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이씨(영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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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고종의 후궁. 고종의 서장자이자 훗날 완친왕으로 추증되는 완화군 이선의 어머니다. 제2의 희빈 장씨, 숙빈 최씨, 영빈 이씨를 꿈꾸었으나 결국엔 화무십일홍의 삶을 살다 간 인물.
명성황후가 순종을 낳게 되면서 완화군과 함께 출궁하기 전까진, 희빈 장씨와 행보가 비슷했다. 왕비가 들어오기 전부터 총애를 받던 연상의 궁녀, 왕비를 제치고 먼저 왕자를 낳은 점, 심지어 둘 다 왕비가 여흥 민씨 집안 출신이었다. 다만 중인에 소문난 거부 집안의 딸이던 장씨와는 다르게, 이씨는 아예 평민 출신이다.
2. 생애[편집]
본래 궁녀였는데 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상궁이 되었다. 승은을 입을 당시 고종은 명성황후와 혼례를 올리기 전인 15세였고, 그녀는 9살이나 많은 24세였다. 명성황후와 가례를 올린 첫날부터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만큼, 이씨를 총애했다고 한다. 1868년 운현궁에서 고종의 첫 아들을 출산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고종의 서장자인 완화군이다.
그러나 아들을 낳고도 이씨는 정식 후궁으로서의 봉작을 곧바로 받지 못했다. 1871년 왕녀를 낳았으나, 이때도 후궁 봉작을 받지 못하였으며 아들도 1876년(고종 13년)에 9세가 되어서야 군으로 책봉받았고, 본인은 1878년(고종 15년)에 관례를 치를 때까지도 봉작 받지 못했다.전교하기를, "오늘 진시(辰時)에 궁인(宮人) 이씨(李氏)가 아들을 낳았다. 산모를 보살펴주는 등의 일을 운현궁(雲峴宮)에서 대령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5년 윤4월 10일
역대 왕실 대대로, 이씨 성을 가진 여성은 왕비는 고사하고 후궁으로 봉작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컸다. 아마도, 이씨가 후궁으로 봉해지지 못한 이유를 살펴보자면 신분이 낮았다기보단 이씨 성의 후궁을 꺼리는 왕실 내부 사정 탓이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2]
1880년(고종 17년)에야 비로소 최하위 말단 품계인 숙원에 책봉되었는데,[3] 불행히도 그해에 완화군이 13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남은 평생을 홀로 보냈다. 비록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매천야록》에서는 명성황후가 한때 원자로 거론되었던 완화군을 죽였는데, 일설에는 젓갈항아리에 빠트려 죽였다고 하고 또는 방망이로 때려죽였다고 하는 말도 있었다고 기록했다. 또 다른 야사에는 명성황후가 홍역을 앓고 있는 완화군에게 인삼탕을 보내 열이 오르게 하여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야사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당대의 신문기사를 참고하면 "민비의 미워하심을 받아" 같은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너나 할 것 없이 명성황후를 범인으로 의심한 듯 하다.[4]
1906년(고종 43년)에 귀인으로 책봉받았고, 1928년 12월 17일에 사망했다.
현재 묘소는 서삼릉 귀인 묘역에 있다.李貴人別世
순종의형님되시는이를나흐신 완왕궁 리귀인(完王宮 李貴人)은 팔십세의로령으로 지난십칠일 정오에 별세하얏더라
(현대어 버전) 이귀인 별세
순종의 형님되시는 이를 낳으신 완왕궁 이귀인이 80세[5]
의 고령으로 지난 17일 정오에 별세하였다.
3. 대중 매체[편집]
- 1965년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서는 배우 이민자가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