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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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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揆園史話

1. 개요
2. 진위 논란
2.1. 위서론 관련 자료
2.2. 진서론 관련 자료
3. 규원사화상 고조선 왕사
4.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규원사화(揆園史話) 원문

조선 후기에 기록한 역사서. 진서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곤 하지만, 거의 대부분 위서라는 데에 의견이 모인다. 북한 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책에 따르면 북애자(北崖子)라는 사람이 조선 숙종 즉위 이듬해(1675)에 저술했지만 곧이 믿을 수는 없다.[1] 현재 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 중이다.

2. 진위 논란[편집]


환단고기를 비롯한 20세기 사이비 고대사 위서들의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어 신빙성이 낮다. 그러나 정작 환단고기를 공개한 (혹은 저술한) 이유립은 규원사화가 윤덕영이 날조한 책이라고 비난했고, 나중에는 자신이 만든 잡지 『커발한』에서 규원사화를 연재하면서 멋대로 개작하기도 했다.팀킬 경쟁자를 견제하는 건 당연 두 책이 전하는 단군조선의 연도부터 불일치하는 등[2] 명백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많아서 양쪽 다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북한이나 일부 사학계에서는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만, 환단고기를 연상케 하는 내용들이 넘쳐나며 텍스트 비평도 통과하지 못하는 등 많은 문제가 있어서 대한민국의 대부분 사학자들은 규원사화의 내용을 인정하지 않고 책 자체에 대해서도 위서라고 본다. 일단 전문가 라인에서 심의한 사례를 보자면 1972년에는 고서심의위원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의 3인이 심의하여 조선 왕조 숙종 1년(1675)에 작성된 진본이라 판정했지만, 2003년 3월에는 서지 전문가들이 비공식적이기는 하나 재감정하였더니 대체로 진본이 아니고 일제강점기 당시 필사되어 제본된 책이라고 판단했다. 공식적으로 다시 하는 게 좋겠지만 아직 하질 않고 있다.

아래에서 설명하듯 현재는 애초에 조선시대 저작이 아니란 주장이 정설이다. 일단 1889년 일제 육참본부에서 나온 만주지지(滿洲地誌)의 내용이 고대로 실렸다. 설령 진서라 할지라도 내용이 고고학적 성과나 교차검증에서 죄다 걸리는 등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료적인 가치가 없다. 다만 일부에서는 민족주의적으로 보면 평가할 가치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쉽게 말해 조선시대 원조 환빠 기질이 있던 어느 인물이 병자호란 이후 분해서 쓴 찌라시 비슷하게 볼 수도 있다는 것.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규원사화가 정말로 1675년에 집필되었다고 한다면 이상한 부분이 있다. 서문에서 "우리 선조들의 옛 강역이 적국의 손에 들어간 지 이미 천여 년(我先祖舊疆, 入于敵國者已千年)"이라고 하는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에서부터 계산한다면 천여 년이 되겠지만 규원사화에서는 발해를 명백하게 우리 민족의 나라로 간주하므로 발해가 멸망한 926년에서부터 따지면 비교적 짧은 749년에 불과하다.

여기서 '천 년'이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저 오랜 세월의 관용적 표현이라고 하거나, 모르는 사람이면 대충 천 년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개탄하면서 역사책을 썼다는 서문에 나온 말이라 설득력이 떨어진다. 아무리 문학적 표현이라 해도 역사책에 그런 구절을 씀은 자승자박이 아닌가? 사족으로 발해 멸망에서 천 년 후는 마침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이다.[3]

게다가 단순히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도 없다. 신라 선덕여왕대(632~47년 재위)에 건립된 첨성대를 천수백 년이 지나도록 서 있다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규원사화가 1675년에 집필되었다면, 첨성대가 건립된 지 거의 문자 그대로 천 년이 된 무렵이다. 왜 첨성대를 두고 '천 년'이 아니라 '천수백 년'이 지나도록 서 있다고 표현했을까?

또한 1675년은 강희제 재위 14년으로 청나라가 중국을 완전히 정복하고 매우 강성한 시기인데도 여진족을 쇠미한 일족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청나라가 망한 이후에 더 강한 이웃이 나타나면 조선을 정복하고 백성을 노예로 부릴 것이라고 말하며 애통해하기까지 하는 등 일제강점기가 아닌 숙종 연간에 작성된 사료라면 지나치게 예언적인 구절이 많다.

더구나 규원사화에서는 초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관념대로 여진족을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보는 관점을 그대로 취하기 때문에, 압록강 북쪽의 우리의 강역을 잃었다고 슬퍼하면서 그와 동시에 여진족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고 강변한다. 심지어 우리가 여진족과 연합해서 중국을 무찔러야 비로소 중국의 오만함을 꺾을 수 있으리라는 말까지 나온다. 효종의 북벌 계획이 실현되지 못함을 한탄한 구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자가당착이다. 청나라가 만주와 중국 본토를 석권한 1675년에 쓰인 글이라면 좀처럼 납득이 안 되는 모순적인 부분으로, 이는 규원사화가 실제로는 이미 청나라가 멸망한 시점에 작성되었음을 시사한다.

사실 연도 표기만 봐도 문제가 있다. 규원사회의 서문에서는 글을 쓴 시기를 "상지2년을묘3월상한(上之二年乙卯三月上澣)"이라고 적었다. (글을 쓸 당시의) 임금(上)이 즉위하고 2년이 된 을묘년 3월 중 상순이란 뜻이다. 규원사화가 1675년에 쓰였다 운운함은 숙종이 1674년(갑인)에 즉위했기 때문이다. 숙종이 즉위한 이듬해 1675년(을묘)이 '상지2년을묘'라고 본 것이다.

문제는 조선시대의 유교적 셈법을 따른다면 1675년이 상지2년을묘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반정 등으로 선왕을 축출하고 즉위한 경우가 아닌 한, 효를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에 따라 선왕이 통치한 마지막 해 또한 선왕의 통치기간으로 간주한다. 이론적으로 1월까지만 선왕이 통치하다 죽고 2월에 새 왕이 즉위했다고 해도 그 해 전체를 선왕의 통치기간으로 잡는다. 숙종은 1674년(갑인)에 즉위했지만 이해는 선왕 현종이 다스린 시절로 셈하여 현종 15년으로 간주하고, 이듬해 1675년(을묘)이 숙종 1년이 된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알 수 있다. 숙종실록에서 숙종이 즉위한 1674년의 첫 기사에서는 연도를 "현종대왕 15년, 청 강희 13년 갑인"이라고 적었는데, 이듬해 1675년 설날의 첫 기사에선 "숙종대왕 원년 을묘"라고 하였다. 따라서 만약 숙종 때 선비가 1675년을 의도했다면 '상지2년을묘'가 아니라 '상지원년을묘(上之元年乙卯)'라고 썼을 것이다.

시대적 차이가 좀 있으나, 19세기 최익현이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를 쓰면서 첫머리를 상지십년계유동上之十年癸酉冬(임금이 즉위하고 10년인 계유년 겨울)이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고종이 1863년에 즉위했으나 이듬해 1864년부터 고종 1년으로 쳤기 때문에 최익현이 쓴 '상지십년계유'는 1873년이다. 실제로도 1873년의 간지는 계유이므로 톱니가 들어맞는다.

그런데 규원사화에서는 숙종이 즉위한 해를 1년으로 보고 그 다음해를 2년이라고 표현하였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는 선왕 현종을 정당한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소리인데, 숙종 시절의 선비가 이렇게 표현할 리는 결코 없다. 숙종이 선왕 현종의 적장자로서 임금이 되었는데, 현종을 정당한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숙종은 인정한다면 실로 모순이며 어불성설이다.

혹시 '상지2년을묘'란 구절의 '상'이 숙종이 아닌 다른 임금을 가리킬까? 즉위년으로부터 2년 뒤가 을묘년이라면 즉위년은 계축년이란 소리인데, 조선시대 역사 전체를 통틀어 계축년에 즉위한 임금은 없다. 반정으로 즉위한 임금들은 즉위한 해부터 즉위 원년으로 셈하므로, 만약 이런 경우라면 반정이 갑인년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역시 조선시대에 반정으로 즉위한 임금들 중 갑인년에 거사를 행한 인물은 없다. 따라서 조선이 건국한 뒤부터 멸망할 때까지 어떻게 따져도 선비가 '상지2년을묘'라고 표현할 법한 연도가 없다. 이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연도를 헤아리는 방식을 잘 모르는 근현대 사람이 한문 고서를 위조하며 무지 때문에 실수했다고 보아야 더 자연스럽다.


2.1. 위서론 관련 자료[편집]


위서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논문은 다음과 같다.

  • 송찬식, 〈僞書辨〉, 《月刊中央》, 1977, 9월호
  • 이순근, 〈고조선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성심여자대학교》, 1987.5.15
  • 조인성, 〈現傳 《揆園史話》의 史料的 性格에 대한 一檢討〉, 《李丙燾 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
  • 조인성, 〈《揆園史話》論添補〉, 《慶大史論》3, 1987, 경남대학교
  • 조인성,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韓國史市民講座》2輯, 1988
  • 조인성, 〈《揆園史話》論 添補〉, 慶大史論, 1987.3


2.2. 진서론 관련 자료[편집]


위서론에 반박하고 진서임을 주장하여 규원사화의 내용의 실제 역사로서의 가치를 주장하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규원사화》 〈단군기〉의 중국과의 외교.전쟁 등에 해당되는 중국 사서의 기록과 연대가 부합함을 제시하였다.
  • 최인철,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사회과학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규원사화》는 다른 단군관계비사들에 비해 과장이나 가필이 적다고 판단, 일부 내용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규원사화》가 숙종 초 북애자가 쓴 진서라는 설에 동의하지만 그 내용의 사료적인 가치보다는 조선 후기의 민족주의의 흐름을 반영하는 자료로서 더 비중을 두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 한영우, 17세기의 반존화적 (反尊華的) 도가사학의 (道家史學) 성장 - 북애의 (北崖) 〈 규원사화 (揆園史話) 〉에 대하여 -, 한국학보, 1975
  • 정영훈, 〈규원사화의 민족사상〉, 고려대학교, 1981
  • 정영훈, 〈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사상적 성격에 관한 연구 : 한말-정부수립기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1993
  • 정영훈,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인식〉,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비주류사상인 선가(仙家)의 역사인식에 주목하였다.
  • 심백섭, 〈'규원사화'의 본문구조와 세계관 형태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1993


3. 규원사화상 고조선 왕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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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같이 보기[편집]


[1] 서문에서 만주족을 언급하면서 효종의 북벌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원통해하는 듯한 표현이 있고 상지2년을묘3월상순(上之二年乙卯三月上澣)에 썼다고 기술하는데, 효종 이후 즉위 후 1~2년째가 을묘년인 임금은 숙종밖에 없으므로, 해당 표현이 숙종 즉위 다음해인 1675년을 의미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2] 환단고기: 기원전 2333~기원전 238년(2096년간), 규원사화: 기원전 2333~기원전 1128년(1205년간)[3] 이 때문에 '상지2년을묘'가 1675년이 아닌 1915년이고 '상'은 조선의 왕이 아닌, 1913년 3월에 취임한 미국의 우드로 윌슨을 의미한다는 말도 있다. 혹은 1914년에 즉위한 교황 베네딕토 15세나. 물론 농담이겠지만, 은근히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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