민을 군대로 흡수하고 세력을 불리려는 목적이 있었다. 초한지에서는 진승오광의 반란군을 토벌한 장한이 승전 후 진채에 밥을 지어두고 죄수 병사들에게 "먹고 싶은만큼 실컷 먹어라."라고 한 것만으로도 사기가 크게 올랐다는 장면도 나온다.

아무리 부족한 군대여도 대체로 군량미는 확보하고 있으며 기본적인 식사는 제공한다. 밥도 안 먹이고 전투를 시킬 순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국민소득 1,000달러 미만의 개발도상국에서는 그래도 밥은 제대로 주는 군대에 입대하려는 빈곤층의 사람들이 넘쳐난다. 군대에도 밥을 못 주는 조선인민군 같은 열악한 예도 있지만 이는 매우 흔치 않은 예이다. 심지어 로스 세타스 같은 막장 깡패 준군사 집단도 '우리는 끼니로 컵라면 따위를 제공하지 않는다'라는 구실로 조직원들을 모은다. 근대 일본군의 모병 유인책도 "군대 가면 쌀밥을 배불리 먹여준다"였고, 각기병 예방을 위해 잡곡밥과 빵을 급식하니 "흰 쌀밥 먹으려 군대에 온 거지, 이런 잡곡이나 빵 조각 따위를 먹으려 온 게 아니다." 라며 들고 일어나 다시 흰 쌀밥으로 원상복귀 됐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임오군란의 방아쇠가 된 사건도 (전투식량보다는 봉급으로서의 의미였지만) 군량 보급이었다. 잦은 전쟁으로 인하여 먹고 살기가 힘들었던 시절에 하층민들에게는 그저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현대전에서는 물론 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조달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탄약이나 각종 연료, 장비의 부품 등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 더 늘어나서 비중은 줄었다. 병사들이 군량이 없으면 굶주린 상태로 얼마간 버틸 수는 있지만 탄약이나 연료가 떨어져버리면 아예 전투력이 사라지기 때문에 특히나 그렇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량 보급을 아예 등한시해서는 안된다.


4. 구성[편집]


사극 등의 미디어 매체물에서 전투 식량은 쌀만 언급되는 경우가 많고, 군량미(米)라는 이름 때문인지 사람들로 하여금 밥만 먹고 전투하는 거냐는 의문을 갖곤 한다.

벼농사가 지금만큼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의 시대상을 감안하면 백미보다는 잡곡이 많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군사들에게 지급하는 군량은 백미에다가 보리, 기장, 조, 콩 등을 섞어서 주는 것이 보통으로, 주로 보리를 많이 섞었다. 중국은 남북조 시대 이전만 하더라도 쌀보다는 좁쌀을 더 많이 먹는 편이었다.

콩과 보리를 섞는 것은 귀중한 쌀을 아끼는 방편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병사들에게 부족해지기 쉬운 영양을 보충해 주는 효과도 볼 수 있었다.

벼농사가 일찍부터 발달한 한국의 군대에서는 예로부터 찐밥을 군량미로 사용하였다. 찐쌀을 말린 것은 호화되어 있으므로 생쌀보다 섭취하기 좋다.

몽골이나 흉노 등의 유목 제국들은 보르츠처럼 가축을 도축해 말린 고기와 유제품을 전투식량으로 유용히 사용했고 이 때문에 진격 속도가 더 빨랐다고 한다. 흔히 몽골군의 전식을 보르츠만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이 만든 유제품도 훌륭한 식량이 되었다. 더욱이 유제품은 행군 중에도 생산이 가능하다.

춘추전국시대에서는 쌀이 아닌 좁쌀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먹는 곡물이었고, 진의 시황제도 조밭을 대규모로 개간하여 군량을 마련하기도 했다. 쌀이 본격적으로 군량의 주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남북조 시대 이후 강남 일대가 개발되면서부터이다. 이 무렵부터는 쌀은 아예 중요한 주식이 되어 일반 서민들까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동아시아 지역은 유럽권과는 달리 식량이 이기 때문에 특성상 야전 조리 시 주식 메뉴인 은 일반적으로 먹던 밥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장점이 있어 정도만 곁들여도 병사들 입장에서 나름 야전에서 먹을 만한 식사가 완성되었다. 반면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을 주식으로 삼던 유럽권은 다른 곳에서 이나 건빵으로 구워 실어오는 게 아니라면 야전 조리 시 보급받은 밀가루[1] 을 끓이던가 제대로 발효도 안 된 채 대충 물에 갠 반죽을 판자에 붙이건 무기에 감아서든 안 타게 감싸서 잿불에 묻든 어떻게든 구워먹어야 했고, 이로 인해 병사들의 불편이 막심하였다. 익혀서 먹을 수 있게 됐다 정도지 불에 구운 수제비 반죽 같은 물건이라 맛이 정말 형편없었다. 그래서 유럽 군대는 야전에서 제대로 빵을 굽는 방법에 대해 매우 많은 고민을 하였고, 이동식 오븐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주식의 차이로 인해 서양에 비해 동양은 휴대용 식량의 개발이 더뎠다.

미국은 천조국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군량미 보급에도 큰 힘을 기울인다.[2] 미국 특유의 보급 능력은 간식(부식)을 배급하는 사례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달달한 간식은 사기를 진작하고 급격히 소모되는 열량을 보충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데, 타국은 간식을 더 주고 싶어도 보급 역량이 모자라 주식만 간신히 제공하던 상황이었지만 미국은 가능하면 간식을 충실하게 챙겨주었다. 엠앤엠즈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역에 해군용 간식으로 처음 데뷔했고, 수병과 제독이 함께 줄서서 아이스크림을 받아 먹었으며, C-레이션에도 싸제와 다름없는 초콜릿 쿠키[3]와 사탕류를 꼬박꼬박 넣어주었다. 오죽하면 에르빈 롬멜이 습격한 미군 기지에서 본국으로부터 배달된 초콜릿 생일 케이크를 발견하고 보급 역량에 질려했다는 야사까지 있을 정도이다. 베를린 봉쇄 시기에는 따로 수송기 소티를 배정하여 민간인에게 사탕과 기호식품을 투하하여 소련이 제발로 물러나도록 만들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간식도 미국이 책임졌기에 참전 한국군은 C-레이션 간식을 당연히 접할 수 있었고, 주식은 밍밍했을지언정 아이스크림, 빵이나 과자는 당시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걸 넘치게 보급받아 실컷 먹을 정도였다. 맛이 없는 것으로 악명높은 MRE도 간식을 주된 열량 공급처로 간주해서[4] 싸제와 동급으로 맛있게 챙겨준다.


4.1. 반찬[편집]


시대나 배경에 따라 달랐겠지만, 잡곡밥과 함께 먹는 찬거리는 별로 없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이것은 다른 문화권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의 군대도 군량의 메뉴가 아주 조촐했고, 특히 따뜻하고 수분이 많은 음식은 없다시피 했다. 물론, 쌀밥만 먹기에는 맛이 없고, 하루종일 전장에서 고생하며 땀을 비오듯 흘렸을 장병들에게는 짭짤하고 맛깔난 반찬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다만 부식에 대해서 역사 자료에서는 언급한 바가 적다. 이는 굳이 기록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종이가 아닌 비단이나 죽간 혹은 쪼갠 나무에 기록을 했던 고대에는 이러한 물건들이 지녔던 부피 때문에 책의 권수가 수레로 옮겨야 할 만큼 많았다. 때문에, 고대의 문집들은 핵심내용만 간략히 추려적었으며, 그러한 습관이 종이가 발명된 후에도 이어졌고 인류가 이러한 습관에서 벗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손자병법만 해도 내용이 상당히 짧고 간략하다. 때문에 반찬이나 기타 부식 이야기 따위는 굳이 적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에 제갈량이 지휘한 촉한군은 순무[5]를 반찬으로 먹었다고 기록한 서신이 남아있고[6] 원술의 군대가 강에서 채집한 물풀과 다슬기를 끓여 먹었다는 기록과[7] 전란시대타쿠앙 소호단무지를 만들어서 군에 보급했다던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밥에 넣어먹는 건조 해물 가루인 후리카케를 정식으로 전투식량으로 보급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국가와 문화권의 경계를 떠나 장병들이 먹은 주된 반찬이자 부식은 소금이다. 밥에다 넣어 간을 맞추거나, 약간의 채소나 기름, 장 등을 넣고 소금으로 맛을 낸 염장국으로 끓여 먹었을 것이다.[8] 소금 이외에 일반적으로 기록에 필히 남는 동아시아권의 주요부식은 이었으며 콩을 이용해 만드는 간장이나 된장 같은 장류조미료도 중요하게 취급하는 부식으로, 전쟁대비 혹은 전쟁중에 장을 직접 담그거나 베나 덩굴 등에 절여 소지했다가 식사 때 물에 풀어 사용하기도 했다. 특별식으로 가축이나 멧돼지 등을 잡아 과 함께 장병들에게 공급했지만 이런 특혜는 중요한 전투에 앞서 장병들의 체력을 증진시키고 사기를 고무시키려는 목적을 지녔거나, 혹은 진중에 적장이 투항하거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는 등의 호재가 있었을 경우에 해당되었다. 물론, 잦은 극한 체력 소모와 부상에 시달려야하는 군대 입장에서 장병들의 전투력 유지를 위해 가능하면 육류를 많이 확보하는 것을 신경 썼다.[9]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벌이던 독립군들은 옥수수 가루를 대충 반죽하여 솥에다 구워낸 옥수수떡을 주로 먹었고[10], 6.25 전쟁 당시에도 전장에서 소금으로 간을 한 주먹밥을 배급받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정규군이 아닌 의병이 전투시에 고두밥, 말린 어패류[11], 시래기 등을 가지고 다녔다는 일본측 기록도 있는 것을 미루어 전시 중에 현지에서 그때 그때 필요한 식자재를 보급했던 것 같다.

식자재를 관리하고 조리할 수 있는 진중에서는 그나마 제대로 밥과 반찬을 해먹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군대에서 육류 보급을 위해 가축을 도축하거나 사냥 등을 했고, 이것을 따로 관리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해안가 쪽으로 가면 청어, 명태, 조기 등등 다양한 생선과 김, 미역, 톳 같은 해조류도 비교적 잘 해 먹었다. 장병들 입장에서도 먹는 것은 사기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제대로 기풍이 잡힌 군대라면 가능하면 군사들을 잘 먹이는 것은 당연하다. 한나라 때 비장이라 불리던 명장 이광도 사냥한 짐승을 모든 병사들이 골고루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정유재란 발발 당시 보급상황이 극도로 나빠진 상황에서도 무짠지에 보리밥, 쇠기름 뜬 무국을 저녁식사로 냈으며, 인근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여 된장을 푼 생선탕을 군사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특히나 쌀을 주식으로 하는 문화권에서 장이 식문화에 차지하는 비중은 크고 중요하기 때문에 진중에서 장을 담그는 일이 많았다.[12]


5. 군량미가 떨어졌을 때[편집]


진중에 완전히 군량미가 떨어졌을 경우에 더 멋진 식사가 장병들에게 제공되었는데, 이는 성내의 가축들이나 군마를 잡아서 먹는 것이였다. 당시 전투에서 군용 말이 오늘날의 탱크와 같은 역할을 했고, 상당히 비싼 물건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군용 말을 잡아 군량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장병들이 정말 굶주림에 허덕여 어쩔 수 없을 때 감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기를 다룬 문학작품을 보면, "말까지 잡아 먹었다", "네놈들이 말고기를 먹게 해주마"하는 구절이 나오는 데 이것을 뜻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말고기 요리가 생긴 연원이 보불전쟁 당시 파리가 고립됐을 때 말까지 잡아 먹으며 버틴 데서 나왔다는 야사도 있다. 덧붙여 보불전쟁 막바지에는 워낙 식량 사정이 안 좋아서 말고기를 먹으면 오히려 다행이고, 대다수의 서민들은 쥐고기까지 먹으며 연명했을 정도이다.

군량이 다 떨어져서 군마나 가축을 잡아먹는 등 제 살 깎아먹기까지 했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보통은 사기가 떨어져서 항복하거나, 죽지 않기 위해 상관을 하극상하거나, 다들 탈영하거나 그냥 쓰러지고 굶어죽거나, 배가 고파 싸울 힘도 집중력도 없어져서 전투가 벌어져도 쉽게 진다. 다만 역사적으로 가끔씩 결사항전하는 경우에는 평소라면 입에 못 댈 것들까지 먹어가며 치열하게 저항했던 전투가 회자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오줌과 시신을 먹으면서 저항한 가잠성 전투, 말의 피와 오줌을 먹으며 버텼던 울산성 전투가 그 예다. 당연히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며 살아남은 당사자는 심각한 트라우마가 생기기도 한다. 울산성 전투에서는 살아남은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에 돌아가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 바닥에 까는 다다미도 식용 가능한 토란 줄기로 만들 정도로 비상식량 확보에 집착하게 되기도 했다.


6. 보급의 어려움[편집]


무기와 더불어 단연 1순위에 드는 보급품으로 무게가 많이 나가고 부피가 꽤 컸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운송에 어려움이 많이 뒤따랐던 품목이었다. 과거에는 군마에게 공급할 마초(馬草)와 함께 엮여 근대까지의 군대가 전투병보다 더 많은 보급병을 운용해야 했던 원인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어 수양제고구려 원정을 살펴보면, 전투 병력은 113만이었지만, 각종 무기와 군량을 포함한 군수품을 운송하는 병력은 두 배에 달했다고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적의 군량미를 발견했다면 불태우는 것 보다는 빼앗는 편이 훨씬 좋다. 손자병법에서도 보급을 충실히 하며 부족한 것을 적에게서 취하라고 하는데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탈취하려 했던 것도 보급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보여준다. 앞서 예시로 든 수양제의 군대의 경우에는 고구려의 청야전술에 대비하여 내호아가 이끄는 보급선단을 패강으로 미리 보내 본대가 먹을 양식을 준비했다가, 고건무가 이끄는 별동대의 습격으로 모조리 잃어버려 패전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결과가 되었다. 삼국시대 하북을 제패한 군벌 원소가 조조에게 패전한 결정적인 이유도 군량고인 오소를 습격받아 군 전체에 혼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상대 측에서는 군량미의 약탈을 방지하고자 청야전술을 이용하기도 한다.


7. 여담[편집]


군량미는 곡식이었으므로 보관기간이 긴데다가 화폐 대신 교환물품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므로, 고대·중세 시대에는 쓰임새가 다양한 귀한 물품이었다. 그래서 군량미를 횡령하는 관리도 빈번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군량미는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만큼 코에이의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군량미는 잘 관리해야 한다. 버전마다 효과가 다르지만, 군량이 떨어지거나 약탈당하면 바로 패배 판정나거나, 사기가 떨어져 병사가 탈영해 결국 패배한다.

과거에는 정말 군량미 말고는 먹을 게 없었지만 현대에는 전투식량이라는 것이 새로 생겨났다. 단, 전투식량은 전시상황에서, 그것도 주로 전장에서 먹는 것이고 군대에서도 평소에는 군량미로 지어진 병영식을 먹는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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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은 현장에서 방앗간을 활용해 빻기도 했다. 따라서 방앗간이 전술 목표가 되기도 했다. 유발 하라리의 "대담한 작전"에서는 프랑스 측의 소규모 특수부대가 침투해 신성 로마 제국 진영의 방앗간을 파괴한 일화가 소개된다.[2] 이는 경제적 여유도 여유지만 미국이 세계적인 곡물 생산국인 덕도 있다.[3] 초기 버전은 1980년대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크라운산도와 동급의 초콜렛 쿠키를 넣어줬고, 1950년대 초에는 아예 초코칩 쿠키로 업그레이드했다. 한국의 민간 간식과 비교했을 때 40년을 앞선 것이다.[4] 주식 메뉴는 단백질 공급이 주된 목적이기에 칼로리의 양이 생각보다 많지 않으며, 각 간식 메뉴는 주식 메뉴 하나 분량의 열량을 공급하도록 포장된다. 종종 싸제 엠앤엠즈스키틀즈 봉지가 그대로 들어가기도 한다. 장진호 전투에서의 투시 롤 보급은 이후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5] 지금도 중국 사천지방에서는 무를 가리켜 제갈채라고 부르고 있는데, 제갈공명이 전장에 나아갔을 때 본영에서 무를 많이 심어서 그런 것 같다. 실제로 공명은 병사들에게 무씨를 가지고 다니라고 명할 정도로 무를 중요한 부식이자 대체 군량으로 여겼다고 한다. 더욱이 무는 볶거나, 끓이거나, 말리거나, 소금에 절이거나 그것마저도 안되는 환경이면 생으로라도 먹을 수 있는 등 요리법이 다양한 것도 장점. 순무는 그 이미지와는 다르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름난 전쟁식량이다. 1, 2차대전기 독일군도 순무를 애용했다.[6] 단무지처럼 염장한 순무로 추측된다. 촉한은 정염을 국가적인 산업으로 삼고 있었을 뿐더러, 김치처럼 순무도 소금으로 절이면 보존성이 월등히 높아진다.[7] 국가의 정규군이자 조위가 정촉호군이라는 기병대를 따로 운용해 상대할 정도로 정예병이었던 촉한의 군대나, 원소에 이은 거대 군벌이었던 원술군의 전투 중의 식생활이 이런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다른 군벌은 좋지 않았으면 더 좋지 않았지 더 나았던 식생활을 영위했을 리는 없다. 실제로 삼국시대보다 1300년이나 뒤인 일본 전국시대의 병량이 쪄서 말린 현미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순무나 다슬기를 반찬으로 삼는 것은 어느 정도 경제력이 받쳐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8] 실제로 염장국은 식량이 부족한 과거에는 흔하게 먹는 음식이었다.[9] 고대부터 고기는 기력 저하와 상처의 회복을 돕는 보약으로 여겼다. 지금도 환자들이 어느 정도 호전에 들어가면 고기 등의 육류를 섭취하게 하여 회복을 빠르게 하도록 돕는다.[10] 만주지역은 지금도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지으며, 옥수수에 부족한 양질의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명태와 콩을 중요한 부식으로 사용했다.[11] 주로 명태나 바지락 말린 것 따위.[12] 이 때 생긴 것이 속성으로 만든 장인 전국장, 즉 청국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