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쿠스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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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그라쿠스 형제.jpg
그라쿠스 형제 조각상.[1]

1. 개요
2. 어린 시절
3.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3.1. 농지법
4. 가이우스 그라쿠스
5. 형제의 동기
6. 평가
7. 후손



1. 개요[편집]


그라쿠스 형제는 공화정 시절 로마정치가로서, 형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2]와 동생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Gaius Sempronius Gracchus)[3]를 이른다. 이들은 기원전 2세기 호민관을 역임하며 농지법을 발의한 뒤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초기에 몇 차례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결국 둘 다 원로원에 의해 피살당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고대 역사에서 귀족 층에 맞서 평민들에게 부의 분배를 시도한 가장 유명한 사례로 꼽히며, 후대의 사회주의대중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


2. 어린 시절[편집]


그라쿠스 형제는 유서깊은 평민 귀족인 셈프로니우스 가문 출신이었다. 이 두 형제는 아버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4][5]와 어머니 코르넬리아(Cornelia Scipionis Africana)[6][7]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77년과 163년 집정관을 맡았던 정치인이었고, 어머니 코르넬리아는 한니발 바르카를 이긴 로마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둘째 딸이었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 그라쿠스와 외할아버지 스키피오는 서로 정적 사이였지만 스키피오는 그라쿠스의 능력을 인정하였고, 그가 자신이 부패 혐의가 씌워져 처벌받는 것을 호민관의 거부권을 사용해 막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둘을 결혼시켰다고 한다.[8]

나이차가 상당히 많이 나는 결혼이었지만 부부의 금슬은 매우 좋아서 자녀가 무려 12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형제가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는데, 일반적인 로마 여성들과 달리 코르넬리아는 재혼하지 않고 자녀들의 교육에 힘썼다. 코르넬리아는 자녀들에게 그리스 출신의 교육자를 붙여주었고, 형제는 이 가정교사들로부터 웅변술과 정치학을 배운다. 이때 이들은 그리스의 민주주의 체계와, 공화정의 모든 권력은 국민들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상을 배웠다. 이는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또한 이들은 당시 젊은이들에겐 필수적이었던 군사 교육도 배우는데 이들은 승마술, 무술 등을 배웠다. 이들은 곧 젊은이들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재능을 보이게 된다. 두 형제 중 맏이였던 티베리우스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 종군한 젊은 장교 중 가장 뛰어난 통솔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카르타고 성벽을 가장 먼저 돌파한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또한 히스파니아에서 발발한 누만티아 전쟁에서는 뛰어난 외교술로 2만에 이르는 병력의 목숨을 구해내는 등의 활약을 한다. 그들의 뛰어난 재능과 배경은 곧 원로원 귀족층의 눈에 띄었고 이후 이들 형제가 성장하면서 귀족들과의 교우는 점점 두터워진다.


3. 티베리우스 그라쿠스[편집]


두 형제 중 맏이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그의 군사 경력을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시작한다. 그는 그의 사촌형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에 의해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에 임명된다.[9] 기원전 137년 그는 재무관에 선출되었으며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이끄는 스페인의 누만티아 원정군에서 복무하게 된다. 그러다 만키누스의 실수로 로마군은 크게 패하고 현지인 군대에게 포위되었다.(누만티아 전쟁 항목 참조.) 만키누스는 화평을 구걸했으나 이미 로마에게 거하게 통수를 맞은 적이 있던 누만티아군은 이를 거부했고, 그 때 만키누스의 재무관이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협상 대표로 나섰다. 그의 아버지 대 그라쿠스가 스페인 총독 시절 공정한 통치를 했던 것을 기억한 스페인군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는 협상에 동의하여, 로마군이 모든 물자를 누만티아군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 원로원의 입장에서는 이는 매우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행위였으며, 원로원에서는 이 협정을 무효로 선언하고 패장 만키누스는 결박하여 누만티아군에게 넘겼으나 누만티아군이 이를 함정으로 의심하고 만키누스를 석방하여 돌아온다. 한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자신과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맺은 협정이 원로원에 의해 무효화된 것, 그리고 매형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협정 무효화에 앞장서고 누만티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한 것에 대해 심한 배신감과 모욕감을 느끼고 분노했으며, 자신의 신망을 망쳐놓아 정치적 입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스키피오와 서로 적대하게 된다.

로마는 당시에 무수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징집된 군단병들은 자주 그들의 농토를 떠나 종군하여야 했다. 이 때문에 자영농인 군단병들은 농사를 망쳐[10] 자주 파산을 하였으며 이러한 땅은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로마의 부유층이 사들인 뒤 대규모의 농지를 경영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획득한 넓은 영토는 매각되거나 임대를 하게 되었는데 이는 주로 자금 동원능력이 뛰어난 부유층의 소유가 되곤 하였다. 부유농들은 이러한 넓은 농지를 수많은 노예를 동원해 경영하였다.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티베리우스가 누만시아를 떠나 로마로 귀국하며 많은 농장을 지나갔는데 이때 그는 농촌마을이 텅텅 빈 것을 목격하였고 또한 넓은 농경지에 많은 야만인들이 노예로써 농작을 짓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로써 이에 대한 해결방법을 모색하였고 이는 그와 그의 동생을 훗날 파멸로 밀어넣게 된 불길한 생각이 된 것이었다.


군단에서 복귀한 로마 시민들의 많은 이들은 그들의 농경지가 황폐해진 것을 보고 이를 팔아치운 뒤 로마로 상경해 수많은 무산자 계급들과 함께 일거리를 찾아 로마 시내를 배회하였다. 때문에 로마 군단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가진 재산을 가진 자들의 수는 줄어들게 되었으며 이는 로마 군단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한때 군단병이었던 로마 시민들은 그들의 영토를 잃고 나선 더이상 군대의 일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또한 자녀를 키우는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탈리아 전체에서 점점 일손이 부족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부유층이 제공하는 노예들이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그로써 자유민들은 실업자가 되었고 이들의 자리를 노예가 대체한 것이다.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에 선출된다. 그는 선출되자마자 그가 그동안 쭉 생각해온 군단병이 실업자로 전락하는 문제를 막기 위한 법안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그는 군중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이탈리아를 떠도는 짐승도 모두 몸을 숨길 토굴을 가지고 있지만,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다 죽은 용사들은 공기태양 빛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집도 없고 가정도 없이 처자식을 데리고 떠돌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병사들에게 그들 조상의 무덤신전을 지키라고 외치는 장군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용사들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신전도 없고, 많은 로마인이 조상의 무덤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남들을 잘 살고 사치하도록 만들어 주려고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용사들이 마치 세상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받들지만, 군인들은 자기 이름으로 된 흙 한 덩어리도 없습니다."[11]



3.1. 농지법[편집]


저소득층에 대한 분배를 늘리기 위해 티베리우스는 원로원과의 논의 없이 BC 133년에 평민회(concilium plebis)에 동료들과 함께 농지법을 제출한다. 이 법안을 작성한 사람은 원로원의 프린켑스(princeps)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Appius Claudius Pulcher)와 2명의 법률가인 리키니우스 크라수스(P. Licinius Crassus)와 같은 해 집정관이였던 무키우스 스카이볼라(P. Mucius Scaevola)였다. 티베리우스는 이 법안의 작성자라기보다는, 열렬한 옹호자이자 대변자로 나선 것이다. 이 농지법은 전쟁으로 획득한 국유 토지(=공유지, ager publicus)에 대한 관리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법은 개인당 320에이커의 공유지 보유한도를 초과하는 땅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를 초과하여 소유했을 경우 그 나머지 부분은 국가가 몰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이유는 당시 로마에서 대토지 소유주가 자신의 노예와 자신들의 보호민(클리엔테스)인 로마 시민들의 명의로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이러한 편법을 농지법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이 거의 대농장 소유주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달래기 위해 그라쿠스는 농지법에서 그들이 불법으로 소유하는 영토를 정부로부터 임대받는 형태로 소유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또한 이렇게 형식적으로 몰수한 것에 대해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는 원로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티베리우스는 또한 정부 관리하에 있는 국유지의 경우 무산자들에게 9에이커에서 18에이커로 추정되는 각기 다른 크기로 땅을 나누어 주게 한 뒤 지대와 병역 복무의 의무를 지게 하는 하는 제안을 내놓으며, 분배된 토지의 판매와 양도를 금지하도록 했다. 이는 로마 사회의 무산자의 급증과 병역 복무 가능 인원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해결책이었다.[13]

티베리우스의 제안에 대해 원로원은 강하게 반대하였다. 사실 이들의 반발은 티베리우스의 법안 제출이 독단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왜냐면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서 그의 제안을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14] 그는 당시 원로원에 우선 제출하여 의논을 거친 뒤 민회에 회부하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직접 이 법안을 민회에 가져간 것이었다. 비록 이것이 로마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지만 원로원 의원들은 원로원을 무시하는 티베리우스의 방식에 분개하였고 때문에 원로원과 티베리우스와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티베리우스의 법안을 저지하기로 결심한 원로원은 동료 호민관인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설득하여 티베리우스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토록 하였다. 옥타비우스의 거부권에 의해 농지법안의 통과가 여러 차례 저지되자 분노한 티베리우스는 그가 호민관의 본분을 저버리고 평민의 권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들어 그를 해임키로 하였다. 티베리우스는 그의 해임에 대한 투표를 하려 하였는데 옥타비우스는 이러한 투표가 전례에 없으며 또한 이런 것이 로마법에 규정되어있지 않음을 들으면서 호민관 직을 계속 유지하였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그가 평민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저지하였고 그의 해임안에 대한 투표를 강행하였는데 이는 호민관에 대한 신성불가침 권한을 위배하는 것이었으므로 티베리우스의 지지자들은 이에 대해 우려하였다. 마침내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호민관으로써 갖고 있는 거부권을 활용해 로마 시내의 모든 축제와 시장이 열리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이로써 로마 시내의 모든 상업과 행사를 중단케 하였다. 특히 티베리우스는 이 농지법이 통과되어야만 자신의 거부권을 철회하였다고 버텼다. 이러는 동안 티베리우스의 신변을 우려한 민중들은 그가 이동할 때마다 그를 에워싸며 보호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우스 해임안을 관철시킨다.[15]

옥타비우스를 해임하자 티베리우스는 거리낌없이 농지법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자 원로원은 반발하여 농지법에 아주 적은 양의 예산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훼방을 놓는다. 그런데 그해 마침 로마의 식민지인 페르가몬의 왕 아탈로스 3세가 로마에 자신의 왕국을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이로써 로마는 그의 왕국과 국고를 손에 넣게 된다. 티베리우스는 이 새로운 자본을 농지법의 예산으로 쓰고자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평민집회에서 이 돈을 농지법의 자원으로 쓰는 법안을 제출하고 이를 통과시킨다. 그러나 이는 원로원에게 있어 직접적인 공격이라고 비추어졌는데, 로마에서 전통적으로 예산의 집행은 원로원의 고유한 권한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이때 퀸투스 폼페이우스[16]가 원로원에서 티베리우스를 맹비난하며 아탈로스 3세가 죽으면서 그에게 자신의 왕의 인장과 가운을 주었고, 이는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왕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며 비난을 퍼붓는다. 마침 아탈로스 3세는 티베리우스의 아버지 대 그라쿠스의 도움을 받아 그의 클리엔테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에 솔깃한 원로원 의원들이 많았다.

특히 이때 티베리우스의 임기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티베리우스가 옥타비우스를 해임시킨 것은 신체불가침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었으므로 원로원은 그의 임기가 끝나면 재판에 회부하고자 하였다. 이를 안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에 다시 출마하려고 하였다. 그는 선거의 공약으로 군복무 기한을 줄이고, 배심원을 기사단으로 구성시킬 것을 내세웠다.[17] 그런데 당시 로마의 법률에 따르면 호민관의 연임은 위법이었고, 그렇기에 티베리우스의 행동은 고대 그리스의 참주가 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다.[18]

게다가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이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는 티베리우스의 사촌임에도 불구하고[19] 자신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티베리우스의 아버지 대 그라쿠스의 몽니 때문에 집정관 당선이 취소된 원한까지 겹쳐 티베리우스를 맹비난하며 티베리우스가 왕이 되려하는 것을 가만둘수 있느냐고 말하며 원로원 의원들을 선동한다. 그는 당시 집정관이었던 무키우스 스카이볼라[20]에게 그라쿠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러자 스키피오 나시카는 자신의 철제 의자 다리를 뜯어 들고 곤봉을 만들었고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티베리우스를 항해 돌진한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티베리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혼란에 빠졌고 패싸움 도중에 티베리우스는 스피키오 나시카와 원로원 의원들에게 목숨을 잃는다. 그의 지지자들도 같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현직 호민관이 원로원 의원들에게 포로 로마노 한복판에서 살해당하는 참극은 로마 시민들을 경악시켰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지만, 본래 호민관은 고대로부터 이러한 상황을 염려하여 법률로서 신체불가침권을 인정받고 있었는데 사회 지도층이라는 원로원 의원들이 이를 대놓고 무시하며 살해한 것이다. 그래서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원로원은 나시카를 파면하고 추방형에 처한 뒤[21] 농지법의 시행을 약속하고, 실제로 충실히 수행한다. 왜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을 원로원이 수행했는지는 후술.



4. 가이우스 그라쿠스[편집]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티베리우스의 친동생으로 그보다 9살 연하였다.[22] 티베리우스가 죽었을 때 그는 21살이었는데 형의 죽음은 그라쿠스에게 아주 큰 슬픔을 안겨주었으며 이런 강한 충격이 그의 형에 비해 더 급진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을 갖게 하였을 거라고 플루타르코스는 서술하였다.

가이우스는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의 작성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티베리우스가 농지 분배 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그의 장인과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여기에 참여시킨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농지법에 대한 방해 공작으로 고생했을 때나 살해당했을때 가이우스는 이것을 아주 직접적으로 체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때 그는 이미 성인이었던 21세였으므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지[23]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죽음 이후 그는 가급적 조용히 튀지 않고 명예로운 경력을 밟아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연설할 기회가 생겼을 때 흥분을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언사를 내뱉었는데 이것이 실은 그의 본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에서 가장 훌륭한 시민인 티베리우스를 죽인 악당들이여! 두고 보시오. 내가 반드시 그대로 갚아주겠소!


다만 그 이후로는 이렇다할 실언을 한 기록은 없으나, 그를 주목하는 이들이 절대 그냥 놓치지는 않았을 워딩이었다. 이후로는 28세에 콰이스토르(=로마인 이야기식 번역으로는 회계감사관. 각종 서적에서는 재무관)에 선출되었고 임기가 종료된 32세에 호민관 선거에 나서 당선된다.[24]

가이우스는 호민관이 되자마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마찬가지로, 원로원의 친구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는 우선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 그의 동료들을 처형한 당시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공격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당시 로마법엔 사형선고할 수 있는 재판은 반드시 민회[25]로만 가능했는데 포필리우스는 이를 어기고 특별위원회를 연 후 거기서 재판을 통해 그들을 처형시킨 바 있다. 가이우스는 민회를 통하지 않은 사형 판결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 법안은 소급 적용이 되었던 고로 포필리우스는 로마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그리고 뒤이어 티베리우스의 공약이었던 배심원을 기사계급으로 채우는 정책을 실현시킨다.

가이우스는 농지법도 적극적으로 실현하려 하였다.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에게 대단히 적대적이었던 것은 티베리우스가 추진했었던 125 헥타르의 제한이 원로원의 토지 소유와 충돌했었기 때문인데 가이우스는 이를 피하려고 해외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이것을 로마 시민들에게 배분하려 하였다. 이 점은 원로원의 재산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고 또한 원로원이 이미 평민들에게 농지법을 약속한 것도 있어 가이우스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는다.

이에 그는 형보다 광범위한 개혁을 계획하고, 농지법 외에도 몇 가지 정책을 더 추진한다. 첫번째는 곡물법(lex Frumentaria)이다. 이 법은 국가가 해외에서 곡물을 수입하여 로마에 거주하는 시민들에게 매월 일정량을 1모디우스(modius) 당 6.5아스(ass)에[26] 공급하도록 규정했다. 흔히 곡물법을 '곡물을 싸게 공급하는 것' 정도로 알려져있지만 실상은 더 복잡하다. 이 가격 자체는 당대 로마의 평균적인 시장 가격보다 그리 낮지는 않았고, 오히려 시기에 따라서는 시장 가격보다 높은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곡물법의 진정한 의의는 곡물가의 안정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이우스의 두번째 정책은 시민권이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라틴인들에게 확대 부여하고, 라틴인들의 권리를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 주민에게 주는 것을 골자로 시민권 개혁을 시도한다. 하지만 곡식에 대한 법은 통과되었음에도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은 기각되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다른 이탈리아인과 공유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정책으로, 티베리우스의 원안에는 있었으나 어느새 삭제된 '농지 분배 위원회의 사법권'을 부활시켰으며, 네 번째 정책으로 대규모 도로 건설 사업으로 고용률을 올렸다. 다섯 번째로 그는 군대법(lex Militaris)으로 정부가 병사들의 급료를 줄이지 않고 의복과 장비를 지급하고, 군복무 기간을 단축하고, 17살 미만 소년들의 징집을 금지하도록 했다. 이는 군대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병사들과 동맹국 주민들과 유권자들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여섯 번째로 그는 로마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식민시 건설을 추진했으며, 선정된 지역은 카푸아, 타렌툼, 카르타고였다. 특히 카르타고 지역에 건설된 식민시인 유노니아는 가이우스의 각별한 관심을 받은 곳이였는데, 로마 및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에서 데려온 6천 명의 개척자들을 125에이커의 농지에 정착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가이우스는 유노니아 개척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직접 건너갈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세금 징수를 개혁하였다.

가이우스는 형과 달리 연임에도 성공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원로원이 반발하며 움직이기 시작해 이들은 같은 원로원인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에게 힘을 실어준다. 원로원에게 조종당한 드루수스는 가이우스보다 더 급진적인 법안을 내놓았다.[27] 이로써 시민들의 인기는 드루수스에게 집중되고 가이우스는 잊히게 되었고 결국 세번째 호민관 선거에 출마하나 여기서 낙선한다.

그해 가이우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던 루키우스 오피미우스가 집정관에 당선된다. 오피미우스는 가이우스의 법안을 철회하려고 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군중들이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모이게 된다. 이때 오피미우스의 부하가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이를 빌미로 삼아 원로원은 최초로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의한다. 이로써 이들은 로마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초월적인 권한을 오피미우스에게 주었으며 오피미우스는 그의 병사를 이끌고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를 모두 체포한다. 가이우스는 달아나다 목숨을 끊었으며 그의 지지자 3천 명은 모두 처형당한다. 그렇게 한 뒤 원로원은 가이우스의 모든 법안을 폐기한다.

하지만 가이우스를 제거한 오피미우스도 나시카처럼 뒤끝이 좋지는 않았는데, 누미디아와 한판 붙은 유구르타 전쟁 직전에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것이 들통나 공직에서 파면되고 디라키움으로 추방되는 형벌을 받아 거기서 죽었다.


5. 형제의 동기[편집]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 개혁 법안을 둘러싼 싸움을 단순히 티베리우스 진영과 로마 원로원간의 권력 투쟁으로 묘사한 학자들이 많았다. 이 학자들의 눈에는 티베리우스가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를 주축으로 움직인 민주적·자유주의적 혹은 급진적 개혁자로 비치고, 원로원은 로마의 사회·경제적 문제에는 아랑곳 없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데만 급급했던 부유한 토지 귀족들로 비쳤다. 이 견해는 오래 버틸 수 없다. 티베리우스는 급진적 개혁을 염두에 두고서 일을 벌이지 않았다. 그의 개혁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개혁으로서, 언제나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에 의존했던 군 병력 자원을 되살리고, 노예들에 의해 경작되는 대농장의 확산을 막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 티베리우스를 반대했던 원로원 의원들 중 다수가 자신들의 방대한 토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의원들은 그의 행동을 자신들이 순수하게 믿고 있는 '정체'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또 개인과 계파의 정치에 근거하여 그를 반대한 의원들도 있었다. ······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을 집행하도록 구성된 농지 분배 위원회가 그 입안자의 사후까지도 활동을 허용받은 것은 원로원 내에서 티베리우스에 대해 조성되었던 반감이 주로 개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반대나 편협한 개인의 경제적 이해에 기초를 두지 않고 개인적이고 파벌적인 정책에 기초를 두었음을 암시하는 또 한 가지 점이다. 개혁으로부터 가장 큰 정치적 이익을 거둘 뻔한 당사자가 죽었기 때문에, 개혁 자체가 더 이상 그의 정적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실은 이번에는 그들이 자진해서 호의(gratia)를 베풀고 토지를 분배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많은 수의 피호인들을 확보했다. 콘술 포필리우스 라이나스(Popilius Laenas)는 심지어 자신이 그 법을 시행하기 위해 했던 일을 자랑했다. 그는 루카니아의 지계석(地界石)에 자신이 "목동들로 하여금 농부들을 위해 길을 내주도록 만든 최초의 인물"이라는 글귀를 새겨넣게 했다.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에 임명된 농지 분배 위원회 위원들은 티베리우스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었던 폴비우스 플라쿠스(M. Fulvius Flaccus)와 파피리우스 카르보(C. Papirius Carbo)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활동한 결과 6년만에 7만5천 명이 넘는 인구를 정착시킨 듯한데, 그것은 군 복무가 가능한 병력 자원을 20% 늘린 셈이었다. 그라쿠스의 농지법은 로마의 군사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을 일시적으로 성취한 듯하다.

······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죽은 뒤에 넓은 의미에서 귀족파로 분류할 수 있는 그의 정적들은 한때 그가 자신들을 누르는 대가로 이익을 얻으려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그의 법을 시행할 의지가 있었다. 그들은 곡물법을 폐지하지도 않았고, 부당취득재산 반환청구 법정에 선정된 배심원들을 교체하거나 속주 세금 행정 체제도 수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식민지 설립과 관련된 법을 포함한 농지법도 비록 수정은 했으나 폐기하지 않았다.

Friz Moritz Heichelheim, 『하이켈하임 로마사』 中


전통적으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둘러싼 당대의 논쟁은, 기득권층의 특권을 박살내려는 그라쿠스 형제와, 개인적이고 편협한 동기에 사로잡힌 기득권층의 대립으로 이해되었다. 이 견해는 부분적으로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나 하이켈하임이 지적하였듯이, 근래에는 씨족의 디그니타스(dignitas, 존엄)을 높이려던 청년 귀족 그라쿠스 형제의 야심 및 정치적 이해관계와 그들 내부의 고결한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설명된다.

형제의 아버지는 집정관을 두번이나 지냈고, 두번의 개선식을 거행했고, 히스파니아에서는 존경 받는 총독이였고, 감찰관을 지냈으며, 존경받는 복점관 사제단의 일원이었다. 아버지의 디그니타스를 재현하거나, 혹은 뛰어넘으려는 전통적인 로마 엘리트의 마음에서 바라볼 때 형제들의 동기는 더욱 쉽게 이해된다. 특히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형제들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가졌던 사적인 관계이다. 하이켈하임은 이 점을 특히 주목한다. 아이밀리아누스는 형제들의 친척이였으며, 티베리우스의 정채적 행보 초기에는 아이밀리아누스와의 친족 관계가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하였으나, 티베리우스의 가족과 아이밀리아누스 사이에는 그들의 복잡한 인척 관계로 인해 생긴 유산 상속 문제를 둘러싸고 악감정이 쌓여있었다. 게다가 스키피오는 티베리우스의 누이였던 셈프로니아의 남편이였으나 이 결혼 생활이 불행하게 되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고, 티베리우스가 카르타고에서 귀환한 후 2~3년 뒤에 귀족 사회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스키피오의 큰 정적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딸과 약혼하게 되어서 기름을 부었다. 또한 BC 137년에 티베리우스는 히스파니아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C. Hostilius Mancinus)[28] 밑에서 재무관(quæstor)으로 일하기도 했다. 또한 만키누스가 누만티아군에게 패배했을 때 티베리우스가 자신과 아버지 대 그라쿠스의 명예를 걸고 누만티아군과 맺은 평화협정을 스키피오가 앞장서서 무효화하고 원정군을 이끌고 가서 누만티아를 파괴하여 티베리우스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켰다. 다시말해, 아이밀리아누스와 그라쿠스 형제(최소한 티베리우스)는 이웃보다도 더 웬수 같은 친척이였던 셈이다. 위에서 말한, 아이밀리아누스의 평화협정 거부는 그와 티베리우스의 관계가 파탄이 났음을 말해준다.

스키피오는 야심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만키누스뿐 아니라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정치 생명까지도 희생시킬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스키피오에 대해서 공정히 말하자면, 그는 티베리우스가 만키누스와 같은 운명에 떨어지지 않도록 도왔지만, 그 사건을 전체로 놓고 보면 티베리우스의 신망에 엄청난 타격을 입힌 셈이 되었고, 따라서 티베리우스로서는 일가 사람 시늉을 하려고 한 스키피오의 어설픈 행위를 조금이라도 감사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유지하고, 아울러 두말할 나위 없이 스키피오를 응징할 수단을 필사적으로 찾게 되었다. 농지 개혁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수단이었다.

Friz Moritz Heichelheim, 『하이켈하임 로마사』 中


특히 이 사건은 티베리우스의 디그니타스를 처절하게 찢어놓았고, 따라서 그의 디그니타스를 복구하기 위해 과감한 방법을 찾아내게 된다. 이러한 사적인 이해관계 및 정치적 야망과 그의 고결한 성품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농지법이라는 폭풍을 부르게 된다. 우선, 농지법을 시행하게 되면 당연히 로마가 당면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호민관 출마를 앞두고 있던 티베리우스에게는 유권자들에게 호소하여 표를 받을 수 있는 매력적인 아이템이였으며, 시행에 성공할 경우 부동의 지지층을 형성할 수 있다. 특히 중요한 점은, 농지법이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정치적 타격을 준다는 점이다. 농지 위원회가 구성된다면, 아이밀리아누스가 히스파니아에서 귀국하면 자신의 전역병들에게 보상해야 할 '바로 그 토지'를 아이밀리아누스가 아니라 농지 위원회가 분배하게 된다. 다시 말해, 아이밀리아누스의 피호인이 티베리우스의 열렬한 지지자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아이밀리아누스에게는 크나큰 타격이다. 다시 말해, 농지법은 정의로우면서도 동시에 티베리우스에게 자신에게 유익한 개혁이였던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티베리우스의 사후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위에서도 인용했듯이, 농지 위원회는 해산되지 않았고 업무를 중단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기까지 했다. 아직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이 되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엄청난 지지자를 확보하여 줄 농지법 프로젝트를 엎어놓지 않았고, 심지어 티베리우스의 가장 큰 정적이였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이탈리아 동맹국 시민들이 자기들에게도 공유지의 혜택을 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혼쾌히 수락하고 농지법의 동맹국 혜택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가 된다. 그러므로 원로원이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을 반대한 것에서는, 경제적인 이해관계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고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인해,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붕괴된 농지법을 부활시킨' 인물로 바라보기보다는, 티베리우스 사후에도 유지되어온 농지 위원회의 위원으로서 티베리우스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지지자를 흡수한 인물로 바로봐야 할 것이다. 가이우스의 광범위한 개혁의 동기는 티베리우스의 경우처럼 '정의'와 '정치적 이득'이라는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엮여있고, 여기에다가 티베리우스의 사망으로 인해 찢어진 가문의 디그니타스를 회복하려는 동기도 있다.

티베리우스를 살해할 때 그의 정적들은 티베리우스가 참주가 되려고 한다며 고소하였고, 참주는 처형되어야 한다고 규정한 옛 법을 근거로 그를 살해하였다. 물론 티베리우스가 공화정을 뒤엎고 참주가 되려고 했다는 근거는 없으나, 당시 그의 정적들이 어마어마한 민중 지지자를 확보해나가던 티베리우스에게 얼마나 큰 공포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그의 정적들이 오직 단 하나 '기득권 옹호'만으로 움직였다고 바라보기보다는, 여러 요인을 함께 감안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그리고 대부분의 정적들에게는)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이 문제였겠으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이 문제였을 것이다.

가이우스의 사후 농지법이 어떻게 운영되었는가를 본다면, 역시 이 주장은 더더욱 힘을 얻는다.

세 번에 걸쳐 연속적으로 제정된 법들이 그라쿠스의 농지법과 관련된 모든 집단의 이해에 맞춰 점차 수정했다. 기원전 121년에 제정된 듯한 첫째 법은 정착민들에게 자기들이 할당받은 농지를 매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 법은 군 복무를 위한 재산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부유한 토지 소유자에게 주변의 작은 토지들을 사들이거나 강제 매각하도록 허용하려는 목적을 무산시키는 경향을 띠긴 했지만, 반드시 인기가 없지만은 않았다. 소규모 토지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만약 그것을 상속자들에게 더 작은 토지로 분할해 준다면 생계 유지는 더욱 힘겨운 일이 될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정착민들은 그것을 팔아 현금을 손에 쥐는 것을 좋아했을 것이다.

두번째 법(아마 기원전 118년에 제정됨)은 농지 분배 위원회를 해산하고(그 위원회의 임무는 이미 끝났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공유지에 대한 더 이상의 분할을 중단하고, 국가에 소액의 지대를 지불한 대가로 이미 분배된 토지에 대해 법적 소유를 보장했다. 이 법은 대규모 토지 소유자들과 소규모 소유자들을 동시에 만족시켰고, 특별히 이탈리아 동맹국들에게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공유지를 더 이상 분배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그들의 희생을 전제로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원전 11년에 세번째 법(비명<碑銘>에 부분적으로 보존된 토리우스 법(lex Thoria>인 듯함)이 제정되어 기원전 118년의 법에 의해 지시된 모든 임대 행위를 폐지하고, 그라쿠스 농지 분배 위원회에 의해 320에이커까지 분배된 모든 공유지를 사유 재산화하고, 식민 도시들과 자치 도시들에게 이미 준 토지를 안전히 보유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아울러 이 법은 공공 방목지를 더 이상 잠식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 목초지에서 풀을 뜯는 가축의 수효를 엄격히 규제했다. 지대 경감은 대규모 토지 소유자와 소규모 소유자 모두에게 혜택을 주었고, 자치 도시들의 동맹국 시민들은 자기들에게 하사된 토지의 안전한 보유권에 대해서 감사히 여겼다. 소규모 자영농들은 대규모 지주들이 부가적인 공유지를 불법으로 잠식하지 못하도록 막아준 조치를 환영했을 것이며, 소규모 목축업자들은 목조지를 못쓰게 만드는 과잉 방목의 규제조치로 인해 혜택을 입었을 것이다.

Friz Moritz Heichelheim, 『하이켈하임 로마사』 中



6. 평가[편집]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유한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을 수호하다 죽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로마가 가진 문제점을 파악하였고 높은 교양과 법률적인 지식을 무기로 이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중세에서든 근대에서든 현대에서든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평가는 학계에서도 대중에서도 매우 호의적이다.

물론 위에서도 지적하였듯이, 형제의 개혁에는 그들의 성품이 가진 고결함 뿐만 아니라, 정치적 야망도 함께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그러나 근래 연구가 밝혀낸 성과들은 형제들을 바라보는 조금 더 인간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것일 뿐, 형제들이 받아야 할 찬사를 막진 않는다.

또한 이들의 법안은 원로원 귀족들의 이익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형제를 둘러싼 정치적 이해관계와 얽혀 형제를 죽음으로 위협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는 이에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고 이들은 평민 집회가 가진 입법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원로원의 의사에 반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이는 당시 권력자들이었던 원로원의 심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고 이러한 종류의 도전은 원로원은 공화정 설립 이후 처음 겪는 것이었다.

공화정이 생긴 이래 원로원은 실질적인 로마의 최고 권력 집단이었다. 집정관이 공식적으론 최고 권력자이나 이들은 집정관 경험이 없는 뜨내기들이 주로 맡았고 원로원은 전직 집정관이 우글거리는 집단이었다.[29] 또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는 인사들은 이미 원로원 의원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집정관들은 거의 모든 문제를 원로원과 상의하려고 하였으며 따라서 원로원의 의사는 곧 로마의 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이러한 구조에 처음으로 도전한 것이다. 여지껏 호민관들 중 여지껏 그라쿠스 형제처럼 그들이 가진 권한을 쓴 적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호민관의 권력은 막강하였다. 행정권과 군단 지휘권을 제외하고 호민관과 집정관의 권한의 차이는 거의 없었으며,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이 아니라 호민관 특권과 군단 지휘권 두개만으로 황제의 직위를 획득하였다는 사실에서 호민관의 막강함을 알 수 있다. 이 호민관 특권은 군사권만 빼면 황제의 권한과 전혀 다를바 없었으며 단지 아우구스투스는 일년 임기를 없애고 종신으로 호민관 권한을 가졌을 뿐이다. 그 이전에 강력한 군단 지휘권을 쥔 폼페이우스가 호민관 가비니우스의 배후에서 원로원에 불리하고 민중파에 유리한 법들을 잇따라 제정하게 했는데도 원로원이 아무 조치도 못 취했다는 점에서[30] 그 강력한 권한이 충분히 설명된다.

호민관에겐 독자적인 입법권, 사법권, 거부권이 있었기에 분명 법률적 권한은 막강했다. 이들은 원로원의 허락없이 자신의 재량만으로 재판을 열 수 있었고 법률을 민회에 회부할 수도 있었으며 원로원의 어떤 결정이나 입법도 거부권을 동원해 무력화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이런 권력을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원로원인데, 이는 원로원이 귀족과 평민의 차별을 없애라는 개혁을 요구하는 평민들의[31] 요구를 수용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편법 때문에 호민관이 이런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된 것이었다.

원로원은 평민들로 하여금 평민 집회를 따로 갖게 하였고 이들이 호민관을 선출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정부 체제를 완전히 고수하는 한편 평민들의 정부를 따로 구성케 한다. 그리고 이 평민들의 정부를 자신들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평민들의 요구 수용"과 "귀족들의 기득권 수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다. 평민들의 정부가 완전히 원로원의 통제하에 두게 된 이유는 호민관에 출마할 자격을 가진 자들은 평민 귀족들 뿐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원로원과 정치적 이익을 공유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로원이 자신들과 같은 계급이라고 생각한 그라쿠스 형제가 최초로 이 평민 정부를 움직여 로마의 개혁을 추진하고 원로원을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최초로 평민 정부가 원로원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원로원은 위에 나오듯 이를 심각한 위협이라고 판단하였고 원로원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법을 만들고 추진하는 것을 왕이 되려는 행보라고 판단하였다. 그럼으로써 원로원이 일찍이 없던 무력으로 호민관을 죽이는 초법적인 행동에 의지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라쿠스 형제 이후 로마 정부는 피와 폭력으로 얼룩지게 된다.[32]

즉, 그라쿠스 형제의 출현은 로마 정부의 모순점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이런 모순을 만든 건 다름아닌 원로원 계급이나 다름없었다. 군단 지휘권만 없었지 실제론 왕이나 다름없는 권한을 호민관들에게 줌으로써 사실상 로마내에 두개의 정부가 구성되게 만든 것은 바로 원로원들이었다. 이로써 이들은 사실상 다른 마음을 품은 정치세력이 마음만 먹으면 평민들로 이루어진 정부를 굴려 원로원 체제를 전복시키려 하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훗날 민중파의 대두는 바로 이런 터전에서 생긴 것이며 이들은 사병화된 군단들과 영합하여 군사력까지 갖춤으로써 기어이 원로원 체제를 전복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은 훗날 제정이 되고 나서도 황제들이 다시[33] 시도하지 않는데 이는 너무도 기득권과 반대되기 때문이었다.[34][35][36] 사실상 사유 재산에 한계를 긋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사회주의 외에 어디서도 시행되지 않는다. 이렇게 고대~중세 국가의 귀족 집단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성공 사례가 극히 드문데, 이런 귀족 집단의 영향력은 왕조차도 무시할 수 없으며, 이들이 왕보다 권력이 큰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대개 이들의 기득권이 전복된 것은 외부의 침략으로 아예 나라 전체가 쑥밭이 되거나 또 다른 지배계급이 등장하여 기존 지배세력의 대체를 시도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37][38][39]

그라쿠스 형제는 농지 개혁을 원로원과 관료들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시도하려 하였고, 이에 맞서 원로원은 위법적인 무력 수단을 동원한다. 그 결과 그라쿠스 형제는 목숨을 잃고 로마는 엄청난 혼란에 빠진다. 이는 결국 원로원과, 부족한 힘으로 무모한 개혁을 시도한 그라쿠스 형제의 대결이 결국 원로원의 승리로 끝난 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비롯한 내부적인 모순이 쌓이고 쌓여 원로원은 점점 지지를 잃어갔으며 마침내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를 거쳐 원로원은 힘을 잃고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으로 가게 된다.

따라서 그라쿠스 형제의 출현은 로마 공화정의 모순된 정치구조를 보여주는 최초의 조짐이라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득권 출신이었음에도 기득권에 반하는 개혁을 추진하다가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했다는 점 때문에 후세의 많은 동정을 받았으며, 때문에 그라쿠스라는 이름은 '양심적인 로마인'을 묘사할 때 애용되는 이름으로 남아 고대 로마를 다룬 작품에서 등장한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스파르타쿠스와 노예들의 처지를 동정한 민중파 영수의 이름도,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콤모두스 황제 이후의 로마를 맡아 공화정으로 회귀시킬 역할을 맡은 원로원 의원의 이름도 모두 그라쿠스이다.


7. 후손[편집]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딸의 후손은 이어져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자손을 남긴 풀비아에게로 이어지게 된다. 즉 풀비아의 후손은 모두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후손이기도 한 것이다. 풀비아가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가 첫 결혼에서 얻은 딸 마르켈라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율루스 안토니우스 또한 아버지와 형이 그랬듯 로마 내부 권력 투쟁에 휘말려 비명횡사하고 말았지만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자식들은 옥타비아의 외손자들이기도 했기에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철저하게 보호해주어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손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훗날 유능한 장군으로 성장해 비텔리우스 타도와 베스파시아누스 옹립에 큰 공헌을 했고,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딸 또한 자식들을 낳으며 무탈하게 대를 이어갔다. 이 이후로는 기록이 없으나 어떤 형태로든 후손은 이어졌다고 볼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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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조각상은 19세기프랑스에서 상상하여 만든 것이다. 즉, 로마 시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라쿠스 형제의 조각상은 존재하지 않는다.[2] 생몰년도: 기원전 168년 혹은 163년 ~ 기원전 133년[3] 생몰년도: 기원전 154년 ~ 기원전 121년[4] 대(大) 그라쿠스라고도 불린다.[5] 생몰년도: BC 217년 ~ BC 154년[6] 생몰년도: BC 190년경 ~ BC 100년[7] 후에 로마 여성의 모범으로 존경받는다.[8]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전, 1장[9] 한국에서는 주로 '군사호민관'으로 번역되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 호민관과는 전혀 상관없는 군사 지휘관이다. 오역의 폐해. 시오노 나나미는 '대대장'으로 번역했다. 이쪽도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만. 관련 문단 참고.[10] 전쟁 때문에 농사를 지을수 없다보니 망치는것은 당연했다.[11] 플루타르코스 지음, 신복룡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5』, 서울, 을유문화사, 2021, p.254-255.[12] 이들은 주로 새로이 정복된 해외 식민지들(주로 시칠리아)에 대농장을 보유했다. 애초에 이 당시 이탈리아에 노예 베이스로 돌아가는 대농장-라티푼디움이 성행했다고 보긴 어렵다. 당시 이탈리아는 주로 자영농이 대세였다. 문서 본문도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아서, 원로원 기득권층의 라티푼디움 형성-자영농 박살-군대 약화라는 기존의 학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 Saskia T. Roselaar, <Public land in the Roman Republic: a social and economic history of ager publicus in Italy, 396-89 BC> 참고.[13] 문제는 이 농지법이 이탈리아인(즉 로마 시민이 아닌 이들)에 대해선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이탈리아 동맹국민들이 경작하던 토지 대부분이 로마의 공유지였다. 로마가 이탈리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병합된 이탈리아 국가들(후에 이탈리아 동맹국이 되는)의 영토가 공유지로 편입된 것이다. 기존까지는 로마 당국도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반항하지 않는 한 그냥 공유지에서 농사짓게 냅뒀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 의해 공유지가 "로마 시민"들에게 재분배되면서 이탈리아인들은 대대로 경작하던 토지를 뜬금없이 빼앗기게 된 것. 또 당시 이탈리아 내의 지주 상당수가 원로원 의원들[12]이 아닌 그냥 이탈리아인들이었던 고로 농지법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토지를 몰수당하는 주 피해자는 부유한 이탈리아인들이 되었다. 당연히 이탈리아인들은 반발했지만 로마 시민권이 없는 이들이 반발해 봤자 뭘 할 수는 없었고, 로마 시민권이 없어 농지법의 혜택도 주어지지 않았다. 후에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이 문제를 파악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 이탈리아인들을 달래는 동시에 농지법의 적용 범위도 넓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자 했지만 그 역시도 살해당하면서 없던 일이 된다. 결국 여기에다 기존에 시민권이 없단 이유로 받던 차별까지 더해져 쌓이고 쌓인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폭발한 게 동맹시 전쟁이란 주장이 있다.[14] 실제로도 그들의 기득권을 제한하는터라 찬성할리가 없었다.[15]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티베리우스는 옛 친구이기도 한 옥타비우스를 최대한 설득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논쟁할 때 옥타비우스에 대한 인신 공격은 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법안에 저촉되는 옥타비우스의 땅값을 개인 재산으로 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결국 해임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민중들 앞에서 간절히 설득한 뒤 자신의 호민관 직부터 거는 안부터 내밀고 이걸 거절하자 해임안을 제출했으며, 투표가 진행된 뒤에도 옥타비우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흐르자 투표를 중지시키면서까지 설득했다.[16]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싸운 폼페이우스와 같은 씨족(gens)이긴 했으나 가문은 다른 먼 친척 정도였다. 그래도 카이사르와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어서 그의 증손녀가 바로 카이사르의 부인 중 하나인 폼페이아다.[17] 이는 그 자신에 대한 보신책이기도 하였다. 배심원이 원로원을 싫어하는 기사단으로 구성되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무죄받을 확률이 원로원으로 구성된 배심원보다 훨씬 높았다.[18] 다만 호민관의 연임이 위법이라는 법률이 있었다고 확실히 증명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연임 시도 이후, 제한적인 상황(후보가 나서지 않는다든지)에 한해 호민관의 연임을 허용한다는 법률이 제정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이를 통해 그 이전에 호민관의 연임이 위법으로 정해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자세한 내용은 허승일의 <로마 공화정 연구> 참조.[19] 티베리우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로, 스피키오 나시카 가문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큰아버지의 후손인데다, 스피키오 나시카의 어머니의 여동생이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였다. 당시 최고의 장군이자 두 번의 집정관, 감찰관 경력을 통해 막대한 권위를 가졌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그의 사촌이고, 최고 제사장인 스키피오 나시카 역시 사촌인 것은 얼마만큼 티베리우스가 지배계급인 원로원과 가까웠는지 보여준다. 이런 티베리우스가 평민들을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은 아이러니하다.[20] 스카이볼라는 그라쿠스의 동지로, 농지개혁법의 법률적인 작성자 중 한명이다. 이때 스카이볼라는 "폭력을 사용치 않을 것이며, 재판 없이 시민을 처형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만약 민중이 티베리우스의 선동이나 강제에 이끌려 불법적인 표결을 강행한다면,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는데, 스카이볼라마저 어느정도 거리를 두는 모습은 당시 그라쿠스의 호민관 연임 시도가 당시 로마 사회에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는지 알수 있다.[21] 보통 로마의 최고 제사장은 로마에서 나가는 법이 없었지만 민중들을 달래고자 외교 임무를 구실삼아 나시카를 추방시켰다. 그러다보니 나시카는 추방당해서 소아시아를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고(일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의 지지자들에게) 죽었다고 한다.[22] 그가 죽은 뒤 14년이 지나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가이우스 마리우스보다 3살 연하이다.[23] 즉 원로원 의원들의 부패와 횡포와 이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이라는 것.[24] 굳이 따지자면 호민관은 명예로운 경력/관직의 사다리에 들지 않는다.[25] 그중에서도 이 당시에는 사실상 형식적인 존재로만 남은 코미티아 쿠리아타를 빼면 제일 유서 깊은 민회이자 귀족, 평민 가리지 않고 모든 로마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민회인 코미티아 켄투리아타.[26] 한 부셸의 약 1/4쯤 되는 곡물에 비숙련 노동자의 하루 품삯의 절반쯤 되는 가격[27] 사실 이는 완전히 인기 영합주의적인 법안으로 원로원과 드루수스는 이 법안을 계속 유지하고자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지 가이우스의 인기를 갉아먹기 위한 것이었다.[28] 그의 가까운 친척인 L. Hostilius Mancinus가 아이밀리아누스의 정적임.[29] 그 이유는 집정관은 해마다 두 명씩 나왔으며 이들은 연임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원로원은 대략 2~30여 명의 전직 집정관을 꾸준히 포함하고 있었다.[30] 호민관의 신성불가침도 무시할 수 있는 원로원 최종 권고가 있었지만, 강력한 군사력의 지원을 받는 호민관을 상대로 발동했다간 정치적 정당성은 물론 오히려 원로원이 박살날수도 있기 때문에 발동 자체가 불가능했다.[31] 이런 요구는 도시 국가에선 필연적으로 이루어 진다. 이 때문에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대부분 민주정으로 바뀌었고 귀족들은 몰락하게 되었다.[32] 키케로는 그의 저서에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왕위를 차지하려 시도했는데, 아니 오히려 그는 실제로 수개월간 통치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누만티아를 파괴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훌륭한 인물로 뛰어난 군인이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죽인 평범한 개인 푸블리우스 나시카보다 공화국에 더 유익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하며 티베리우스의 개혁이 공화국을 무너뜨릴 뻔 했다고 비판했다. 다만 키케로는 티베리우스에 대해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을 많이 했기에, 그의 의도 자체는 선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33] 위에서도 강조했지만, 형제들의 농지법 자체는 당대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농지법이 '또' 시행되는 경우는 후대에 없었다는 의미.[34] 급진적이었던 셈프로니우스 농지법과 달리, 폼페이우스 퇴역병들의 문제로 인해 보수파 군벌 폼페이우스의 힘을 얻은 카이사르는 집정관으로서 원로원 귀족들의 기득권을 어느정도 보장하는 형태의 율리우스 농지법을 통과시켜 왜곡을 어느정도 완화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경우 카이사르가 통과시킨 농지법이 그라쿠스의 농지법이라고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었는데 실은 둘의 법안은 같지는 않았다. 로마인 이야기에도 서술되듯이 그라쿠스 형제가 국유지 임차에 있어 로마 귀족과 동맹시 기득권층의 이해를 크게 건드린 것과 달리, 대부분의 이탈리아 반도 도시민이 로마시민권을 얻은 상황에서 타협적인 내용의 율리우스 농지법이 통과되었다. 그 뒤에는 개선장군인 보수파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에 대한 보상이 있었고, 그 힘으로 평민회 통과가 가능했다.[35] 당시 원로원 계급은 반드시 대농장을 경영하는 지주여야만 하였고, 원로원의 상업활동을 금지하는 법이 플라미니우스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에, 원로원이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는 유일한 수단은 대농장을 소유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은 바로 이런 대농장의 소유를 금지케 하는 것이었며, 농지법의 시행은 사실상 원로원 계급의 씨를 말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의견이 있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들에게 있어선 절대적으로 농지법의 통과를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되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그라쿠스 형제가 이것을 몰랐던 것인지 혹은 의도했던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원로원에게 있어 그들의 계급 자체를 파멸시키는 법안이나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농지 위원회가 해산되지 않고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을 시행했다는 점은 이런 주장이 온당한 평가가 아니라는 반론을 가능하게 한다. 애시당초 그라쿠스의 형제의 법안에서 원로원의 사유농지 자체를 불법화 한적이 없다. 이전부터 농지의 임차와 소유의 상한선은 정해져 있었지만 원로원이 일가족과 노예들 명의까지 동원해서 사실상 무제한으로 토지 점유가 이루어졌고, 그라쿠스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임차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상한선을 넘긴 토지도 국가가 돈을 주고 사는 식이였다. 농지법에서 정해진 상한선은 1000유겔룸(250헥타르) 인데 이게 원로원을 파멸시킬 수준인지는 의문이다.[36] 다만 그라쿠스 형제가 내세운 다른 개혁들은 대부분 이후에도 살아남거나 당대에는 시행되지 않았더라도 나중에 이뤄진다. 특히 곡물법의 경우,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사후 어느 시점에 잠깐 폐지되었다가 사투르니누스가 부활시킨다. 이후 곡물법은 제정기에 무료 배급의 형식으로 바뀌면서, 빵과 서커스에서 "빵"을 담당하게 된다.[37]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후삼국시대-고려로의 이행 중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백제와 고구려의 경우 최상층 집단은 소수는 해외로 자의든 타의든 나가고 국내에 남은 다수는 성씨를 바꾸거나 하여 숨어 살았으나 통일신라의 견고한 골품제 아래에서 상층으로의 진입은 거의 봉쇄된 꼴이었고 극도로 운 좋은 몇몇 외엔 전원 중류 이하 계층으로 편입되었다. 최상층 바로 아래 이전의 삼한 거수국 지배층 혹은 고구려 5부의 일부였던 집단은 역시 상층으로의 진입은 완전 봉쇄되어 전원 중류 이하 계층으로만 살 수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통일신라가 역사상 대항해시대 ~ 2차 대전 기간 중 꾸준히 등장하는 악질 침략국들-대표적인 예시로 일본 제국이 있다-마냥 백제와 고구려의 거의 모든 유민을 하류층으로 쑤셔박거나 노예화한 건 아니었으나 여하튼 정치적 권리가 있는 상층으로의 진입을 제도적으로 원천봉쇄한 건 사실이었다. 물론 통일신라라고 인물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무열왕계 왕실이 흡사 그라쿠스 형제처럼 선견지명을 갖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고 꾸준히 애썼으나 로마의 원로원 계급이 민중파의 모든 개혁 시도를 찍어눌렀듯 진골들 또한 가능한 수단을 다 써서 무열왕계 왕실의 모든 개혁 시도를 방해했으며, 끝내 무열왕계 왕실은 진골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38] 물론 그 결과 등장한 원성왕계 왕실이라고 개혁 시도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으나 무열왕계 왕실이 진골들 비위를 꾸준하게 거스르다 어떻게 되었는지 똑똑히 지켜본 이상 근본적인 개혁 시도는 무리였다. 끝내 고구려, 백제 유민들은 동맹시 전쟁 당시 궐기한 이탈리아인들이 그랬듯 한번 봇물이 터지자 서라벌 및 진골 집단에 대한 모든 공물 납부를 거부하며 집단으로 무력 행동에 나서게 되며 그 결과 벌어지는 혼란 상황은 마치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그랬듯 패서의 고구려 유민 왕건이 수습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견훤은 이런 구도에선 기존 체제 파괴자와 경쟁자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술라와 안토니우스가 했던 역할을 한 셈이다.[39] 이슬람 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무아위야 왕조는 겉으로는 다 같이 평등한 이슬람 교도라고 하였으나 그건 말 뿐이었고 실제로는 비아랍계에 대한 꾸준한 차별이 있었다. 아바스 왕조의 등장은 같은 이슬람 교도고 납세는 더 많이 하는데 어째서 정치, 경제, 사회상 권리가 차별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비아랍계들의 강력한 반격 양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