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스-야거스도르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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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러시아군
4. 전투 경과
4.1. 전투 전야
4.2. 프로이센군의 습격
4.3. 러시아군의 반격과 프로이센군의 후퇴
5. 결과



1. 개요[편집]


7년 전쟁 기간인 1757년 8월 30일 동프로이센 그로스-야거스도르프에서 프로이센군이 프레겔 강을 건너고 있던 러시아군을 기습한 전투. 러시아군은 이 기습에 한동안 고전했으나 수적 우세를 활용해 프로이센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2. 배경[편집]


1757년 6월, 스테판 표도로비치 아프락신이 이끄는 러시아 대군이 프로이센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프로이센의 본토를 공략하기 위해 진군을 개시했다. 그들은 7월 초 메멜 요새(현재의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를 함락시키고 이 곳을 전진 기지로 삼은 뒤 동프로이센에 전격 침공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한스 폰 레발트 장군에게 러시아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레발트는 대왕의 명령을 받들어 동프로이센 주둔 프로이센군을 규합한 뒤 8월 29일 프레겔 강을 건너 랑글락과 푸슈도르프 사이의 숲에 주둔했다.

이후 레발트는 소수의 호위병들을 대동한 채 러시아군의 위치를 정찰하려 했지만 단지 몇 개의 코사크 숙영지만 확인했을 뿐 러시아 대군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에 그는 2개의 후사르 연대, 15개 드라군 분대, 2개의 척탄병 분대를 각각 쇼렘머 중장, 홀슈타인 왕자, 플라텐 장군, 루슈 장군에게 맡겨 알메나우센으로 진군시켜서 적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알아내게 했다. 척탄병 대대는 숲을 헤치며 진군했고, 기병대는 평야로 진군했다. 이들은 곧 프레겔 강을 도하할 준비를 하고 있던 일부 러시아군을 확인했다. 이에 레발트 장군은 기습 공격을 감행해 그들을 섬멸시키기로 결심한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프로이센군[편집]


  • 사령관: 한스 폰 레발트
  • 병력: 22개 보병대대, 50개 기병대대, 35개 야전대포, 20개 중포, 총 24,700명


3.2. 러시아군[편집]


  • 사령관: 스테판 표도로비치 아프락신
  • 병력: 89개 보병대대, 40개 척탄병대대, 41개 기병대대, 5개 후사르 정규 중대, 119개 비정규 후사르 중대, 68개 야전포대, 12개 중포, 총 54,800명


4. 전투 경과[편집]



4.1. 전투 전야[편집]


8월 29일 저녁, 레발트 장군은 군사 회의를 소집한 뒤 장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아군은 오전 2시 30분에 3열 대형을 갖춰 푸슈도르프 숲을 가로질러 행진한다. 그 후 두 개의 보병 군단이 본대의 측면에서 알메나우센 숲을 향해 전진하고 기병대로 구성된 세번째 군단이 북쪽으로 1.5km 떨어진 개간지로 진군한다. 루슈 후사르 분대와 말라코우스키 후사르 분대는 두 보병 군단 선봉을 담당하라. 그러면 왼쪽 보병 군단은 우익을 이루고, 오른쪽 보병 군단은 좌익을 이루게 된다. 또한 세번째 군단은 두 군단의 뒤를 따르고 두 개의 척탄병 대대는 각 보병 군단의 측면을 경비하라. 홀슈타인 드라군 분대는 첫 보병 군단의 중앙에 포진하라.


8월 30일 오전 1시, 프로이센군은 명령보다 일찍 3개의 대열을 갖춘 채 진군을 개시했다. 새벽 3시 30분, 그들은 푸슈도르프 숲에 들어섰다. 첫번째 군단은 좌측으로 진군하여 우익을 형성했는데, 여기엔 보병대, 5개의 드라군 분대, 그리고 일부 포병대로 구성되었다. 또한 두번째 군단은 우측으로 진군하여 좌익을 형성했다. 이 두 개의 군단은 알멘후우젠 협곡을 통과하며 서로 가까이 움직였으며, 루슈 후사르 분대는 양쪽 군단 앞에 행진했다. 이후 세번째 군단이 또다른 협곡을 통과했는데, 이들은 후사르 10개 분대, 드라군 25개 분대로 구성되었다.

이윽고 군대가 숲을 완전히 빠져나오자마자 군단들이 갈라졌다. 첫번째 군단은 우측으로 이동했고 두번째 군단과 세번째 군단은 좌측으로 이동했다. 그 다음 우측과 좌측 열이 두개의 대열로 배치되었다. 첫번째 전선은 10개의 머스켓 대대로 구성되었고, 두번째 전선에는 8개의 보병대대가 배치되었다. 각 측면에 2개의 척탄병 대대가 배치되었고, 기병대는 양익에 배치되었다. 보병 제1전선 앞에는 포병 3개 대대가 배치되었다. 레발트 장군은 아군 기병대의 대부분을 좌익에 배치했고, 우익에는 나머지 기병대와 5개 경기병대를 배치했다.

한편 러시아군은 적이 근처에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 강을 도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러시아군 총사령관 아프락신 장군은 이보다 앞서 선봉대에게 시텐펠트에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러시아군의 주력 병력은 두 개의 군단으로 이뤄져 있었다. 제1군단은 1사단과 3사단의 절반으로 구성되었으며 노키튼, 우데르발렌, 알브레치스탈로 진군할 에정이었다. 제2군단은 2사단과 3사단의 절반으로 구성되었으며 선봉대와 같은 길을 따라 에센브루흐로 진군할 에정이었다. 제1사단과 제2사단은 각각의 보병 연대를 차출해 각자의 후위대를 구성했다. 각 군단에는 야전포병대가 동행했고 군단의 측면엔 후사르 기병대와 코사크 기병대가 따라갔다. 또한 러시아군 후방에는 3사단의 3개 보병 분대가 배치되었다.

오전 4시, 러시아군은 알렌부르크를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선봉대가 먼저 출발한 뒤 바실리 러프킨 장군 휘하의 2사단이 노키튼 숲의 동쪽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빌림 빌리모비치 페르모르 장군 휘하의 1사단은 아직 집결이 완료되지 않아 뒤쳐졌고, 3사단 역시 진군하는 군대의 후위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키튼 우드 서쪽에서 대기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군의 대열은 3km 이상에 걸쳐 과도하게 늘어졌다. 한편 레발트 장군은 러시아군의 대열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보고를 접하자 좌익 부대에게 적의 대포 사정거리 밖까지 진군한 뒤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하고 우익 부대에겐 일단 대기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그는 제2전선 부대들에게 최전선에서 공백이 발생할 경우 바로 메꾸라고 지시했고, 기병대에게 적 기병대를 물리친 뒤 적 보병대에게 주의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새벽 4시 30분, 프로이센군 좌익이 북을 치며 빠르게 전진하는 동안, 우익은 인근의 다우펠켄 마을에서 우데르발렌 마을을 향해 진군했다. 오전 5시경, 프로이센군은 그로스-야거스도르프 동쪽의 언덕에 포병 진지를 설치했다. 이와 동시에 프로이센 양익 기병대가 러시아 기병대를 향해 전진했다. 한편 아프락신 장군은 한창 진군하던 중 적이 난데없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접하자 선봉대에게 급히 전령을 보내 행군을 멈추고 프로이센군에게 대항하기 위해 새 대형을 형성하라고 지시했고 나머지 부대들에게도 즉각 대형을 형성해 적과 맞서 싸울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제때에 대열 형성을 완료하기도 전에 프로이센군이 들이닥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4.2. 프로이센군의 습격[편집]


오전 5시 즈음 프로이센 우익 기병대가 노키튼 숲의 남동쪽 모퉁이 부근의 러시아 비정규기병대를 몰아냈다. 이에 러시아군 제2사단의 포병대가 그들을 향해 포격을 퍼붓자, 그들은 일단 뒤로 물러섰다. 한편 프로이센 좌익 기병대를 지휘하고 있던 쇼렘머 중장은 말라초스키 후사르 분대를 파견해 적의 방비 상태를 살펴보게 한 뒤 노키튼 숲 북서쪽 모퉁이로 진격했다가 티우체프 소령 휘하의 러시아 포병대에 의해 일시적으로 제지당했다. 이에 5시 30경 전열을 재정비한 쇼렘머 기병대는 자신들을 막으러 들려든 러시아 기병대를 격퇴한 뒤 적의 포격 세례를 뚫고 노키튼 숲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여기에 코프 소령과 플레테베르크 소령 휘하의 드래곤 분대가 러시아군의 전선을 돌파하여 러시아 보병대의 측면에 위치한 바이노텐에 이르렀다. 하지만 후위대에 배치되어 있던 러시아 보병대대의 역습과 러시아 포병대의 거센 포격에 직면한 프로이센 좌익 기병대는 후방으로 물러나서 전열을 재정비했다.

이렇듯 프로이센 기병대가 분전하고 있을 때 프로이센 보병대가 마침내 도착했다. 오전 6시경, 프로이센 우익 보병대는 러시아군의 일제 사격에도 굴하지 않고 적의 대열을 향해 침착하게 진군했다. 그들은 앞선 기병대의 활약으로 측면이 뚫린 러시아군 2사단을 향해 밀어붙였고, 2사단은 적의 기세에 밀려 패주하기 시작했다. 이에 2사단장 바실리 러프킨이 도망치는 병사들을 수습하기 위해 애를 쓰던 중 적의 총탄 세례를 맞고 치명상을 입은 뒤 적에게 붙들려 포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무렵 홀슈타인 왕자가 이끄는 프로이센 우익 기병대는 전방으로 치고 들어가 적 선봉 부대의 보병대를 돌파하고 8개의 야전포들을 포획했다. 홀슈타인 기병대는 이 야포들을 재배치해 적군을 향해 쏘려 했으나, 러시아군 선봉대의 2번째 전선에 배치되었던 척탄병들에게 역습당해 후방으로 밀렸다. 이때 그들은 아군 보병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결국 로저 우드로 물러나 거기서 재집결했다. 홀슈타인 왕자는 다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이들의 존재는 러시아 선봉대가 프로이센군에게 진격하는 걸 꺼리게 만들었다.

한편, 프로이센 좌익 보병대는 노키튼 숲의 북서쪽 지역을 지나 북쪽 가장자리에 접근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러시아군 3사단 보병대 및 포병대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고, 뒤이어 표트르 살티코프 휘하 1사단 보병 여단의 북서쪽 방향에서의 역습에 직면했다. 결국 프로이센 좌익 보병대는 노키튼 숲에서 후퇴했고 그들을 지휘하던 크리스토프 추 도나쉴로디엔 중장은 전투 중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렇듯 좌익 보병대가 적에게 패퇴하자 프로이센군의 공세는 약화되었다.


4.3. 러시아군의 반격과 프로이센군의 후퇴[편집]


오전 8시경, 러시아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후 공세가 수그러든 프로이센 우익 보병대를 향한 역습을 개시했다. 프로이센 우익 보병대는 적에 맞서 거세게 저항했으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고, 제1전선의 8개 보병대대는 40%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 결국 적의 압도적인 공세를 이기지 못한 프로이센 우익 보병대는 패주했고, 레발트 장군은 이들을 수습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전군에 후퇴 명령을 내렸다. 한편 프로이센 좌익의 쇼렘머 기병대는 적 보병대를 돌파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후퇴했다. 이때 적의 기세에 짓눌러 후방으로 후퇴했던 프로이센 좌익 보병대가 쇼렘머 기병대를 적 기병대로 착각해 발포하는 바람에, 쇼렘머 기병대는 많은 손실을 입었다. 그래도 그들은 동요하지 않고 보병대의 후퇴를 엄호했다. 프로이센군은 적의 추격을 회피하고 푸슈도르프로 후퇴해 다리를 지나 윌켄도르프 진지에 이르렀다. 러시아 기병대는 그들을 추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푸슈도르프에서 몇 개의 군단기와 야전대포들을 포획하는 데 그쳤다. 이리하여 그로스-야거스도르프 전투는 러시아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편집]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에서 123명의 장교와 159명의 부사관, 4,238명의 병사를 잃었고 크리스토프 추 도나쉴로디엔 중장은 부상을 입었다. 또한 그들은 17개의 연대포와 11개의 중포를 잃었다. 한편 러시아군은 38명의 장교와 병사 1,450명이 목숨을 잃었고 240명의 장교와 4,260명의 병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2사단장 바실리 러프킨은 치명상을 입고 포로가 된 뒤 얼마 안가 사망했다. 이렇게 해서 프로이센군을 격퇴한 아프락신은 동프로이센을 완전히 장악할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제 자리에 가만히 있다가 9월에 철수했다. 이에 대해 그가 조심스런 성격이라 겨울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때 대군을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주둔시키는 걸 기피했다는 설, 이 시기부터 병세가 완연했던 옐리자베타 여제가 붕어한 후 차기 황제가 될 표트르 황태자의 친프로이센 성향을 고려했다는 설, 원정군 내부에 천연두가 돌아서 원정이 힘들었다는 설 등이 제기되었지만 정확한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튼 러시아군이 철수하면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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