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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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호
정집(正執) / 독수
본관
안동 권씨[1]#
출생
1898년 8월 28일
경상남도 진주군 청암면 궁항리
(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사망
1947년 10월 9일[2]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동경 남부 야체이카와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에서 활동하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2005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편집]


경상남도 하동 출신으로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 뒤 서울로 상경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만인 1926년에 퇴학당하였다. 도쿄에서 권대형은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일월회, 재동경조선청년동맹,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등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는 서클인 신흥과학연구회가 발간한 『신흥과학』의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이 일어나자, 권대형도 신간회 동경지회 결성에 참가하였고 제3차 조선공산당의 일본 지부였던 일본부에 입당하였다. 1928년 2월에는 제4차 조선공산당의 일본총국 동경 남부 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그 뒤 귀국하여 1930년 6월 이종림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고향인 경상남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1931년에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정치 교양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 및 서기국 책임자로 선임되었다.[독립유공자공훈록]

1931년 4월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은 단체 내 파벌투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해산하였으며, 권대형은 혁명적 노동-농민조합의 결성을 위해 출판부를 담당하며 활동하였다. 연락기관인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해 책임자가 되었고 이때 서인식 등과 함께 출판 업무를 담당해 『코뮤니스트』, 『봉화』 등을 발행하기도 하였다.[3] 일제의 검거를 피해 대구로 피신한 그는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경상남도 양산에서 조직된 경남적색농민조합 동부위원회와 광주에서 결성된 전남노농협의회를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그러던 중 1932년 3월 검거되었고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독립유공자공훈록]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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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야공파 도징(道徵)계 31세 대(大) 병(丙) 만(萬) 우(友) 항렬.[2]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57년 5월 16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독립유공자공훈록] A B #[3] 대구역사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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