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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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켈리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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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여우주연상
제26회
(1953년)


제27회
(1954년)


제28회
(1955년)

오드리 헵번
(로마의 휴일)

그레이스 켈리
(갈채)[1]


안나 마냐니
(장미 문신)

-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파일:goldenglobe.png
여우조연상 - 영화
제10회
(1953년)


제11회
(1954년)


제12회
(1955년)

케이티 주라도
(하이 눈)

그레이스 켈리
(모감보)


잰 스털링
(비상 착륙)
여우주연상 - 드라마
제11회
(1954년)


제12회
(1955년)


제13회
(1956년)

오드리 헵번
(로마의 휴일)

그레이스 켈리
(갈채)


안나 마냐니
(장미 문신)

--



모나코 레니에 3세의 공비
그레이스 켈리
Grace, Princesse de Monaco

이름
그레이스 패트리샤 켈리
(Grace Patricia Kelly)
출생
1929년 11월 1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사망
1982년 9월 14일(향년 52세)
모나코 라콜 모나코 병원
장례식
1982년 9월 18일
모나코 모나코빌 모나코 대성당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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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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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모나코|

모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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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배우자
모나코 공 레니에 3세 (1956년 결혼)
자녀
카롤린, 알베르 2세, 스테파니
아버지
존 B. 켈리 시니어
어머니
마거릿 메이저
형제
마거릿, 존 주니어, 엘리자베스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Grace Kelly Signature.png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출생과 성장
3.2. 배우 생활
3.3. 배우에서 모나코의 공비로
3.4. 불행한 결혼생활과 죽음
4. 패션 스타일
5. 여담
6. 어록
7. 매체에서
8. 본가
8.1. 아버지 존 켈리 시니어
8.2. 오빠 존 켈리 주니어
9. 자녀
10. 출연작



1. 개요[편집]




미국배우이자 모나코레니에 3세의 비(妃).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골든글로브 상을 수상한 배우이다.

2. 작위[편집]




3. 생애[편집]



3.1. 출생과 성장[편집]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아버지와 독일계 미국인인 어머니의 1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사업자이자 조정 선수였고, 어머니는 최초의 여성 체육교사였다. 켈리가는 전형적인 20세기 중반 미국의 부유한 중산층 가정이였고, 아버지가 재산 관리에 철저해서 그레이스를 비롯한 사남매 역시 대공황 시기에도 유복하게 생활했다. 고등학교때는 춤과 연기를 배웠으며, 졸업책에 존경하는 배우로 잉그리드 버그먼조셉 코튼을 꼽았다.

건강하고 활달한 자식들을 편애한 아버지는 허약한 그레이스를 가장 덜 예뻐했다.


3.2. 배우 생활[편집]


모델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고, 브로드웨이와 텔레비전에서 연기를 하다가 마침내 할리우드의 스릴러 영화 《14시간》에서 단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관객과 평론가들의 눈에 띄지 못하고 연극 무대와 텔레비전에서 활동을 지속하다 1952년 서부극 영화 《하이 눈》에서 게리 쿠퍼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1953년 《모감보》에서 클라크 게이블, 에바 가드너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 본래 켈리가 맡은 배역은 진 티어니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티어니가 우울증을 겪자 켈리로 교체되었다. 켈리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모감보》의 성공은 켈리에게 골든 글로브 상의 영광을 안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의 눈에 드는 행운까지 안겨주었다. 히치콕은 켈리를 데리고 《다이얼 M을 돌려라》와 《이창》을 제작했고, 그 전까지만 해도 순진하고 청순한 이미지였던 켈리는 히치콕의 영화로 인해 우아하고도 차가운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1] 이후에도 다작하며 연기력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마침내 1954년에 영화 《갈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2]

스타덤에 올라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그레이스 켈리는 숱한 스캔들을 뿌리고 다녔는데, 이에 히치콕이 붙여준 별명으로는 "눈 덮인 화산".[3][4] 그러나 유독 대한민국에서는 스캔들 하나 없이 깨끗하고 정숙한 이미지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5] 영화에 함께 출연했던 거의 모든 유부남 주조연 배우들과 부적절한 관계였다고 알려져있는데, 이중 일부는 가족들이 직접 사실이 맞다고 확인해주기도 했다. 게리 쿠퍼[6], 클라크 게이블[7], 레이 멀랜드[8], 윌리엄 홀든[9], 빙 크로즈비[10][11]가 거의 확실시된 불륜 상대들이며 켈리의 어머니는 1956년의 신문 지상 폭로를 통해 이들과 함께 프랭크 시나트러[12], 데이비드 니븐, 장 피에르 오몽 등을 거론했다. 이 외에도 이란의 왕 팔레비 2세, 스펜서 트레이시 등 염문을 뿌린 상대는 더 많다. 그럼에도 홀든, 멀랜드, 게이블 외엔 소문에 불과하다는 입장들도 있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의 상대 역이었던 레이 멀랜드와의 스캔들인데, 당시 멀랜드는 켈리보다 22살이나 더 많은 유부남이었고 둘이 대놓고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노출해 헤더 하퍼 등 당대의 인기 연예 칼럼니스트들이 켈리를 색정광으로 묘사하며 비난하기도 했다.

추측이지만 켈리가 주로 한참 연상의 유부남 배우들과 스캔들이 잦았던 이유가 엘렉트라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 뻘인 남자들에게서 사랑받고 싶었다는 것. 실제로 켈리는 부모에게서 제일 덜 주목받던 아이였다. 훗날 배우 활동을 접으면서까지 레니에 3세와의 결혼을 결심한 것도 자신의 결혼으로 집안이 상류층에 편입하게 되면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거란 생각에서였다는 비화가 있다. 실제로 그레이스의 전기 작가에 의하면 "그레이스의 어머니는 딸이 결혼한다고 얘기한 남자만 50명 정도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 또한 가족들의 관심을 끌려는 어그로였을 수 있다는 것.

러시아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올레크 카시니하고는 진지하게 아이를 가지고 결혼을 약속했지만, 가족들은 맹반대했고 스캔들로 배우 경력이 끝날 것을 두려워한 켈리는 결국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했다. 카시니는 평생 누군가가 켈리의 낙태설에 대해 물으면 그 일은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이고 내버려두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 애인 팔아먹기가 일쑤인 할리우드에서도, 인간적 면에서도 보기 드문 신사적인 태도.

이런 화려한 불륜 스캔들로 더 유명하지만, 그레이스는 미모나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훌륭한 배우, 진짜 연기 실력을 높이기 위해 매우 노력했다. 영화 《갈채》에 출연하기 위해 영화사에 '이거 출연 안 시켜주면 기차에서 뛰어내린다, 확 은퇴한다'고 협박해 기어코 출연한 것이 그 예.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주디 갈런드의 수상에 거의 이견이 없었기에 지금도 말 많은 수상으로 꼽힌다. 이때 주디 갈런드는 명연기에도 불구, 항상 촬영장에 지각하거나 펑크, 음주로 제정신이 아니라 업계 평판이 내핵까지 꽂혔을 때였고 성실하고 이미지가 좋았던 그레이스가 촌스러운 역할을 자청해 열연한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평가를 더 얻었기 때문이라고.


3.3. 배우에서 모나코의 공비로[편집]


이후 칸 영화제 주최측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로 간 그레이스는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 잡지사 Paris Match가 모나코 공(公)[13] 레니에 3세와의 만남을 제안한 것. 둘은 1시간 20분간 궁을 함께 산책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레이스는 칸으로 돌아가면서 레니에 3세를 매력적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레니에 3세는 궁의 개인 상영실에서 그레이스가 출연한 모든 영화를 상영하도록 지시했다. 레니에 3세의 친구들은 그가 그레이스에게 매료되었다고 말했다. 이후 7개월간 두 사람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가까워졌고, 1955년 말 레니에 3세는 뉴욕으로 향했다. 공식적으로는 건강검진을 위한 방문이었으나, 사실 그레이스에게 청혼하기 위한 것이었다. 몇 차례의 만남 후 뉴욕에서 열린 비공개 파티에서 그레이스에게 청혼했다. 10.47캐럿의 다이아몬드 약혼반지가 유명한데 사실 처음 받은 반지는 모나코 국기 색의 루비와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영화 <<상류 사회>>에서 소품 반지를 착용할 예정이었으나 레니에 공이 진짜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한 것. 그레이스는 영화에 실제 반지를 착용하고 나온다. 켈리의 다음 영화 《백조》는 유럽 왕실을 다룬 코미디 영화였으며, 영화 속에서 켈리의 배역은 공주였다. 그리고 그 다음 영화 《상류 사회》는 켈리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켈리가 레니에 3세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하게 되면서, 불과 5년여 만에 영화계에서 은퇴하게 된 것.

1956년 4월 18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레니에 3세와 켈리는 무려 1주일 일정으로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로 켈리는 주로 그레이스 공비(Princess Grace)[14]라고 불리게 된다. 그녀가 프랭크 시나트러에게 2달러를 선물 받은 뒤 레니에 3세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여 2달러가 행운의 상징으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이 드라마틱한 결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 및 추측과 카더라 통신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오나시스와 관련된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3.4. 불행한 결혼생활과 죽음[편집]


레니에 3세와의 사이에서 1957년 장녀 카롤린 공녀(公女), 1958년 외아들 알베르 2세, 1965년에는 차녀 스테파니 공녀를 낳아 총 1남 2녀를 두었다. 켈리는 알베르 2세를 낳고 스테파니 공녀를 갖기 전에 두 번 임신했으나 건강이 좋지 못해 유산을 거듭했다고 한다. 스테파니 공녀가 늦둥이기도 했지만 여러 차례 유산한 뒤에 본 자식이라 더 애지중지했다는 비화가 있다. 스테파니 공녀가 태어난 후에도 한 차례 유산했다.

카롤린 공녀의 탄생으로 레니에 3세에게 적법한 후계자가 생기자 프랑스에 합병당할 위기를 넘기게 됐는데, 이 때 모나코 전역이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후 켈리 덕분에 모나코에 미국인 관광객이 폭증했다.

그러나 세기의 결혼 이후, 실제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켈리는 '배우 생활을 하며 매너를 지키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결혼 이후에 따로 배울 것이 없다.'고 했지만, 공가에 적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모나코에서는 프랑스어를 썼는데 켈리는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해서 언어 장벽으로 적응에 애로사항이 있었다. 켈리는 자녀들과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으며 대신 가정교사가 아이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공비로서 공가의 엄격한 규칙이나 전통을 제대로 지켜야 하고, 언제나 긴장하며 위엄을 갖춘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또 크게 웃을 수도, 누구와 잡담을 할 수도 없는 생활이었다.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이 다른 레니에 3세와의 갈등도 많았다. 레니에는 까다롭고 비위 맞추기 어려운 폭군 타입이었지만 켈리는 신혼여행에서부터 남편의 본성을 알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켈리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급기야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다.[15]

시어머니 샤를로트 그리말디는 자신도 사생아 출신이면서 미국인 평민에 배우 출신인 며느리를 무시하며 따돌렸다.[16] 시누이 앙투아네트 공녀와의 갈등도 심했는데 앙투아네트는 동생 레니에 3세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켈리 이전에 사귀던 여자와의 결혼을 방해하려는 음모를 꾸민 적도 있었다. 그런 시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못해 시집살이를 꽤나 했다.

결혼 생활도 나빠져 레니에와 그레이스는 각자 바람 났다는 소문이 돌았고 대판 싸운 레니에 3세는 모나코 내에서 켈리의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금지했다. 할리우드의 자유로운 생활을 그리워하던 차에 1962년에 히치콕이 영화 《마니》에 켈리의 출연을 제안해 왔고 배우로 복귀하려 했으나, 영화 속에서 켈리가 맡을 배역이 도벽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품위 문제로 모나코 언론과 국민들이 크게 반대해서 결국 무산, 켈리가 출연한 영화는 1956년의 《상류 사회》가 마지막이 되었다.

1982년 9월 13일 시골 별장이 있던 프랑스 몽 아젤에서 모나코로 돌아가기 위해 운전하던 중 뇌출혈로 정신을 잃었고, 차가 산비탈로 굴러 떨어지는 교통사고가 났다. 운전석에 타고 있던 스테파니는 가벼운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지만, 켈리는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다음날인 9월 14일, 향년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4. 패션 스타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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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패션의 아이콘 중 하나이다. 1950년대 패션을 참고하고 싶다면 그레이스 켈리의 패션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당대 활동하던 스타들인 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 역시 당대의 패션 아이콘들이었지만, 오드리 햅번은 1950년대보단 1960년대 패션이 더 유명한 편이고, 마릴린 먼로의 패션은 현대에 소화할 만한 의상은 많이 보급된 편이라 나머지는 일상룩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몸매가 드러나는 드레스다. 켈리는 클래식한 느낌의 슬랙스부터 우아한 레이디 라이크 룩까지 적절히 소화했으므로 쉽게 참고하기 좋다.

영화 《이창》에서 선보인 의상들은 그레이스 켈리 하면 떠오를 정도로, 그녀의 이미지에 맞게 고급스러우면서도 단정하게 디자인 되었다. 헤어스타일은 물론 악세사리와 장갑까지 세련된 미가 돋보인다. 디자이너오드리 헵번부터 엘리자베스 테일러까지 다양한 의상을 디자인했던 이디스 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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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결백하다》
스카프 또한 빼먹을 수 없다. 영화 《나는 결백하다》에서 스카프를 흩날리며 운전하는 모습은 우아한 모습이 아름다워,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패러디되기도 했다.

영화의 제목답게 상류층 아가씨 같이 고귀한, 백조 같이 기품 있는 디자인을 보여준다. 《이창》과 함께 《상류 사회》 역시 아름다운 의상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폭 넓게 부풀린 소매나 드레스 같이 넓게 퍼진 풀 스커트는 로맨틱 스타일 시대인 19세기 초중반을 떠올릴 법한 실루엣이다. 이 의상들은 헬런 로즈가 디자인했는데, 켈리의 웨딩드레스 역시 헬런 로즈가 디자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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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 하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웨딩드레스일 것이다. 영화 의상 담당인 헬런 로즈가 디자인했다.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이라, 요새도 비슷한 디자인의 웨딩드레스가 나오고 있으며 많은 신부들에게 선택받고 있다. 영국캐서린 미들턴, 미란다 커 등 왕족과 연예인 등의 셀럽들까지 따라할 정도로 유명하다. 정교한 레이스가 돋보이는 상의는 자칫 너무 화려해보일 수 있으나, 차이나 카라 같이 덮여있는 하이넥 형태 때문에 품위 있고 고결해보이기까지 하다. 또한 독특한 스커트의 디자인이 눈에 띈다. 하이웨스트 스커트처럼 밴드로 허리를 감싸놓은 스커트는 흔히 볼 수 있는 허리부터 아래까지 쭉 퍼지는 A라인, 몸매가 드러나는 H라인의 드레스가 아니라 튤립 꽃봉오리처럼 봉긋한 형태인데, 상의의 정숙함을 하의의 사랑스러움으로 매치시켜 켈리만의 우아함을 한껏 돋보인다.

5. 여담[편집]


  • 마릴린 먼로가 섹시한 미인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현재 그녀는 우아한 미인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색기가 넘치는 미녀를 보고 마릴린 먼로에 비교하는 것처럼 기품이 넘치는 미녀를 보고 켈리에 비하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 뷰티풀피플닷컴(BeautifulPeople.com)에서 회원 12만 7천 명을 상대로 조사한 세계 왕족 외모 순위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1위에 랭크되었다.

  • 프랑스의 축구 구단 AS 모나코 FC의 현 유니폼인 하양-빨강 대각선 디자인은 1961년에 그레이스 켈리가 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디자인을 선보인 해에 모나코는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

  •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내고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점은 영국의 다이애나 스펜서와 매우 비슷하다.

  • 상술한 것처럼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였고, 이런 배경 때문에 처음부터 천주교 신자로 자랐다. 그리말디 가문의 종교를 생각하면 공비 후보군으로 적합한 인물.[17]

  • 술을 잘 못해서 다른 배우들의 속도에 맞춰 마시려다가 토하곤 했다.



  • 1956년 임신한 배를 에르메스 백으로 가린 사진이 Life지에 실리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켈리백으로 알려졌다. 1977년 공가의 허락을 얻어 공식적으로 켈리백으로 명명되었다.


6. 어록[편집]


내 인생이 동화라는 생각 자체가 동화다.


나는 기본적으로 페미니스트다. 여성은 자신이 결정한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인생에 대해 단순한 견해를 가지고 계셨다. '공짜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노력과 끈기, 정직에 의해 얻어져야 한다.


나는 끊임없이 사랑에 빠졌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나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스크린과 실생활에서 진주를 선호한다.


화를 내는 것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후회보다 좋은 기억들을 택한다.


2~3년 일찍 공을 만났다면 그와 결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렇게 빨리 결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적절한 시기에 만났다.


히치콕씨는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살인씬은 러브씬처럼, 러브씬은 살인씬처럼 찍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의 덕분이다.


7. 매체에서[편집]


  • 2014년에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가 나왔다. 일생 전체를 다룬 전기 영화는 아니고, 결혼 직후인 1960년대 초에 모나코가 프랑스에 병합될 위기를 배경으로 했다. 니콜 키드먼이 그레이스 역으로 출연했다. 제작 전 아들인 알베르 2세는 영화 만들기만 하면 소송도 불사한다는 엄포를 놓았는데, 아마도 켈리의 결혼 전 문란한 관계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노골적으로 까발릴까 미리 선수쳤다는 추측.

  • 게임 레인보우 식스 시즈의 오퍼레이터 도깨비의 본명[18]은 그녀의 이름에서 따왔다.

  • 가수 MIKA의 'Grace Kelly'라는 곡이 있다. 모티브는 당연히 이 문서의 주인공인 그레이스 켈리가 맞고, 노래에 '그레이스 켈리'라는 가사가 나오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가사의 내용은 그레이스 켈리와는 큰 상관이 없다.


8. 본가[편집]



8.1. 아버지 존 켈리 시니어[편집]


딸의 전세계적 유명세에 가려져서 그렇지, 존 켈리 시니어는 아들과 함께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유일하게 등재되어 있는 대선수다. 그는 벽돌공 생활을 하다가 우연하게 입문하게 된 조정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여, 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존 켈리 시니어가 조정에 출전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는데, 본래 조정은 영국에서도 귀족들의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벽돌공으로 일했던 신분이 문제가 되었다. 이유는 '신사가 아니라서'. 존 켈리 시니어는 영국의 헨리 로열 레카타 조정에 출전하려다가 신분 때문에 가로막혔고, 경쟁자인 귀족 잭 베러스퍼드에게 우승컵을 넘겨주어야 했다. 그러다가 우여곡적 끝에 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에 출전하여 잭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은퇴 이후에는 사업가 겸 정치인, 조정 이사회 회장 등으로서 성공가도를 걸었고, 평생 조정의 대중화를 위해 헌신했다. 또한 신분 때문에 좌절당했던 아픔이 있어서, 평생 가문을 명문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필라델피아주의 가장 큰 공원인 페어마운트 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존 켈리 부자의 조정과 관련된 사연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이렇듯 한 마디로 자수성가계의 전설로 불리는 인물이었던 셈이지만,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바람둥이였다는 면모도 있다.


8.2. 오빠 존 켈리 주니어[편집]


아버지와 같이 조정 선수가 되어 상술했던 대로 아버지가 집안 배경 문제로 불행하게 참전하지 못한 세계 최고의 조정 대회인 영국의 헨리 로열 레가타에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해서 아버지의 숙원을 풀어드렸고, 이 일화는 서프라이즈에서 방영되었다. 은퇴 후에도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고향인 필라델피아의 지역 발전을 위해 힘써 왔으나 1985년 3월에 아침 조깅 중 심장마비로 급사하고 말았다. 표면적으론 그렇지만, 실은 술과 방탕으로 건강을 해친 탓. 성적으로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켜 상대방과 살겠다며 아내와 아이들까지 내쫓아 거하게 집안 망신을 당한 켈리 가족은 그를 수치로 여기고 정계 진출을 못하게 필사적으로 방해했다고 한다.


9.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배우자 / 자녀
1녀
하노버 왕자비 카롤리네
(Caroline, Princess of Hanover)
1957년 1월 23일
필리프 주노
스테파노 카시라기
슬하 2남 1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폰 하노버
슬하 1녀
1남
모나코 공 알베르 2세
(Albert II, Prince of Monaco)
1958년 3월 14일
샤를린 위트스톡
슬하 1남 1녀[19][20]
2녀
스테파니 공녀
(Princess Stéphanie)
1965년 2월 1일
다니엘 뒤크레
슬하 1남 1녀[21]
아단스 로페즈 페레스


10. 출연작[편집]


연도
작품
1951
14시간(Fourteen Hours)
1952
하이 눈(High Noon)
1953
모감보(Mogambo)
1954
다이얼 M을 돌려라(Dial M for Murder)
이창(Rear Window)
갈채(The Country Girl)
에메랄드(Green Fire)
원한의 도곡리 다리(The Bridges at Toko-Ri)[22]
1955
나는 결백하다(To Catch a Thief)
1956
백조(The Swan)
상류 사회(High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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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음 여왕(ice queen)'이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후에 모나코 공비가 된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일.[2] 다만 《스타 탄생》의 주디 갈런드가 탔어야 했다는 것이 중론. 또, 그레이스 켈리의 대표작을 뽑을 때 《갈채》보다는 《하이 눈》, 《모감보》, 히치콕 영화들이 먼저 거론된다.[3] 조신하고 기품 있으며 스캔들 하나 없는 고결한 요조숙녀 인상이지만, 침실에서는 매우 화끈한 여자라는 뜻. 게다가 스캔들 상대도 대부분 가정이 있고 나이 차이가 많은 유부남이었다.[4] 케리 그랜트는 대놓고 켈리의 이런 반전 매력을 흠모했다. 켈리를 자신이 함께 일해본 최고의 여배우로 꼽기도 했다. 즉, 당시 할리우드 종사자들 사이에선 켈리의 남성 편력은 공공연한 비밀도 아닐 정도로 유명했단 얘기다. 참고로 케리 그랜트는 그레이스 켈리와 사귀진 않았고, 원래 그랜트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불륜으로 오랫동안 할리우드에서 쫓겨났다 돌아온 잉그리드 버그먼이 "나를 한결같이 대해준 유일한 신사"라고 평가할 정도로 매너남이었고, 이런 공공연한 비밀을 숨기는 걸 무척 싫어하는 성격이었다.[5] 사실 배우 활동 당시에도 미국에서 스캔들로 유명하긴 했는데, 뉴스에서 켈리에 대한 온갖 소문을 아무리 떠들어도 그녀의 인기에 딱히 악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만큼 대중이 좋아한 배우였다는 것. 게다가 그레이스 켈리가 왕성하게 활동할 당시의 대한민국은, 고위층의 해외여행도 금지되었던 시절이라 머나먼 미국의 얘기는 알 수도 없었다.[6] 1951년 여름. 다만 켈리의 가족들은 시인한 반면 촬영 관계자들은 대부분 이를 부인했다.[7] 《모감보》를 찍던 1952년.[8] 1953년 여름부터.[9] 《원한의 도곡리 다리》 를 찍던 1954년. 켈리가 빙 크로즈비와 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 끝났다.[10] 다양한 주장이 있어 언제 관계가 시작됐는지는 불분명하다. 주변에서 둘의 관계를 의심하던 시기에 크로즈비에겐 이미 약혼자가 있었고 켈리는 올레크 카시니와 만나고 있었다. 카시니가 이를 편지에서 직접 걱정하기도 했다.# 답장에서 켈리는 크로즈비와의 관계를 부인했다.[11] 크로즈비와 한창 만나고 있던 1955년 켈리가 불과 몇 시간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처음 만난 말런 브랜도와 잠자리를 가졌다가 크로즈비에게 현장을 들켰다는 가십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신력 있는 출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크로즈비는 이 시상식에서 브랜도의 수상과 연기력을 칭찬하는 인터뷰를 했다.[12]상류 사회》에 함께 출연할 때 구애해 만났다는 증언이 있는데 설레스트 홈 등에 따르면 관계는 빠르게 끝났다.[13] 모나코의 국가 원수는 왕(王, King)이 아닌 공(公, Prince)이다.[14] 켈리를 모나코 왕비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니에 3세가 공이므로 켈리는 '공비(公妃, Princess)'라고 해야 옳다. 하지만 유교 문화권인 한국에서는 '공'이라고 하면 독립국의 군주가 아니라 신하라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모나코 뿐 아니라 다른 유럽의 대공국/공국 군주들도 모두 '왕'이라고 부를때가 많다. 같은 경우로 중국에 수출된 한국 사극에서 왕이라고 하면 중국에서는 독립국 군주라는 이미지가 안떠오르기 때문에 조선 황제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15] 그러나 어쨌든 레니에 3세는 켈리와 약 23년 간 결혼 생활을 하며 자녀를 셋이나 낳았고 함께 정성껏 길렀다. 또한 켈리가 사고로 숨지자 생중계되는 그녀의 장례식에서 공의 체통을 다 내려놓고 대놓고 흐느끼며 사별로 인한 슬픔을 못 견디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켈리 사후 20여 년 뒤에야 죽었지만 그때까지 재혼하지 않고 쭉 혼자 살았다. 이런저런 점을 보면 잡음은 있었어도 켈리를 아내로서 나름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16] 모나코 루이 2세의 사생아로 태어나 친부에게 입양되어 후계자가 되었지만 미천한 모계 등 하도 구설이 많아 그냥 아들 레니에에게 계승권을 넘긴 것.[17] 종교가 달랐다면 개종을 해야 하는데 그 절차가 까다롭다.[18] 남은혜(그레이스 남).[19] 카를라데 여백작 가브리엘라 공녀, 모나코의 공세자 자크[20] 샤를린과 결혼 전 태어난 사생아가 1남 1녀 있다.[21] 이 외에 사생아가 1녀 있다.[22] 6.25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