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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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헌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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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1.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3.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8
2003

{{{#fab93d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55번}}}
권오길
(1988)

권준헌
(1990~2003)


이대환
(2004~2005)
{{{#ffffff [[한화 이글스|한화 이글스]] 등번호 47번}}}
김정수
(2001~2003.6.9.)

권준헌
(2004~2008)


양승진
(2008~2010)



파일:/image/003/2007/07/06/NISI20070706_0004748658_web.jpg

권준헌
權準憲

출생
1972년 1월 16일[1] (52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2]
(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백산초 - 신월중 - 광영고
포지션
3루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0년 연습생 (태평양)
소속팀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1990~2003)
한화 이글스 (2004~2008)
지도자
인천연수구유소년야구단 코치

1. 개요
2. 선수 경력
3. 은퇴 후
4. 연도별 주요 성적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한국프로야구 선수로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한화 이글스에서 활약한 야구 선수.

태평양 돌핀스 최후의 3할 타자이자, 현대 유니콘스의 전성기 시절에는 준수한 셋업맨이었다. 그러니까 한국프로야구 역사에서 흔치 않은 야수에서 투수로 전향에 성공한 선수이며, 타율 3할과 10세이브를 유일하게 이뤄낸 선수이다. 타율 3할과 10승은 한국 프로야구 원년 시절에 김성한이 달성하였지만, 이쪽은 권준헌이 처음이고 앞으로도 달성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편집]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20130123150746667-4783923.jpg
태평양 돌핀스 시절. [3]

그가 졸업한 광영고등학교 야구부는 1986년에 창단해서 1994년에 해체할 때까지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팀이었다. 권준헌은 모든 대학과 프로 팀에서 외면당한 탓에 1990년 광영고 졸업과 함께 태평양 돌핀스연습생으로 입단했다.[4] 이대로 사라질 뻔했던 권준헌은 2군에서 구르고 구른 끝에 1992년부터 1군 무대 백업으로 본격적으로 이름을 내밀기 시작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백업 선수로 뛰던 권준헌은 1995년에 처음으로 주전 3루수 자리를 차지하여 110경기에 출전해 0.306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태평양의 중심 타자로 도약했다. 타선이 징그러울 정도로 약했던 태평양은 3할 타자 자체가 희귀했는데, 1995년을 끝으로 태평양현대에 인수되어 사라지면서 이 해 유일하게 팀 내 3할 타자였던 권준헌은 최후의 태평양 3할 타자로 이름을 남겼다. 1995년의 맹활약 속에 홍현우[5] 가 사고를 치면서 빈 올스타 자리에 선발되기도 했지만, 그날 컨디션이 미쳤던 올스타전 MVP 정경훈에 밀려 출전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다.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1219000012360.jpg
찾아보기 힘든 그의 타자시절. (출처 : 포토로) [6]

그러나, 타자로서의 전성기는 태평양 시절 1군 경기에 가장 많이 출장했던 1995년이 마지막이었다. 애당초 수비가 썩 좋지 않았던[7] 권준헌은 1996년 소속팀이 현대 유니콘스로 바뀐 첫 시즌에 김원형의 투구에 손가락을 맞아 손가락이 부러지면서 그나마 낫던 공격력마저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타율 0.206을 기록한 후 1997년부터는 준주전으로 내려갔고, 1998년 외국인 3루수 스캇 쿨바가 입단한 후에는 아예 백업으로 완전히 밀렸다. 그래도 1998년 한국시리즈에 대타로 나와서 우승 반지는 끼웠다. 여기에 손가락과 팔 부상을 당해 야수로서의 가치가 바닥이 된 상황에서, 그간 권준헌의 강한 어깨를 눈여겨본 코치진의 제안으로 1999 시즌 종료 후 투수로 전향하게 되었다. 구단은 권준헌이 투수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3년간 그의 연봉을 동결시켜 줬다.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524170312741G.jpg
투수 전향 이후 (출처 : 포토로)

전향 후 첫 시즌이었던 2000년에는 1군 3경기에 등판하여 승패 없이 평균자책 10.13으로 별 실적이 없었지만, 2001년 계투로서 1군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2001년 1군 32경기에 등판하여 2승 2패 4홀드 평균자책 3.43으로 준수한 출발을[8] 한 권준헌은 2002년 평균자책 3.05, 5승 2패 1세이브 12홀드로 조용준 앞의 셋업맨으로 역할을 다 했다. 2003년에는 그간의 활약을 더해 평균자책 3.19 8승 4패 9세이브 10홀드로 조용준이 2년차 징크스 부상으로 이탈했을 때는 마무리로서 제 역할을 다 했고[9], 조용준이 돌아왔을 때는 필승 셋업맨으로 신철인과 함께 현대의 막강한 불펜을 만들면서 200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 투수와 타자로서 모두 우승 반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최고구속 150km/h대를 뿌리는[10] 강한 속구와 슬라이더의 단순한 투피치 투수였지만, 애당초 마무리 투수에게는 다양한 구종보다는 위력적인 1~2가지의 구종이 더 유용하다는 점을 볼 때 권준헌은 그야말로 분명 매력적인 투수였고, 상대적으로 늦은 투수 전향은 오히려 어깨가 싱싱하다는 장점으로 비춰졌다.[11] 2000년 이후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구대성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해 애를 먹고 있던 한화 이글스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 코치진과 불화가 있고, 부상으로 당해 시즌을 망쳤던 송지만[12]과 1:1 맞트레이드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트레이드 초기에는 차라리 내야수를 받아왔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13]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송지만이 잘해주다보니 그런 의견들은 쑥 들어갔다.


2.2. 한화 이글스[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40423233252740.jpg
(출처 : 포토로)

2004년 한화 이글스로 이적하여 팀의 마무리로 활약하면서[14] 평균자책 2.11에 17세이브를 기록할 때만 해도, 비록 송지만이 현대로 건너가서 20홈런을 넘게 치면서 살아나기는 했지만 당시 한화의 입장에서 권준헌의 영입은 전혀 아깝지 않은 장사로 여겨졌다. 그러나 2004 시즌 종료 후 2005년 6월에 팔꿈치 수술을 받으면서 투수 권준헌은 몰락하기 시작했다.[15] 팔꿈치 부상으로 2005년을 통째로 날린 후, 수술의 후유증으로 인해 투고타저 시즌이었던 2006년에 평균자책 5점대로 부진했던 것이다.

다행히 2006년 시즌 후 계약기간 2년에 옵션을 포함하여 총액 5억 원에 FA 계약을 맺고 한화 이글스에 잔류하였다. 2007년중간계투 자리에서 1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다시 살아나는가 싶었지만, 재활공장장 이라 쓰고 킬인식이라 하는김인식 감독 하에서의 무리한 등판으로 인해 다시 부상을 입으면서 전력에서 이탈했고 결국 2008년을 끝으로 한화에서 방출당하며 은퇴하기에 이르렀다. 한화 시절에 그가 남긴 인상이라고는 공두오라는 참으로 아쉬운 전과뿐이다. 현대 시절의 활약은 이 좋지 못했던 한화 시절의 모습으로 인해 묻히고 말았다.


3. 은퇴 후[편집]


한화에서 방출된 뒤 사회인 야구 레슨 등을 하였고, 현재는 태평양 시절 동기였던 가내영이 감독으로 있는 인천 연수구리틀야구단 코치로 일하고 있다. #


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타자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삼진
병살타
장타율
1990
태평양
5
4
0.000
0
0
0
0
0
0
0
0
1
0
0.000
1991
7
8
0.125
1
1
0
0
1
0
0
0
1
0
0.250
1992
46
102
0.265
27
6
1
1
1
11
0
1
0
0
0.373
1993
47
135
0.222
30
6
0
3
13
13
2
5
38
6
0.333
1994
54
111
0.297
33
7
0
1
15
14
1
8
32
3
0.387
1995
110
395
0.306
121
16
3
6
34
40
14
18
63
9
0.408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삼진
병살타
장타율
1996
현대
84
253
0.206
52
13
0
2
23
15
4
23
44
5
0.281
1997
75
212
0.245
52
7
0
2
25
19
1
19
35
13
0.307
1998
25
50
0.260
13
2
1
2
10
8
1
4
11
1
0.460
1999
22
52
0.173
9
1
0
0
5
7
2
6
10
0
0.192
KBO 통산
(10시즌)
475
1322
0.256
338
59
5
17
127
127
25
84
235
37
0.346

역대 투수 기록
연도
소속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현대
3
5⅓
0
0
0
0
0.000
10.13
10
2
2
4
8
6
2.06
2001
32
44⅔
2
2
0
4
0.500
3.43
39
4
16
29
18
17
1.21
2002
39
62
5
2
1
12
(3위)
0.714
3.05
69
4
17
44
22
21
1.37
2003
66
93
8
4
9
10
0.667
3.19
85
9
27
67
37
33
1.16
연도
소속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4
한화
35
42⅔
1
1
17
1
0.500
2.11
34
2
13
24
10
10
1.10
2005
1군 기록 없음
2006
37
42⅓
1
1
1
12
0.500
5.10
41
5
12
32
24
24
1.25
2007
23
27⅓
2
1
1
1
0.667
1.98
24
4
9
17
8
6
1.17
2008
3
2⅓
0
0
0
0
0.000
3.86
3
0
0
1
1
1
1.29
KBO 통산
(9시즌)
238
319⅔
19
11
29
40
0.633
3.32
305
30
96
218
128
118
1.23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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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971년 12월 1일[2] 당시 행정으로는 영등포구였으나 구로구를 거쳐 1995년에 금천구로 분구되었다.[3] 위 사진 유니폼은 94년~95년도 당시의 유니폼이다.[4] 반면 그의 광영고 동기인 김한수최동수는 나란히 중앙대학교로 진학했고, 뒤에 각각 삼성LG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5] 팬과 맞짱을 까서 출전 정지를 당한것[6] 오른쪽 어께 소매에 유니콘 마스코트가 있고 킷 스폰서가 리복인 걸 보면 1998년 시즌으로 추정된다.[7] 전지훈련에서 상대하는 외국 팀 코치들이 권준헌의 송구를 보면서 모두 어떤 선수인지 물었지만, 공을 잡는 자세를 보고는 다시는 선수에 대해 묻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8] 2001년 현대의 투수진은 그야말로 전년도와 비교하면 헬게이트 수준이였다. 다승왕을 획득했던 젊은 영건 김수경이 무너지고 정민태 마저 일본으로 떠나간 사이 혼자서 선발진을 지탱한건 임선동 하나였다 그리고 뒤에서 올라온 마일영전준호 및 땜방 선발진들 시즌 후 고과 연봉 1위인 송신영신철인이 잠시나마 1년간 존나게 굴렸었다.[9] 뒤에는 이상열이 셋업맨으로 고군분투 하였다.[10] 한화 시절 팔꿈치 수술 이후에도 최고 153km/h까지 뿌렸을 정도로 강견을 타고났다.[11] 사실 이건 잘못된 상식인데, 투수와 타자는 주로 쓰는 근육이 달라 부상의 위험이 크다. 후술되는 바와 같이 실제로 권준헌은 이후 부상으로 신음하다 결국 은퇴하게 된다.[12] 송지만은 발목 부상으로 주루 능력이 감퇴한 것 이외에는 타격 능력과 강한 어깨는 여전해 리그 정상급 우타자였다. 단지 2003년 부상으로 인해 커리어 로우를 찍었을 뿐. 마침 당시 송지만과 한화 구단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한화는 송지만을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해 약점인 불펜을 보강하고자 했고, 삼성 노장진, LG 장문석 등과 맞트레이드를 추진하다가 결렬, 결국 권준헌 카드를 내민 현대와 트레이드를 하게 된다.[13] 참고로 이 시기의 한화 센터라인 내야수는 전설의 임과장님부터 시작해서 원바운드 송구의 백재호, 3푼이 한상훈유격수 꽃범호 등으로 구성된 최악의 내야진이었다.[14] 당시 한화구대성일본에서 뛰던 시절이었고, 마무리 투수 문제가 심각했다. 결국 38세의 고령인 송진우가 선발, 마무리 투잡을 뛰는 상황이 되었으니.....[15] 사실 저 17세이브(34경기)는 2004년 여름 이전에 쌓은 성적으로 그 때 팔꿈치 부상으로 아웃된 후(당시 강판된 마지막 경기에선 평소 닥치고 150대 직구를 꽂아넣던 권준헌이 슬로 커브를 연거푸 던져댈 정도로 경기를 보는 사람들 모두 뭔가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눈치챘을 정도였다.) 다시 1군에 올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전혀 아깝지 않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서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