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 굴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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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 굴리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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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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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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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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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마트
41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

루드 굴리트
(1988~1994)


로날드 쿠만
(1994)


루드 굴리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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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World Soccer.png

1987 · 1989
파일:발롱도르 트로피.png




베스트팀
파일:UEFA 유로 1988 로고.svg

파일:World Soccer.png

파일:UEFA 유로 1992 로고.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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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000000; font-size: 0.9em"
1995-96 PFA 올해의 팀

1988 Ballond'or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루드 굴리트
3위
프랑크 레이카르트
1988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디에고 마라도나
1989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장피에르 파팽
파일:World Soccer.png
Player of the Year 1988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루드 굴리트
3위
프랑크 레이카르트
Player of the Year 1993
수상
로베르토 바조
2위
데니스 베르캄프
3위
루드 굴리트



루드 굴리트의 기타 정보






네덜란드의 축구인


파일:굴리트_2020.png

이름
루드 굴리트[1]
Ruud Gullit
본명
뤼디 딜[2]
Rudi Dil
출생
1962년 9월 1일 (61세)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암스테르담
국적
[[네덜란드|

네덜란드
display: none; display: 네덜란드"
행정구
]]
| [[수리남|

수리남
display: none; display: 수리남"
행정구
]]

신체
191cm / 체중 99kg[3]
직업
축구 선수 (공격형 미드필더[4]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ASV 메이르보이스 (1967~1975 / 유스)
AFC DWS (1975~1978 / 유스)
HFC 하를럼 II (1978~1979)
HFC 하를럼 (1979~1982)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82~1985)
PSV 에인트호번 (1985~1987)
AC 밀란 (1987~1994)
UC 삼프도리아 (1993~1994 / 임대)
UC 삼프도리아 (1994~1995)
첼시 FC (1995~1998)
감독
첼시 FC (1996~1998 / 선수 겸 감독)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8~1999)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2004~2005)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2007~2008)
FC 테렉 그로즈니 (2011)
네덜란드 대표팀 (2017~2018 / 수석 코치)
국가대표
66경기 17골 (네덜란드 / 1981~1994)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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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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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발
오른발 (양발)
역대 등번호
HFC 하를럼 - 13번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 7번
PSV 에인트호번 - 10번
AC 밀란 - 10번[1]
UC 삼프도리아 - 4번
첼시 FC - 4번
네덜란드 대표팀 - 10번
가족
아버지 조지 굴리트
어머니 리아 딜
아들 막심 굴리트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5.2. 감독
5.2.1. 대회 기록
6. 여담
7. 축구 게임에서의 굴리트
7.3. 고평가의 원인
8.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네덜란드축구인.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다.[5]

현역 시절 네덜란드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소속팀들 중 하나인 AC 밀란에서 밀란 제너레이션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마르코 반 바스텐,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오렌지 삼총사를 구성해 유럽축구에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소속된 클럽마다 우승을 한다는 이유로 '우승 청부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6]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편집]


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교사였던 수리남인 아버지 조지 굴리트(George Gullit)와 암스테르담에 있는 한 박물관의 관리인이었던 네덜란드인 어머니 리아 딜(Ria Dil) 사이에서 태어난 굴리트는 에레디비시 1979-80 시즌, HFC 하를럼에서 16세의 나이로 데뷔하며 에레디비시 역대 최연소 데뷔 기록을 세웠다. 팀은 굴리트가 데뷔한 시즌에 꼴찌를 차지해 2부 리그로 강등되었으나, 굴리트의 활약으로 1980-81 시즌 2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1시즌 만에 에레디비시로 승격했다. 굴리트는 1981-82 시즌에 하를럼을 리그 4위로 올리며 UEFA 컵 티켓을 따내는데 기여했는데, 1982-83 시즌 UEFA컵은 HFC 하를럼 역사상 유일한 유럽 클럽 대항전이 되었다. 이때 보여준 활약으로 굴리트는 '네덜란드던컨 에드워즈'라는 별명을 얻었다.

세 시즌 동안 91경기 31골을 넣은 굴리트는 페예노르트 로테르담로 이적하여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뛰면서 1982-83 시즌에 리그 우승과 KNVB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인종차별 발언을 듣기도 해서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해 리그 2연패를 이끌고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상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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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AC 밀란으로 이적하여 1987-88 시즌 디에고 마라도나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1987년 발롱도르를 수상한다. 특히 마르코 반 바스텐과 투톱을 이뤄 맹활약하며 세리에 A 우승을 이끌었다. 1988-89 시즌에는 오렌지 삼총사를 결성하여 아리고 사키압박 축구를 토대로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반 바스텐과 굴리트가 2골씩 득점하며,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상대로 4:0 대승을 거두었다.

1989-90 시즌에도 SL 벤피카를 격파하고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했지만, 굴리트는 88년부터 발생한 무릎 부상이 반월판 부상으로 커지며 시즌을 거의 벤치에서 보내야 했다. 마라도나의 라이벌이었고 87-88 시즌엔 그에게서 리그 우승컵을 가져오기도 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라이벌리를 이어가지 못했고 월드컵에서도 부진했던 탓에 마라도나의 라이벌 자리는 그와 2차례 월드컵에서 맞대결해 1승 1패를 기록하고 자서전에서 직접 인정했던 로타어 마테우스에게 넘어가게 된다.

다음시즌인 1990-91 시즌부터 적용된 새로운 오프사이드 규정으로 인해 사키이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수비전술에 변수가 발생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또 유러피언컵 4강에서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를 만나 밀란이 패배했다. 여기서 밀란은 조명이 망가져 재경기를 해야한다고 억지를 부리며 그냥 경기장을 떠나버렸고 이에 UEFA는 1년간 유러피언컵 출전 금지를 내린다. 사키는 이를 마지막으로 밀란을 떠났지만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부임해 그의 밀란을 잘 계승해내며 다시 전성기를 이끌어낸다. 카펠로 감독 체제에서 1991-92 시즌에 리그 무패 우승과 그 다음 시즌도 우승을 경험하며 리그 2연패. 또 1992-93 시즌에는 유러피언컵에서 준우승하는 등 발군의 활약을 펼친 후 1993년에 밀란을 떠나 UC 삼프도리아에서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불태웠는데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의 밑에서 만치니와 주로 투톱으로 나서며 리그 15골 12어시스트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내고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했다. 피파 온라인 4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길 이 삼프도리아 시절이 자신이 가장 잘했던 시절이라고 한다.[7]

이후 잠시 밀란에 복귀했으나 큰 활약은 하지 못했고, 어린 시절 우상이였던 글렌 호들이 이끌던 첼시로 이적하면서 영국으로 향했다. 이탈리아 무대에서 주로 공격수로 뛰었던 것과 달리 첼시에선 리베로와 홀딩 미드필더로 출전했는데 공격수로 나서는 것보다 미드필더로 뛰는 것이 더 뛰기 편했다고 한다. 첼시는 리그 11위를 기록했지만 굴리트는 혼자 팀을 이끌며 PFA 올해의 팀에 올랐다. 이후 선수 겸 감독을 맡아 FA컵 우승을 차지한 후 감독에 집중하기 위해 은퇴했다.


2.2. 국가대표[편집]


굴리트의 국대 경력을 설명하자면 먼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어떤 위기를 겪고 있었는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분명히 네덜란드는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지도 아래 천재 요한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들이 들고 나온 토탈 풋볼은 축구의 혁명이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나름 영광을 이어 갔지만, 리누스 미헬스가 떠나는 등 영광의 멤버들이 노쇠하고 흩어지면서 침체가 시작된다. 이후 네덜란드는 오렌지 삼총사 등장 이전까지 1970년대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한다.

결국 리누스 미헬스가 다시 대표팀 감독으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세대로 팀을 짜게된다. 당시 밀란 제너레이션으로 유럽을 제패하고 있던 AC 밀란오렌지 삼총사 마르코 반 바스텐, 프랑크 레이카르트, 루드 굴리트, 그리고 삼총사 더해서 달타냥이라는 로날드 쿠만까지. 그리고 이 선수들을 조화롭게 묶어줄 수 있는 선수가 최상의 피지컬과 최고의 전술 이해도를 겸비한 굴리트였다.[8] 굴리트는 가장 전술 이해도가 좋은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역사상 이보다 범용성이 좋은 축구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골키퍼와 센터백을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A급 이상으로 뛰는 선수였다. 말 그대로 네덜란드 대표팀의 핵심은 굴리트로 시작해서 굴리트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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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네덜란드의 유로 1988 우승은 바로 1974년 크루이프의 역할을 그대로 이식받은 굴리트의 역할이 가장 컸다. 정확히 네덜란드가 예전의 포스를 되찾은 시작점이 유로 1988이었고, 그 뒤를 이은 대회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었다. 물론 굴리트의 플레이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이때 네덜란드가 16강에서 마주친 상대는 그 대회 우승팀,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가 이끄는 서독이었다.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16강전에서 레이카르트와 루디 푈러가 충돌했고 이 와중에 레이카르트가 루디 푈러에 침을 뱉는 사건이 발생한다.[9] 결국 푈러와 레이카르트 모두 퇴장당했으나, 푈러가 없는 독일과 레이카르트가 없는 네덜란드의 무게감 자체가 달랐다. 적어도 푈러보다 레이카르트가 훨씬 뛰어난 선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석연치 않게 16강에서 월드컵을 접어야 했었다.

스웨덴에서 열린 유로 1992 8강 조별리그에서 네덜란드는 독일을 3:1로 뭉개버리면서 그대로 복수한다. 바로 레이카르트 본인이 득점을 하면서,[10] 또한 굴리트는 이 대회에서 종횡무진 중원을 탈탈 털어버리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4강전 상대는 브리안 라우드루프페테르 슈마이켈이 버티던 덴마크였다. 네덜란드는 승부차기 끝에 패하고 보따리를 싸야 했었다.[11]

하지만 1994년 미국 월드컵에는 불참하였고 이 대회는 네덜란드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 시절이 네덜란드의 드림팀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1994년의 네덜란드는 더더욱 역대급의 전력으로 구축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미헬스 이후 취임한 딕 아드보카트 감독 체제에서 굴리트와 아드보카트의 불화, 반 바스텐의 부상이 겹쳐 온전한 전력으로 월드컵에 출전할 수 없었다. 결국 8강에서 맞이한 브라질에 고배를 마시면서, 탈락했고 굴리트는 1994년에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12][13][14]


3. 플레이 스타일[편집]


부모님에게 물려받은[15] 191cm의 키와 88kg의 몸무게라는 압도적인 피지컬을 바탕으로 다른 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 확실히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상대 센터백들의 머리가 골반 위치에 올 정도로 폭발적인 점프력과 강력한 목 근육을 사용한 뛰어난 헤더 능력, 100m를 10초대에 주파하는 스피드, 강력한 발목힘을 활용한 위협적인 슈팅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신체적 능력 외에 전술 이해도 및 축구 기술들을 수행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 좋은 패스를 줄 수 있는 경로를 읽는 능력, 공을 잘 받을 수 있는 위치를 발견하는 위치 선정 능력, 상대가 이동할 위치를 알고 그곳으로 이동해 상대의 공격을 차단하는 수비 능력 등 정신적 능력 또한 우수했고, 이러한 능력들을 바탕으로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수준급 활약을 펼칠 수 있었다.[16]

이러한 유틸리티 능력 덕분에 굴리트는 소속팀, 국가대표팀에서 높은 중요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대표팀 경기에서 마르코 반 바스텐이 부상 등으로 결장하게 되면 굴리트가 그 자리를 대신할 정도였다고 한다.[17] 또한 굴리트는 단순히 공격수 포지션에 그치지 않고 윙어에서도 특출한 모습을 보였고 공격형 미드필더보다 한 칸 아래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했을 때는 상상 이상의 중원 장악력을 보여주었다.[18] 그 중에서도 가장 잘 뛰었다고 평가를 받은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는데, 굴리트는 상기한 전술 이해도와 축구선수에 최적화된 피지컬, 화려한 발재간을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보여주면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강력한 라이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굴리트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축구능력을 갖춘 선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축구감독이 된다면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명제는 굴리트조차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던지 굴리트는 단 한 번의 성공 이후 지도자 경력에서 실패를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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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에서 몸담고 있던 1995-96 시즌, 글렌 호들 감독이 잉글랜드 국대 감독으로 부임하자 당시 첼시의 선수였던 굴리트는 선수생활을 유지함과 동시에 첼시의 지휘봉을 잡았다. 1996-97 시즌 그는 입단 당시 리그 11위였던 첼시 FC에서 27년 만의 FA컵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1997-98 시즌 도중 1998년 2월 12일 리그 2위와 위너스컵-리그컵 8강에 올라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질되었다. 경질 사유는 너무 많은 자금을 사용해 팀을 재정난에 빠뜨렸다는 것이었지만 구단주 켄 베이츠와의 불화로 경질되었다는 것이 유력하다.[19] 여담으로 제이미 캐러거가 1997년 10월 5일에 자신의 커리어 첫 첼시전을 가졌는데 이때 첼시 선수 한 명이 퇴장당하자 감독 겸 선수였던 굴리트가 워밍업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자켓만 벗고 경기에 들어와서 뛰었다. 캐러거는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를 보고 있었는데 굴리트가 정말 굉장했다고 회고했다.[20]

경질되긴 했지만 성적이 나빠서 경질된 것도 아니고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10위권 밖을 전전하던 첼시가 강팀으로 오르는 포석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본인의 세리에 시절 인맥으로 지안프랑코 졸라, 로베르토 디 마테오, 잔루카 비알리같은 오늘날 첼시의 레전드로 꼽히는 이탈리아 선수들을 데려왔고 본인의 자리 역시 첼시 역대급 수비수로 손꼽히는 프랑크 르뵈프로 대체하는데 성공했으며 후임 감독 비알리는 굴리트의 스쿼드를 그대로 물려받아 그동안 순항 중이던 위너스컵과 리그컵에서 대회 우승이라는 성적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첼시 FC 시절이 굴리트에게 유일하게 성공적인 감독 커리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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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8-99 시즌을 앞두고 케니 달글리시 감독을 경질하고 새 사령탑을 물색 중이었던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지만 부진한 성적에 선수단 장악에도 실패하며 급격히 입지를 잃어버렸다. 특히 오랫동안 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한 팀의 주장 롭 리의 등번호 7번을 빼앗고 그를 유스 팀으로 강등시켜 팬들의 많은 원성을 샀다. 첫 시즌 리그 13위를 기록한 굴리트는 급기야 1999-00 시즌 5라운드 승격팀이었던 선덜랜드와의 위어타인 더비에서 팀의 주포 앨런 시어러를 벤치에 앉히고 기용하지 않는 무리수를 두었고, 팀은 2-1로 패배했다. 사흘 후 굴리트는 경질되고 말았다. 이후 바비 롭슨 감독이 위기에 빠진 뉴캐슬의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첫 경기에서 셰필드 웬즈데이를 8-0으로 짓밟는 결과를 얻고 시어러는 이 경기에서 5골을 폭발시켜 굴리트를 머쓱하게 했다. 시어러가 그의 다큐멘터리에 말하길 그때 굴리트가 팀 기강을 잡기 위해 본인을 이용했고, 그때 자신이 싸움에서 밀렸다면 다른 팀으로 이적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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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의 감독이 되었지만 리그 4위에 컵대회에서도 무관이라는 성적을 얻어 1시즌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22] 여담으로 이 당시 송종국을 기용하지 않아 피파 온라인 3을 통해 유명해지기 전까지 대한민국 축구팬들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송종국이 예스맨이어서 기용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송종국이 굴리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조건 '네'라는 말만 했기 때문에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않아 사이가 갈라진 것이었다.[23] 송종국 본인도 굴리트의 축구는 자기와 잘 맞지 않았다고 했는데, 굴리트 입장에서 보면 송종국이 본인의 말에 '네, 네'라고 말하면서도 본인의 지시와 다른 플레이를 보여주니 네덜란드어를 이해 못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나 생각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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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메이저 리그 사커 감독들 중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조건으로 데이비드 베컴홍명보의 전 소속팀 로스앤젤레스 갤럭시의 감독직에 취임했으나 성적 부진 및 팀원들과의 갈등을 이유로 2008년 8월 11일 감독직에서 사임했다.[24]

굴리트는 본인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도자 경력에서 라이벌 디에고 마라도나와 유사한 길을 걸었고, 같은 오렌지 삼총사였던 마르코 반 바스텐프랑크 레이카르트와는 달리 씁쓸한 경력을 가지게 되었다.[25] 현재는 감독 활동을 접었으며 FIFA가 주최하는 공식 행사를 뛰며 사회를 자주 보고 있다.[26] 이 외에도 여러 나라들의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면서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고 있다.


5. 기록[편집]



5.1. 선수[편집]



5.1.1. 대회 기록[편집]










5.1.2. 개인 수상[편집]




5.2. 감독[편집]



5.2.1. 대회 기록[편집]




6. 여담[편집]


  • 현역 시절 흑인 민권운동가로 활약한 바 있다. 1987년 유럽 올해의 선수상을 받으며 "이 상을 넬슨 만델라에게 바치고 싶다"며 수상소감을 밝혔고, 부업으로 레게 밴드를 만들어 남아공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비난하는 노래를 부른 바 있다.관련 뉴스

  • 굴리트는 3번의 결혼과 이혼을 한 복잡한 가족 관계를 가지고 있고 총 6명(2남 4녀)의 자식들을 두고 있다. 그는 첫 번째 부인에게서 딸 2명, 둘째 부인에게서 아들 1명과 딸 1명, 셋째 부인 에스텔 크루이프(Estelle Cruijff)에게서 아들 1명과 딸 1명을 보았는데, 셋째 부인 에스텔 크루이프는 요한 크루이프의 조카이며 굴리트보다 16살 어리고 굴리트가 첼시 선수일 때 만나 그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녀는 격투기 선수 바다 하리와 불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2012년 결국 굴리트와 이혼했다. 에스텔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굴리트의 잦은 외도에 대한 불만으로 맞바람을 피웠으며, 굴리트가 자신을 떠나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식들 중에서 에스텔 크루이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막심 굴리트는 아버지처럼 축구선수의 길을 가고 있고, SC 캄뷔르에서 레프트백으로 뛰고 있다.

  • 2013년 FIFA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사회를 진행했는데 국내에서는 축구선수로서의 인지도가 동시대 라이벌들과 동료들에 비해 매우 떨어지는 편이고, 현역시절 외모와 상당히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브라질의 레전드 카푸가 연관검색어에 오르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담으로 루드 굴리트 문서 자체는 2013년 말 생성되었는데 초반에는 선수 경력보다는 축구 게임 내 성능에 관해 중점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 안정환이 현역 시절 가장 닮고 싶어했던 롤모델이었다.[27] 안정환 본인이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밝힌 바로는 밤새 굴리트의 비디오를 보면서 플레이를 계속 따라해보곤 했다고...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중계할때도 우연찮게 김정근 캐스터가 안정환 보고 좋아하는 선수는 누구냐고 묻자 바로 루드 굴리트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보통 옛날 선수라면 안정환이 언급을 한 번 하고 넘어가는 정도겠지만, 하술할 게임상의 사기성 때문에 젊은 층에서의 인지도도 높은지라 해설 도중 굴리트에 관해 언급이 나온 이후 뜬금없이 실검에 굴리트가 올라가기도 했다. 이후 뭉쳐야 찬다 2 2022년 6월 26일 방송분에서 루드 굴리트가 나오자 평소 엄격하고 까칠한 성격이었던 모습이 아닌 시종일관 우러러보는 눈빛과 존경심을 대놓고 보였다.

  • 장지현첼시의 팬이 된 원인을 제공한 선수이다. 장지현은 원래부터 굴리트의 팬이었는데, 굴리트가 첼시 FC로 이적하자 이것저것 첼시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다가 첼시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첼시 시절 굴리트는 커리어 말엽이었고 해당 클럽에 있던 기간이 비교적 짧았던 점은 장지현의 발언에서 감안해야 할 부분이다.

  • 오렌지 삼총사 중에서는 현재 그나마 대외활동을 가장 많이 하고, 별 사건사고 없이 제 2의 삶을 평온하게 누리는 중이다.[28]

파일:골닷컴 시대별 최고의 선수.png
파일:시대별 최고의 미드필더.jpg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1980년대 최고의 선수와 미드필더들 중 5위에 이름을 올렸다.

  • 2022년 6월 26일 JTBC 예능프로그램 뭉쳐야 찬다 2에 특별출연했고 어쩌다벤져스의 명예감독 자리에 올랐다. 자신의 롤모델과 만난 안정환은 시종일관 굴리트에게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7. 축구 게임에서의 굴리트[편집]


굴리트는 뛰어난 활약을 펼친 전설적인 선수이긴 하지만 게임 내에서의 위상이 현실의 활약상에 비해 지나치게 고평가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그는 축구 게임에서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 평균 능력치가 높진 않지만 게임에서 보여주는 활약상이 이 선수들보다 더욱 좋아 플레이어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어 전성기가 짧고 한국인이 직접 보기 힘들었던 80년대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현역 및 전설들을 뛰어넘는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2022년 현재는 FIFA 시리즈, 피파 온라인 4PES에서 등장하고 있다.

굴리트는 FIFA 시리즈에서는 1티어 선수로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PES에서는 1티어 선수로 취급받진 않는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PES보다는 FIFA 시리즈, 자세히는 피파 온라인이 더 유명해 '루드 굴리트=사기 선수'라는 공식이 성립하고 있다. 배성재의 언급에 의하면 굴리트는 이미 FIFA 시리즈를 즐기는 스트리머 및 게이머들이 각종 세미나 등에서 자신을 보기만 하면 수시로 본인의 사기성에 관해 언급해 자신이 축구 게임 내에서 사기적인 스탯을 갖고 있는 걸 알고 있으며, 이를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한다.


7.1. FIFA 시리즈[편집]


FIFA 14에서 처음 등장한[29] 굴리트는 넥슨이 서비스한 피파 온라인 3에서 사기적인 성능을 보여주며 본격적으로 국내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피파 온라인 3에서는 발매 후 +1강이 35억 EP를 기록하는 등 정신나간 밸런스 브레이커로 명성을 떨쳤는데, 조각 이벤트 등이 겹쳐 10억대 EP까지 떨어졌다가 입소문을 타며 계속해서 시세가 올라 +1강 가격이 160억 EP까지 상승했고, 한동안 피파 온라인 3 가격 최강자 5위 안에 꾸준히 들었다.[30] 굴리트는 다니 알베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야야 투레를 합친 듯한 미친 성능을 보여주었고 레벨 20을 찍으면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스텟이 100을 넘어가는 정신나간 스텟을 자랑해 농담반 진담반으로 동일한 선수로 포메이션을 만든다면 어떤 선수를 쓸 것인가 하는 떡밥에서 모두가 추천하는 선수일 정도로 모든 부분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0카를 갖다 써도 어지간한 선수 1카 이상의 효과를 보이는 미친 존재감을 보였다. 전술적인 요인이 그렇게 크지 않은 아마추어~프로페셔널 단계의 순위경기에서는 PC방 선수로 굴리트가 나오면 이거 하나로 매 경기에서 이기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얼티밋 레전드 카드가 출시된 이후에는 호나우두에 밀려 가격 2순위가 되었다.

피파 온라인 3의 후속작 피파 온라인 4에서는 NHD, TT, TC, HOT, LH, MC, EBS, CFA, CAP, BTB, FA, ICON, LN, RTN, ICON TM으로 총 16개의 클래스에서 등장하고 있다. 전작에서는 보급형 굴리트가 거의 끝물에서야 나왔고 그마저도 상당히 비싸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긴 했어도 사용유저들이 매우 적어 게임에서 많이 보이진 않았지만, 피파 온라인 4에서는 런칭 초기부터 은퇴한 선수들이 포함된 특수 컨셉을 가진 클래스들이 출시되면서 굴리트가 게임 출시 초반부터 유저들에게 공급되었고 능력치가 높은 굴리트들이 계속 게임에 추가되면서 거의 모든 유저가 사용하는 범용성 높은 선수들 중 1명이 되었다. 이 때문에 피파 온라인 4는 순위 경기를 비롯해 모든 경기들에서, 그리고 높은 랭크로 갈수록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호나우두 등 유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1티어 선수들 위주로 스쿼드가 고착화되는 현상 때문에 다른 유저들과 경기를 하게 되면 아주 높은 확률로 상대팀 스쿼드에 포함된 굴리트를 볼 수 있게 되어 '굴리트 온라인 4'라는 별명을 얻었다.

피파 온라인 4에서 굴리트는 양발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골고루 분배되어 있는 능력치들을 기반으로 모든 포지션에서 1인분 이상을 해줄 수 있어 동시대 라이벌이었던 로타어 마테우스, 그 시대 최고의 선수였던 디에고 마라도나는 물론 그 어떤 전설들보다 게임 안에서 더욱 높은 활용도를 보여준다. 보통 굴리트 정도의 피지컬을 가진 선수들은 게임 내에서 조작감이 굉장히 별로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굴리트는 하드웨어에 걸맞지 않은 괴랄한 스피드와 '마름'체형이지만 몸무게와 몸싸움 수치가 좋아 공격·수비 상황에서 다른 선수들에게 꿇리지 않는 경합 능력, 어떤 위치에서 중거리 슈팅과 감아차기로 상대 팀의 골문을 노리는 슈팅 능력까지 모두 겸비해 완벽한 퍼포먼스를 낼 수 있다. 이러한 성능 때문에 그 어떤 선수도 굴리트보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굴리트는 유저들에게 피파 온라인 4의 3대장 호굴비(호나우두, 루드 굴리트, 파트리크 비에라) 중의 한 명이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동시에 모두가 가장 증오하는 선수라는 아이러니한 취급을 받고 있다.[31] 그래서 현역시절 가지고 있었던 특유의 대걸레 머리스타일만 봐도 욕이 나온다는 유저들도 많다.

피파 온라인 4 출시 초반부터 필수 선수로 취급받던 굴리트는 MC 클래스 굴리트 출시 이후 신규 시즌이 한동안 출시되지 않았고 굴리트들 중에서 가장 능력치가 좋았던 MC 클래스 굴리트는 굴리트답지 않게 몸싸움 능력치가 낮아 이름값에 비하면 아쉽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스쿼드 안에서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었는데, 몸싸움 능력치가 월등히 높아진 EBS와 CAP 클래스가 출시되고 훈련코치 시스템을 통해 몸싸움 능력과 공격 능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되면서 스쿼드 안에서 다시 굴리트의 중요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사실 순수 능력치 상으로는 펠레, 마라도나보다는 적은 능력치를 받아 어느 정도 고증이 지켜져있긴 하다.[32] 하지만 피파 온라인 4의 엔진 특성상 키가 185cm 이하의 선수는 아무리 피지컬 관련 능력치가 좋아도 키가 185cm보다 큰 선수들보다 몸싸움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굴리트는 본의 아니게 게임에서 더욱 사기적인 선수가 되어 버렸다. 다르게 말하자면 능력치 및 현실 활약상이 아무리 뛰어났어도 키가 165cm인 마라도나는 찬밥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로 논해질 레벨에는 미치지 못했음에도 양발에 키가 190cm가 넘어가며 능력치까지 균형이 잡혀있는 굴리트는 모든 팀에서 필수적인 선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2022년 여름에는 넥슨에서 ICON 클래스 굴리트의 출시를 예고하면서 본인이 직접 출연한 광고를 만들었다.[33] 그 굴리트가 ICON으로 출시되는 만큼 최상급 능력치와 성능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되었고, ICON 굴리트는 모든 유저들이 예측한 것처럼 다른 클래스들의 굴리트보다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다. 다만 ICON 클래스로 출시된 선수들 중에서도 1티어 선수로 취급받아 상당히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보니 에이전트에서 잘 풀리지 않은 것도 있고 ICON 클래스 굴리트를 보유할 정도로 많은 BP를 가지고 있는 유저들 또한 많지 않아 임대팩에서 나온 경우를 제외하면 인게임에서 많이 보이지는 않는 편이다.

피파 4에 팀컬러 시스템이 추가된 이후로는 모든 팀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네덜란드 국대나 첼시, 밀란 등 굴리트가 들어간 팀이면 무조건 굴리트를 사용한다.

넥슨 피파 모바일에서도 오버롤 118을 자랑하는 굴리트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10 오버롤을 가진 굴리트가 많은 유저들에게 쓰이고 있다.[34]

FIFA 시리즈의 멀티플레이인 FIFA Ultimate Team에서도 선수의 전성기 시절 활약상을 토대로 만들어진 프라임 ICON 버전 굴리트는 최상급 티어로 분류되는 TOTY(Team of the Year)/TOTS(Team of the Season)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 더 높은 취급을 받고 있다.


7.2. PES[편집]


2000년대에는 오렌지 삼총사 모두가 유일하게 위닝 일레븐에서 레전드 팀의 일원으로 등장해서 플레이할 수 있었다. 이때는 위닝 일레븐의 클래식 팀이 으레 그렇듯 라이선스 문제 때문에 게임상에는 굴라스(Gulaas)라고 나와 있었다. 그래도 굴리트답게 포지션은 골키퍼를 제외한 전체 라인이 활동 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35] 이후 PES 2018에서 라이선스를 취득하면서 게임 안에 정식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위닝 일레븐에서 아르헨티나디에고 마라도나가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스쿼드를 구성하는데 있어 골치가 아파지지만, 네덜란드는 범용성에서 아르헨티나를 초월한다. 예를 들자면, 아래의 방법대로 스쿼드를 짜도 모든 포지션에서 98이라는 오버롤 능력치를 자랑하는 굴리트를 볼 수 있다.

1. 요한 크루이프의 상태가 안 좋다. → 굴리트를 윙어 포지션에 놓는다.
2. 마르코 반 바스텐의 상태가 안 좋다. → 굴리트를 중앙 공격수 포지션에 놓는다.
3. 에드가 다비즈의 상태가 안 좋다. → 굴리트를 중앙 미드필더 포지션에 놓는다.
4. 로날드 쿠만의 상태가 안 좋다. → 굴리트를 센터백 포지션에 놓는다.

피파 시리즈에선 최상급 선수로 자리잡았지만 PES에서는 더 이상 사기 캐릭터가 아니며 A-급 정도의 레전드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예를 들어 eFootball PES 2020에서 최상급 레전드로 꼽히는 선수는 요한 크루이프파트리크 비에라 둘 뿐이다. 아이코닉 업데이트 이후에는 아이코닉 모멘트 크루이프, 비에라,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데이비드 베컴, 프랑크 레이카르트, 페르난도 토레스 정도가 1티어 선수로 꼽힌다. 그 파울로 말디니조차 성능이 뛰어나긴 하지만 1티어까진 아니다.

모바일 PES 커뮤니티에서는 평가가 좀 미묘한데, 다름아닌 '클래식 No.10'이라는 AC 밀란 카드 굴리트의 플레이스타일 때문. 활동량은 꽤 많으나 침투나 지구력이 좋지 못한, 거의 2선에서 패스만 담당하는 감질나는 플레이스타일을 가지고 있어 역습 상황에서 뒤로 빠지며 템포를 잡아먹는 등 여러가지 역효과를 내기 일쑤다. 참고로 모바일 PES에서 클래식 No.10 플레이스타일을 보유한 SS나 공격형 미드필더 카드들은 평가가 좋지 않은 편이다. 사기 스탯을 보유한 디에고 마라도나호나우지뉴조차 이 플레이스타일 하나 때문에 컨트롤 고수가 아니라면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편이다. 그래도 저 둘과 달리 굴리트는 피지컬과 범용성만큼은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아이코닉 버전은 쓸만하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며 톱으로 활용할 경우 '클래식 No.10' 특성이 발동되지 않아 연계형 공격수로서 상당한 성능을 보여준다. 다만 결정력이 애매해서 철저하게 연계 위주로 사용되며, 피파 시리즈에서 가지고 있는 사기성은 파트리크 비에라카를하인츠 루메니게가 나눠서 가져갔다.[36]

PES에서 eFootball 로 넘어온 현재, AC 밀란 에픽카드 굴리트는 현재 클래식 No.10의 플레이스타일이 없어지는 센터 포워드 자리에서 요긴하게 쓰이고 있고, 준수한 퍼포먼스를 보인다. 그리고 23년 8월 클10 플레이스타일을 보완할 찬스메이커, 즉 공격형 미드필더로 사용하기 적합한 굴리트가 출시되어 유저들에게 엄청난 호평을 받고 있다.




7.3. 고평가의 원인[편집]


야신 모드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축구 게임에서는 선수의 리더쉽, 수비조율 능력, 전술이해도, 판단력, 투지 등 정신적인 가치들을 프로그래밍을 통해 구현하기 힘들다. 그리고 정교하고 섬세한 드리블, 뛰어난 시야와 정교하고 날카로운 패스, 예리하게 감아차는 슈팅, 깔끔한 태클 등 기술적인 부분도 완벽히 게임에 구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체형, 속력, 주발 등의 신체능력 등 직관적인 수치로 표현할 수 있는 항목들은 앞에서 말한 능력들보다 게임 내에서 구현하기 쉬워 축구 게임에서는 신체적 능력치들이 정신적 능력치보다 더욱 부각되고 있다.[37] 물론 굴리트는 기술적 측면이나 정신적 측면에서 딱히 약점이 있는 선수가 아니지만 뛰어난 피지컬, 빠른 스피드와 양발 활용 능력 등 축구 게임에서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능력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게임에서 더욱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피지컬도 스포츠의 일부인 만큼 무엇이 큰 문제인가 할 수 있지만, 축구 게임의 기술력 때문에 게임 속에서 굴리트가 높은 활약을 보이는 모습은 게임을 통해 축구에 입문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굴리트가 실축에서 역대 최고의 선수이기 때문에 게임 속에서도 활약이 이렇게나 좋은 것이군'이라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 심지어 게임상의 능력치를 가지고 굴리트가 세계 최고의 선수라고 주장하는 사례마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메시, 펠레, 마라도나, 푸스카스 등은 굴리트보다 피지컬적 측면에서는 약하지만, 축구전문가들에게는 굴리트 이상으로 평가받는 전설적인 선수들이다. 굴리트 역시 축구사를 장식한 전설적인 선수인 것은 맞지만, 단순히 게임상의 스탯만으로 굴리트를 역사상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느 정도 축구를 아는 사람들에겐 축알못 소리듣기 좋은 발언이다.

축구선수들이 가진 수많은 가치들 중에 피지컬만이 축구 게임에서 최우선시 되는 현상은 결국 게임의 기술적인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위 문단의 플레이스타일에 언급된 대로 굴리트는 신체능력도 우수하지만 전술이해도나 테크닉 역시 뛰어난 선수였는데 따지고 보면 게임에서의 굴리트 역시 실제 굴리트를 완전히 구현하지 못한 셈이다.


8.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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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덜란드어 발음은 '뤼트 휠리트[ˈryt ˈxʏlɪt\]'이지만, 이름을 영어식으로 읽은 '루드 굴리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본인은 영어 또한 유창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름을 네덜란드어(뤼트 휠리트)로 부르든, 영어(루드 굴리트)로 부르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선수 본인의 발음[2] 'Dil'은 어머니의 성으로 네덜란드어로 '엉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루드는 자신이 '엉덩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싫어 아버지의 성 'Gullit'를 현역시절에 사용했지만, 본인의 이름을 개명하지는 않았다. 출처 굴리트의 자녀들 역시 할머니의 성 'Dil'이 아닌 할아버지의 성 'Gullit'를 사용하고 있다.[3] 현역 시절 88kg[4]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였으며, 어디까지나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다.키도 커서 골키퍼도 잘할 거 같다[5] 다만 굴리트는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수준급으로 소화할 수 있었던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다.[6] 굴리트의 전 소속팀인 AC 밀란에서 뛰고 있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도 굴리트와 비슷한 별명을 가지고 있다.[7] 실제로 93-94 시즌 굴리트는 신체능력은 유지된 상태에서 기술이 노련해져서 플레이가 더욱 유연했다. 몇몇 세리에 올드팬들은 마라도나와 라이벌을 형성했던 87-88 시즌보다 낫다고 평가할 정도.[8] 축구는 몸이 아닌 머리로 하는 것이라는 요한 크루이프의 말처럼, 토탈 풋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전술 이해도였다. 크루이프의 체력, 피지컬, 테크닉이 모자란건 결코 아니었지만,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토탈 풋볼에 대한 기여도가 전술 이해도에 비하면 낮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를 증명하는 사례가 존재하는데, 1974년 네덜란드는 아르헨티나를 4:0으로 박살내고 브라질을 2:0으로 격파하며 그 기세가 대단했다. 결승전 상대인 프란츠 베켄바워의 서독도 지금의 네덜란드에는 별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강했지만, 결과는 사뭇 달랐다. 독일은 베르티 포크츠에게 크루이프를 전담마크 시켰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전담마크 보다는 크루이프와 함께 자폭해서 필드에서 사라지는 전술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크루이프는 최고의 선수도 우승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변명했으나 포크츠는 "나는 볼터치를 3번밖에 하지 못했는데 챔피언이 되었다" 라며 비웃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포크츠의 신체능력이 크루이프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말년의 크루이프는 네덜란드에 진출한 허정무에게도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굴리트는 신체능력도 뛰어난 선수였다.[9] 루디 푈러2002년 한일 월드컵차범근에게 아스피린 운운하던 바로 그 감독 맞다. 헌데 이날은 푈러에게도 악몽의 날이었는데, 레이카르트는 굴리트와 더불어 가장 고귀한 성품의 선수로 유명한 선수였다. 이러다보니 대회 이후에 침을 뱉은 레이카르트가 욕을 먹는게 아니라 오히려 푈러가 얼마나 까불었으면 그 착한 레이카르트가 그랬을까?'' 라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마치 2006년 독일 월드컵 우승은 이탈리아가 했는데, 정작 전세계 언론은 지네딘 지단은 왜 마르코 마테라치에게 박치기를 했는가?'''로 도배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10] 레이카르트는 중앙 미드필더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었지만, 센터백으로도 자주 출장했었다. 정확히 독일전에서 2분만에 골을 꽂아버리면서 2년전의 한을 그대로 풀어버린다.[11] 이 대회에서 네덜란드는 데니스 베르캄프를 발굴했다.[12] 네덜란드가 전력을 온존히 보존했을때를 가정한 멤버는 루드 굴리트, 데니스 베르캄프,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클라렌스 세이도르프, 프랑크 레이카르트, 아론 빈터르, 프랑크 더부르와 같은 정신나간 스쿼드이다. 1998 월드컵 스쿼드에 비해서 하등 꿀릴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월등하다. 굴리트의 존재감이 그러했다.[13]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네덜란드와 브라질의 물고 물리는 관계이다. 브라질이 펠레 은퇴 후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한테 무너졌고, 네덜란드는 1994년 화려한 멤버로 브라질에게 1점차 패배를 당했고, 거스 히딩크의 1998년에는 창과 창의 대결이며, 사실상의 결승전이라 칭해진 4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한다. 그리고 2010년은 측면을 탈탈 털어버린 아르연 로번웨슬리 스네이더의 활약에 브라질은 무너진다. A매치에서 실질적으로 서로 잡고 잡히며 발목을 잡은 두 팀이다.[14] 굴리트의 대회참가 여부와 전성기 문제가 있긴 한데, 그 해에 굴리트는 AC 밀란UC 삼프도리아에서 경기당 0.5골의 결정력을 자랑했던 시기이다. 당시 나이는 32세, 34세의 마라도나가 해당 대회에 참가해서 2경기만에 1골 2어시스트를 기록했던것을 감안하면, 결코 굴리트의 폼이 나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다시금 강조하지만 굴리트의 주 포지션은 최전방 공격수가 아니다. 물론 잘보긴 했지만, 이때는 주로 중미 아니면 공미 심지어 센터백으로도 나오기까지 했는데 경기당 0.5골이라는 것이다. 반면 아드보카트의 팀 장악력은 좋았지만, 그의 최대의 단점은 '작은 장군' 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독불장군식 운영이었다.[15] 특히 아버지 조지 굴리트의 피지컬을 물려받았는데, 굴리트의 압도적인 피지컬은 아버지의 좋은 신체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진 만큼 조지 굴리트 또한 당시에 엄청난 신체를 가지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16] 이 정도의 유틸리티 플레이 능력을 갖춘 선수로는 필립 코쿠, 클라렌스 세이도르프 정도를 들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유상철허정무가 굴리트와 유사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해외축구가 널리 알려지기 전에는 박지성이 그가 가지고 있었던 뛰어난 축구 지능과 전술 이해 능력을 바탕으로 굴리트와 비교되곤 했는데 엄밀하게 따지면 미드필더에 가까운 윙어인 박지성은 굴리트와 확실히 다른 플레이스타일의 선수였다.[17] 마르코는 당시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는 최고의 공격수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당대 최고 공격수의 빈자리를 정통 공격수가 아닌 트레콰르티스타가 대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굴리트의 신체적·정신적 능력을 알 수 있다.[18] 다만 AC 밀란 시절 이후부터는 보통 4-2-2-2의 투톱이나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주로 출전했고 다양한 포지션을 옮겨다니는 일은 잘 없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멀티 플레이어 능력과는 별개로 항상 투톱의 한 자리에서 주로 뛰었으며 팀 사정상 미드필드나 수비진에 공백이 생겨도 우선적으로 빈자리를 메우러 가진 않았다. 굴리트의 포지션 변화는 다음과 같다. 리베로공격형 미드필더 → 투톱의 공격수(간헐적으로 미드필더 소화) → 우측 윙 → 다시 리베로.[19] 그 자리를 당시 첼시의 스트라이커인 잔루카 비알리가 메꿔 첼시는 1997-98 시즌을 UEFA 컵위너스컵 우승과 풋볼 리그컵 우승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20] 경기 결과는 리버풓의 4대 2 승리였다.[21] 여담으로 훗날 시어러와 굴리트는 BBC 매치 오브 더 데이에 함께 나오기도 했다.[22] 굴리트의 후임으로는 로날드 쿠만의 형 에르빈 쿠만이 선임되었다.[23] 굴리트와 송종국의 관계를 보면 굴리트는 처음에는 송종국을 주전으로 기용하긴 했지만 자주 송종국의 팀 융합, 전술능력 등을 탐탁지 않아했으며 송종국이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의 기량이 나오지 않는다고도 말했던 적 있었다. 다만 송종국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다, 송종국이 네덜란드어 학원에도 다니고 있다고 말하며 송종국을 믿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2년이 지났는데도 송종국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않자 언어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구단 홈페이지에 공식적으로 말하고 그를 벤치에 앉혔던 것이다.[24] 굴리트를 LA 갤럭시로 데려오는데 큰 역할을 했던 알렉시 랄라스 회장 역시 굴리트의 성적 부진과 데이비드 베컴의 에이전트와의 부정적인 유착관계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굴리트가 사임하던 날 회장직에서 해임되었다.[25] 판바스턴은 네덜란드 국대를 맡았던 적 있었고 레이카르트는 바르셀로나 드림팀 2기의 감독을 맡아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문제는 그들의 후임들이 넘사벽의 업적을 세웠다는 것인데, 바르셀로나는 펩 과르디올라를 만났고, 네덜란드는 베르트 판마르베이크 아래에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준우승을 달성했다. 한편 반 바스텐, 레이카르트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던 적 있지만 굴리트만 유일하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적이 없다.[26] 2020년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으로 진행된 더 베스트 FIFA 풋볼 어워드 시상식에 사회자로 깜짝 등장했고 재치있는 진행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손흥민FIFA 푸스카스상을 수상할 때 사회자를 보았다.[27] 물론, 안정환은 페루자에서 뛰던 시절에 "로베르토 바조는 대단한 선수였다" 라고 생각하면서 정말 존경한다고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페루자에서 뛰던 시절에 같이 바조를 상대했던 경기에서는 너무 감동을 해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뛰었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28]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현재 플로리다에 있는 몬트버디 아카데미의 기술고문으로 활동하며 조용하게 살고 있고, 마르코 반 바스텐FIFA의 기술위원장에 취임하고 방송에도 출연하며 여러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생방송 중 출연자에게 나치식 인사를 건네 큰 파문이 일어났고 방송사에서 정직 및 축구 게임에서 공급제한되기도 하는 등 꽤나 고역을 치룬 적이 있었다.[29] 다만 FIFA 14에서 FIFA 17까지는 Xbox 플랫폼에서만 등장했다.[30] 나머지는 파트리크 비에라, 펠레, 뤼트 판니스텔로이 등이 있었다.[31] 초창기엔 에마뉘엘 프티, 파트리크 비에라가 굴리트의 아성에 도전했지만, 프티는 굴리트보다 키가 작고 오른발이 3이어서 양발을 잘 못쓴다는 단점이 있고, 비에라는 프티와는 반대로 왼발이 3인데다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더 적합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어 공격능력이 굴리트, 프티보다 떨어진다. 그래서 저 둘은 굴리트와는 달리 미드필더를 넘어 공격수 포지션에서 기용하기에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2022년 현재는 미하엘 발락, 아르투로 비달, 스티븐 제라드, 유상철 등이 굴리트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으나 여전히 굴리트는 1대장 취급을 받고 있다.[32] 예를 들어, 펠레 또는 마라도나가 한 클래스에서 100의 능력치를 받으면 굴리트는 그들과 동률 내지 1~2정도 낮은 능력치를 받는다.[33] 굴리트는 이 광고를 찍은 후 본인의 인스타그램에서 피파 온라인 4를 서비스하고 있는 넥슨에게 감사를 표했다.[34] 2022년 10월 기준으로 1티어 선수로 분류되진 않지만 넥슨 피파 모바일은 피파 온라인 4와 달리 +5진화(피파 온라인 4의 강화와 동일한 개념) 이상부터 한 단계씩 진화 등급이 올라갈 때마다 선수의 특성을 하나씩 원하는 대로 변경할 수 있어 110 굴리트 고강은 유저들에게 높은 수요를 가지고 있다.[35] UC 삼프도리아 시절 굴리트는 센터백 역할을 수행한 적이 있다.[36] 사실 톱 굴리트도 원터치 패스와 스루 패스 스킬을 장착했지만 결정력이 낮고, 아쉽긴 하지만 워낙 몸빵이 좋아 헤더와 볼 공급으로 루메니게를 보좌하기에 최적화된 톱이란 이유로 쓰이는 거라 위닝에서 굴리트의 위상은 상당히 낮다고 봐야 한다. 그마저도 유저 취향에 따라서 페르난도 토레스마이클 오언, 킬리안 음바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리오넬 메시에게 톱 자리를 뺏기기도 한다.[37] 현역시절 투지의 상징으로 불렸던 제이미 캐러거, 로이 킨 등이 축구 게임 안에서는 부족한 피지컬로 인해 유저들에게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반면, 유럽인의 신체조건을 갖춘 브라질 테크니션으로 '축복받은 피지컬'이라 평가되었으나 유리멘탈 등으로 인해 활약상은 기대에 못 미쳤던 아드리아누는 불후의 사기 캐릭터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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