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니코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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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그라니코스.png
그라니코스 강 전투,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 1665년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마케도니아 왕국군
3.2. 아케메네스 왕조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기원전 334년 5월, 마케도니아 왕국알렉산드로스 3세가 그라니코스 강(오늘날 터키의 비가차이(Biga Çayı))을 건너 아케메네스 왕조의 소아시아 태수들의 병력을 격파한 전투. 페르시아 원정을 단행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첫번째 회전이다.

2. 배경[편집]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후, 마케도니아 왕국의 새 국왕으로 즉위한 알렉산드로스 3세는 부친이 생전에 단행하려 했던 페르시아 원정을 이어받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트라키아인들을 제압하여 북쪽 국경을 안정시켰고, 일리리아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테베를 비롯한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반란 역시 제압했다. 이리하여 국내의 정세를 안정시킨 뒤, 기원전 334년 봄 4만 가량의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를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헬레스폰트를 건넌 뒤 북부 고원의 산맥을 피해 아나톨리아의 북부 해안을 따라 진군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국왕 다리우스 3세는 적이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마침 몇몇 사트라프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느라 이를 조기에 대처할 여력이 없었다. 또한 그는 믿을 수 있는 지휘관 멤논[1]과 소아시아의 사트라프들이 알아서 막아줄 거라 기대했다.

소아시아의 사트라프였던 스피트리다테스와 아르시테스, 그리고 멤논은 군사 회의를 열어 마케도니아군을 어떻게 막을 지 논의했다. 멤논은 적의 기세가 강하니 전면전을 회피해야 하며, 해군을 이용해 적의 해상 보급로를 끊고, 마을을 불태우고 농지를 갈아엎고, 우물에 독을 타며, 작물을 태워버리는 등 청야 전술을 구사하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한다면 적은 진군할수록 식량을 확보하는 게 어려워져 점점 약화될 테고, 충분히 약해졌을 때 역공을 가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피트리다테스와 아르시테스는 멤논의 제안을 거절했다. 두 사람은 멤논의 제안대로 했다가 거주지와 재산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백성들의 원성이 심할 것을 우려했고,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마케도니아군을 충분히 격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라니코스 강에서 적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라니코스 강은 너비가 약 60피트였고, 물살이 거셌기 때문에 쉽게 건널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병력을 배치해 둔다면, 마케도니아군이 감히 건너지 못하리라 여겼다.

얼마 후, 알렉산드로스는 정찰병으로부터 적이 그라니코스 강 건너편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그는 소아시아에서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러던 중 적이 그라니코스 강에 집결했다는 걸 알게 되자, 그는 즉각 그곳으로 향했다. 그라니코스 강에 도착한 뒤, 파르메니온 등 여러 장수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밤에 강의 상류 지역으로 올라가 몰래 건너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거절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라니코스를 두려워한다면 헬레스폰트에게는 불명예일 것이오."


이후 그는 기병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페르시아군을 향해 돌격했다. 이리하여 알렉산드로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 첫번째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마케도니아 왕국군[편집]


알렉산드로스 3세가 원정을 단행했을 때 동원한 마케도니아군은 37,000명으로 보병 32,000명과 기병 5,000여 명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라니코스 강에 도착하자마자 전투를 개시했기 때문에, 병력 전체가 전투에 동원되지는 않았다. 현대 역사가들은 그라니코스 전투 때 투입된 마케도니아 병력은 1만 8,000명으로 13,000명의 보병과 기병대 5,000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3.2. 아케메네스 왕조군[편집]


그라니코스 전투에 동원된 아케메네스 왕조군의 병력은 고대 사료마다 차이가 많다. 현대 역사가들은 2만 내지 3만 명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그 중 그리스 용병대는 5,000명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들은 그라니코스 전투 당시에 상당히 독특한 진형을 구축했다. 그라니코스 강이 흐르는 아드레스타이아 평원의 강둑에 기병대를 배치하고, 그리스 용병 보병대를 후방에 배치해 둔 것이다. 당대에도 탁월한 전투력을 갖추기로 유명한 그리스 보병대를 후방에 배치해둔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사트라프들이 같은 그리스인끼리 싸우는 걸 주저할 거라 예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큰 실수였다고 지적한다. 기병대는 강둑에 대거 배치되어 있어서, 돌격을 통해 적진을 뒤집어놓을 수 없었다. 게다가 보병대가 후방에 있어서 후퇴할 공간이 부족했다. 또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주력 부대인 낫전차은 진흙투성이의 강둑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배치가 마케도니아군의 갑작스런 도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

4. 전투 경과[편집]


파일:그라니코스 전투도.jpg

아리아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투구에 크고 하얀 깃털을 꽂고 기병대의 선두에 섰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병력을 강의 서쭉 둑에 정렬시켰다. 파르메니온이 그리스-트라키아 혼성 부대로 구성된 좌익을 지휘했고, 마케도니아 보병대는 중앙에 배치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가 친히 이끄는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우익에 배치되었다.

그날 저녁,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페르시아군 궁수대가 즉각 수많은 화살을 쏟아부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무릅쓰고 강 건너편 강둑으로 올라갔다. 아리아노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스스로 나팔을 불며 우익을 이끌었고, 부하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는 물줄기가 옆으로 꺾인 방향으로 대열을 늘어서며 여울에 들어섰는데, 이는 그가 대열을 이끌고 강물에서 나올 때 페르시아인들이 강으로 도로 밀어내는 걸 억제하고, 그 자신은 가능한 한 넓은 대열로 적을 마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건너편 강둑에 도착한 직후,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기병대와 페르시아 기병대 간의 격투가 벌어졌다. 알렉산드로스가 설마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강을 냅다 건널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페르시아 기병대는 당황해 했고, 적 기병대가 국왕을 중심으로 막강한 기세로 밀어붙이자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이때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그리스 용병대는 전투 내내 제자리를 지킬 뿐 움직이지 않았다.

한창 격전을 벌이던 중,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의 사위인 미트리다테스가 페르시아 주력군과 떨어진 채 일부 기병대와 함께 싸우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즉각 그쪽으로 달려가 미트리다네스의 얼굴을 검으로 후려쳤다. 이 광경을 목격한 로이사케스 장군이 미트리다테스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어 알렉산드로스의 투구를 후려쳤다. 이로 인해 투구가 깨졌고 깃털 일부가 잘려나갔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로이사케스의 목을 베었다.

이때 사트라프이자 로이사케스의 형인 스피트리다테스가 알렉산드로스의 바로 뒤에서 도끼를 들어 내리찍으려 했다. 그러자 클레이토스 장군이 곧바로 검을 휘둘러 스피트리다테스의 팔을 베어버렸고, 알렉산드로스는 이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렇듯 지휘관들이 무력화되자, 페르시아 기병대는 사기가 뚝 떨어져 사방으로 달아났다.

알렉산드로스는 도망치는 페르시아 기병대를 쫓는 대신 후방에 가만히 있던 그리스 용병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용병대는 자비를 청했고, 멤논은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페르시아를 위해 동족을 배반한 배신자로 간주하고, 전군에 저들을 포위한 뒤 섬멸하라고 지시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리스 용병들은 판단보다는 열정에 이끌려 비난을 퍼붓는 알렉산드로스의 밑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자들을 섬멸하려는 그의 고집으로, 그는 이전의 모든 전투보다 많은 아군 병사들의 목숨을 잃었다.


결국 그리스 용병대는 섬멸되었고, 멤논은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살아남은 2,000 명의 용병들은 광산에서 사슬에 묶인 채 일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로 이송되었다. 한편 팔이 잘려나간 스피트리다테스는 포로가 되었고, 아르시테스는 프리기아로 도망친 뒤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살했다. 이리하여 그라니코스 전투는 마케도니아군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5. 결과[편집]


마케도니아군의 사상자는 300~400명 정도였다. 아케메네스 군의 기병대 전사자는 1,000명가량이었고, 그리스 용병대 5천 명 중 3천명이 살해되었으며, 생포된 2,000명은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갑옷 300벌을 아테네로 보내 파르테논 신전에 걸어두게 하고,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기라고 명령했다.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라케다이몬인[2]

을 제외한 그리스 연합군이 아시아에 사는 야만인들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을 바칩니다."


이것은 페르시아가 일전에 아테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보복을 시작했다는 걸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전사한 헤타이로이 25명을 기리는 동상을 올림푸스 산 근처의 제우스 신전에 세웠다. 이 동상은 제우스 신전 인근에 전시되었다가 기원전 146년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끝난 후 퀸투스 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아누스에 의해 로마로 옮겨졌고, 카피톨리누스 언덕 아래에 세워진 포르티코에 전시되었다.

그라니코스 전투 후, 알렉산드로스는 큰 저항 없이 소아시아 일대를 평정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333년 시리아로 진군한 그는 침략자를 격퇴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온 다리우스 3세를 상대로 이소스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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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도스 섬 출신의 용병 지휘관으로, 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의 장군 파르메니온이 페르시아를 침입했을 때 마그네시아에서 격파한 적이 있었다.[2] 스파르타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