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나다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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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 Battle of Grenada
프랑스어 : La bataille navale de la Grenade, Bataille de la Grenade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3.2. 영국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9년 7월 6일 서인도 제도 그레나다 섬 앞바다에서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이 격돌한 전투. 프랑스군이 승리했다.

2. 배경[편집]


1778년 9월 7일, 부이예 후작이 이끄는 프랑스 군이 도미니카 섬을 점령해 카리브 해에서의 영국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영국은 이에 맞서 12월 15일 세인트루시아 해전에서 데스탱 백작 장 바티스트 샤를 앙리 엑토르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고 세인루시아 섬을 공략했다. 이후 양측은 한동안 증원군을 모으며 세력 확대에 골몰했다. 당시 서인도 제도의 영국 함대는 존 바이런 제독 휘하의 전열함 10척을 주축으로 삼았고, 프랑스 함대는 데스탱 백작이 이끄는 전열함 12척을 주축으로 삼았다. 1779년 전반기 내내 대치하며 본국으로부터 증원군을 받은 결과, 바이런 휘하 함대는 21척, 데스탱 백작 휘하 함대는 25척으로 프랑스군이 다소 우세했다.

게다가 1779년 6월 6일, 바이런 제독은 본국으로부터 세인트루시아 섬으로 향할 예정인 영국 상선을 호위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남긴 채 영국으로 향했다. 데스탱 백작은 이 틈을 타 카리브 해에서 영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로 결심했다. 그해 6월 18일, 프랑스군은 세인트빈센트 섬을 공략했고 7월 4일 그레나다를 공략했다. 이 무렵 세인트루시아 섬의 고로스 만에 도착한 바이런 제독은 적이 세인트빈센트 섬과 그레나다를 점령했다는 급보를 접하자 즉시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 진군했다. 데스탱 백작은 7월 5일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자 즉시 해군을 이끌고 이들과 맞설 준비를 했다. 이리하여 카리브 해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 해군의 맞대결이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프랑스군[편집]


  • 지휘관: 데스탱 백작 장 바티스트 샤를 앙리 엑토르
  • 병력: 전열함 25척

3.2. 영국군[편집]


  • 지휘관: 존 바이런 제독
  • 병력: 전열함 21척

4. 전투 경과[편집]


1779년 7월 6일 아침, 존 바이런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그레나다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데스탱 백작은 즉각 전투 태세를 갖추려 했지만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강력한 바람 때문에 제대로 이동하지 못했고 좌현 쪽은 해안에 너무 근접해서 배가 가라앉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우현 쪽으로 천천히 이동해야 했다. 바이런은 많은 프랑스 전선들이 항구 밖으로 나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굳이 전열을 갖추고 천천히 공격하는 것보다는 즉각 돌격해 적을 쓸어버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 함대의 규모를 실제보다 과소평가하고 있었기에 정면대결을 벌이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이에 바이런 제독은 전위 함대에 소속된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술탄, 보이네 호에게 즉시 출격하여 적의 후방을 차단할 것을 지시했다.

명령을 접수받은 영국 전위함대는 순풍을 타고 적을 향해 나아가 포격전을 개시했다. 그런데 이제 막 전투를 시작한 7시경에 바람이 돌연 프랑스 함대 쪽에서부터 불기 시작했다. 데스탱 백작은 덕분에 함대를 우현으로 기울어진 전열로 편성하고 영국 전위 함대를 향한 반격을 개시했다. 바이런은 적이 대열을 갖춘 것을 보고 비로소 적의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후퇴 명령을 내리는 대신 전군에 적선을 향해 근접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적 함대에 포격을 가하면서도 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영국 함대는 이들을 추격하다가 전열이 거의 흐트러졌고, 너무 멀리까지 가버린 그렉톤, 콘월, 라이온 호는 적의 거의 모든 함대에게 공격당해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결국 바이런은 전술을 바꿔 전위 함대와 중앙 함대에게 집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그 사이에 부제독 사무엘 베링턴이 이끄는 전위함대는 적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베링턴은 팔에 부상을 입었으며, 베링턴의 기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심한 손상을 입었다. 반면 하이드 파커 제독이 이끄는 후위 함대는 대부분 전투에 가담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지켜봤다. 이렇듯 전열이 엉망이 되었으니 제대로 전투가 이뤄질리 만무했고, 영국 해군은 자칫하면 이 전투에서 몰살당할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데스탱 백작은 적을 섬멸하는 것보다는 그레나다 섬의 지배권을 지키는 걸 우선시했고, 오후 3시 경에 전 함대에게 그레나다로 물러서라고 지시했다. 바이런은 이 틈에 함대를 수습하여 전장을 멀찍이 떠났다. 이리하여 그레나다 해전은 프랑스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편집]


영국군은 그레나다 해전에서 183명이 전사하고 346명이 부상당했으며, 라이온 호는 막대한 손상을 입은 후 적에게 포획되는 걸 피하기 위해 자메이카로 달아났다. 반면 프랑스군은 190명의 사망자와 759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바이런은 그레나다를 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영국으로 철수했고, 데스탱 백작 역시 또다른 전투를 강행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산 도밍고로 돌아갔다.

그 후 바이런은 해군 장성을 은퇴하고 자신의 영지에서 말년을 보냈고, 데스탱 백작은 1780년 9월에 서인도 제도에 대한 군사 작전을 마무리한 후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프랑스 대혁명 시기 왕당파로서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를 지지하고 1793년 마리 앙투아네트 재판에서 그녀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다가 반역죄로 기소되어 1794년 4월 28일 단두대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아내 마리 소피 루셀롯과 외동딸 역시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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