궈모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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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본명
곽개정(郭開貞)
한문
郭沫若
한국식 독음
곽말약
영문
Guo Moruo

팅당(鼎堂)

샹우(尚武)
출생
1892년 11월 16일 청나라 쓰촨성 낙산현[1]
사망
1978년 6월 12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일본 규슈대 의학부 졸업
직업
극작가, 시인, 서예가, 역사학자, 정치인
종교
없음(무신론)

1. 개요
2. 생애
2.1. 가계
2.2. 초기 경력
2.3. 일본 망명 시기
2.4.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 시기
2.5.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3. 문학가
3.1. 시집
3.2. 산문
3.3. 소설
3.4. 자서전
3.5. 연극
4. 역사학자
5. 서예가
6. 가족관계
7. 영향 및 평가
8.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극작가, 시인, 역사학자, 서예가, 정치인. 1914년에 일본으로 유학가서 근대 과학연구 방식을 익혔고 1921년 창조사(創造社)를 결성하여 낭만주의 문학 운동을 일으켰으며,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참가하여 우한, 상하이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 난창 폭동에 가담한 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국민당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가서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으로 중국 고대 사회를 연구했다. 중일전쟁 시기 항일 전선에 참가하여 선전 활동에 종사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여러 요직을 맡았으며 마오이즘 문학 사상을 전파했다.

2. 생애[편집]



2.1. 가계[편집]


<곽씨가보(郭氏家譜)>에 따르면, 궈모뤄의 본적은 푸젠성 팅저우(汀州)부 닝화현(寧化縣)이며, 궈모뤄의 선조 곽복안(郭福安)은 당나라의 명장 곽자의의 후손이라고 한다. 궈모뤄 본인은 <덕음록(德音錄)>에서 "내 가계의 본적은 푸젠성이고 1781년에 러산(樂山)현 퉁허강(銅河)사완(沙灣)구로 이주해서 4대에 걸쳐 그곳에 정착했다."고 서술했다.

2.2. 초기 경력[편집]


궈모뤄는 1892년 11월 16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궈차오페이(郭朝沛)는 지주였고 어머니 두오정(杜遨貞)은 몰락한 관리 집안의 여식이었다. 그는 1906년 청두 석실 중학교를 다니면서 공화주의를 받아들였다. 1914년, 궈모뤄는 일본으로 유학가 규슈대에 입학해 의학을 전공했다. 1921년1월, 궈모뤄는 병가를 이유로 3개월 간 휴학하고 교토 제국대학 문과 강의를 청강했다.

궈모뤄는 1921년에 첫 시집인 '여신(女神)'을 발표했다. 그후 1922년 3월 15일에 <제조계간(創造季刊)>을 집필했다. 그는 이시기 후스 등과 함께 신문화운동을 전개했으며 5.4 운동에 감명받아 이를 바탕으로 한 문학 작품 집필에 전념했다. 하지만 문학에 열중하면서도 자신의 본래 학업을 포기하지 않아 1923년 규슈대를 졸업하고 의학학사 학위를 받았다.

1926년 3월, 궈모뤄는 광저우로 가서 광둥대학 문과장을 역임하고 제6회 전국 농민 운동 강습소의 교원을 겸임했다. 이때 국민당의 북벌이 개시되자, 궈모뤄는 북벌에 가담하여 국민혁명군 총사령부의 행영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북벌군이 무창을 공격할 때, 그는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부주임으로 승진해 중장 계급을 받았다. 얼마 후, 그는 난창으로 가서 총정치부 사무소장을 역임했으며 난창 특별당 집행위원 및 총사령부 행정부 주임으로서 매월 200위안의 수당을 지급받았다. 그후 궈모뤄는 1926년부터 1927년까지 국립 무창 중산대학 준비위원을 맡았다.

그런데 1927년 4월 12일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하고 공산당원 체포령을 내리자, 궈모뤄는 주더의 집에 은신하며 <금일의 장제스를 보라(請看今日之蔣介石)>라는 제목의 격문을 썼다. '중앙일보(中央日報)'에 개재된 이 글에서, 궈모뤄는 장제스를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장제스는 건달이자 토호(土豪), 얼신(劣紳)이며 부패한 공무원이고 군벌 및 모든 반동분자와 같은 반혁명 세력의 중추적인 힘이다. 그는 우페이푸, 쑨촨팡, 장쭤린, 장쭝창 등보다 더 치열하고 사악하며, 치욕스러운 사형집행관이다."


궈모뤄는 1927년 8월 4일 심야에 난창에 도착해 난창 폭동에 참가하여 혁명 위원회 위원과 7일 주석단 임원으로 추대되었고 총정치부 주임과 선전위원장을 겸임했다. 1927월 9월 초 난창 봉기군과 함께 루이진(瑞金)으로 향한 그는 저우언라이, 리이망(李一氓)의 소개로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0월 초, 봉기군이 차오산(潮汕)에서 해산하자, 궈모뤄 등 4인은 보령현에서 열흘간 숨어있다가 신천에서 배를 타고 홍콩으로 가서 10월 하순에 도착했고 한달 후 상하이로 향했다.

1927년 12월 23일, 국민정부는 궈모뤄를 지명수배했다. 이에 그는 저우언라이와 함께 소련으로 가려 했지만 심한 발진티푸스에 걸려 한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그후 그는 일본으로 망명가기로 결정하고 1928년 2월 24일 '우첸(吳誠)'이라는 가명을 쓴 채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2.3. 일본 망명 시기[편집]


궈모뤄는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보내는 동안 일본 헌병과 경찰의 감시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갑골 문자금문을 연구했다. 1930년, 그는 '중국 고대사회 연구'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역사 문헌자료를 인용해 마르크스주의와 인류 사회학 발전의 법칙을 적용했을 때 중국 역시 원시 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궈모뤄는 유물사관론을 전개했고, 훗날 중국을 재패한 공산당은 그의 사관을 주류 사관으로 지정하고 그의 역사서를 초중고 교과서로 지정했다.

궈모뤄는 이 시기에 <고문 연구>, <은, 주 청동기문자 연구>, <금문총고>, <복사통찬(卜辭通纂)>을 발표했으며, 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독일 이데올로기>를 번역했다. 또한 그는 샤옌(夏衍), 저우양(周揚)이 제시한 "국방문학" 주장에 단호히 반대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내전을 중단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자"는 <8.1 선언>을 접한 그는 태도를 바꿔 만족갈등이 현재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국방문학이 올바른 구호임을 인정하고 "당이 결정하면 나는 그대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궈모뤄는 <국방의 기치 아래> 등의 글을 발표했다.

1937년 5월 하순, 위다푸(郁達夫)가 난징에서 궈모뤄에게 전보를 보내 "위원장께서 짐을 꾸리고 빨리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하지만 지명수배가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일본에서 한달 동안 머물렀다. 그러던 7월 25일 장제스가 지명수배령을 취소하자, 궈모뤄는 중국으로 돌아와 7월 27일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2.4.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 시기[편집]


상하이에 도착한 후, 그는 '구망일보(救亡日報)'를 창간해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을 선전했다. 그후 난징으로 가서 장제스와 면담한 후 '장 위원장 회견기'를 발표해 장제스의 리더쉽과 항일정신을 찬양했다. 샤옌은 이 당시 궈모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 시기 그의 가장 인상 깊은 모습은 당에 대한 무한한 충성과 저우언라이 동지에 대한 진지한 경의였다. 한번은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제스, 천청과 감정을 교류했다. 매우 어색했지만, 나는 그들과 이야기하고 나서야 저우언라이 동지의 지시가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궈모뤄는 홍콩을 거쳐 광저우로 가서 1938년 1월 1일에 '구망일보'를 복간했다. 1월 9일에 우한으로 간 그는 황치샹(黃琪翔)으로부터 천청이 자신을 군사위원회 정무부 삼청장으로 초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를 거절하려 했으나 저우언라이, 왕밍, 보구, 둥비우 등 양쯔강 지부 지도자들이 그에게 천청의 초청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다. 이에 궈모뤄는 3월 중순에 군사위원회 정무부 삼청장에 부임했다. 중국 공산당 양쯔강 지부는 즉시 후위즈(胡愈之), 양한셩(陽翰笙), 위다푸(郁達夫), 쉬베이훙(徐悲鴻), 선쥔루(沈鈞儒) 등을 삼청에 보내 항일통전선 기구를 세우게 했다.

1938년 4월 1일, 정치부 삼청이 우한에서 정식으로근무하면서 '홍보주간 확장', '국민헌금' 등의 다양한 활동을 실시하였고 각종 노래를 작곡하고 연극을 제작했다. 특히 궈모뤄는 삼청의 문예선전 대상을 공장 광부와 하층민으로 확대하여 중국 공산당의 '항일구국 10대 강령'을 관철한다는 원칙을 중시했다. 이에 정치부 주임인 천청을 비롯한 국민당 일부 인사들은 이들이 국민당 내부에 공산당의 싹을 틔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반감을 품었다.

1938년, 공산당원이자 문학평론가인 후펑(胡風)이 당시 문화계에 "루쉰 선생처럼 세상을 뒤흔들 만한 대작가가 없다."고 지적했다. 저우언라이는 궈모뤄가 문화계의 지도자가 될 만하다고 생각했고 중국 공산당 중앙에 건의문을 제출했다. 1938년 여름, 중국 공산당은 궈모뤄를 루쉰의 계승자이자 중국 혁명 문화계 지도자로 결정했다.

1939년 10월 우한이 함락되기 직전, 궈모뤄는 저우언라이를 따라 우한을 떠나 충칭으로 향했다. 1940년 1월11일, 그는 창간 2주년을 맞이한 신화일보에 국민정부를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다.

"서민들이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반대로, 백성을 대표하여 말할 수 있다면, 그 힘은 장강, 대하보다 더 크다."


1940년 9월, 장제스는 궈모뤄를 군사위원회 정무부 삼청장에서 해임하고 정치부 설계위원으로 좌천시켰으며 군사위원회 소속원들에게 즉시 국민당에 가입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궈모뤄를 비롯한 삼청 내 문예계 인사들은 대거 사표를 제출했다. 이에 저우언라이가 급히 장제스를 찾아가 설득했고, 장제스는 결국 궈모뤄, 양한셩 등을 불러 정치부 문화공작위원회를 구성하고 그들을 그곳에 배치할 테니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아도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1940년 12월 7일, 장제스는 문화사업위원회를 발족시키고 궈모뤄 등을 이곳에 배속시키면서 이들이 문화 연구에만 전념할 뿐 정치 공작에 종사할 수 없음을 명문화했다.

이후 궈모뤄는 문예강좌, 문화강좌, 국제문제 강좌, 국제 문제 좌담회, 각종 형식의 보고회를 자주 개최했다. 얼마 후 환남사변이 일어나자, 궈모뤄는 시를 지어 국민정부를 비판했다.

강남의 한 잎사귀 같은 억울한 역사가 일어나(江南一葉奇冤史)

모든 사람들의 근심을 불러 일으켰네.(萬眾皆先天下憂)

눈물을 닦고도 쓴웃음을 지으니(淚眼揩乾還苦笑)

잠시 집을 잊고도 원수를 갚기 어렵구나.(暫忘家難賦同仇.)


중국 공산당 남방국은 환남사변의 여파로 충칭의 좌익 문화인들이 화를 입는 걸 예방하기 위해 그들을 옌안, 구이린(桂林), 쿤밍(昆明), 홍콩 등지로 보냈다. 하지만 궈모뤄는 충칭에 남아 문화사업위원회를 주재했다. 1941년, 궈모뤄 탄생 50주년과 창작 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저우언라이는 양한셩에게 전국적인 정치 행사를 개최하게 했다. 그는 이를 통해 환남사변과 전황의 악화로 의기소침해진 좌파 문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했다. 이에 양한셩은 쑨커(孫科), 사오리쯔(邵力子), 천부레이(陳布雷), 장즈중(張治中), 장다오판(張道藩), 펑위샹, 선쥔루, 황옌페이(黃炎培), 덩샤오민(鄧初民), 젠보짠(翦伯贊) 등 각계의 인사들을 초청해 궈모뤄 축하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1941년 11월 16일, 저우언라이는 신화일보 1면에 궈모뤄에게 찬사를 보내는 사설을 실었다.

궈모뤄의 창작 생활 25년은 바로 신문화 운동의 25년이다. 루쉰은 자칭 혁명군마의 졸병이라고 말했는데, 궈모뤄는 바로 혁명대중의 중심이었다. 뤼신은 신문화운동의 스승이며 궈모뤄는 신문화운동의 주장이다. 루쉰이 길을 개척해낸 선봉이라면, 궈모뤄는 모두를 이끌고 함께 나아가는 길 안내자이다.


이날 오후 충칭의 중소문화협회 식당과 정원에서 열린 다과회에는 2만여 명의 참가자들이 참가했다. 또한 쿤밍, 옌안, 구이린, 홍콩, 싱가포르에서도 문화계의 축제가 열렸고 반년 동안 기념글이 잇달아 실렸다. 축제 기간 중 충칭에서는 곽조년(郭早年)의 연극 '당두의 꽃(棠棣之花)'이 상영되었는데, 당대 일류 배우들이 대거 주연을 맡았으며 궈모뤄는 직접 리허설과 대본수정에 참여했다. 이 연극이 충칭에서 대인기를 끌었고 저우언라이는 7차례나 관람했고 <신화일보>에 당두의 꽃과 역사극 창작에 대해 호평하는 글을 실었다.

1942년 1월 상순, 궈모뤄는 연극 "굴원"의 극본을 9일만에 완성하고 1942년 1월 24일부터 2월 7일까지 <중앙일보> 부간지에 연재했다. 또한 1942년 2월 상순에 역사극 "호부(虎符)"를 창작했으며 5월 6일에 역사극 "고점리"를 창작했다. 또한 1942년 9월 상순에 "공작담(孔雀膽)"을 창작했으며 1943년 3월에서 4월 사이에 "남관초(南冠草)"를 창작했다. 이 여섯편의 역사 비극 작품 중 가장 인기있는 작품은 "굴원"이었다. 역사학자 왕원의(王遠義)는 이시기 곽말약이 대중적인 형식과 엘리트의 창작, 현대성과 전통적인 민족문화가 공존하는 문학과 문화로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시기에 역사연구를 계속했고 1942년 4월부터 1945년까지 "은주의 노예사회 고찰", "묵자 사상", "술오기(述吳起)", "진한시대의 유자(秦漢之際的儒者)", "공자, 손자, 니자(尼子)의 음악이론", "여불위와 진나라의 정치", "청동시대", "십비판서(十批判書)"[2] 등을 출간했다. 또한 역사 연구방향을 주제로 린위탕(林語堂), 선충원(沈從文), 스저춘(施蟄存)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45년 3월 30일,정치부 문예사업위원회가 장즈중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후 1945년6월, 궈모뤄는 충칭에서 미국 군용 수송기를 타고 인도, 이란을 경유하여 소련 모스크바에 가서 과학원 200주년 기념 대회를 참관했다. 6월 29일, 그는 스탈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등과 함께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등 독소전쟁 직후 페허가 된 도시들을 둘러봤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발표하자, 그는 8월 16일에 중국으로 귀국했고 8월 20일에 충칭에 도착했다. 그후 마오쩌둥이 장제스와 회담을 가지기 위해 충칭에 방문엤을 때, 궈모뤄는 마오쩌둥이 오래된 회중시계를 사용하는 걸 보고는 자신의 손에 있던 손목시계를 선물로 줬다. 이후 마오쩌둥은 오랫동안 이 손목시계를 사용했다고 한다.

1946년 1월 10일, 궈모뤄는 사회현달 대표로서 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해 정부조직개편문제를 논의하면서 주석 권한이 너무 크고 국부위원은 건의권도 없다고 발언했다.그해 5월 8일, 그는 온 가족을 데리고상하이로 갔다. 그리고 1947년 11월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홍콩으로 이주해 중화 전국문예계협회 홍콩지회의 지도업무를 담당했다. 1948년 11월 23일 배를 타고 홍콩을 떠나 12월 1일 요동 안동 석성도 기슭에 도착했고 12월 6일 선양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1949년 2월 25일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상경했다.

2.5.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편집]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궈모뤄는 중국 과학원장과 중국문련 주석을 오랫동안 역임했고 중앙인민정부위원, 정무원 부총리 겸 문화교육위원회 주임, 중국 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주임, 역사 연구소 제1소장을 역임했다. 또한 중국 공산당 제 8,9,11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상무위원 부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전국정치협상회의 제 1회 전국위원회 부주석, 제4기 상무위원, 제 2,3,5기 상무위원을 역임했다.

궈모뤄는 1959년부터1960년까지 사극 '채문희'와 '무측천' 각본을 차례로 집필했다. 그후 그는 1962년 정성공 300주기를 기념해 영화 '정성공' 시나리오를 집필했지만, 몇년 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영화 촬영을 하지 못했다.

문화대혁명 발발 직전인 1966년 초, 궈모뤄는 전국문학연맹 총회 의장국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오늘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내가 이전에 쓴 것은 엄격히 말하자면 전부 태워버려야 하는 것이며 조금도 가치가 없다."


그후 그는 문화대혁명 시기 과거에 장제스를 찬양하는 글을 쓴 일로 거센 비판을 받았고 그 자신도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의 제의를 받아들여 '보호해야 할 간부 명단'에 궈모뤄를 넣고 홍위병들이 그를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1971년 학술논저 '이백과 두보'를 발표한 궈모뤄는 낭만주의 시인 이태백을 인정하면서도 충군사상이 강한 두보를 성인으로 받드는 것에 반대를 표명했다. 이후 1978년 3월, 그는 <과학의 봄>을 발표해 지식인들에게 학술연구에 전념할 것을 호소했다.

1978년 6월 12일, 궈모뤄는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은 산시성 시양현 인민공사의 계단식 밭에 뿌려졌다.

3. 문학가[편집]


궈모뤄가 평생 집필한 작품은 백만자가 넘는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작품들은 '궈모뤄 전집' 38권으로 총집결되었다. 이 전집은 문학집 20권, 역사집 8권, 고고학집 10권으로 구성된다.

3.1. 시집[편집]


궈모뤄의 시는 당대에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후스와 함께 중국의 새로운 시문학 흐름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 연구가들은 곽말약의 시들이 지나치게 장황적이며 낭만적이라고 비판하며, 19세기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의 영향을 받은 측면이 강하므로 독창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여신(女神)
  • 별이 총총한 하늘
  • 전모(前茅)
  • 회복(恢復)
  • 전성집(戰聲集)
  • 신화송(新華頌_
  • 백화제방(百花齊放)
  • 낙타집(駱駝集)
  • 위대한 스탈린 원수 만세!
  • 태양문답(太陽問答)
  • 주마작(咒麻雀: 참새를 저주한다)
  • 강철 1억 7천만톤!
  • 홍투전심(紅透專深)
  • 사해여생사해도(四害餘生四海逃)
  • 만강홍, 수령송(滿江紅·領袖頌)
  • 우주충영가송성(宇宙充盈歌頌聲)
  • 장칭 동지와 학우 동지들에게 헌정하는 글
  • 수조가두(水調歌頭)-무산계급 문화대혁명 10주년 경축
  • 수조가두-4인방 척결

3.2. 산문[편집]


  • 산중잡기(山中雜記)
  • 파도
  • 난징의 인상

3.3. 소설[편집]


  • 표류 삼부작
  • 올리브
  • 수평선 아래
  • 족발(豕蹄)[3]
  • 지하의 웃음소리

3.4. 자서전[편집]


  • 궈모뤄 자서전 (4편)

3.5. 연극[편집]


  • 3인의 반역적 여성(탁문군[4], 왕소군, 섭앵[5])
  • 당제지화(棠棣之花)
  • 굴원
  • 호부
  • 공작담(孔雀膽)
  • 채문희
  • 무측천
  • 정성공

4. 역사학자[편집]


궈모뤄의 초기 역사 연구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을 중국 고대 문헌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 중반부터 고대 문서보다는 고고학 자료에 초점을 맞추었고 마르크스주의 고전을 인용하지 않았다. 중국의 초기 사회에 대한 궈모뤄의 관점은 현재까지 중국 사학의 주류 이론이 되었다.

  • 갑골문자 연구
  • 복사통찬(卜辭通纂)
  • 고대 문자의 변증법적 발전
  • 중국 고대사의 분기 문제
  • 중국 고대사회 연구
  • 갑신 3백년제(甲申三百年祭)
  • 청동시대
  • 십비판서(十批判書)
  • 노예제 시대
  • 이백과 두보
  • 중국사고(中國史稿)
  • 사회조직과 사회혁명[6]

5. 서예가[편집]


파일:c2fdfc039245d688dff14413a4c27d1ed31b2491.jpg
궈모뤄의 서체

궈모뤄는 '회봉전향, 역입평출'(回锋转向, 逆入平出: 붓의 왼쪽 아래로부터 위로 돌려 눌러찍고 수필을 오른쪽 아래로 내게 함.)을 학필로 삼고 자신만의 서체를 고안했다. 그의 서체는 '곽체'로 불리며, 살아숨쉬는 시대적 특색을 보여준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현대 서예사에서 중요한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궈모뤄의 서체가 사회적으로 인정된 것은 신해혁명 시기에 시작되었다. 중화민국 성립 후, 그는 사회 각계, 국내외 친구들을 두루 사귀면서 여러 문장을 남겼다. 현재 중국의 많은 유명 리조트의 간판은 그의 서체로 작성된 비문을 사용하며, 중국 과학기술대학, 심양 황궁, 길림 대학, 복주 대학, 남서사범대학, 청두 무호사당, 제남 리칭자오 기념관, 백운산, 루산 등의 간판도 그의 서체를 사용한다.

6. 가족관계[편집]


1912년, 궈모뤄는 부모의 부탁으로 장경화(張瓊華)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닷새만에 집을 떠나 그녀와 이혼했다. 1939년 궈모뤄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아직 생과부로 살고 있던 장경화에게 절을 하며 미안함을 표시했다. 장경화는 1980년 러산시에서 병사했고 자녀는 없었다.

1916년, 궈모뤄는 일본으로 유학가서 사토 푸지코(佐藤富子)와 공동 거주했다. 그후 푸지코는 부모와의 연을 끊었고 궈모뤄는 그녀에게 "안나(Anna)"라는 애칭을 부여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자신에게 걸렸던 지명수배령이 철회되자 궈모뤄는 그녀에게 얘기도 없이 일본을 떠났다. 이후 1948년 사토는 아이를 데리고 홍콩으로 가서 궈모뤄를 만났으나 궈모뤄가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는 걸 알게 되자 떠났다. 1949년 이후, 사토는 몇차례 베이징으로 가서 궈모뤄를 찾아가 이혼 후 아이 양육 문제를 협의했는데, 궈모뤄는 모두 핑계를 대며 그녀를 만나길 회피했다. 이에 저우언라이가 직접 나서 사토와 아이 다섯 명이 모두 중국에 오게 해줬다.

이후 사토는 다롄에서 생활했고 이름을 곽안나로 바꿔 아들 곽화부와 함께 살았다. 곽안나는 제6차 전국정치협상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문화대혁명 시기 광기에 휩싸인 중국을 벗어나고 싶어한 그녀는 1974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그녀는 베이징에 가서 당시 병원에 입원했던 궈모뤄를 찾아갔는데,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곽안나는 1994년 101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궈모뤄와 안나 사이에는 자녀가 다섯 명 있었다.

  • 장자 곽화부는 1917년에 태어났다. 중국 과학원의 화학자였으며 1994년에 사망했다.
  • 차남 궈보는 1920년에 태어났다. 그는 건축가와 사진가로 활동했고 상하이시 참사실 참사, 상하이 쑹칭링 재단 이사, 중국 사진가협회 회원 등을 역임했다. 그는 현재까지 살아있다.
  • 삼남 곽복생은 1923년에 태어났으며 현재 중국 과학원 동물소의 엔진니어이다.
  • 딸 곽숙정은 1925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임애신(林愛信)과 결혼해 딸 임충(林叢)을 낳았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 국적을 일본으로 바꿨다. 그녀는 현재 일본 국립중앙박물관 문학부의 중국 문학교수이며 궈모뤄 연구 학회의 설립에 관여했다.
  • 사남 곽지홍은 1932년에 태어났으며 현재 중앙음악학원 객원교수이다.

1934년, 궈모뤄는 도쿄에서 잠춘훤(岑春煊)의 외손녀이자 '대공보(大公報)'의 기자인 우림침(于立忱)과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1937년 궈모뤄가 중국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살했다. 그후 그는 우림침의 여동생 우립군(于立群)과 사귀었고 1938년 1월부터 동거해 1939년 여름에 결혼했다. 이후 두 사람은 평생 함께 살았고 4남 2녀를 낳았다.

  • 장남 곽한영(1939~2010): 칭화대 공학과 졸업. 중국과학원 이론물리소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 장녀 곽서영(1940~): 중국 과학기술대학 생물 물리과를 졸업했고 현재 북경 중국 경제발전센터 사장을 맡고 있다.
  • 차남 곽세영(1942~1968): 문화대혁명 시기 베이징 농업대학의 홍위병에게 잡혀 고문을 당했고 알마 후 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 삼남 곽민영(1943~1967): 중앙 음악대학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1965년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기에 자살했다.
  • 차녀 곽평영(1946~): 인민대학교 국제정치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부소장이자 궈모뤄 기념관장이다.
  • 사남 곽건영(1953~) 베이징대학 컴퓨터 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7. 영향 및 평가[편집]


궈모뤄는 중국 현대 문학사, 중국 역사학, 고고학 등의 분야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관영 현대 문학사 교과서는 그를 "루쉰에 이어 중국 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했고 사학계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사학 5로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궈모뤄는 초창기에 괴테의 작품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등 괴테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저우양(周揚)은 이를 빗대어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사회주의 시대 신중국의 괴테이다."


궈모뤄는 대만의 학계 및 정치계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장제스, 장징궈 집권 시기 궈모뤄는 공산당의 나팔수이자 역사를 왜곡하는 파렴치한 학자로 매도되었다. 하지만 리덩후이는 오늘날 대만의 역사계 업적은 후스, 루쉰, 궈모루 등이 주장한 사상과 사회반화의 실천에 기인한다고 밝히며 그를 옹호했고, 현재는 궈모뤄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추세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일생동안 정권에 아첨하는 행태를 많이 보였다. 1958년, 그는 대약진운동에 호응해 대약진을 노래한 시를 많이 썼다. 예를 들어, 그는 '태양문답'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당에게 감사하라. 당은 지지 않는 붉은 태양이다. 동풍은 영원히 서풍을 압도하며 사회주의는 빛을 발한다. 모가 열심히 노력하여 상류를 쟁취한다면 천당에 도달하는 것도 머지 않으리라. 붉은 깃발을 전세계에 꼽고 붉은 깃발을 산꼭대기에 내걸어라."


그러나 대약진운동이 처참한 실패로 끝난 후인 1963년 11월 14일, 그는 진명원(陳明遠)에게 편지를 보내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

대약진운동 중 곳곳에서 위성을 띄우고 희소식을 발표하며 예식을 행하다가 와글와글 흩어지고 거짓을 과장하는 나쁜 풍조가 범람하여 재해가 되었다. (중략) 좋은 일을 꾸미고 우스꽝스럽고 거짓으로 가득하고 빈말도 하는 이 모든 건 새로운 맨후와 ㅢ적이자 새로운 사회의 적이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궈모뤄는 자신의 전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적인 친구, 동지들이 보기에는 나는 문화인이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작가라고 불렀고 시인으로 불렀다. 몇십년 동안, 나는 줄곳 붓대를 들고 글을 썼고 약간의 물건을 번역했다. 숫자로 따지면 아마도 몇백만 자나되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기준으로 말하자면, 내가 이전에 쓴 것은 엄격히 말하면 전부 태워버려야지, 조금도 가치가 없다."


궈모뤄는 마오쩌둥의 시우(詩友)로 유명했으며 마오쩌둥의 시와 서예를 높이 칭송했으며 그를 "황량(黃梁)"이라고 부르며 찬미의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1967년 6월 5일, 궈모뤄는 옌안 문예 좌담회에서 '장칭 동지와 학우 동지 여러분에게 헌정하는 글'을 발표했다.

"친애하는 장칭 동지, 그대는 우리가 배워야 할 모범입니다. 그대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마오 주석의 사상을 잘 활용하고 몸을 아끼지않고 문화전선에서 돌격하며, 중국 무대를 공농병의 영웅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1976년 5월 12일, 궈모뤄는 "수조가두(水調歌頭)-무산계급 문화대혁명 10주년 경축"을 발표했다.

"주자파는 수레에 대항하는 사마귀다. 덩샤오핑은 뒷걸음질을 치고 있고 사건을 어떻게든 뒤집는다 해도 사람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삼항위강(三項為綱)'이 철저하게 폭로되어 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인민은 분노했다. 주석의 거대한 손을 따라 군대와 단결해 나아가라."


그러나 불과 5개월 후인 9월에 4인방이 체포되고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그는 "수조가두-4인방 분쇄"를 발표해 4인방을 비판하고 화궈펑을 치켜세웠다.

"위대한 사람들이 걱정거리였던 4인방을 잡아냈다. 정치깡패(왕훙원), 저질 문인(야오원위안), 머저리 군장(장춘차오), 그리고 정생백골(精生白骨, 장칭)이 측천무후처럼 깨끗이 쓸려나갔다. 그들은 당의 정권을 찬탈하려 했으며 황량(黃梁, 마오쩌둥)과 같이 되려는 꿈을 품었다. 그들의 야심은 크고 간계를 광란하게 부렸다. 그들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하다. 마오 주석의 후계자는 준걸이며 마오 주석의 유산을 계승하는 데 적합하다. 화주석을 지지하고 당 중앙위원회를 지지하자."


이렇듯 정권에 아부하고 시국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 입장을 바꿔버리는 그의 행보는 그가 역사계, 문학계, 서예게에 거둔 업적과는 별개로 두고두고 비판받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8. 참고 문헌[편집]


[1] 현재 쓰촨성 러산시[2] 중국의 고대 사회 기구와 고대 학술 사상을 열개 분야에 걸쳐 비판적으로 연구했다.[3] "맹자, 부인을 내쫓다", "공자님의 식사", "칠원리 장자가 양나라로 유세를 가다", "공자묘를 찾아온 마르크스", "초패왕의 자살", "제나라 용사의 무예 대결", "진시황의 임종", "사마천의 분기탱천", "노자의 입관지", "가의의 통곡" 등 11편 수록[4] 전한시대 임공의 거상 탁왕손의 딸. 시문에 능했고 북과 거문고를 잘 연주했다. 16세에 결혼했으나 몇년 후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었다. 어느날 사마상여가 탁왕손의 연회에 초청받고 와서 거문고로 <봉구황(鳳求凰)>이란 곡조를 연주했다. 탁문군은 그 곡조에 자신을 향한 사마상여의 애모의 정이 담겨있다는 걸 눈치채고 곧 그를 사모했다. 두 사람은 야음을 틈타 성도로 도주했으나 생활이 매우 가난하고 어렵자 임공으로 돌아와 작은 주점을 열었다. 탁문군은 술을 빚고 사마상여는 설거지를 하며 생활을 하였는데, 탁왕손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 그들에게 재물을 나눠준 덕분에 부유하게 살았다. 사마상여가 후에 첩을 들이려 하자 탁문군은 <백두음(白頭吟)>을 지어 그러지 못하게 했다. 남편이 죽자 남편의 생전 공덕을 열거하여 칭송하는 글을 지었다. 채염, 이청조, 상관완아와 함께 중국 사대재녀로 손꼽힌다.[5] 중국 전국시대 협객 섭정의 누이. 평소 엄수에게 큰 은혜를 받았던 섭정은 은혜를 갚기 위해 한나라 재상이자 엄수의 원수인 협루를 살해했다. 섭정은 누이에게 해를 입을 것을 염려하고 자신의 낯가죽을 스스로 도려내고 두 눈알을 뽑아낸 후 자살했다. 이후 한나라는 시가지에 이 도적의 이름과 경력을 고하는 자가 있으면 상으로 천금을 주겠다는 방을 붙였다. 7일 후 섭정의 누이 섭앵이 이 사람이 자신의 동생 섭정임을 밝히고 동생의 이름을 세상에 밝히기 위해 밝혔을 뿐 천금을 받을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관원이 섭정을 사주한 자를 밝히라고 다그치자 섭앵은 "죽은 동생의 의기를 어찌 저버릴 수 있으리오."라며 정자의 돌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했다.[6] 가와카미 하지메(かわかみはじめ) 원저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