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준(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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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파일:독립운동가 권준.jpg

초명
권중형(權重衡)
본명
권중환(權重煥)
이명
권중석(權重錫)·강병수(姜炳秀)·진민각(陳民覺)
장종화(張從化)·장수화(張樹華)·권문술(權文述)
권무산(權武山)·권중산(權中山)·양무(楊武)

계언(季彦)

백인(百忍)·양무(揚武)
본관
안동 권씨[1]
출생
1895년 5월 2일
안동부 함창군 북면 척동리
(현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척동리)
사망
1959년 10월 27일 (향년 64세)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02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의열단 단원이자 중국군 장교로 항일전쟁에 참전한 공로로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권태휴는 그의 장남이다.


2. 생애[편집]


1895년 5월 2일 안동부 함창군 북면 척동리(현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척동리)에서 아버지 권석주(權錫周, 1844 ~ 1899. 4. 1)[2]와 어머니 함창 김씨(1852 ~ 1927. 10. 23)[3] 사이의 5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917년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권준은 광복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1919년 3.1 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에는 상하이로 가서 퉁지대학 공과에서 수학했다.

그 무렵 3.1 운동이 무력에 의해 진압되고 만세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생각한 독립운동가들이 여러 방향으로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권준도 만세운동보단 무력투쟁이 필요할 것이라 판단해 같은 해 11월 9일 김원봉·윤세주 등과 의열단을 결성한다. 거기서 그는 김상옥종로경찰서 투탄의거·김익상조선총독부 투탄의거·나석주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의거와 김지섭의 도쿄 니주바시(二重橋) 투탄의거 등 의거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책임을 주로 도맡았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 검거되어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출옥 후 다시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4년에는 1차 국공합작이 일어나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치는 일이 일어난다. 이를 보고 독립운동 노선도 하나로 합쳐야 한다고 생각하여 1926년 3월 8일 쑨원의 추천장을 받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전공, 장흥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약속했다.[4] 졸업한 뒤에는 교관으로 배속되어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하나로 합치기 위해 노력했다.

1932년에는 난징에서 장제스의 지원을 받은 의열단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한다. 이 학교는 1935년까지 125명의 졸업생을 냈으며 권준은 거기서도 교관을 맡았다.

1933년, 권준은 국민혁명군 장교로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한다. 그 와중에도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하려고 했으며, 1937년 조선의용대 비서장으로서 항일우한방위전에도 참가했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의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 임시정부에 들어가 1944년 내무부 차장에 취임하여 활동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우한지구 교포선무단장 및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을 잠시 맡다가 1946년 12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국군 창설에 도움을 아끼지 않았으며, 1948년 12월 7일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1반에 입교, 약 3주 간의 훈련을 수료하고 이듬해 1월 1일에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다.[5]#

임관한 후에는 제106여단장, 초대 수도경비사령관, 103사단장, 북부지구경비사령관, 서부지구경비사령관, 육군훈련소장, 초대 제3군관구사령부 사령관, 초대 제50보병사단장 등을 지냈다. 6.25 전쟁 중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1956년 김석원, 오광선 등 군 원로들과 함께 전역하였으며, 전역과 함께 소장에 진급했다.

한편 독립유공자의 업적을 기리거나 문화재 재정비하는데도 힘썼는데 1954년 민긍호 의병장의 묘를 이장하고 추모비를 건립하였으며, 1958년에는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던 안동 권씨 시조 권행의 묘인 태사묘를 재정비했는데, 이 사실은 족보에도 수록되어 있다.

1959년 10월 27일 별세하였으며,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70년 11월 17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3. 참고 자료[편집]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63~2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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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검교공파 수경(守經)계 32세 중(重) 종(宗) 인(仁) 무(武) 항렬.[2] 초명 권홍일(權弘鎰).[3] 김리(金履)의 딸이다.[4] 이 둘은 의열단, 조선의용대와 연관되었으나 광복군 창설 후에는 좌익계열과 거리를 두었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군 장성으로 복무하였다.[5] 당시 대령으로 함께 임관한 김석원·오광선·이준식, 준장으로 임관한 김홍일, 중령으로 임관한 안춘생, 소령으로 임관한 전성호 등의 동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