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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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속 권신들
2.1. 한국사
2.1.1. 삼국시대 ~ 후삼국시대
2.1.2. 고려
2.1.3. 조선[1]
2.2. 일본사
2.3. 중국사
2.3.1. 하상주
2.3.2. 춘추전국시대
2.3.3. 한나라
2.3.4. 삼국시대
2.3.5. 서진, 동진
2.3.6. 남북조시대
2.3.7. 수, 당
2.3.8. 요
2.3.9. 송
2.3.10. 원
2.3.11. 명
2.3.12. 청
2.4. 기타 지역
2.4.1. 고대
2.4.2. 중세 ~ 근세
2.4.3. 근현대
3. 대중매체
4. 권신 역을 주로 맡는 배우



1. 개요[편집]


권신()이란 전근대에 왕조에서 신하로서 권력를 휘두르던 권력자를 가리킨다.

단순히 권력이 많거나 직책이 높은 신하들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의도되거나 설계된 바 그 이상으로 신권왕권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큰 경우나, 독자적인 권력 기반이나 군주의 총애를 믿고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면서 통제가 불가능했던 신하를 가리킨다. 가령 조선의 의정부정승들은 모두 국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법제상 권력이 보장된 자리이므로 권신이라고 지칭하지는 않는다. 또 단지 직책만 높을 뿐 실권은 적은 경우도 많았다.

권신은 권력자의 속성에서도 특히 복합적 인성 부적격(특히 불충)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반대로 복합적 인성 적격(특히 충성)을 강조하는 용어로는 중신(重臣)이 있다. 예를 들면 제갈량은 사실상 황제 대신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촉한의 국정을 장악했지만 전근대에는 제갈량을 중신이라고 했지 권신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제갈량의 충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고 같은 관료 조직이나 피지배자 사이에서의 평가가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 관이오, 악의 등이 있다.

제갈량의 사례에서 보듯 이러한 평가는 주관적인 가치판단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아, 조선시대의 경우 수양대군계유정난으로 김종서를 비롯한 당시 정치 지도부를 숙청하면서 그들이 권신이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는 김종서에게서 권신이라는 오명이 지워지기도 했다. 특히 붕당정치 시대에는 각 붕당의 리더에 대한 평가에 있어 권신이냐 중신이냐를 놓고 붕당끼리 팽팽히 대립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대간#臺諫에게 권신으로 낙인찍히는 경우가 많았다. 붕당은 대간을 중심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김조순은 이러한 과정에서 평가가 나뉘게 된 케이스로, 본인도 권력을 어느 정도 절제하기는 했지만 붕당의 시대가 끝나고 세도정치 시기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대간에 의해 중신으로 칭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도정치의 발단을 만든 장본인으로서 사실상 권신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권신들은 그 특성상 크든 작든 군주의 권력과 권위를 침범하게 되어있어서 숙청당할 때 보통 역적 타이틀을 뒤집어쓰게 된다. 반면 역으로 권신의 권세가 강해지다 못해 대세가 완전히 권신에게 흐르면 찬탈이 일어나기도 한다. 왕조 국가라면 일단 기본적으로 신하가 '군주'를 진심으로 섬기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데다, 권신들의 경우 절대 다수가 군주의 권력을 침해하고, 이에 따른 부작용이 생기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다.

군주제의 특성상 외척 출신이 권신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경우에도 예외가 있는데 군주의 의도적인 외척 견제로 권좌에서 밀려나는 경우도 많이 존재한다.

그 밖에는 개국공신이나 그 후손들이 권신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개국초기에는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하여 대숙청이 일어나는 경우도 빈번하다. 한나라유방의 예가 유명하며 그 밖에도 월나라구천, 명나라주원장도 유명하다. 처음에는 군주와 협력하다가도 장기적으로 권신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미리미리 싹을 잘라두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사람에 따라 용어의 의미를 폭넓게 해석하여 김종서, 흥선대원군, 제갈량같이 군주가 어려 선대 군주의 유탁을 받은 고명대신이나 군주를 대신해 섭정을 맡는 경우에도 권신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사극에서는 그야말로 최종보스의 위엄. 보통은 이미지상 악역으로 더 많이 나온다.


2. 역사 속 권신들[편집]


  • 권신이면서 나라에 해를 끼치거나, 반면교사가 될 경우에는 강조 표시.
  • 권신인지 아닌지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는 기울임체
  • 그리고 권력이 너무 막강해서 군주바지사장에 불과했던 경우는 밑줄로 표시.[2]


2.1. 한국사[편집]



2.1.1. 삼국시대 ~ 후삼국시대[편집]


  • 진정 - 근초고왕 대의 인물이다. 외척 출신으로 347년 조정좌평에 임명되었다. 성품이 사납고 까다로우며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에게 평가가 나빴다고 한다.
  • 진고도 - 근구수왕의 장인이다. 376년 내신좌평에 임명되면서 군주로부터 정사를 위임받았다.
  • 해구 - 백제 시대에는 해구란 이름을 가진 인물이 시대별로 세 명이나 있었는데, 이 해구는 바로 백제 문주왕 ~ 삼근왕 시기의 권신 해구이다. 문주왕을 시해하고, 어린 삼근왕 치세에서도 군주를 대신해 전횡을 일삼다가 반란을 일으켰고 토벌되었다.
  • 비담 - 선덕여왕한테 반란을 꾀하기는 했지만, 워낙에 기록이 없어서 간신인지는 불명. 여왕 측에 선 근왕파 김춘추김유신에 의해 패배해 몰락한다.
  • 연개소문과 아들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 아버지는 평가가 갈리나, 아들들은 권력 다툼으로 고구려 멸망의 단초를 제공했다. 다만 이러한 투쟁의 속사정이나 그들 개개인의 내막은 꽤나 복잡한 편이다. 자세한 것은 각 인물 항목 참조. 특히 연개소문은 최충헌과 더불어 한국사에서 군주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신하로 유명하다.[3] 대놓고 군주를 시해한 권신이며 이 당시 보장왕은 사실상 그냥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 위해 온 김춘추가 보장왕이 아니라 연개소문과 만났다는 사실은 이 당시 권력 상황이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적국인 당나라에서도 연개소문에 대해 언급하지, 보장왕에 대해선 별다른 말이 없다.(...) 그래도 보장왕은 연개소문이 동탁이나 조조와는 달리 보장왕을 잘 대해줬기에 헌제와 같은 대접은 안 받아서 그나마 다행일지도..?
  • 김유신 - 장군으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지만 당시 중앙 정치 쪽에서는 최고 실력가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덕여왕진덕여왕의 7촌이며 태종 무열왕의 7촌 겸 처남이자 문무왕의 외숙이었으니. 김유신이 가진 최고 직위인 태대각간은 17관등 중 최고 관등인 각간 위로 대각간, 그리고 거기서 다시 한 번 위로 태대각간으로 최고 관등으로부터 무려 2관등이나 올린 파격적인 직위였다. 또한 이 직위는 김유신과 사후 추증된 김인문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오르지 못했다. 사후에는 아예 신라의 군주로 추존되었으며 현재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은 왕릉의 형상을 하고 있다. 당시 김유신의 정치적 입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다. 다만 신라 군주들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동시대 고구려의 권신 연개소문과는 달리 김유신은 권력을 가져도 본분에 충실해 왕권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군주의 오른팔로써 권력을 받았고 그 권력을 충실히 군주를 위해 사용한 경우.
  • 김흠돌 - 신라 문무왕 ~ 신문왕 때의 권신. 통일전쟁 때 김유신 휘하에서 공을 세웠고 딸을 신문왕에게 시집보내 외척으로써 막대한 권력을 가졌다. 그러나 신문왕 대에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고 처형되었다. 김흠돌의 모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에 반발하여 모반을 꾀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 다른 설로는 김흠돌의 반대 세력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모반 사건을 조작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 김양 - 신무왕 옹립에 공을 세웠고 문성왕 때는 군주의 장인, 즉 국구가 되어 실세로 군림했다. 죽을 때도 김유신의 예법에 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태종 무열왕의 능 근처에 묻혔다.
  • 김위홍 - 조카인 진성여왕과의 관계로 당시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진성여왕이 남편이 없었고 당시 신라에서 근친혼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남편, 즉 국서로 봐야 한다는 의견 또한 있다.
  • 종간, 은부 - 태봉의 권신
  • 능환 - 후백제의 권신

2.1.2. 고려[편집]


  • 왕규 - 왕규의 난으로 유명한 인물인데 오늘날에는 정말 권신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문서 참조.
  • 왕식렴 - 정종 당시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경 천도를 주도하다 실패하여 국정에 혼란을 야기했다는 것이 권신으로 지목되는 이유이다.
  • 김치양
  • 강조 -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즉위시켰다. 다만 권세를 잡은 기간은 짧다. 후에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한 요 성종에 맞서 싸우다 통주 전투에서 대패해 끝내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다. 죽음 직전의 순간에 요의 회유에도 끝내 넘어가지 않았다. 현종은 강조가 죽고 나서야 제대로 군주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 이자연 - 딸 셋을 문종에게 시집보내 3명의 군주(순종, 선종, 숙종)의 외조부가 된 초유의 인물. 고려 중기의 최대의 문벌귀족인 경원 이씨의 세도를 쌓아올린 인물이다.
  • 이자의 - 이자연의 손자다. 헌종때 자신의 누이동생인 선종의 후궁 원신궁주의 아들이자 헌종의 이복동생이 되는 한산후 왕윤을 군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계림공에 의해 제압당하고 살해당했다.
  • 이자겸 - 이자연의 손자다. 예종에게 한 명, 인종에게 두 명의 딸을 시집보냈다. 그래서 인종은 이모 두 명과 혼인한 셈.[4]
  • 척준경 - 이자겸과 한패였을 때는 물론이고 이자겸을 축출한 뒤엔 더더욱 권세가 커졌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직접적으로 그가 '권력을 휘둘렀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후대에 의해 과장됐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 등을 비롯한 무신정권 역대 집권자들 - 여기서 유일하게 간신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경대승이다. 최충헌한국사 최고(물론 부정적인 의미로), 최악의 권신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신정권 당시 고려의 군주들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고 모든 권력자들이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최충헌은 연개소문과 더불어 한국사에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신하로 유명하다.
  • 기철 - 누이인 기황후의 위세를 등에 업고 온갖 패악질을 부린 원간섭기 시대의 간신. 결국 병신정변때 공민왕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 신돈 - 초기에는 개혁에 앞장섰으나, 후기에는 타락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가 창왕과 우왕을 내리 폐위시키며 폐가입진이란 논리를 내세웠기 때문에 신돈의 이미지를 왜곡했을 가능성이 높은 편.
  •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 권문세족의 핵심으로 우왕 치세의 간신들. 무진피화때 의기투합한 최영과 이성계 일파에게 숙청당했다.
  • 이성계 - 고려말 군부의 실세로서 이후 신진사대부와 결합하여 위화도 회군 이후 다른 군부의 실세였던 최영을 제거하고 왕 셋을 폐위, 살해하며 조선을 건국한다.


2.1.3. 조선[5][편집]


  • 정도전 - 태조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아 권력을 가진 경우로 간신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1차 왕자의 난으로 숙청된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역신으로 규정당해야 했지만.
  • 이거이 - 태종 연간 초기의 권신. 태종조차도 직접 건드리지 못하고 법제상 줄 수 없는 권한을 나눠주거나, 정승에서 직접 사퇴시키지 못하고 같은 정승이었던 하륜을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어 간접적으로 총사퇴 분위기를 종용해야만 했을만큼 막강한 권력을 누렸으나 결국 그 탓에 태종 치세의 공신 숙청의 일타를 찍고 만다.[6]
  • 이숙번 - 하륜과 함께 태종의 양팔이었지만 하륜과 달리 처세에 조심하지 않았고 자제력도 결여돼 권세를 마구 휘둘렀다. 물론 이를 태종이 그대로 놔둘리 만무. 결국 숙청당하고 세종 때에도 《태종실록》 편찬을 위해 잠시 서울로 올라온 걸 빼고는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충성 자체에는 의심을 받지 않았지만 복합적 인성 부적격이 원인이 된 케이스.
  • 김종서 - 단종 시기의 국정을 모조리 장악했는데 이는 수양대군 일파[7]에게 그를 축출할 명분을 만들어 주었지만, 기록을 보면 특별히 전횡을 저지른 기록은 없다. 최영과 마찬가지로 자기 절제에 충실한 케이스. 쿠데타로 숙청된 것도 똑같다.
  • 한명회 - 조선 전기 전형적인 보스형 권신. 두 딸을 각각 예종, 성종에게 시집보냈으나 모두 단명했다. 비리와 축재가 많았기에 간신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그래도 국정은 잘 이끌었고, 북방 개척에서도 활약했으며 일처리 능력도 매우 유능했다. 다만 실제로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파의 존재감이 조선 중기의 혼란에 영향을 끼친 감은 있다.
  •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중종반정 공신 - 공신 버프로 이들의 전횡이 대단히 심각했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헌데 이들은 정작 모두 중종이 즉위한지 10년이 채 되기 전에 젊은 나이에 시름시름앓다 죽고 만다. 특히 박원종은 영의정이 된지 불과 몇달만에 사망했는데 그의 나이 겨우 44세였다.
  • 이행, 이항, 심정 - 남곤 사후 김안로가 대두하기 직전에 잠깐 집권한 신하들. 사림파 사관들에게는 욕심만 많은 간신들로 분류되지만 현실은 그냥 평범한 권신들이다.[8] 김안로와 적대했다가 그에 의해 처참하게 죽고 만다. 홍경주, 김극핍 등도 이 그룹에 포함되기도 하나 홍경주는 너무 일찍 죽어 권세를 누리지 못했고 김극핍은 존재감이 없다. 이행의 형 이기는 명종 시기에 권신이 된다.
  • 조광조 - 권신은 권신이었지만, 다른 권신보다는 정도전 같은 "이상에 매몰된 권신"에 가깝다.
  • 김안로 - 조선 초기 최강의 권신+간신. 반대파를 경빈 박씨 일파, 이행, 심정, 이항 일파 등으로 몰아 참혹하게 죽였고 중종의 아들 복성군의 사사까지 주도한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다. 그의 지나치게 잔혹한 정치는 후대에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그의 '양비양시론'은 훈구와 사림의 교체기에 권력의 정점을 향유한 인물다운 견해랄까. 나중에 중종의 아들인 복성군을 죽인것까지 주도하면서 중종의 눈 밖에 나고 만다.
  • 윤원형 - 김안로와 함께 조선 전기 최강의 권신이자 간신. 덕분에 덩달아 문정왕후가 함께 비판을 받기도 한다.
  • 이기,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 윤원형과 함께 경원대군을 명종으로 옹립한 소윤의 실세들, 허나 이기를 제외하곤 거의 다 요절하여 권력을 제대로 누려보진 못했으나 을사사화의 저주. 살아남은 이기만큼은 77세까지 장수하며 윤원형에 맞먹는 세도를 구축했다.
  • 이량 -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사의 권신. 윤원형에 맞먹는 세도를 구축했으며 한때는 윤원형을 뛰어넘는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명종의 외척으로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각종 요직에 두루 앉히면서 밀어주었으나 윤원형을 견제하라는 일은 안하고 다른 외척인 심씨를 모함하고 전횡이나 일삼다가 명종의 눈밖에 나서 전격적으로 숙청되었다.
  • 정철 - 정여립을 개발살낸 후에 한동안 서슬퍼런 권력자로 조정에서 군림했으나 '건저 사건'이 계기가 되어 개발살난다. 선조는 한 마리의 독수리와 같다고 정철을 칭찬했으나 그가 1593년에 죽고 난 후에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뭉치 독기로 사람을 해친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기록상 정적을 가혹하게 숙청하는 독선적인 성격이었고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작품으로 선조에게 아첨과 아부를 하는 작품들이 있어 간신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원칙에 충실하고 신념을 굽히지 않는 자신 나름대로의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반론도 있다. 일례로 명종 21년의 기록을 보면 종친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뒤 강물에 던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군주인 명종은 자신의 종형이 간여된 일이므로 이를 조용하게 넘기려고 정철을 설득시켜 논박을 중지하도록 하였지만 정철이 명종의 요청을 거부해 명종의 눈 밖에 나서 파면되고 한직을 전전하게 된 적이 있었고, 선조에게도 '아무리 청천벽력과 같은 진노가 계시더라도 신의 말씀은 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분노한 선조에 의해 삭탈관직당한적도 있기 때문이다.
  • 류희분, 박승종 - 유영경이 숙청된 직후 이이첨이 부상하기 전까지 소북 정권을 운영하면서 권세를 누렸다. 특히 류희분은 광해군의 처남으로 외척이라 탁소북 출신인 박승종도 그와 손잡아 무사할 수 있었다. 봉산옥사 이후 이이첨과 함께 '삼창'이라 불렸으며 폐모에는 반대했으나 후금과의 외교 문제로 둘은 엇갈린다. 이이첨은 오랑캐 사신의 목을 치자고 강하게 주장했고 류희분은 거기에 좋다고 응했는데 박승종이 "류희분의 분 자는 똥 분이냐?" 비웃으면서 이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틀어진다. 인조반정 이후 류희분은 아우 류희발과 함께 목이 잘렸고 박승종은 아들과 함께 자결했다.
  • 이이첨 - 왕권 침해와 권력 남용면에서 간신이기도 하다. 다만 정치적 파트너였던 정인홍의 영향 때문인지 의외로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 김류 - 반정의 4대장 중 이서와 신경진은 무인이라 천대받고 이귀는 난폭하다는 이유로 인조의 미움을 산 와중에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잘 나갔으나, 정원군의 추숭에 반대하고 강빈 사사에 반대하면서 인조의 눈 밖에 났다.
  • 이귀 - 반정의 4대장 중에 한 명인데, 좌찬성,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이귀는 난폭하다는 이유로 인조의 신임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귀의 아들들인 이시백이시방 형제가 청빈하여 명망이 높고 인조와 효종의 권신이 됐다.
  • 김자점 - 주군 인조의 치세 초반부터 무능하기로 악명이 높았으나 인조반정에서 세운 공 하나로 권세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병자호란에서는 아예 대놓고 막나가기까지 했는데 그 결과는... 그러나 잠깐 유배를 갔다가 돌아온 뒤로는 승승장구하여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인조 후반기에는 영의정까지 되면서 다른 공신 세력들과도 대립했지만 효종 즉위 이후 청나라와의 내통 의혹으로 귀양을 갔다가 사형되었다.
  • 김우명 - 명성왕후의 부친이자 숙종의 외척으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고 송시열을 견제하기 위해 허적과도 연합을 했다.
  • 송시열 - 조선 후기 최강의 권신. 세도정치가 들어서기 전까지 그의 권세의 크기를 따라갈 사람은 없었다. 명성면에서는 세도정치 시기의 권신들조차 감히 따라가지 못할 지경. 조선사에서 사관없이 군주와 독대를 한 유일한 신하이다.
  • 허적 - 현종, 숙종조의 재상으로 적절한 과단성, 신중한 처신과 일처리로 현종과 숙종의 신임을 모두 한몸에 받았다. 탁남의 영수이자 오랫동안 영의정을 지냈으며 강력한 외척인 김우명, 김석주 등과 연계했고 자신과 적대적인 김만기, 김만중 형제에게도 손을 내밀었으나 거절당했다.[9] 허나 말년에 자신의 서자인 허견을 관리하지 못하다가 허견이 복선군 등과 역모를 꾀하는 바람에 세트로 처리당한다. 야사에선 숙종의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유악을 썼다가 나가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록》에는 관련 내용이 없으며 그가 처형될 때 읊어주는 죄목에도 없었다.
  • 김석주 - 인조, 효종조의 명재상 김육의 손자이자 효종, 현종조에 군주의 신임을 받은 김좌명의 아들이며, 숙종의 외가쪽 친척으로[10] 2차 예송논쟁에서 송시열과 서인을 실각시켰다가, 권력을 잡은 남인을 치기 위해 다시 서인과 손잡는 등의 행보로 권력을 유지하였다. 게다가 병권도 쥐고 있었다. 그는 숙종 10년에 51세를 일기로 요절했는데, 숙종의 역사상 행적을 볼 때 더 오래 살았으면 험한 일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기사환국으로 공신호를 추탈당했다가 나중에 복구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최고의 명재상 중 하나인 김육. 참고로 초상화에 묘사된 생김새가 굉장히 독특하다.
  • 민암 - 숙종 치세, 남인의 2차 집권기 당시의 최고 실세로 남인의 영수였다. 남인 재집권 이후 예조판서, 병조판서, 대제학을 거치다가 우의정에 올랐다.[11] 숙종이 장희빈에게 서서히 질려가면서 숙빈 최씨를 총애하는 것을 보고 한중혁, 함이완 등의 모의를 고변하여 남인 정권을 탄탄히 하려다가 숙종의 주특기인 환국에 휘말려서 죽고 만다.
  •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 숙종 말엽에서 경종 초의 노론 영수들로 '노론 4대신'이라 불렸다. 실로 막강한 권세를 자랑했으며 숙종과 야합하여 경종을 폐세자하려고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섣불리 경종 길들이기에 나섰다가 삼수의 옥 사건으로 모조리 죽음을 맞는다. 이중 김창집과 이이명의 권세가 가장 강력했으며 김창집의 아버지는 위에 상술한 숙종, 현종 조의 재상이자 송시열의 애제자인 김수항인데 김수항 역시 환국으로 사사된다. 이이명도 위에 상술한 김만중의 사위에다가 대사헌 이민적의 아들이다.
  • 최석항, 류봉휘, 조태구, 이광좌, 조태억 - 숙종 말엽에서 경종 초의 소론 영수들로 조태억을 제외하거나 포함하여 '소론 4대신' 또는 '소론 5대신'이라고 불렸다. 노론 4대신이 숙청된 이후에 권세가 가장 강력했지만, 영조 즉위 이후 권세가 조금씩 떨어졌다. 그래도 이광좌와 조태억은 영조 때에도 영의정이나 좌의정까지 지냈지만, 사후 '나주 괘서 사건'으로 소론 5대신 모두 관작이 추탈되었다. 순종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1#2
  • 홍인한, 정후겸 - 영조 말년을 지배한 실세, 겁도 없이 정조를 어떻게 해보려다가 정조의 교묘한 대응에 박살났으며 정조 즉위 후에 모두 사사된다.
  • 홍국영 - 정조의 신임을 얻어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일찍 숙청당했다. 그를 세도정치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 김조순, 김좌근, 김유근, 김문근, 김수근, 김흥근, 김홍근 - (신)안동 김씨 일파. 김조순이 배경이 되고 김좌근, 김홍근, 김유근 등을 비롯한 그 후손들이 전면에 서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 조만영, 조인영, 조득영, 조병구, 조병현 - 풍양 조씨 일파. 신정왕후의 외척으로 외손자 헌종이 즉위하면서 (신)안동김씨와 경쟁했고, 막강한 권력을 행세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수준을 넘어서진 못했고 철종 조에 이들이 대거 죽으면서 풍양 조씨 권세는 사실상 끝난다.
  • 흥선대원군 - 섭정이고 고종의 생부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아들 고종의 신하였다. 이는 '대원군의 가마 논쟁'에서 드러난 것인데 본래 조선의 예법에 종친들은 여덣 명이 드는 '팔인여'를 타고 정승급 대신들은 4명의 가마꾼이 드는 교자를 타는 것이 예법인데 안동 김씨 일파는 대원군에게 종친의 예를 적용하려 했으나 대원군은 끝내 대신들처럼 교자를 타고 다녔고 조대비 역시 대원군에게 교자를 타도록 했다. 본래 종친은 정치 참여를 하지 못하는 게 원칙이므로 안동 김씨가 대원군에게 오히려 더 사치스런 팔인여를 타게 하려고 했던 것. 하지만 고종이 20세가 넘어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조정을 장악하려고 한 것은 얄짤없는 권신의 모습이다. 단적으로 고종이 15세가 되자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완전히 뒤로 물러난 것이나, 최익현이 고종이 20세가 되었으니 친정을 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을 처벌하려고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후 실권에서 밀려난 대원군은 고종을 밀어내고 다른 아들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죽을때까지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지 몇개월 뒤에 생을 마감했다. 그래도 황제의 친할아버지라고 순종때 대원왕 작위를 받았다.
  • 민승호, 민규호, 민태호, 민겸호, 민영규, 민영소, 민영준, 민응식, 민영익, 민형식 - 여흥 민씨 일파. 고종의 외척으로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이후의 주도세력으로 꼽힌다. 그리고 특히 민승호, 민겸호, 민영준 등은 탐관오리로 나라를 망쳤다. 그나마 괜찮은 인물은 급진개화파였다가 온건개화파로 전향한 덕분에 악당취급당한 민영익과 함께 민씨일족의 신진으로 유명하였던 민영환 정도다.
  • 김홍집 - 갑오개혁을 총지휘한 인물이자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초대 내각총리대신이다. 당대 인사 중 업무능력이 탁월해서 여러 세력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관파천으로 인해 완전히 역적으로 몰려서 죽음을 맞이했다.


2.2. 일본사[편집]


  • 모노노베 모리야
  • 아스카 시대소가[12] 가문 - 천황가와 혼약을 맺어 정계에 진출한 소가 가문의 수장들. 소가노 우마코는 기존의 토착 호족 가문인 모노노베 일가를 척살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사위인 쇼토쿠 태자를 내세워 개혁을 주도했다. 다만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권세를 휘두르지 않고 막후정치를 행사하여 국정을 어지럽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들인 에미시와 손자 이루카는 관직을 독식하고 덴노 일족을 위협하는 등 패악질을 부리는 바람에 나카노오에 황자와 나카토미노 가마토리에 의해 척살당했다. 그리고 나카토미노 가마토리는 소가 일족을 척살한 공로로 후지와라 성씨를 하사받는다. 사실상 후지와라 일가의 중시조들이다.
  • 헤이안시대 후지와라가의 권력자들 - 천황가와의 혼사로 대를 이어가며 셋쇼와 간파쿠 직을 독식했다. 이들의 정치를 '섭관정치'라고 부를 정도. 대표적인 인물은 11세기 초반의 권력자이자 《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의 모델이라는 설도 있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 타이라노 키요모리
  • 호조 도키마사를 비롯한 호조씨 가문의 싯켄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역대 막부[13] 쇼군[14][15]


2.3. 중국사[편집]



2.3.1. 하상주[편집]




2.3.2. 춘추전국시대[편집]




2.3.3. 한나라[편집]


  • 소하
  • 곽광
  • 왕망[16] - 외척으로 제위를 찬탈해 전한을 종식시켰다.
  • 두헌
  • 양기
  • 염현
  • 조등
  • 하진
  • 십상시
  • 동탁 - 실질적으로 후한을 무너뜨린 장본인으로, 그의 폭정 끝에 후한 조정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지방 군벌이 발호, 중국은 분열기에 접어든다. 이를 어느정도 정리한 사람들이 조조, 유비, 손권 으로 이들은 삼국시대를 연다.
  • 왕윤
  • 이각
  • 곽사
  • 원소
  • 조조 조비 - 조조는 군벌로 출발하였지만, 이각 곽사의 난에서 헌제를 보호하며 실권을 쥐면서 삼국지를 대표하는 권신에 올랐다. 조비는 그의 아들이다. 조조 세력은 십상시의 난 이후의 혼란기를 정리하면서 실권을 쥐었고, 그 아들인 조비는 헌제로부터 제위를 넘겨받아 를 세운다.


2.3.4. 삼국시대[편집]




2.3.5. 서진, 동진[편집]




2.3.6. 남북조시대[편집]




2.3.7. 수, 당[편집]


  • 양소
  • 장손무기
  • 이임보
  • 양국충
  • 고력사
  • 곽자의 - 중국사를 대표하는 성공한 권신이자, 권신들의 인생 모범답안[17]이라 볼 수 있는 인물.


2.3.8. 요[편집]


  • 술률노속(述律魯速) - 거란요나라의 재상으로 태조 야율아보기의 처남이자 황후 술률평(述律平)의 오라버니이다. 술률평이 섭정할 때는 대승상, 대장군이라는 고위직에 오르며 요나라 군권을 손에 넣었고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워 술률노속의 군사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도 있었다. 거기에 직설적인 성격때문에 당시에 하은(河恩)의 말은 거짓을 내놓지 않는다는 말도 있을정도였다. 세종이 술률평을 유폐한 뒤에도 그의 군사의 기세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18] 목종에 이르기까지 70이 넘는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떠나면서 생전에 모든 것을 누린 권신이 되었다.


2.3.9. 송[편집]




2.3.10. 원[편집]




2.3.11. 명[편집]




2.3.12. 청[편집]


  •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 구왈기야 오보이
  • 허서리 송고투
  • 니오후루 허션
  • 증국번 -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청나라의 군부를 지배하던 증국번은 주변 한족 부하들에게 제위에 오르라는 청을 여러번 받았으나 이를 한사코 물리쳐 청나라의 신하로 일생을 마쳤다.
  • 이홍장 - 증국번의 제자로서 마찬가지로 청나라의 군권을 쥐었으나, 본인의 권력 확대에 사용하지 않고 청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청일전쟁의 패전으로 실패한다.
  • 원세개 - 청나라의 북양대신으로서 서방식으로 훈련받고 서방제 무장을 한 청나라 정예 부대 북양군 10만을 지휘하며 청나라의 마지막 보루였으나, 대총통에 오르게 해주겠다는 중화민국의 유혹에 넘어가 제정을 폐하는데 앞장섰다.


2.4. 기타 지역[편집]



2.4.1. 고대[편집]


  • 요압(이스라엘) - 다윗의 조카이자 군사령관. 다윗의 정복전쟁을 성공적으로 지휘하고, 압살롬과 세바의 반란을 진압한 당대의 명장. 그러나 골수 유다 민족주의자 성향을 지녔기에 다윗과 종종 대립각을 세웠으며, 실제로 다윗의 정치기반이라 할 수 있는 유다 지파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보다못한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 때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요압의 직위를 해제시키고 다른 사람을 군사령관으로 삼았으나 요압은 그를 죽여버리고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되찾아버렸다. 이때문에 다윗은 생전에 요압을 제거하지 못했고 아들인 솔로몬이 즉위하고 나서야 간신히 그를 제거할 수 있었다.
  • 포티우스, 아칠라스(이집트)
  • 암네리스(이집트)
  • 세네카(고대 로마) - 스토아 철학자로 수많은 명언을 제공한 고대 라틴어 교본의 대명사이기도 하지만, 사실 오늘날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일대에서는 악랄한 수탈을 자행한 악인으로 유명한, 로마 제국의 네로 시대를 대표하는 권신이자 탐관오리다. 젊은 시절부터 세네카는 유능함과 별개로 음모를 꾸미고 상대를 비방하는 재주가 뛰어났다고 하며, 권력욕, 명예욕이 상당했다. 따라서 갓 원로원 의원이 되었을 때인 칼리굴라클라우디우스 1세 시대부터 개인적 야심을 이용해 정치적 계략을 꾸미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 이를 자랑하듯 뽐냈다. 당연히 이런 그의 행동은 권력강화를 통해 애매모호한 황제의 지위를 확실히 하려고 한 칼리굴라 황제의 신임을 잃게 했다. 그러던 중 세네카는 황제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기소됐고, 이때 증거가 확실해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 판결 직전까지 갔다. 여기에 더해 그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불법 고리대 사업, 황실 내부 암투에 가담한 일 등에 이름을 올리면서도, 무척 뻔뻔해 머리 끝까지 열받은 칼리굴라 황제는 아예 죽여버리려고 했다. 이때 세네카는 천식으로 몸이 너무 마른 것을 이용해, 자신의 깡마른 몸을 보여주며 황제에게 "심한 천식으로 오래 살지 못하니 관용을 베풀어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간곡히 읍소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렇지만 칼리굴라 황제 암살 후 제위에 오른 황숙 클라우디우스 역시 세네카를 전적으로 신임하지 않았고, 자신의 전임자이자 조카인 칼리굴라처럼 세네카를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두 황제에게 일찌감치 "떡잎부터 노란 간신" 내지 "로마와 카이사르 가문 모두에게 큰 위협이 될 독약 같은 자" 등으로 찍혔는데, 세네카는 그럼에도 늘 뻔뻔했고 이후에도 각종 계략으로 황제와 황실 모두에게 견제 대상이 됐다. 그러다가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 황실 암투 개입과 간통 범죄에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유배되는 처벌을 받았다. 오랫동안 유배되어 잊혀지는 듯 하던 중 네로를 제위에 올리고 싶어한 소 아그리피나의 도움을 받아 겨우 로마로 복귀했다. 이후 그는 아그리피나의 의중에 따라 네로의 스승이 됐고, 이후 아그리피나파와 함께 급사한 클라우디우스의 유언장을 깡그리 무시하고 네로를 궁중쿠데타로 옹립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세네카는 네로 치세 10여년간 권신으로 있으며, 네로 이전의 두 황제가 생전 우려한 것처럼 원로원과 팔라티누스 황궁 안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 시기, 친구 부루스를 통해 군권까지 통제한 탓에 악행은 많이 가려졌지만,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오늘날 영국에 해당하는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난 부디카 여왕의 반 로마 봉기 원인을 제공했다. 그래서 그는 가장 가난하기로 유명한 브리타니아에서 벌인 인신매매, 고리대, 노예무역, 공금 횡령 등으로 로마 1년 예산정도를 개인재산(그것도 원금만!!)으로 불렸다. 같이 활동한 권신 부루스가 병으로 죽고, 티겔리누스가 후임 근위대장이 된 이후 네로와 티겔리누스가 자신을 뒷조사하기 시작하자 큰 두려움을 느끼고 나이를 들어 은퇴한 뒤 몸을 사렸다. 하지만 워낙 구린 구석이 많은데다 권모술수의 대가로 유명해, 65년 피소 사건에 일찌감치 용의선상에 올랐다. 피소 음모사건 당시, 세네카의 조카 루카누스가 연루되었는데 이때 고문에 못 견딘 루카누스가 큰아버지 이름을 내뱉으면서 반역죄로 기소됐다. 이때 네로는 자신의 옛 스승 세네카에게 스스로 정맥을 끊고 자살하는 형벌로 고통스럽게 자살케 했다. 따라서 세네카는 자살하는 방법으로 죽었다.
  • 페렌니스(고대 로마) - 폭군 콤모두스 시대를 대표하는 두 권신 중 한 명. 당대 원로원 의원이자 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국정 통치 능력은 뛰어났지만 권신답게 권력을 쥔 3년 내내 콤모두스의 호화롭고 방탕한 생활을 돕고 황제가 막장 짓을 하는 것을 방치했다고 한다. 따라서 제국 각지에서 다양한 인종, 계층의 미녀 300명과 미소년 300명을 황궁으로 보내 황제의 화려한 주연과 성교 파티를 만들어줬고, 이때부터 로마에서는 공공연하게 원로원 의석, 고위관직이 매관매직되기 시작했다. 185년 황제가, 또는 그에게 불만을 품은 브리타니아 주둔 병사 대표 1,500명이 황제에게 이 사람 문제를 거론한 것이 계기가 되면서 콤모두스 명에 따라 아들들과 함께 처형됐다.
  • 클레안데르(고대 로마) - 폭군 콤모두스 시대를 대표하는 두 권신 중 한 명. 185년 페렌니스 몰락 후, 근위대장에 오른 뒤 190년까지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 터키 프리지아 태생 노예로 황실에 운좋게 들어온 뒤 황실 침실 시종을 거쳐 근위대장까지 올랐다. 따라서 그 재능과 눈치는 가히 최고였는데, 페렌니스 이상으로 탐욕스럽고 비양심적이었다. 그는 페렌니스처럼 황제의 방탕한 생활을 도왔고, 로마 역사상 최초로 명예로운 경력 관직들까지 돈을 매겨 판매한 뒤 황제에게 이를 상납까지 했다. 하지만 190년 곡물 파동 당시, 로마 민중들의 시위가 폭동이 되고 인파가 황제가 머무는 퀸틸리 빌라까지 확산되자 황제의 명에 따라 처형된 뒤 머리가 성난 군중들에게 보내졌다.
  •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고대 로마)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외사촌, 오른팔로 근위대장을 지내는 동안 권신으로 악명을 떨쳤다. 권세와 황제의 친척, 측근이라는 점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쌓았고, 권력을 남용해 할 수 있는 잔인한 폭력과 불법행동을 모두 행사했다고 한다. 따라서 거리에서는 로마법상 불법으로 규정된 남자노예를 거세시켰다는 낭설도 돌았을 정도로 악명이 대단했다. 202년경 공동황제 겸 제위계승자 카라칼라의 장인이 되었지만, 사위와는 사이가 최악이었고, 황후 율리아 돔나까지 견제해 황후의 시종들을 불법으로 납치, 고문하는 일을 벌였다. 하지만 세베루스 황제는 그를 묵인했다. 반면 카라칼라는 장인과 아내를 모두 죽이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고, 205년 1월 22일 황태자 카라칼라가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 백인대장 세 명과 황궁 경비대들을 포섭해 직접 궁중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플라우티우스 일가를 도륙냈다.
  • 티메시테우스(고대 로마) - 고르디아누스 3세의 장인이자 권신이다. 레반트 출신의 그리스계 로마인으로 행정관료를 지내며, 세베루스 왕조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의 금고지기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시해된 이후, 문맹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쪽에 붙어 막시미누스의 군자금을 그리스, 소아시아의 폰투스 일대에서 수탈하고 추가 세금까지 징수하는 일을 담당하며 승승장구했다. 푸피에누스발비누스 즉위 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몰락하자 계급이 강등당하고 함께 몰락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권토중래를 노린다. 인맥과 갈리아 내 유력자들의 도움으로 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 고르디아누스 2세의 여동생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주도한 것으로 추측되는,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 처형 사건 후 로마로 복귀한다. 이후, 고르디아누스 3세의 근위대장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고, 소년 황제의 보호자를 거쳐 황제의 장인이 되어 막강한 권세를 휘두른다. 근위대장 취임 이후, 상당히 훌륭한 섭정이었음에도 벌인 행적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권신으로 행동했다. 그는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후, 같은 속주 태생의 율리우스 프리스쿠스, 필리푸스 아라부스 형제 등과 내각을 꾸려 완벽하게 권력을 장악한다. 그 다음 아퀼레이아 공성전에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 도륙날 뻔한 국가를 구한 장군, 원로원 의원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한 뒤 기록말살형을 내렸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와 달리 서방에서는 연공금 협상에서 실수를 하고 지진으로 여러 도시들이 피해를 입는 와중에 무책임한 행동을 벌였고, 지진이 발생해 여러 도시들이 큰 피해를 입은 가운데 사위와 함께 신탁서를 보면서 주술행위를 하는 등 기행도 벌였다. 이런 가운데, 근거지 격인 시리아 일대가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공격을 받았다. 이에 티메시테우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와 자신의 확실한 입지, 페르시아의 계속된 위협에 맞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계획해 동방으로 떠났다. 이때 그의 지휘 아래 로마군은 계속 승리했는데, 원정 중 그곳에서 갑작스레 병사했다.


2.4.2. 중세 ~ 근세[편집]




2.4.3. 근현대[편집]



3. 대중매체[편집]


권신 겸 간신은 굵은 글씨 표시.



4. 권신 역을 주로 맡는 배우[편집]


당연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중견 배우들이 맡는 경우가 절대 다수이다. 가끔은 젊은 배우들이 맡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엔 대부분 '권세만 믿고 날뛰는 찌질이' 역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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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타 조선의 주요인물에 대한 내용은 조선/주요인물 문서를 참고하라.[2] 대표적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후한 헌제가 유명하다.[3] 수양대군도 유명하지만, 수양대군은 출신 성분부터 왕족에다가 훗날 군주인 세조가 되었기 때문에 예외.[4] 물론 인종이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라 이자겸에 의해 강제로 한 혼인이었고, 후에 이자겸을 숙청하고 난 후 이모 두 명은 폐위된다.[5] 여타 조선의 주요인물에 대한 내용은 조선/주요인물 문서를 참고하라.[6] 그래도 숙청의 일타, 즉 본보기였던 탓인지 파직후 귀향시키는 것으로 끝냈고 나름 천수를 누리다 사망했다. 이후에 숙청당해 유배 후 사약을 받고 죽은 민무구, 민무질, 민무회, 민무휼에 비하면 상당히 온건한 처우였던 샘.[7] 이 일파에는 수양대군 포함한 종친들은 당연하고 이후에 사육신에 포함되는 집현전의 신진관료들까지 모조리 포함된다. 간단하게 말해서 진급 불만이다. 어린 군주 주변을 세종 시기부터 활동하던 노대신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그 이하층에서는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자세한 것은 계유정난 참고.[8] 이렇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는 바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을 무고로 내쫓았기 때문이다.[9] 허적과 김만기, 김만중 형제는 인척이기도 하다.[10] 정확히 말해서는 그의 삼촌인 김우명이 바로 숙종의 외조부이고 숙종의 모친 명성왕후의 친사촌오빠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숙종의 외삼촌은 아니고 외당숙이다.[11] 이로 인해서 남인 재집권 초반기에는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쪽에 붙어있는 조정 대신들과 남인 중진들이 많았지만 중반기 이후 민암 쪽의 세력이 강해진다.[12] 백제계 도래인이란 주장이 있지만 아직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많다. 자세한 건 소가씨 참조[13]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14] 일본의 쇼군들은 그 자체가 권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국의 군주인 천황을 마치 입헌군주제 국가의 군주마냥 상징적 국가원수로 만들어 놓고 막부의 쇼군들이 실권을 쥐었으니 쇼군 그 자체가 사전적인 의미의 권신이라 할 수 있다.[15] 그렇지만 쇼군들도 전부가 권력을 휘두르진 못했다. 물론 유능한 이들이야 권력을 행사했지만 쇼군들도 정치력이 부족해서 부하들이나 또다른 권신인 싯켄이나 간레이들에게 휘둘린 쇼군들도 많았다.[16] 일부 삼국지 덕후들에게 동탁, 조조, 사마의와 함께 소위 망탁조의라는 개념으로 묶이지만, 애당초 이 넷은 권신이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인물이다. 전한을 무너뜨린 인물이고, 동탁, 조조, 사마의는 왕망 이후 200년 지나 후한 말기에 활약한 인물들이다. 게다가 사마의는 아예 유씨의 한나라가 아니라 조씨의 위나라를 무너뜨린 인물이다. 굳이 함께 묶일만한 인물은 후한을 무너뜨리는데 공헌한 동탁과 조조 정도지만 조조는 그래도 재평가론이 끊임없이 나올 정도로 동탁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다.[17] 난세에 능력을 바탕으로 공을 세워서 출세 후 권신화, 그러면서도 끝까지 국가를 배신하거나 말아먹지 않았고, 물러나야 할 때 잘 물러나서 천수를 누린데다 후세의 평가까지 좋다.[18] 본래는 술률평을 처단하고 술률노속의 관직도 박탈했지만 후에 다시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