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 보잉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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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명예 훈장 수훈자
파일:미합중국 해군 명혜훈장 0.png
이름
그레고리 보잉턴


파일:major-gregory-pappy-boyington-everett.jpg

Gregory Pappy Boyington (1912.12.4~1988.1.11)

미 해병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던 그레고리 "패피" 보잉턴중일 전쟁2차 대전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영웅적인 전공으로 의회 명예 훈장과 해군 십자장을 받았다.

1. 유년기
2. 스포츠광 책상물림
3. 군 경력
4. 플라잉 타이거즈에서
5. 해병 항공단에서
6. 퇴역 후
7. 죽음
8. 헌정


1. 유년기[편집]


그레고리 보잉턴은 1912년12월 4일 미국 아이다호 주 커달레인(Coeur dAlene)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인구 8천명도 채 안되는 고장 커달레인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이름을 딴 작은 마을로, 그가 가진 특이한 용모와 함께 인디언 혼혈이란 주장이 심심치 않게 제기된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커달레인에 사는 인구 5만의 주민 중에서 9할 이상이 백인이며 보잉턴 스스로도 생전에 인디언 설을 일축하며 부인했었다. 고향 세인트매리스의 벌목촌과 워싱턴 주 타코마에서 자라난 그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하고 힘이 세서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교를 대표하는 레슬링 선수였다. 그가 처음 비행을 경험한 것은 기억도 하기 힘든 겨우 6살이 되던 해였는데, 그 뒤 태평양을 무착륙으로 횡단해 유명해진 클라이드 팽본(Clyde Pangborn)과 함께 탔었다.


2. 스포츠광 책상물림[편집]


1930년에 워싱턴 대학교에 입학한 보잉턴은 미 육군 ROTC에 입단하였으며, 람다카이알파 사교 클럽에 가입했다. 대학에서도 운동에 두각을 보인 그는 레슬링부와 수영부에서 활동하면서 미국 북서부 대학 미들급 레슬링 타이틀을 따내기도 했다. 대학에서 항공 공학을 공부한 그는 1934년에 대학을 졸업과 동시에 미 육군 상근예비역[1] 소위로 임관, 미 육군 제630 해안포병대에서 2달간 현역으로 복무 후 예비역으로 전환하여 군생활과 직장생활을 병행했다. 고향에서 그는 탄광촌과 벌목 캠프에서 일하며 여름을 보내고 도로 공사 현장에서 커달레인 화재 예방 협회의 경비 업무를 보기도 했다. 대학 댄스 파티에서 만났던 17세 소녀 헬렌 클락(Helen Clark)과 졸업 후 결혼한 보잉턴은 보잉 사에 입사하여 제도공과 엔지니어로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원체 혈기왕성한 성격이었던 그는 책상물림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제도판에 달라붙어 도면을 그리며 비행기를 설계하는 것보다 자기가 직접 몰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어지는 욕망이 커가는 것을 깨닫고, 남은 군생활은 조종사로 근무하기를 희망하게 된다.

조종사가 되기 위해 지원한 그였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조종사는 미혼 남성에게만 지원 자격을 주고 있었다. 이에 보잉턴이 출생증명을 다시 알아보니 자신이 계부를 따라 할렌벡이란 이름으로 자라났지만 친부는 찰스 보잉턴이었고 젖먹이일 때 이혼한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레고리 보잉턴이란 이름으로는 공식 결혼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꼼수를 써서 해병대 조종장교에 지원할 수 있었다.


3. 군 경력[편집]


1935년 봄 미 해병대 조종장교에 지원했던 그는 1935년 6월 13일 육군 예비군에서 해병대 예비군으로 전군했고, 7월 16일 해병대 예비역 근무를 시작했다. 1936년 2월 18일 미 해병대 예비군 학생조종사가 된 보잉턴은 플로리다펜사콜라 해군비행기지에 배속돼 비행 훈련을 받았다. 1937년 3월 11일 비행훈련을 수료하고 버지니아 주 콴티코 기지에 위치한 함대 해병대(FMF) 제1항공전대(Aircraft One)로 발령을 받았다. 1937년 7월 2일에는 예비역에서 현역으로 전역하여 해병대 현역 소위가 되었다.

1938년 7월, 필라델피아의 해병대 기초교에서 해병대 현역 신임 소위들이 받는 신임장교 지휘참모과정을 수료하고 샌디에이고 해군비행기지에 위치한 제2해병항공전대로 전출됐다. 이곳에서 항공모함 렉싱턴요크타운에 배속되어 함대 문제훈련(Fleet Problems : 1923~1940년 사이에 있었던 27 차례의 대규모 해군 기동훈련)에 참가하며 실무와 조종술을 연마하게 된다. 1940년 11월 4일에 중위로 진급한 보잉턴은 그 다음달부터는 비행 교관으로서 펜사콜라로 돌아갔다.


4. 플라잉 타이거즈에서[편집]


보잉턴은 1941년 8월 26일 미 해병대에서 중앙항공기제작사(CAMCO)로 전직했다. 그런데 이 회사는 사실 그 이름과는 달리 중화민국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 항공부대(Special Air Unit)에 인력을 파견하는 인력파견업체였다. 중화민국 공군 소속의 이 항공대는 나중에 미국 의용 항공대(AVG)로 일반에 알려졌다. AVG의 첫번째 부대인 플라잉 타이거즈에서 몇 달간 복무한 보잉턴은 편대장이 되었다. 천방지축인 그는 이 부대에서도 괄괄한 지휘관 클레어 셰놀트와 자주 부딪혔다. 보잉턴은 일본기 3.5대를 격파한 것이 공식 인정됐지만 AVG 기록에 따르면 4.5대가 그의 기록으로 보인다. 나중에 그는 그 시절 자신이 6대를 공중 격추했다고 주장했지만 여기에 관해서는 증인이 없다.


5. 해병 항공단에서[편집]


1941년에 미국이 진주만 공습으로 참전을 결정하자, 보잉턴은 AVG와 계약이 해제되어 본국으로 돌아가 1942년 9월 29일 미 해병대 예비역 소령으로 재입대했다. 미 해병대는 경험있는 전투 조종사가 절실했다. 제1해병항공단 제11해병항공전대와 함께 남태평양으로 부임한 그는 과달카날 섬에서 작전하는 제122해병전투비행대대의 부대대장직을 맡게 되었다. 122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보잉턴은 적기를 단 한 대도 격추하지 못했다. 1943년 9월에는 검은양 비행대대란 별명으로 잘 알려진 제214해병전투비행대대장이 되었는데, 이 시절 그의 대대원들은 자신들보다 10살 가까이 나이가 많고 산전수전 겪은 그를 가리켜 그랜드 패피(Grand Pappy : 할배)라고 불렀다. 이 별명은 종군기자들에 의해 보도되면서 아예 그의 이름처럼 되어 버린다.

보잉턴은 검은양 비행대대에서 보우트 F4U 콜세어를 조종하며 세운 무공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러셀 제도-뉴조지아 섬 지역과 부갠빌 섬-뉴브리튼 섬-뉴 섬 지역에서 활약한 보잉턴은 거의 매일 기록을 더하며 차근차근 격추수를 올려나갔다. 그럴수록 그가 이끄는 검은 양들의 무용담은 본국에 알려지며 미국에서 보잉턴과 그의 부하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지게 된다. 대대의 첫 전투 임무 기간에 보잉턴은 32일 동안 14대의 일본기를 격추했다. 12월 27일이 되자 그의 기록은 25대까지 올라갔다.

보잉턴의 전투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43년 10월 17일 부갠빌 끝에 위치한 카힐리 비행장 공격이었다. 24대의 콜세어들은 적기 60대가 새까맣게 몰려 있는 비행장을 빙빙 돌며 대규모 편대를 보내도록 일본군을 자극했다. 치열한 전투에서 적기 20대를 격추한 검은 양떼는 아무 손실 없이 귀환했다. 벨라라벨라 섬에 주둔한 보잉턴 비행대대는 월드 시리즈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그들에게 보내는 야구모자의 숫자만큼 제로기를 격추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들은 프로 선수들로부터 모자 20개를 받았지만 훨씬 더 많은 적기를 격추시켰다.

1944년 1월 3일 라바울 항구 상공에서 1대를 더 격추시킨 그는 미군 최고 에이스와 격추율 타이(Tie)를 달성했지만 자신도 격추되고 만다. 이날, 검은 양 비행대대 소속의 1개 편대(4기)를 포함한 미군 전투기 48대는 부갠빌에서 이륙해 라바울 상공에서 전투기 소탕에 나섰다. 보잉턴은 편대장으로 아침 8시에 목표 상공에 도착했다. 이어진 작전에서 그는 26번째 격추를 기록했다. 그뒤 급강하하며 덮치는 제로센들 속에 뒤섞여 도그파이트를 치르는 도중 보이지도 않고 무선 교신도 없었으며 편대와 함께 귀환하지도 않았다. 훗날 일본 해군의 카와토 마사지로는 자신이 보잉턴을 격추한 조종사라고 주장했다. 2권의 책과 많은 공식 행사에서 그날의 교전을 묘사한 그는 이런 주장을 죽을 때까지 고집했지만 결국 증명되지는 못했다. 보잉턴이 격추 당한 전투에서 약 30대의 미군기와 교전한 70대의 일본 전투기 가운데 카와토 상비조의 출격 기록이 없었던 탓이다. 이때 보잉턴의 윙맨 조지 애쉬먼 대위는 전사했다.

"44년 1월 3일 아침 6시 30분쯤으로 기억되네요. 그날 첫 초계를 위해 발진한 우리는 구름이 너무 많이 끼어서 시야를 확보하려고 6,000피트까지 상승하고 있었습니다. 얕은 각도로 기수를 들고 날던 나는 그때 구름 사이에서 반짝이는 금속성 광채를 보았습니다. 그때 내 제로센의 고도는 5,000피트쯤이었을 겁니다. 4대의 전투기가 차례로 꼬리를 물고 마치 기차놀이를 하듯 쫓고 쫓기는 진기한 광경이었죠. 맨 앞에는 제로, 그 뒤는 콜세어, 그 뒤를 다시 제로, 또 그 뒤를 콜세어가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마치 서로 우군기로 오인하고 일렬 종대로 비행하듯이 말이죠. 정신을 차린 나는 가장 뒤에서 날고 있는 콜세어의 후방을 향해 강하했습니다. 거리가 200피트까지 좁혀졌을 때 나는 기관포 레버를 당겨 사격을 시작했죠. 발사된 탄이 뻗어가다가 적기에 두어발 정도가 맞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습니다. 한발은 엔진 카울링 오른쪽, 또 한발은 콕핏 후방 오른쪽에 명중해 폭발했어요. 피격된 그 콜세어는 울컥울컥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기수를 아래로 향하고 강하하더군요. 갑작스런 추락이라기 보단 마치 얕은 강하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걸 따라가던 나는 고도 1000피트에서 캐노피가 열리고 조종사가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지요. 격추를 확인한 나는 그 적기를 따라 강하하던 걸 멈추고 수평으로 비행하며 지켜 보았습니다. 그 콜세어는 완만하게 고도를 낮추며 천천히 바다와 가까와지면서 대략 1.5~3마일을 그렇게 날아가더니, 해면에 처박히며 흰 포말을 뿜어냈죠." - 카와토 마사지로


뒤이은 철저한 수색 끝에 보잉턴은 전투중 행방불명으로 선언되었으나, 실상은 바다에 불시착한 후 헤엄치다가 일본 잠수함에 구조되어 전쟁 포로가 됐다. 이 잠수함은 그를 구해내고 13일 뒤 격침당했다. 보잉턴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일본에 의해 한번도 공식 전쟁포로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그를 잡은 것을 적십자에 통보해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전쟁의 남은 기간 약 20개월을 일본의 잔혹한 포로 수용소에서 보냈다. 라바울과 트럭 섬에서 붙잡혀 있던 그는 헤일스톤 작전으로 알려진 미 해군의 대규모 공격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뒤 오후나 수용소로 옮겨졌다가 결국 도쿄 근처의 오오모리 포로수용소(大森捕虜収容所)로 이송됐다. 수용소의 간수들과 일본군들은 걸핏하면 포로가 된 미군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는데, 보잉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일본군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그들 사이에서도 구타는 일상이었고 폭행이 체질화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전후에는 자신에게 관대하게 대해준 간수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2]

1945년 8월 중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 이어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뒤에 보잉턴은 오오모리 수용소에서 8월 29일에야 풀려났다. 1945년 9월 12일에 미국 앨러미더 해군 항공기지로 돌아가 자신이 지휘했던 214대대의 부하들과 다시 만났다. 그날 밤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세인트프랜시스 호텔에서 그를 위해 파티가 열린 것을 라이프 지에서 보도했다. 이 잡지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보여준 것은 이 파티를 다룬 기사가 처음이었다. 도착에 앞서 9월 6일 그 동안 잠정적이었던 해병 중령 계급장이 그에게 정식으로 수여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보잉턴 중령은 미국인 최고의 명예인 명예 훈장을 받기 위해 워싱턴으로 갔다. 이 훈장은 전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1944년 3월에 수여하려 했지만 그가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연기된 것이다. 1944년 10월 4일 보잉턴은 라바울 공습을 기려 미 해병대 사령관으로부터 해군 십자장을 받았다. 다음날 니미츠 데이에 그와 다른 수병과 해병들이 백악관에서 해리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미국 의회의 이름으로 미합중국 대통령이 아래와 같이 군무를 수행한 보잉턴 미합중국 해병대 예비역 소령에게 기쁜 마음으로 명예훈장을 수여합니다. 1943년 9월 12일부터 1944년 1월 3일까지 솔로몬 지역에서 일본군에 맞서 제214해병전투비행대대장으로 주어진 의무를 뛰어넘는 비범한 영웅적 행위를 하였습니다. 중무장한 적군의 상공에서 잇따른 위험한 비행을 통해 늘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보잉턴 소령은 언제나 대담하고 용감하게 적군을 공격하며 그의 편대를 전투에 이끌어 일본군의 선박, 해안기지, 항공전력에 궤멸적 타격을 가했습니다. 적군에게 심각한 손상을 가하려는 확고한 의지로 보잉턴 소령은 10월 17일 카힐리 상공에서 24대의 편대를 이끌고 적기 60대가 있는 비행장을 계속 선회하며 일본군이 항공기를 출격시키도록 대담하게 도전했습니다. 그의 눈부신 지휘 하에 아군기는 1대의 손실도 없이 이어지는 교전에서 적기 20대를 격추했습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최상의 조종사이자 단호한 전사 보잉턴 소령은 개인 통산 적기 26대를 파괴했으며 강한 지도력으로 전투 태세를 갖추어 이 전략적으로 몹시 중요한 지역에서 연합군이 공중 전과를 얻는 데 그의 지휘가 탁월한 요소였습니다."


명예 훈장과 십자장을 받은 보잉턴은 승전축하 순회 행사에 나섰다. 원래는 콴티코 기지의 해병학교에 보고하도록 명령받았지만 나중에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미라마에 위치한 서부 해안 해병항공창의 사령관에게 보고하도록 지시받았다. 1947년 8월 1일 전역한 그는 복무 중 무공과 노고를 인정받아 대령으로 특별 진급과 동시에 전역했다.


6. 퇴역 후[편집]


보잉턴은 거칠고 방탕한 성격의 기인으로도 잘 알려졌다. 게다가 폭음을 일삼아 전쟁 뒤 몇 년 사이에 술이 그를 괴롭히고 여러 번 이혼한 것도 음주 탓이 컸었다. 어느 정도냐하면, 수용소에서 2년을 보내면서 술을 못마신 덕분에 스스로 건강이 좋아졌다고 인정했을 정도니까.... 아돌프 갈란트 못지 않은 무시무시한 골초이기도 해서 전투 중에도 조종석에서 담배를 놓지 않았으며, 동료들은 그의 조종석 틈으로 늘상 새어 나오던 담배 연기를 증언하곤 했다. 전역한 그는 여러가지 직업을 가졌는데 그중에는 프로레슬링의 심판과 선수로 뛴 적도 있다.

많은 이들은 1970년대 텔레비젼 드라마 검은 양떼(Baa Baa Black Sheep : 검은양 비행대)를 통해 그를 알았다. 이것은 보잉턴이 쓴 자서전을 윤색하여 만들어진 TV 프로그램이었는데, 로버트 콘라드(Robert Conrad : 1935~)가 보잉턴을 연기했다. 영화 라이트 스터프의 척 예거처럼 패피 보잉턴도 드라마의 시즌2에서 기지를 방문하는 장군으로 잠깐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다. 보잉턴과 함께 생활했던 여러 부대원들은 이 드라마를 보고 매우 격분했는데 대부분이 픽션이고 보잉턴을 지나치게 미화했다고 주장했다. 보잉턴은 자주 인터뷰어들과 청중에게 그 TV 시리즈는 픽션이며 실제 역사와는 약간 관련이 있을 뿐이라며 그것을 말도 안 되는 헐리우드 싸구려 영화라고 말했다. 자서전뿐 아니라 보잉턴은 AVG를 다룬 소설도 썼다.

예술 작품이나 출판 사진에서 종종 보잉턴은 숫자 86이 새겨지고 킬마크로 뒤덮인 룰루벨이란 전투기와 함께 있는데 이것은 그의 탑승기가 아니었다. 사실 그는 같은 비행기를 몇 번 이상 탄 적이 거의 없다. 그는 겉보기에 가장 엉망이어서 아무도 타기 싫어하는 F4U를 골라서 탔다고 전해진다. 기체번호 86의 F4U에 보잉턴이 탑승한 사진은 1943년 11월 26일 뉴헤브라이드 제도의 에스피리투산토에서 촬영했다. 이 사진은 보잉턴이 지휘관으로서 214대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작전을 치르던 사이에 전대가 휴가를 보낼 때 찍었다. 종전 후 보잉턴이 그 사진 속의 전투기가 룰루벨이라고 주장했지만 항공 역사가 브루스 갬블의 분석에 따르면 아무래도 루시벨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214대대는 보잉턴이 지휘하기 전에 솔로몬 제도에서 두 번의 작전에 투입됐다.

또한 그는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의 폴가버 항공기 복원보관소를 방문했는데 때마침 F4U기가 막 복구되어 출고되는 참이었다. 박물관 안내원의 목격에 따르면 보잉턴이 옛날 생각이 나서 조종석에 올라타더니 엔진 시동을 걸려 했다. 보잉턴은 그 커세어의 랜딩기어 수납부에 매직마커를 써서 서명을 남겼다. 그리고 사실상 자기가 본 커세어 중에 최상의 컨디션이라고 말했다. 몇년 뒤 그 기체는 박물관의 천정에 매달렸는데 시력이 좋은 이들이라면 보잉턴의 서명을 바닥에서 올려다 볼 수 있다.

1957년에는 TV 패널쇼 진실고백에 게스트 도전자로 출연했는데, 이때 그가 숨기고 싶어한 가정사가 일부 드러나 대중들로부터 비난을 사기도 했다. 보잉턴은 첫 번째 아내 헬렌이 낳은 세 자녀와 한동안 인연을 끊고 지낸 무책임한 아버지였고, 결혼도 네 번이나 했다. 그런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딸 쟈네트 보잉턴은 자살했으나, 아들 그레고리 보잉턴 2세는 1960년에 미 공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령 계급으로 공군에서 예편했다.


7. 죽음[편집]


오랫동안 술고래에다 골초였던 보잉턴은 1988년 1월 11일 캘리포니아주 프레스노에서 75세에 암으로 사망했다. 1월 15일에는 명예훈장 포상자로 예식 7A-150에 따라 앤드류 공군기지 해병파견대의 F-4 팬텀들이 추모 비행을 포함한 최고의 예를 다해서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프레스노에서 운구하기에 앞서서 VMA-214 편대도 추모 비행을 시도했으나 4대의 해리어 중에서 1대가 고장을 일으켜 취소되었다. 장례식이 끝난 뒤 보잉턴의 친구 프레드 로쉬가 묘비를 내려다 보니 보잉턴이 복싱의 전설 조 루이스 옆이어서 "보잉턴이 또 한바탕 싸우러 가면 안 될텐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8. 헌정[편집]


2007년 8월 아이다호 주 커달레인 공항이 보잉턴을 기려 패피 보잉턴 비행장으로 개명했다. 영화 제작자 케빈 곤잘레스가 2008년에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패피 보잉턴 비행장(Pappy Boyington Field)을 제작해 그를 기념하는 이름을 더하기 위해 캠페인을 벌인 국민들을 연대기적으로 담아내었다. 이 영화는 캠페인에 관여한 이 지역의 참전 용사들을 보여줄 뿐 아니라 아들 그레고리 보잉턴 2세와 TV 시리즈에서 그를 연기한 로버트 콘라드를 통해 보잉턴의 개인적 삶을 들여다보았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해병대의 감수를 받았다.

그가 이끌던 부대인 제214해병전투비행대대는 현재 제214해병공격비행대대(VMA-214)로 재편되어 AV-8B 해리어 II를 운용하고 있는데, 지금도 비행 지휘관기의 캐노피 프레임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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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의 예비역은 민간에서 바로 예비역으로 입대하며, 근무는 주말에만 출퇴근을 하고 연간 2주일은 입소훈련도 받는다. 출퇴근하는 복무 특성상 현역으로부터 파트파임 군인, 주말 군인, 시민군이라며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예비역으로 직역하면 의미가 혼동되기 때문에 상근예비역으로 의역했다.[2] 이 시기에 보잉턴은 잠정적으로 중령 진급 대상으로 뽑혔다. 그와 포로 생활을 함께 견뎌낸 동료는 훗날 명예훈장을 받은 잠수함 함장 리차드 오케인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