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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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사단 사령부의 전경

1. 개요
2. 역사
2.1. 상징성
3. 현재의 예하부대
3.1. 전력수준
4. 그러나 명백한 한계
4.1. 1980년대 수준의 전투장비
4.2. 1950년대 수준의 전투교리
4.3. 태만한 군기와 낮은 훈련도
4.4. 보급 부족
5. 기타
6.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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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의 군기
조선인민군 육군의 기갑부대로 북한군 최초의 기갑부대이자 정규 기갑부대의 효시인 부대이며, 북한군 최초의 근위부대라고 알려져있다.김일성과 항일 빨치산 운동을 함께 했던 측근인 류경수를 초대 지휘관으로 세운 부대로써 1947년 5월 16일 창설[1]된 북한군 최초의 기갑부대인 제15전차연대를 모태로 하여 제9 전차여단으로 개편되었고 6.25 전쟁 당시 서울을 함락시킨 뒤로 현재와 같은 105라는 사단번호를 부여받았다.

북한 전차전력과 역사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거론해야되는 부대가 바로 이 부대이고 이 부대를 소개할 때는 아예 북한 전차부대 창설의 역사까지 소개해야될 정도로 북한군 입장에서 중요한 부대다.

그래서 김일성 시절부터 김정일 시대와 현 김정은 시대에 이르기까지 3대 돼지가 북한의 지상군 현지시찰을 나갈때면 거의 필수코스로 들르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선대들은 말할 것도 없고 MiG-29 A/C형같은 구형전투기 30기 남짓으로 공군 강국을 자처하며 비행기 사랑을 뽐내고 인민들의 고혈을 짜서 대외과시용 에어쇼까지 열었던 김정은 역시 땅크는 우리 군대의 상징 이라며 이 부대를 각별히 여길 정도다. 그만큼 타 북한군 사단과 달리 최신 전차와 제일 좋은 보급품을 우선적 공급받으며 정말 좋은 대우를 받고 있고 북한군 부대 중 가장 위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중의 점령/진출지를 별칭으로 쓰는 부대는 한국 육군에도 있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제26기계화보병여단의 명칭인 혜산진부대는 북한 소재지인 혜산진에서 따왔다.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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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제9땅크려단장 시기 류경수의 사진.[2]

위에 개요에서 짧게 언급한 대로 이 105사단의 역사는 곧 북한군 전차보유의 역사와 함께 시작하기 때문에 설명할 것이 굉장히 많다. 1946년 이후 북한군이 점점 무장을 시작하면서 김일성은 남침에 가장 우선적인 전차를 포함한 기계화무기들을 소련에게 부탁하였고 소련은 개전 직전까지 T-34 242대와 SU-76M 176대 등을 지원하며 남한과 달리 본격적인 전쟁을 위한 무장에 열을 올리던 참이었다.

북한의 전차전력 창설은 1947년에서 48년 사이로 거슬러 올라가게된다. 류경수라는 인물은 당시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 운동을 같이했던 동지로써, 특히 소련군이 운용하던 전차를 매우 동경하고 있어서 몰래 소련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해가며 전차에 대한 것을 배웠을 정도로 전차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인물이었다. 즉, 탱덕후였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를 지켜본 김일성은 북한정권 설립 후 북한군 최초의 전차부대 창설을 준비하면서 그를 적임자로 내세우게 된다. 1948년 8월 20일 그렇게 덕업일치북한군의 전차부대 창설을 진두지휘하게 된 류경수는 첫 전차부대인 제15교도전차연대를 탄생시켰으며 이 때문에 북한의 기계화군단 명칭인 제820기계화군단(위장명칭 820훈련소)의 단대호가 바로 이 8월 20일에서 따온 명칭이 되었다.

북한은 소련군정이 끝난 1946년 이후 소련이 남기고 갔던 각종 중화기 특히 T-34-85전차를 기초로 소련군 교관을 초빙해 전차전술과 부대창설에 대한 준비를 시작했고 전차운용에 적합한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을 가려뽑아 부대가 주둔했던 지금의 평양 사동일대 호랑이골에서 고도의 훈련을 거쳐 북한의 첫 전차 승무원들을 배출하였다. 1948년 북한의 첫 전차열병식을 시작한 때로부터 이 교도전차연대는 교도라는 타이틀을 벗기고 군기를 하달받아 본격적인 야전전차부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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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땅크부대에 하달된 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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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4월 26일에는 '제9 땅크려단'[3]이라는 명칭으로 여단급 전차부대로 승격된 이후 6.25 전쟁 때 전투에 투입되면서까지 유지된다.

6.25 전쟁 당시의 제9전차여단은 현재 우리군의 제1포병여단같은 군단급 지원부대와 비슷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예하에 있었던 4개의 전차연대인 1땅크연대[4], 2땅크연대[5], 3땅크연대[6], 65기계화보병연대[7]를 독립적으로 운용하지않고 북한군 제1군단 예하 1,3,4,6사단에 1개씩 임시배속하여 진격지원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그 결과 1땅크연대와 2땅크연대는 3,4사단의 진격축선을 따라서 국군의 제7보병사단을 섬멸시켰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가장 먼저 뚫고 들어가 점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학교병원 인근 산에서 교전이 발생해 조용일 소령과 남 소위, 그리고 선임하사인 민 하사를 비롯한 수비병력 전원이 전사했다. 이후 병동에 난입하여 그곳에 입원해 있던 국군 부상병과 일반 환자 약 900여 명을 학살했다. 저항을 포기한 포로의 학살도 전쟁범죄인데 민간인까지 죽였기 때문에 인민군에 대한 서울시민의 반감은 적지 않았다.

어쨌든 서울함락 이후, 제9전차여단은 1950년 7월 5일에 북한군 최고사령관 명령 7호에 따라 '제105 땅크사단'으로 승격되었고,[8] 서울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같은 달 27일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54호에 따라 근위 칭호를 수여받아 근위 서울 제105 땅크사단이라는 명칭이 되었다.

105땅크사단은 서울 점령 이후, 오산시에서 미군을 공격한 후 금강, 대전광역시, 낙동강 등으로 진격하였다. 북한군의 남침 당시, 국군에는 T-34-85를 저지할만한 무기가 거의 없어서 곡사포직사로 사격하여 격파를 노리는 방법, 궤도 집중공격, 수류탄 또는 박격포탄 묶음을 들고 적 전차에 맨몸으로 돌격하는 방법 등이 시행되었을 정도로 북한군 T-34를 저지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지만, 전체적인 전세를 바꿀 수 있을 만큼의 피해를 입히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05땅크사단은 낙동강으로 진격하는 도중 미군의 네이팜 및 공대지 폭격, 보급선의 부실 및 고장으로 인한 진격 도중의 유기,[9] 자력 집중적인 대전차 사격으로 적지 않은 수를 잃게 되었고,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에서도 민낯을 드러나게 된 북한군의 저급한 전차운용, M26, M20과 같은 UN군의 강력한 전차와 대전차화기 등으로 인하여 상당수를 잃게 되었다.

당시 다수의 T-34를 손실한 105땅크사단은 부대에 사단이라는 이름만 붙은 상황이었지, 사실상 연대급의 부대였다. 인천상륙작전이후, 퇴로가 차단되기 시작한 북한군은 퇴각하면서 남은 T-34들을 모두 집결시켜 수원 부근에서 미군의 포위를 간신히 돌파하였는데, 이때에도 손실을 감수하여야 했다.

결국 105땅크사단은 몇 안 되는 T-34만으로 강계까지 퇴각하였고, 이 이후 10월 말과 11월14일 즈음에는 T-34를 새로이 인계받고 제3군단으로 배속된 후 후방에서 재조직되었다. 완전히 새로 편성 되다시피 한 105땅크사단은 사실상 교도련대 수준을 면치 못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예비물자와 훈련도 부족하여 전선에 투입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1951년 4월 1일 이후에는 최고사령부 관하 제4군단으로 배속 이동되었으며, 미 공군의 공습에 대비해 방공기자재를 운용하는 부대들을 사단에 편제시키게 되면서 근위 서울 제105 기계화사단으로 개칭되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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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있는 류경수의 흉상.

당시 지휘관이었던 류경수는 1958년 사망했는데 부대명칭은 한 동안 바뀌지 않고 이어져오다가 이후 2001년 5월 23일 김정일이 이때의 지휘관 류경수의 업적을 기리고자 최고사령관 명령 0089호를 내려 류경수라는 칭호를 하달하면서 결정적으로 현재와같은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으로 최종 명명되게된다.


2.1. 상징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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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군 전차의 상징인 105 숫자가 붙어있는 T-34 전차다.

북한에서는 105라는 숫자가 본 문서의 부대를 상징함은 물론 전차 자체를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북한은 이런식으로 자신들의 기념일이나 특별한 뜻을 내포한 숫자들을 프로파간다에 써먹고있다. 이를테면, 자칭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일인 1953년 7월 27일 을 기념해 고위간부의 차량번호에까지 할당하는 727번호와 EC-121 격추 사건때 공훈을 세웠던 MiG-21전투기에 사건일자였던 1969년 4월 15일을 기념해 415 전투기라는 금테가 둘러진 삐까뻔쩍한 노즈아트빨간딱지를 수여하는 등..

개요와 역사 문단에서 짧게 설명한대로 105와 류경수 그리고 820이라는 세가지 숫자는 북한 전차부대 창설역사의 중요한 뜻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북한에서 류경수라는 이름이 가지고있는 상징성은 아주 대단한데 그의 이름을 딴 각종 전차나 기계화관련 시설도 존재하고 북한의 첫 전차부대 지휘관이자 전문가인 동시에 김일성과 빨치산활동을 같이했다는 것만으로도 후대에 이 자가 얼마나 미화되고 띄워졌을지는 북한이라는 국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뻔해보인다. 어쩌면 김일성의 숙청이 한창 벌어지던 60년대에서 70년대를 보질 못하고 1958년에 지병으로 죽은 게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다.. 안 죽고 계속 살았으면 숙청당했을지도..

2014년경 이후에, 북한 측에서 6.25 전쟁 당시 공훈을 세운 북한군 근위부대를 찬양하기 위해 작곡된 북한의 군가인 '근위부대 자랑가'에서 가사의 맨 첫 번째 부대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해당 군가는 작곡 이후 2015년, 2017년 열병식에서 근위부대 열병식을 할때마다 연주된 곡인 걸로 봐서 북한의 소위 '높으신 분들'이 밀어주고 있는 곡인 듯. 우리나라 뉴스에는 '한국 전쟁 당시 서울을 제일 먼저 함락 시킨 탱크 부대를 칭송하는 내용'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3. 현재의 예하부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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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황해북도 곡산군에 주둔하고 있는데 북한의 이름난 정예부대인 만큼 한국 육군으로 쳤을때는 거의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나 혹은 제11기계화보병사단과 동일한 성격의 부대라 그런지 최신무기들이 족족 배치되었다고 알려져있다. 물론 자칭 최신무기지 우리들이 봤을 때는 거지가 따로 없다선군호가 우선배치되어 최소 복수의 대대급 규모 이상 편제된 상태다.

◆ 사단 본부와 직할대

◆ 제1 땅크장갑보병련대 (선군호)

2017년 1월 북한 선전영상에서 증강한 땅크장갑보병련대 겨울철 도하공격 전술련습 훈련간 식별된 단대호로써 부대 편제개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선군호 전차와 M2010 APC 및 덕천계열 자주포와 도하공병자산이 여럿 식별되었으며 특히 선군호 전차를 운용하는 것이 확인된 유일한 제대이다.

◆ 제106 땅크병려단

◆ 제107 땅크병려단

◆ 제727 경보병려단

상기 3개 부대는 열병식에서의 부대기를 통해 단대호가 확인되었다.


하지만 2010년도 이후 훈련장면에서 59식 전차로 보이는 T-55계열이 105사단 소속으로 훈련에 참가했던 것을 볼 때 구형전차들도 물량 유지를 위해 운용하고 있거나 북한판 땅크 바이애슬론인 땅크병 경기대회에서 장비 표준화를 위해 일부러 빌려탄 것일 수도 있다. 105사단은 땅크사단이라는 호칭을 가지고있는데 반해서 전체적인 전투서열을 들여다보면 사단급의 규모라기에는 굉장히 크기 때문에 이 105사단만 특별한 편제가 이루어진건지 아니면 상위부대였던 820훈련소에 흡수되었거나 승격되어 명칭만 사단급으로 전통을 유지한 군단급의 규모인지 알 수 없다.

특히 포병대대가 8개 이상에 이 포병대대를 2개씩 다른 여단에게 떼어주는 방식으로 운용하는 듯 보여서 북한의 남침전쟁 개시때에 맞춰 포병전력과 기계화전력 또 BMP등의 보병전투차를 이용해 하차전투가 아닌 승차전투로 기동력을 앞세워 남침하려는 의도가 보이기에 전체적으로 상태가 심각한 북한군치고는 부대의 우선권과 업적덕분인지 장비들은 전체적으로 북한치고는 높은 수준을 갖추고있다. 물론 8개의 포병대대는 평시 편제일 수도 있고 혹은 6.25때 처럼 전시에만 620 포병군단(포병사령부)의 구성부대에 대한 통제권을 받는 방식일 수도 있다.

전차는 200대 이상 300대 미만으로 볼 수 있고 자주포는 150문 미만 각종 장갑차량들도 역시나 300대 미만으로 규모가 굉장히 크다. 다만 본격적인 군단급 지원화기인 방사포가 12문 밖에 없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독립여단의 성격이던 고무장한 부대들을 통합시킨 부대의 특성상 예하 여단들까지 알차게 완편되어 있기 때문에 많아보이는 것일 수도 있을 듯 싶다.

2019년 기준으로 열병식들에서 북한 최신기갑차량인 선군호M2010 APC가 근위대 칭호(마킹)를 붙이고 등장했는데 기계화부대 중 유일하게 근위대 칭호를 가지고 있는게 이 105사단이고 탈북자들 증언에서도 105사단에 모든 최신장비가 집중배치 된다는 점을 보았을 때, 구식 BMP-1이나 PT-76 등은 더 이상 운용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3.1. 전력수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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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M2010 APC를 대량으로 배치받아 기존 궤도식 장비보다 우월한 기동성과 관리/유지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선군호를 이용한 하천 도하훈련도 함께 진행했다. 전체적으로 북한의 모든 최신장비를 우선적으로 하달받는 부대이며 6.25 전쟁 때 서울을 가장먼저 무너뜨린 부대라 그런지 6.25 전공부대에 하달되는 근위대칭호가 기계화부대들 중 유일하게 가지고 있다. 물론 당시에 기계화부대라곤 교육용 부대를 제외하면 사실상 이 105밖에 없었다. 따라서 열병식 때도 해당 최신장비들이 측면에 근위대라 써진 대형 스티커를 붙이고 등장한다.

기존에 보유하는 것으로 추정하던 BMP-1 등은 더 이상 북한 내부에서도 운용여부가 불확실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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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0일 열병식에서 류경수사단 병력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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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5일 열병식에서 류경수사단 병력들의 모습. 이 열병식에서 류경수사단을 비롯한 땅크사단 병력들은 멀티캠 트로픽을 닮은 새로운 위장복을 입었다.


4. 그러나 명백한 한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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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부대 역시 언제 북한군이 안 그랬냐만은 실질적인 북한군의 현 상황을 볼 때 북한군의 최강 정예부대이자 최고의 기갑부대이고 서울을 3일 만에 밀어버린 전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문제가 당연히 많다.


4.1. 1980년대 수준의 전투장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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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전차라던 선군호조차도 공개된 형상과 정황등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 60년대 활강포 땜빵으로 나왔던 T-62T-64T-72에 준할 정도로 극한까지 개량하여, 차대를 개조하고 거기에 포탑을 대형화시켜 T-72 수준의 복합장갑을 넣고 125mm 주포를 얹은 것으로 끝난 한계성이 뚜렷한 전차이다. 콘탁트-5와 같은 반응장갑이나 소프트킬, 하드킬 능동방호장치 따위도 제대로 없고 FCS(사통장비)도 갖추지않은 냉전 깡통전차에 불과하기에 오히려 이라크가 보유했던 포탑사출전문가 T-72M 계열보다도 기본기가 떨어지는 물건이다.

하물며 그 아래인 폭풍호를 비롯해 T-62의 북한군 제식명칭 계열인 천마호는 모두 한계가 뚜렷하며 경사장갑 채용이나 차대확장 등을 했을 뿐 근본적인 개량과는 관계가 멀다.

전차뿐만 아니라 장갑차나 대공차량 등도 이미 보병전투차개념의 선구자라는 타이틀만 가진 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들어가버려 이젠 중동전장에서도 구식이 된 BMP-1이나 현대에는 아예 저고도 방공망으로도 쓰기 어려운 ZSU-57-2 같은 물건을 운용하고 있다.

수적우세라는 식으로 말로만 떠들어 봐야 더이상 한국군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80~90년대에 K-1 전차가 실전배치 완료된 시점부터 이미 전차교전비는 남한이 압도적으로 유리 해진 것은 물론, 이제는 지속적인 K-1 전차의 개량과 K-2 전차 실전배치로 남한의 기갑군단이 단독으로 북한의 기갑군단을 격파하는 것이 가능한 수준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압도적인 공군, 야전 육군의 공포의 대상인 아파치헬기 까지 등에 업고 있는 한국 육군은 북한 입장에서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 북한 최정예라는 기갑사단은 결국 이라크사담 후세인의 전철을 밟을 확률이 거의 100%다. 당장 걸프전쟁 때만 보더라도 일반 정규군과 비교되고 특혜를 받은 동시에 엄선되어 선발되었던 고도로 정예화된 공화국 수비대 소속의 탈와카나,메디나,함무라비 이 3개 이라크 최정예 기갑사단들의 최후가 어땠는지 생각해 보자. T-72로 무장해봤자 미군 에이브람스 1개 중대(13대 남짓)에게 몇십 분 만에 예하 전차여단(100여 대)들을 통째로 털리고 100시간 만에 완패해버렸다. 그 이라크만도 못 했던 공군력과 경제력을 갖춘 북한이 90년대 미군과는 비교도 안 되는 현재의 미군을 상대한다는 건 차라리 신에게 대적하는 게 더 쉽다고 생각될 정도다.

만약 2020년 10월 10일 열병식에서 공개된 M-2020 전차가 보여주기용 가짜가 아니고 제대로 실전배치되어 정상적 운용이 가능하다면 열약한 북한군의 현실을 어느 정도 극복하여, 선군호와는 달리 남한과의 전차전에서 압도적 열세를 극복하고 K-1 전차에 어느 정도 위협적일 것이다. 문제는 북한의 열악한 경제력으로 생산하는 M-2020전차의 수량이 얼마나 될 것인가와, 120mm 전차포를 장비한 K-1A1과 K-2[11]에게는 여전히 압도적 열세라는 점이다.


4.2. 1950년대 수준의 전투교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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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대가 더 끔찍한 것은 겉으로는 적화통일만 되뇌일 뿐 전혀 실천이라는 걸 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냉전식의 소련군이 주도했던 공격적인 기계화부대와 제파공격을 앞세운 양면 침공교리를 북한은 미군이 최대한 오기전에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어떤 일을 당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을 선제 침공해서 부산까지 다이렉트로 뚫고가는걸 중시했는데 문제는 이런 교리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희생할 물자와 인력을 감수해야하고 무엇보다도 유류체계와 보급체계가 원할해야한다.

나치 독일군만 보더라도 전쟁준비기간이 미흡해 보급 속도가 진격 속도에 못 미쳤고 결국 시원하게 뚫고가다가 42년도와 43년도를 기점으로 탈탈탈 털리고 소련군에게 두들겨 맞았는데 이 수준도 안 되는 북한이 이런 공격적이고 양면에 엄청난 물자를 투입해야 겨우 할 수 있는 짓을 가능케한다면 치트키를 현실에서 쓴 것이다.

게다가 만약에 선군호 같은 구식 전차들이 K-2 흑표K-1 전차보다 방호력과 공격력이 강한 전차였다고 하더라도 이미 내부에 현대적인 FCS와 광학장비가 전무하다시피한 깡통에 불과해서 야간전투 수행도 불가하고 한국군 전차들이 기동간 사격을하며 헌터킬러 개념으로 북한군 전차를 먼저 발견하고 쏠 때까진 단 몇초도 걸리지 않고 또 이 사실을 C4I체계 등을 통해 아군에게 실시간으로 전송해 지휘통솔을 원할히 하도록 한 데 비해서 북한은 포탑을 돌리고 내부에서 적을 찾으며 역시나 수동으로 모든 전투를 수행해야하기 때문에 대처속도도 매우 떨어질뿐더러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도 않았기 때문에 실전에 효용성은 얼마나 떨어질지는 뻔히 보인다. 당장 최정예로 훈련받고 배급도 짱짱하게 대우받는 이라크의 공화국수비대도 그렇게 탈탈탈 털렸는데 최정예부대마저 간부들이 배터리 떼다가 TV보고 10년에 기동훈련 할까말까한 군대인데 그게 가능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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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76 등의 구식 경전차를 이용한 정찰, 강행돌파, 험지전투나 전방 알보병을 까부수도록 기획된 전차 게릴라전술을 현대전에 와서도 버리지 못한 북한군은 인력만 낭비하는 꼴이다. 당장 K-21같은 전투장갑차만 보더라도 사통장비가 첨단화되고 원거리에서도 적을 식별해내서 높은 수준의 관통력을 가진 탄환으로 구식전차 측면은 으깨버리는데 2차대전 직후에 등장한 중기관총 철갑탄도 전면으로 겨우 받아내는 구식 경전차 따위로 뭘 할 수 있을지는 북한 수뇌부만이 알 것이다.


4.3. 태만한 군기와 낮은 훈련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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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탈북한 북한 105사단 출신의 탈북자 말을 들어보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가장 최정예라는 부대조차 전차 배터리를 간부들이 몰래 뜯어다가 TV볼때 쓸 정도고 조종수는 1년에 기동훈련도 못 하며 소대장이나 전차장이라는 인간들도 정작 전차를 몰아본 경험이 거의 없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것만 봐도 이게 정신력 운운할 자격은 있는지 의문인 군대이다.

구식무기여도 적어도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는다면 2선급이나 예비군용도로는 적합할 텐데 이 나라는 무기도 구식이고 훈련이나 병사들의 사기는 물론이요 자신이 타는 장비가 적어도 무엇인지는 알아야 할 텐데 그마저도 모르는 수준이다.


4.4. 보급 부족[편집]


이 문제는 땅크사단만의 문제가 아닌 북한군 전군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조선인민군/열악한 현실 참조.

물량이 있으면 뭘 하는가? 기갑부대도 연료와 탄약이 있어야 훈련을 하는데, 군대 자체가 그럴 연료나 탄약이 없다. 사실 위에서 나열한 훈련도와 복무사기가 극악하리만침 낮은 가장 큰 이유가 이유가 보급 부족 때문이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선군호가 세계최강의 전차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보급이 받쳐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는 깡통이 될 뿐이다.[12]

애초에 식량을 비롯한 기본 의식주조차 제대로 배급되지 않아서 평소에 하는 것이라고는 체계적인 훈련이 아닌 민가를 털어 약탈을 하거나 밭에서 서리를 해가면서 식량을 얻거나 아니면 부대 내의 농장시설이나 협동농장 등에 인력으로 투입되어 농사나 짓고 있다.


5. 기타[편집]


이 부대의 사령부는 황해북도 곡산군 인근에 퍼져있고 인근에는 최전방 항공부대인 곡산 비행장이 존재하는데 이 비행장에 주둔하고있는 조선인민군 제86 비행연대에선 아직도 MiG-21 초기형이나 굴리고 있다. 사단사령부는 곡산 시내와 외곽 그리고 비행장 사이에 있으며 이 주변 지형을 동서남북으로 쭉 넓게 예하 부대들이 퍼져있다.

따라서 남침전쟁이 시작되거나 반대로 한국군이 올라가게 된다면 철원축선에 자리잡고있는 한국군 제3보병사단제6보병사단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될 부대일 가능성이 높다. 2차로 이보다 약간 뒤쪽에 주둔중인 제8기동사단이나 제1기갑여단등도 이 부대와 전면적으로 전투에 돌입할 가능성이 꽤 높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북한의 최정예라던 105사단도 수준만보면 자기보다 체급이 서너배는 작은 한국군 독립기갑여단에도 그냥 복날에 개 맞듯이 갈려나갈게 뻔한데, 훈련을 하고 안 하고 차이는 심하다. 심지어 인민군은 훈련보다 구타를 자주 한다고 인민군 출신 탈북자들이 하나 같이 증언한다. 그래서 프래깅 또한 만연하다. 한국군에 투항할 가능성이 엄청 높다. 쌍팔년도 이전의 한국군에 대응되는 수준이니..

대중매체 중 2차 한국전쟁에서 최종보스 포지션으로 등장, 12군단과 강동포병군단, 일부 교도대와 함께 주인공이 속한 육군 80기갑여단과 해병 2사단을 위협한다. 그러나 신의주에 상륙해서 미군 지원도 없이 밀고내려와 평양 북방에 있어서 탄약과 유류보급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페널티까지 가진 80여단에게 사실상 소멸당한다. 물론 80여단은 그 대가로 장비 50%, 병력 30%를 상실했지만.... 정작 주력인 2사단은 80여단의 탱킹으로 멀쩡했고, 결국 북한은 포병탄약만 보충받으면 2사단이 평양에 돌입할 기세를 보이자 황급히 무조건 항복하고 만다.

여담이지만 1998년 송림사건에 무력시위를 위해 투입되었다.

6. 관련 항목[편집]



[1] 북한에서는 1972년 11월 4일로 주장(열병식에서 확인 가능)[2] 군복 가슴팍에 달려있는 것은 국기훈장 제2급이다. 저 사진이 촬영되었을 당시에는 북한군이 창설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였고, 훈장의 종류 역시 국기훈장 한 종류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위 장교임에도 방탄훈장 차림새가 아니었다.[3] 단대호 명칭은 '제105군부대'로 명명되었다.[4] 107군부대[5] 109군부대[6] 203군부대[7] 206군부대[8] 제9 땅크여단 시기부터 갖고있던 단대호인 '제105군부대' 의 숫자가 그대로 정식 사단 번호가 되었다.[9] 많은 수의 전차들이 38선 부근에서부터 경상도 부근까지 자력으로 기동했기 때문에, 진격을 거듭하면서 엔진성능 저하, 궤도 마모 등 구동계통의 내구도가 악화되었다고 한다.[10] 이후 다시 기계화사단 이라는 명칭이 땅크사단 이라는 명칭으로 재변경되었다.[11] 실제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차전의 선봉에 설 것은 구형 K1이 아니라 이들이다.[12] 전쟁에서 진정한 강함은 보급이며, 거의 대부분의 전쟁 역사에서 승패를 결정한 것 또한 ‘어느 나라가 보급할 여력이 더 많이 남아 도는가’ 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급 체계에 문제는 비단 북한 뿐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동구권 국가에서 일어났다. 소련군과 중국군, 그리고 북한군 등이 공산주의 사회 특성상 내부적인 보급체계에서 한계에 직면해 버렸고, 결국 냉전기에 들어서서 단기적이고 공격적인 군사교리를 채택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러한 단기전이 성공한 사례는 동구권에서 단 한번도 없는데, 국공내전의 공산군은 공격적인 성향을 띠긴 했으나 결코 단기적인 성향을 띄지 않았고, 오히려 최종적인 승리를 쟁취하기까지 준비한 기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으며, 베트남 전쟁기 북베트남은 오히려 미국을 상대로 악착같이 게릴라(방어전)로 버티며 정치,외교 선전에서 승리 했을 뿐이지 초기에 적극적이었던 공세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단기전을 목표로 한 교리가 없었다. 나치 독일의 전격전은 초기에 무리할 정도로 역량을 쏟아부은 나머지 결과적으로 소련에게 패배 했고, 아이러니 하게도 시대가 지나 독일과 유사한 공격적인 교리를 채택한 냉전기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 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패배 요인중 하나가 보급 이었다. 소련군은 그 결과로 연방이 해체 됨에 따라 같이 해산 되거나 러시아군이 되었고, 북한군은 지금의 열악한 모습을 갖추었으며, 중국군은 자본주의 체제가 도입 됨에 따라 보급의 한계를 메꾸어 주요 군단의 전반적인 첨단화에 성공했다. 전격전의 전설에서 저자는 이걸 돈키호테에 비유하며, 전격전으로 '전투'는 이길 수 있어도 '전쟁'은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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