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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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권오설1.jpg

1928년 2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이명
박철희(朴喆熙, 朴哲熙)·김삼수(金三洙)
홍일헌(洪一憲)·권일(權一)·김형신(金亨信)
권부덕(權富德)·권형신(權亨信)

오서(五敍)·막난(莫難)
본관
안동 권씨[1]
출생
1897년[2] 12월 18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서면 가일리
(現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3] 가일마을 422번지[4][5])
사망
1930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
묘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가계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첫째 남동생 권오기(權五夔, 1901 ~ ?)[6]8.15 광복 후 안동군 풍산면의 노동조합장을 지내다가 곧 월북하였다고 하며[7], 둘째 남동생인 권오직(權五稷) 또한 형의 영향으로 조선공산당에 관계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다가 8.15 광복 후 월북했으며 주중 북한 대사 등을 지내다가 1958년에 숙청되었다.

2. 생애[편집]


1897년(고종 광무 1)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서면 가일리(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 422번지)의 몰락한 양반가에서 아버지 권술조(權述朝, 1868 ~ ?. 5. 12)[8]와 어머니 풍산 류씨(豊山 柳氏) 류영(柳榮, 1867 ~ 1953. 7. 17)[9]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양반가이기는 했으나 10대조 권박(權搏, 1607 ~ 1661. 6. 4)이 인조 8년(1630) 식년 진사시에 3등 63위로 입격하고 인조 11년(1633) 식년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여 군수(종4품) 관직을 지낸 이후로는 이렇다할 현달한 선조가 없었으며, 그 때문에 가세는 매우 빈한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 권술조가 운영하는 한학서숙, 집안 가숙(家塾)인 남명학교(南明學校) 등지에서 수학하다가 하회마을 내 사립 동화학교(東華學校)를 졸업하였으며, 경주군 지역 대부호인 최준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대구고등보통학교를 다녔으나 3학년 때 중퇴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경성부 견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장사동(현 종로구 장사동) 52번지[10] 등지에 거주하면서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다니기도 했으나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학업을 지속치 못하고 곧 중퇴하였다. 또 잠시동안 일본으로 유학하여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다녔으나 이 또한 얼마 못가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18년 전라남도 광주군으로 내려가 전라남도청의 고용원으로 근무하던 중 1919년 광주의 3.1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6개월여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1월경 출옥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원흥학술강습소(元興學術講習所)·일직서숙(一直書塾)·오릉의숙(五陵義塾) 등의 학교를 창설하여 교장 겸 교사로 활동하며 교육운동에 매진하는 한편, 농민조합과 안동청년회(安東靑年會), 일직금주회(一直禁酒會)를 조직하여 사회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경에는 동향 출신의 김재봉(金在鳳)·이준태(李準泰)·김남수(金南洙) 등과 교유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 그는 1923년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에 취임하면서 농민운동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풍산소작인회는 곧 회원이 5천명에 달하는 국내 유수의 농민운동조직으로 성장하였으며, 의결기관인 총회와 집행기관인 집행위원회 체계를 갖추고 각 면 단위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각 동에는 다시 통대를 두어 마을을 반 단위로 조직하는 등 견고한 조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또 같은 해 7월 7일 경성부 낙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서 홍명희·구연흠(具然欽)·박일병(朴一秉)·이승복(李昇馥) 등과 함께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를 창설하는데, 이 조직은 1924년 11월 19일 화요회(火曜會)로 개칭, 기존의 사상 연구단체에서 행동단체로 변모하여 후일 있을 조선공산당 창립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한편, 그는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창립총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이 시기 그는 인쇄직공조합과 철공조합 등 각 분야의 노동조합 결성에도 앞장서 활동하는 한편, 같은 해 6월 일제의 언론·집회에 대한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언론집회압박탄핵회(言論集會壓迫彈劾會)에서 방침을 결정하는 위원으로 선임되어 결의문을 작성하는 등 언론투쟁에도 참여하였다.

1925년 1월에는 안동군 안동면(현 안동시) 율세동에서 이준태·권태석(權泰錫)·김남수 등과 함께 화요회의 안동 지부격인 화성회(火星會)를 창설하여 친목단체 성격의 안동 지역의 청년회를 혁신 및 통일시키고 노동·농민운동 지원과 새로운 청년단체의 조직 등에 힘썼다.#

같은 해 2월 그는 김찬(金燦)·김재봉·김단야·박헌영 등과 조선공산당 창당을 결의하였으며, 4월 17일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창당되자 이튿날인 18일 제1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고 같은 날 조선노농총동맹 대표로서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참여하여 고려공산청년회 7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및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중순에는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및 조직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이때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들어오는 자금을 관리하며 조직을 총괄하는 한편, 6.10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는 순종황제 승하 직후인 1926년 4월 말경부터 상해의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인사들과 함께 6.10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으며, 만세운동의 투쟁지도부인 '6.10 투쟁 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책임을 맡았다. 그는 대중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의 중진 인물로서 학생운동계의 중심적 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도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포섭하는 한편 만세운동을 3.1 운동 때와 같이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학생계의 혁명적 인사들을 망라한 통일전선체로서 '대한독립당' 조직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6.10 만세 운동에는 국외의 임시정부, 병인의용대,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등이, 국내의 조선공산당·천도교 구파·조선노농총동맹, 그리고 학생계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이 폭넓게 연대를 이룰 수 있었다.

또한 만세시위 때 사용하기 위한 '격고문'과 그 밖의 전단 등을 직접 작성하고, 관계자들과 함께 격문의 지방 배포 및 지방조직과의 연락을 위해, 격문을 조선일보 지사·『개벽』지사·소비자조합·천도교 교구·기타 청년단체 등 전국 각처에 발송하고, 『개벽』·『신민』·『신여성』 등의 잡지에 격문 약간 매를 끼워 보내도록 하고, 또한 각 지역의 만세운동을 추동하기 위해 책임자를 선정하여 파견하는 등의 방침을 세웠다.

그리하여 전국을 철도선의 구획을 따라 호남선·경부선·경의선·경원선 등 4개 방면으로 나누고, 박내원(朴來源)을 호남선 방면과 경부선 방면의 중심지인 충청남도 대전군(현 대전광역시)에, 민창식(閔昌植)을 경의선 방면의 중심지인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현 황해북도 사리원시) 또는 경원선 방면의 중심지인 함경남도 원산부(현 원산시)에 파견하여 만세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다는 구체적 계획도 세워 놓았다. 그리고 서울 시가지에는 6월 8일 밤을 기해 격문을 배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곧 사건의 전모가 발각되어 6월 7일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결국 그는 1927년 3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의 예심에서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80일 통산)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0년 4월 17일 옥사하였다.

권오설은 다리에 각목을 끼우는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권오설은 자세히 말하진 않았지만 다른 피해자들의 증언을 참고하면 무릎 뒤에 각목을 대고 무릎꿇린 뒤 누르는 압슬 비슷한 원리의 일제강점기에 자주 행해진 고문이다.

경찰에서 취조를 받은 것은 때마침 여름이었다. 일주일 정도 지난 후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하라며 둥근 의자를 넘어뜨려 그 위에 나를 앉혔다. 그때 요시노 경부보가 나의 무릎 끝을 발로 차는 바람에 나는 앞으로 쓰러져 앞니를 부딪쳤다. 그 이후에는 앞니가 덜그럭거리며 움직여 바람이 스치면 고통스럽다. (...) 요시노 경부보가 양손을 목 뒤로 접고 끈으로 동여매었다. 그리고서 5, 6명의 경관이 죽도록 나를 마구 때렸다. 이어서 앉아 있는 다리의 안쪽에 각목 2개를 끼우고 하루 밤낮을 계속 고문했다. 다음날 각목 1개는 빼냈지만, 그것으로 인해 상반신이 붓고, 다리가 마비됐고, 머리가 휘청거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권오설 1>, 552쪽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3. 가계[편집]


그가 태어난 경상북도 안동군 풍서면(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은 안동 권씨 복야공파(僕射公派) 집성촌으로, 전통적인 양반마을이다. 이 마을은 본디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었는데, 1420년경에 권오설의 직계조상이기도 한 참의공 권항(權恒, 1403 ~ 1461. 6. 18)이 이 마을에 살던 사직(司直, 정5품)을 지낸 풍산 류씨(豊山 柳氏) 류서(柳湑)라는 사람에게 장가들게 되었고 이 때부터 안동 권씨 일족 또한 세거하게 된 것이다. 이 마을은 권오설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 운동가를 배출하여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의 거점으로도 크게 두드러졌는데, 이 때문에 한때 '안동의 모스크바'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였다.

이 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11]

  • 권각(權慤, 1923~1943) - 조선문화학원(朝鮮文化學院)[12] 중등과에 재학중이던 1940년 서울 사직공원에 '대한독립만세' 라고 쓴 벽보를 붙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음.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됨.
  • 권영달(權寧達, 1901~1945) -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에 6.10 만세 운동에 관련되어 일본 경찰에 쫓기자 자퇴하였다. 이후 예천군의 대창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는데, 이때 최현배를 비롯한 한글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한글 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했음.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경의 감시를 피해다니며 잠적하였음.
  • 권영식(權寧植, 1894~1930) - 대한광복회 단원으로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던 중 1918년 검거되어 공주감옥에서 수개월 간 옥고를 치렀고, 1920년에 안동청년회와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설립에 참여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음.
  • 권오상(權五尙, 일명 권오돈(權五敦), 1900~1928) - 1924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청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1925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 그 해 고려공산청년회 및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1926년 6.10 만세 운동 당시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하는 등 주도 역할을 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그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얼마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음.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됨.
  • 권오운(權五雲, 1904~1927) -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귀향하여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 활동하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음.
  • 권오직(權五稷, 1906~?) - 권오설의 동생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다.[13]
  • 권오헌(權五憲, 1905~1950) - 1928년 신간회 안동지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이후 안동청년동맹 풍산지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1929년 일제에 결사항쟁할 것을 독려한 축문(祝文)을 썼다고 하여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음.
  • 권재수(權在壽, 1882~?) - 1920년 신흥무관학교 생도를 모집하다가 체포되었음.
  • 권준표(權準杓, 1894~1953) - 1919년 족손 권오설이 세운 원흥의숙(元興義塾)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후 1923년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소작운동을 전개하였음.
  • 권준희(權準羲, 1849~1936) - 대한광복회 고문으로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던 중 1918년 검거되어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고령으로 풀려났음. 201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됨.
  • 권준흥(權準興, 1881~1939) - 대한광복회 단원으로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던 중 1918년 검거되었다. 이후 1919년 족손 권오설이 세운 원흥의숙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음.
  • 권혁수(權赫壽, 일명 권재탁(權在倬), 1926~1965) - 안동농림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4년 조선회복연구단(朝鮮回復硏究團)을 조직, 안동 시내의 경찰서 및 헌병파견대 등을 습격한 후 의성군으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교전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드러나 1945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광복으로 풀려났음. 2006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됨.

이상 12명의 독립운동가가 기록상으로 확인되며, 이 중 권오설을 포함한 5명이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 그만큼 권오설의 이후 생애에 주변 사람들의 영향이 크게 있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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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야공파 박(搏)계 35세 오(五) 오(悟) 숙(肅) 오(梧) 항렬.[2] 1928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98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갈전리·구호리와 함께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권각·권오돈·권준희·권혁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4] 현재 이 지번에는 1996년 12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남천고택(南川古宅)이 위치해 있다. 남천고택은 권오설의 고조부 권기(權璣, 1798 ~ 1849. 10. 6)의 8촌 삼종제(三從弟) 야유당(野遺堂) 권장(權璋, 1802 ~ 1874. 7. 28)이 1850년(철종 1) 넷째 아들 남천(南川) 권수(權鏽, 1832 ~ 1901. 12. 21)를 위해 살림집으로 지어 준 집이다. 1914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4년 당시 이 지번의 필지는 권수의 손자 권동호(權東浩, 초명 권영호(權寧浩), 1882 ~ 1965. 6. 4)의 소유였고, 1980년 7월 14일 권동호의 장손자 권장(족보명 권용대(權容大), 1943. 11. 17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5] 이 남천고택 서쪽에 있는 콩밭에 권오설의 생가가 있었다고 하며, 8.15 광복 후에도 권오설의 어머니 풍산 류씨(豊山 柳氏) 류영(柳榮, 1867 ~ 1953. 7. 17)과 권오설의 부인 부림 홍씨(缶林 洪氏, 1893 ~ ?. 1. 22), 첫째 남동생 권오기(權五夔, 1901 ~ ?)의 부인 안동 김씨(1902 ~ ?), 둘째 남동생 권오직의 부인 광주 노씨(1904 ~ ?), 권오설의 양자 권대용(權大用, 1944 ~ ), 권오설의 조카 권대평(權大平, 1948 ~ ) 등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대에 불에 타 전소되어 사라졌다고 한다.[6] 權五라고도 표기한다.[7] 경향신문 기사[8] 초명 권영수(權寧壽).[9] 류도긍(柳道兢)의 딸이다.[10] 현재 이 지번에 권오설아지트터(6.10만세운동추진거점)라는 이름으로 사적이 보존되어 있다.[11] 김희곤, 「안동 가일마을 사람들의 항일투쟁」,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5권 제1호, 2012.5, 467-496 (30 pages) 참조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홈페이지[12] 기독교계열의 민족교육기관으로 보이는데, 확실한 정보는 없고 다만 1939년 동아일보 기사에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인 연지정(蓮池町)에 있던 학교 건물을 서대문정에 있는 피어선성경학원으로 옮긴다는 정보가 있다. 여기서 피어선성경학원은 현재 평택대학교의 전신이다. 또 대한민국인물연감에 의하면, 한양대학교 설립자 김연준이 조선문화학원을 설립했다고 한다.[13] 199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은 권오직(權五稷, 1927~1981)과는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