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쿠르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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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본명
장 데지레 귀스타브 쿠르베
Jean Désiré Gustave Courbet
출생
1819년 6월 15일
프랑스 두주 오르낭[1]
사망
1877년 12월 31일 (향년 58세)
스위스 라투르드페일
직업
화가
1. 개요
2. 생애
3. 작품
4. 사진과의 관계



1. 개요[편집]


프랑스리얼리즘 화가.

2. 생애[편집]


부유한 농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는 법학가가 되려 했으나 포기하고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의 화가로서의 특징은 철저한 사실주의라 할 수 있다. 천사를 그려달라는 누군가의 요청에 "난 천사를 본 적이 없다. 천사를 내 눈앞에 데려다놔라. 그때 그려주겠다."라 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 그래서 사실주의를 무척 싫어하던 인상파 화가 에드가 드가는 쿠르베가 그린 그림을 보고 "그래서 어쩌라고? 차라리 사진을 찍으면 될 거 아냐?"라는 비아냥을 쏟았는데 당연히 쿠르베와 드가의 관계는 물과 기름이었다. 1859년에는 국제박람회에 점잖은 그림을 낸다는 조건으로 자신의 작품을 출품해보라는 정부 미술관장의 권유가 있었으나 단호하게 거절하고 박람회장 정면으로 자리를 마련해 개인전을 열었다. 관람객이 없어서 실패했고 그 중 유명한 작품이 《화가의 아틀리에》였다.

원래 법학가 지망생이라 그랬는지 파리 코뮌에 참가할 정도로 정치와 사회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훗날 파리 코뮌이 무너지자 의원이었던 쿠르베는 스위스로 망명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3. 작품[편집]


파일:attachment/Gustave_Courbe.jpg
절망하는 남자
젊었을 때 그린 자화상.[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97px-Gustave_Courbet_010.jpg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Bonjour Monsieur Courbet)
당당히 지팡이 짚고 검은 수염 기른 인물이 쿠르베이며 가운데의 녹색 코트의 사내가 브뤼아스, 뒤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사람은 브뤼아스의 하인 칼라스이다. 보통이라면 쿠르베가 후원자인 브뤼아스에게 예를 표해야겠지만 반대로 그리면서 가진 화가로서의 자존심과 긍지를 나타냈다.

파일:attachment/귀스타브 쿠르베/Example.jpg
화가의 아틀리에

파일:돌 깨는 사람들.png
돌 깨는 사람들

여성의 성기를 적나라하게 그린 이 작품은 예술 작품이라는 본질이 무색하게 낚시용 짤방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이거 말고도 다리를 들어 검열삭제가 보이는 무희 그림이라든지 많이 그렸다.

4. 사진과의 관계[편집]


그가 화가의 꿈을 걷기도 전인 182~30년대에 사진이 이미 발명되었지만 쿠르베는 '사실'을 추구했다. 여기서 '사실'이라는 개념은 사진이 나오면서 한물 간 재현메타가 아니라, 1848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낭만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사회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사회비판적인 예술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또한 쿠르베는 실제로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데 사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 전에 화가들이 재현메타를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한 것과 비슷하다. 또한 그의 작품은 역설적으로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역할도 했다.
[1] NGA Systematic Catalogue, "Gustave Courbet", National Gallery of Art[2] 이센스의 손님 demo버전의 커버로 쓰이기도 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2번 《어둠 속의 사건》의 표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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