궈타이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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궈타이위안의 수상 경력
[ 펼치기 · 접기 ]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986
1987
1988
1990
1991
1992
2014
(코치)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1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MVP
노모 히데오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궈타이위안
(세이부 라이온즈)


이시이 타케히로
(세이부 라이온즈)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8, 1994 퍼시픽 리그 승률왕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1, 1992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와타나베 히사노부
(세이부 라이온즈)

궈타이위안
(세이부 라이온즈)

노다 코지
(오릭스 블루웨이브)



파일:궈타이위안 대만 야구대표팀 감독.jpg
궈타이위안
郭泰源 | Kuo Tai Yuan

생년월일
1962년 3월 20일(61세)
국적
[[대만|

대만
display: none; display: 대만"
행정구
]]

출신지
타이난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등번호
12[1], 18[2]
프로입단
1985년 자유계약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 (1985~1997)
지도자
청타이 코브라스 감독 (2004~2005)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투수코치 (2013~2014)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스 1군 수석·투수코치 (2015)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스 감독 (2016)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7[3], 2015, 2017)
응원가
링크

1. 개요
2. 선수시절
3. 은퇴 이후
4. 특징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궈타이위안.jpg


대만 출신의 야구선수, 지도자. 일본프로야구세이부 라이온즈에서 활약했으며, 일본에서는 그의 이름을 음독한 가쿠 타이겐으로 불리었다.[4] 한국식에서는 한자의 한국식 음독인 곽태원으로 주로 알려져있다.


2. 선수시절[편집]


대만 육군 야구부에 입대한 1982년 야구 월드컵에서 대만의 대표팀 투수로 활약하며 각국 스카우트들의 눈을 끌었고, 1984 LA 올림픽 지역예선에서 일본을 꺾는데 기여하고 팀을 LA로 이끌었다. 본선에서 동메달 획득에 성공했고[5] , 세이부 라이온즈와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프로 1년차인 1985년에 노히트 노런 달성 및 9승을 획득했다. 프로 2년차인 1986년은 수석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한 모리 마사아키가 궈타이위안을 선발에서 구원으로 전환시켜 16세이브를 올렸다. 1987년에는 다시 선발 로테이션에 안착했고 NPB 첫 두자리수 승수(13승)를 기록했다. 1988년에는 전년도와 같은 13승을 기록했으며, 1989년에는 선발진을 지탱하던 히가시오 오사무가 은퇴하며 그를 대체할 투수로서 기대되었다. 1991년에는 본인의 한 시즌 최다승인 15승을 기록했다. 와타나베 히사노부, 쿠도 키미야스와 함께 명실상부 세이부 왕조 시기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들 중 하나였으나, 손목 부상으로 1996년부터 하락세를 기록하기 시작한 뒤 1997년 시즌을 마치고 현역 은퇴를 결정했다.

13시즌 통산 기록은 272경기 등판, 117승 68패 18세이브, 평균자책 3.16 이다. 117승은 일본프로야구 외국인 사상 최다승이다.[6][7]


3. 은퇴 이후[편집]


청타이 코브라스 No.88
궈타이위안(郭泰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No.83
궈타이위안(郭泰源)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스 No.88
궈타이위안(郭泰源)

대만프로야구에서 현역으로 1-2년 더 뛸 계획이었으나, 야구계의 혼란으로 뜻을 접고 현역 은퇴. 기술고문으로 팀 동료였던 와타나베 히사노부를 영입했고, 와타나베는 대만에서 현역 투수까지 겸하며 큰 활약을 했다. 2007년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베이징 올림픽 출전권 경쟁에서 대한민국과 일본에 밀리며 출전권을 손에 넣지 못했다. 국가대표팀의 투수 코치를 쭉 맡다가 2013년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1군 투수(불펜)코치로 취임했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15년 프리미어 12,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의 대만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4. 특징[편집]


'동양의 놀란 라이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당대 아시아를 대표하는 우완 파워피처였다. 스리쿼터의 투구폼에서 나오는 속구, 고속 슬라이더 등을 구사했고 제구력도 뛰어났다. 제구력은 쿠도 키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이시이 다케히로 등으로 구성된 세이부 황금 마운드에서도 1-2위를 다툴 정도였다. 같이 배터리를 이룬 이토 쓰토무퍼시픽리그에서 대전한 오치아이 히로미츠도 인정했던 투구실력 이었다.

생애 기록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에이스급의 활약상이나 실력, 현역시절 내내 특별한 부상이나 슬럼프가 거의 없었던 이력에 비해서 등판 수가 매년 많아야 22~24경기 정도고 투구이닝 수도 그 시절 일본프로야구의 선발투수 치고는 매우 적다.[8] 이는 궈타이위안과 함께 80년대 중후반 세이부의 로테이션을 형성했던 히가시오 오사무, 와타나베 히사노부, 쿠도 키미야스와 비교해도 확실하게 비교가 된다.[9]

이렇게 등판기회가 적은 이유는 당시의 일본프로야구의 외국인선수 규정 때문이다. 당시 일본프로야구의 외국인선수 규정은 포지션을 막론하고 구단 당 3명까지 보유할 수 있으며 그 중에 1군 엔트리에 집어넣을 수 있는 선수는 2명까지였다. 그래서 당시에는 대부분의 구단이 매일 경기를 뛸 수 있는 3명의 타자를 보유하면서 그 중에 컨디션이 좋은 2명을 주전으로 쓰고 나머지 1명을 백업으로 활용하는 것이 기본이었다.[10] 때문에 궈타이위안처럼 선발투수가 외국인 엔트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등판이 없는 날은 다른 팀이 외국인 타자 2명을 쓰는 데에 반해 실질적으로 외국인 선수 1명을 빼고 맞서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11][12] 물론 당시 세이부 전력이면 외국인타자 1명[13]만으로도 충분히 다른팀 라인업을 뛰어넘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 때문에 당시 세이부 감독이었던 모리 마사아키는 주축이 되는 외국인타자 1명을 1군 엔트리에 기본으로 넣고 백업 외국인타자와 궈타이위안을 번갈아가면서 엔트리에 등록하는 방법으로 시즌을 치뤘다. 즉, 궈타이위안이 1군에 올라오면 타자가 엔트리에서 말소되는 10일간 2번 혹은 경기 수에 따라 3번을 등판시키고 바로 말소시킨 다음에 궈타이위안이 말소된 10일간은 외국인 타자 2명을 활용하고 10일이 지나면 다시 궈타위안을 올려서 바로 첫날 등판을 시키고 10일간 1군에서 활용한 뒤 다시 말소 시키고 외국인 타자를 1군으로 올리는 식의 무한반복. 이 때문에 당시로서는 초강속구인 시속 150km의 공을 가지고도 다른 일본인 선수들보다 등판기회를 적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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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5년~1986년[2] 1987년~1997년[3] 아시아선수권 한정. 아시아선수권을 한시적으로 지휘하고, 이후 2008년 대륙별 플레이오프부턴 홍이중에게 넘겼다.[4] 그 이전 시기에 뛰었던 백인천, 동시기에 활약한 궈위안즈(곽원치) 등의 다른 아시아인 선수들도 당시에는 이렇게 일본식으로 음독해 불렀다. 일본프로야구에서 아시아인 선수명을 현지어 발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표기하기 시작한 건 선동열이 시초라 알려져 있다.[5] 일본이 금메달, 미국이 은메달, 대만이 동메달을 차지했다. 대한민국은 준결승전에서 미국에 2-5로 패했고, 동메달 결정전에선 대만에 연장 14회초 3실점 하는 바람에 0-3으로 패했다.[6] 일본프로야구 외국인 투수 중 NPB 통산 100승을 달성한 투수는 곽태원 외에도 동시기에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활약한 대만인 투수인 카쿠 겐지(106승)와 1960년대에 활약한 진 바키(100승), 조 스탠카(100승) 단 네 명 뿐이다.[7] 80년대 후반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3명의 대만인 투수 곽태원(카쿠 타이겐, 세이부), 곽원치(카쿠 겐지, 주니치), 장승웅(소 카츠오, 롯데)은 대만과 일본 야구계에서 '이곽일장'으로 불렸다. 이들 중 곽원치와 장승웅은 나중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8] 궈타이위안이 현역으로 뛰던 80년대 당시는 일본프로야구에서 에이스급 선발투수라면 보통 1년에 30경기 이상 등판해서 투구수가 200이닝을 넘기는 건 기본이었다.[9] 구도의 경우에는 궈타위안과 등판수나 이닝면에서 수치상으로는 비슷하나 부상이나 부진에 빠진 기간이 길었다.[10] 현행 규정은 보유 무한대에 1군 등록은 4명까지 가능하다.(투수만 4명, 타자만 4명을 등록할 수는 없다.)[11] 1986년 마무리 투수로 전향했던 것도 이 때문. 어떻게든 출전일수를 늘리려 한 것이다.[12] 한국야구에서 엔트리 제한 문제로 비슷하게 활약이 제한되었던 외국인 선수라면, 선동열 감독 시절 KIA 타이거즈의 마무리 투수로 뛰었던 하이로 어센시오와 외국인 타자 브렛 필의 경우가 있었다.[13] 아키야마 코지, 기요하라 카즈히로와 함께 클린업을 구성하던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타일러 반 바클레오, 스티브 온티베로스 같은 우수한 타자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