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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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체역사물 웹소설 근육조선에 등장하는 조선의 설정을 정리한 문서.

  • 작중 등장하는 역사는 1부, 2부, 근현대를 구분하여 서술 및 표기 바랍니다.


2. 역사[편집]


조선 초기, 중기에 연이어 찾아온 빙의자들이 일으킨 나비효과의 큰 수혜국. 본래 역사의 내부와 외부의 우환을 입신체비라는 근육적 나비효과로 인해 하나하나 해결하는 것은 물론, 사상의 변화로 인해 대외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과 동시에 타국의 실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이득을 챙기는 등 확장과 외교 측면에서 보다 개방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2.1. 1부[편집]


우선 수양대군사학도 출신 헬창 트레이너가 빙의한 것이 결정적인 나비효과가 되었다.

계유정난이고 뭐고 오로지 프로틴과 운동을 위해 왕족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연이어 일을 벌린 결과, 동아시아에 거대한 나비효과를 일으킨다. 당사자인 수양대군은 운동만 잘하는 범용한 왕족에 불과했지만 신료 잘 갈아넣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세종대왕조선 역사상 유능한 군주를 뽑으라면 절대 빠질 수 없는 문종대왕의 수명이 연장된 것이 가장 큰 변화.[1] 세종 이도-문종 이향-세조 이홍위 3대에 걸쳐 누적된 정통성과 더불어, 세종이 아들과 손자에게 각종 정치적 노하우를 전수하게 된다. 거기다 계유정난과 이후에 벌어진 일들 때문에 처형당한 김종서사육신 같은 유능한 신하들이 입신체비로 늘어난 수명이 합쳐져 오랫동안 굴려진 덕분에 황희: 전하 살려주시옵소서 국가 성장의 선순환이 이어지면서 폭발적인 대외 팽창과 부국강성에 성공하는 쾌거를 달성한다.


2.2. 2부[편집]


수양대군에 빙의한 최영직의 나비효과로 조선 초기에 적극적인 대외확장을 펼쳤다면 유성룡에 빙의한 김성원이 활약하는 근육조선 세계의 조선 중기는 세력이 다소 지나치게 넓어져 안정화되지 못한 내부 산업, 공업 기반등을 비롯한 여러 체계를 착실히 다지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은 넓은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지만 다소 지나친 확장으로 인해 내부의 정치 및 산업 체계가 부족한 상태였다.[2] 이후 조선은 경신대기근부터 시작된 연이은 대기근으로 큰 피해를 입고, 해외의 속령에 대한 통제권을 잃으며, 결국 살아남기 위해 무리하게 중원을 점령하지만 원나라를 비롯한 여러 이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한족 문화에 흡수되어 결국엔 중국의 일부로 전락하는 것이 예정된 상태였다고 언급된다. 그러나 빙의자 김성원의 영향으로 운명이 바뀌면서 부족했던 내부 체계를 정리하고 대중 전략을 명나라의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전략으로 선회하였다.

빙의가 끝난 최영직이 도서관에서 확인한 바로는 대기근의 피해를 믿기지 않을 만큼 적은 희생자[3]를 내면서 극복해냈으며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잡는 첫 발자국을 내딛는다.


2.3. 근현대[편집]


작중 근현대 시점에서 조선은 1821년 칭제건원하여 제국이 되었다가 원 역사의 경술국치와 비슷한 시점에서 황가가 제위를 내려놓고 공화국이 되었다.[4] 대한제국 시절에는 시베리아, 필리핀, 뉴기니, 호주, 북미와 중남미의 서부를 모두 통치하는 태평양을 내해로 둔 거대한 제국이었으며, 공화국이 되며 미 서부, 남미 서부 등이 독립하였으나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 자체적으로도 유럽 전체와 유사한 경제규모를 가지고, 원 세계의 미국과도 비슷한 능력을 가진 대국이다. 그럼에도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세계 최강국 후보에는 들지 않았는데, 이는 사치재를 그닥 선호하지 않고 잉여생산량 대부분이 입신체비에 투자되고 있어서 GDP는 경제규모에 비해 낮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입신체비를 중단하고 이 생산력을 군사에 투자하는 순간 국가근손실 상황 그야말로 미친 수준의 군대가 튀어나온다.[5]

1차 세계대전에는 중국의 3개국과 있었던 무신천명대전의 피해때문에 불참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에는 참전하였다. 처음엔 대한 공화국의 우월함을 찬양한 아돌프 히틀러에게 호감을 느꼈으나 이후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를 보고 충격받아 전쟁에 참여해 독일군을 말 그대로 갈아버렸다고 한다.[6] 소련의 경우 카틴 학살이 전후 1947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발각되는 바람에 승전국 직위를 그대로 유지했지만, 참전 동기가 대학살에 대한 응징이였던 대한 공화국의 눈치를 보는 바람에 동유럽 쪽에 세력을 크게 뻗치지는 못했고, 아메리카는 동과 서로 갈라져 있어 힘이 미약해 태평양까지 뻗어나가지 못한 결과 세력이 크지 않아 냉전이 확대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냉전으로 인해 촉발된 우주경쟁도 지지부진한 상황. 게다가 대한 공화국은 무중력에 의한 근손실로 추정되는 이유로 우주 진출에 크게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3. 등장인물[편집]



3.1. 1부 등장인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근육조선/등장인물/조선/1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2부 등장인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근육조선/등장인물/조선/2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입신체비[편집]


근육조선에 등장하는 조선의 대표적 사상이자 운동. 빙의자 최영직이 헬스 트레이닝을 성리학과 결합하여 정착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었지만, 이후의 모든 역사에 영향을 끼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입신체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정치[편집]


1부 시점에서 빙의자 최영직이 왕위 찬탈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버리면서 계유정난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고, 덕분에 왕위 계승의 불안정성과 계유정난 당시 남발되었던 공신으로 인한 폐해 등 세조대에 생겨나 조선 중기까지 문제가 되었던 만행들이 원천 차단되었다.

그 후로도 왕족이 전체적으로 건강해지고 수명도 늘어났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여러 긍정적인 효과들을 누리게 된다. 당대의 세종대왕과 문종대왕 모두 수명이 연장되면서 여러 과업들을 성공적으로 이뤄낼 수 있었고, 젊은 시절에 급사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태조대왕 대부터 내려온 선왕 양위의 전통이 이어진 덕분에 왕위 계승도 매우 안정적으로 바뀌었다. 왕가가 곧 유교 자체인 입신체비의 종주 가문이므로, 태종때 구축되었다가 원 역사에서 중종때 꺾인 왕권주의 기조도 꽤 안정적으로 이어진다.

또한 과도한 업무 와중에도 입신체비라는 명목 하에 최소한의 체력 확보와 휴식이 가능하니 왕이 비뚤어지는 일이 드물어져서, 조선의 왕들은 항상 평균이 세종 문종 세조 초반 3연타로 매우 높아졌지만 이상의 능력을 가졌고 드물게 암군[7]이나 간신[8]이 나오더라도 자정작용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지부상소는 입신체비에 영향을 받아 근육화되어 지력상소로 바뀐다. 단련한 근육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는 상소이자,[9] 확대해석하면 나라가 부덕하여 유생들이 불효를 무릅쓰고 올리는 상소인지라 무시하면 폭군으로 낙인찍히게 된다(...).[10]

관료 집단은 작가 언급으로는 관학파훈구파로 나뉜다고는 하나, 사실상 둘의 좋은 점만 챙긴 한 가지 집단이 쭉 이어지는 형태. 상초충/하초충/소룡식 등 입신체비의 학파 정도는 갈리지만, 계파나 붕당은 작중에서 등장하지도 않는다. 아마 의견 충돌이 있으면 어디 가서 쑥덕쑥덕 작당질하지 말고 3대 운동이나 내수린으로 당당히 털고 가자는 문화 때문일 듯. 다만 1부 시점에서도 관학파 중에서 계파가 나뉘지 않도록 관리 중이라는 언급이 있으며, 2부 외전 시점에는 일시적으로나마 예당과 송당이라는 두개의 붕당이 생긴다. 다만 역시 근육화된 조선이었기 때문에 예당은 부패한 근적들이 중심이 되었고, 송당은 반대로 백성들을 위한 삶을 사는 선비들이라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문화에다가 조선의 세력권이 원 역사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넓어져 인력난에 시달리다보니 원 역사에서 조선 초중기에 실권을 잡은 사림파는 정치세력화 되지 못한다.[11] 독고율의 난 종결 후 세조 이홍위의 말년 시기가 나오는데 구풍(태풍)으로 전라도가 개판 나 사림파가 '날씨는 하늘의 뜻이니, 태풍이 불어 남도 지방에 물난리가 난 것은 왕이 덕이 부족한 탓이다'라는 주장을 하다가, 세조가 '태풍은 여송(필리핀) 근처에서 생기는 건데 그럼 여송의 부덕함이 만든 것인가? 조선의 부덕함이 만든 것인가?'라는 말을 하자 외통수에 걸려서 죽을 고생을 한[12] 일도 있다고 한다. 2부 시점에서는 산림(山林)이라 하여 지들끼리도 뭔가 쑥스러워하는 별종으로 취급된다.[13]원 역사에서 산림들이 붕당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걸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다.

근현대에 여러 나라를 휩쓴 공산주의대한제국에서 득세하지 못한다. 헬스에서는 운동만큼이나 휴식도 중요한 요소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자연스럽게 8시간 일하고, 8시간 쉬고, 8시간 자는 문화가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양질의 식자재를 확보하는 것이 조선의 국책사업 중 하나였다. 오로지 입신체비 하나 때문에 노동자들의 휴식과 식사 등 인권이 여타 나라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보장되었고, 따라서 공산주의가 노동자나 농민같은 서민층에게 파고들 틈이 없어진다. 때문에 다른 나라와 달리 공산정당이 생기기는 커녕 극소수의 지식인들이나 주장하는, 그마저도 눈칫밥을 먹는 비주류 학파에 그친다. 그 탓에 대한제국과 황실이 물러난 뒤의 대한공화국이 아닌 옆나라 일본에서 활동하는 중.

다만 '휴식 시간 보장'은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에 한정된 것이고, 공직자들의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입신체비 덕분에 조선 초기의 왕위 계승이 안정되면서 세종과 문종을 거쳐 축적된 신료들을 효율적으로 갈아넣는 각종 정치적 노하우도 같이 안정적으로 전수되었기 때문이다.[14] 작중 신료들은 정년퇴직은 꿈도 못 꾸고, 졸하기 직전에라도 퇴직을 윤허받으면 눈물이 나올 정도며 몇몇은 아예 일하다가 죽기까지 한다. 그래서 어명을 받으면 울면서 웃거나, 혼자 죽진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을 물귀신마냥 일 지옥에 끌고 오는 등 거의 미쳐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역으로 입신체비를 위한 휴식시간은 꼬박꼬박 쥐어주면서 정작 휴일은 지치기 직전에야 한움큼 쥐어주고 절대 퇴직시켜주지 않고 붙잡으니 더욱 미칠 지경. 시간이 지난 근대에서는 제국이 되며 폭증한 업무를 이기지 못해 황실이 스스로 평민 선언을 하는 것은 물론[15] 현대에서도 3대 500[* 미터법 도입으로 단위가 근에서 킬로그램으로 바뀌면서 1.6배 가량 폭증한 수치인데도!]이하인 사람은 국회의원으로 뽑지 마라는 말이 돌 정도가 된다. 그 밑으로는 체력이 딸려서 격무를 버티지 못한다고.[16]


5.1. 영토외교[편집]


1부 종료 시점에서 조선의 영토는 요동을 제외한 만주, 한반도, 규슈, 대만이 있다. 만주는 명나라 북방의 영토 일부를 떠넘김 당하는 식으로 할양받았고, 규슈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할양받는다. 미래를 알고 있는 수양대군이 금광과 은광이 있는 동네를 선점한 것은 덤. 2부 시점에서는 폴리네시아와 미 서부, 중미와 남미 서부가 본격적으로 조선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으며, 필리핀 일부 지역에도 영토를 차지하여 근육조선의 현대에 만들어지는 영토가 얼추 형성된다. 사실상 태평양을 내해로 둔 거대한 영토가 만들어진 셈.

만주가 조선 땅이 되고 그곳에 사는 여진족을 복속시킨데다 몽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엄청난 양의 말을 얻어내서 군마의 생산도 굉장히 안정적이다. 너무 생산량이 많아서 말들이 먹어대는 곡식값이 감당이 안될 지경이라 명나라에 조공이라는 명목으로 최상급 군마 5천 필, 요동에 하급마 3만 필을 팔아버릴 정도.

이렇게 최상급 군마를 아낌없이 바치는데다 사신으로 너무 오래 머물면 운동 못 해서 근손실이 난다는 이유로(...) 사신도 빨리빨리 일을 처리하고 가다보니 사신들의 접대비용도 적은 등, 이쁜 짓만 골라 해서 명나라는 조선을 번국 중에서도 최고라며 상당히 호의적으로 보고 있다. 다만 조선은 겉으로만 충성할 뿐, 실제 충성심따윈 거의 없다시피 하고 단지 명나라가 무너지면 조선이 피해를 본다는 이유로 도와줄 뿐이며, 나중에는 명나라를 약화시키기 위해 뒤에서 암약해 결국 중국은 여러 갈래로 쪼개졌고, 이후에도 중국을 통일해 강대국이 되는 걸 막기 위해 암약 중이다. 명나라는 사실상 멸망해 상층부만 간신히 조선에 피난, 춘천에 자리잡고 현대에는 차이나타운 비슷한 관광지가 되었다.

또한 장영실과 명 선박 기술자들이 개발한 신형 선박으로 해양 진출을 나서면서 대만을 개척하는 것을 시작해 동남아, 폴리네시아, 아프리카까지 진출, 세력에 편입하였으며, 오스만 제국과 신성로마제국과 인삼 무역을 시작하며 대외무역 진출에 성공한다. 1부 시점에서는 이슬람과의 교류가 주를 이뤘으나, 2부 시점에서는 스페인과 홍삼 무역을 하거나 사절단을 보내는 등 서양과 직접 교역하기도 한다.

독도 문제 따위는 없다. 일본이 국력이 약해지기도 했지만, 여국강의 귀부 이후 처음 만든 배로 시험 운항차 가장 먼저 다녀온 것이 우산도다. 수양대군이 직접 비석을 들고 가 세웠다. 오히려 여국강의 제안에 따라 동해 항로 거점 및 항해 훈련 장소로 적극 이용된다.[17]


5.2. 국가기관[편집]


집현전이 계속 이어지며, 아래에 규장각홍문관을 통할한다. 이외에 과학기술 특화 자문기관인 이현전(肄賢殿: 肄는 '익힐 이')이 설치되며, 관상감과 화학기술 기관 화공원(化工院)을 통할한다.

관직의 공급이 여러모로 대거 필요해지면서 겸직은 하지 않는 추세로 변하며, 일반적으로 한 관직에는 3년 이상 머무르지 못하게 된다. (종친, 당상관 전문가, 일부 지방관은 가능) 육조는 4개 조가 더 추가되어 십조가 된다. 의전서열은 이경호수예외병형공농 순.

  • 경조(卿曹): 외관직과 왕실 잡무를 담당하는 부서. 이조에 중앙직 인사 기능을 남기고 분리되었다. 외부 영토 인사 역시 경조에서 담당한다.
  • 수조(需曹): 재정 담당 부서. 호조에 호구/토지 조사, 세입 기능을 남기고 분리되었다. 빙고상의원을 담당하는 기능도 받아왔다.
  • 외조(外曹): 외교 담당 부서. 예조에 교육/제사 기능을 남기고 분리되었다. 참고로 입신체비 담당 기관인 예진원은 예조 소속이다.
  • 농조(農曹): 농업 및 생산 담당 부서.

그런데 정치 체제는 원 역사보다 퇴보한 부분이 있는데, 평시에는 6조 직계제를 유지하다가 왕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새 왕이 등극할 때 잠깐 의정부서사제로 전환한다. 처음에는 십조가 설치되어도 "육조직계제"라고 그대로 부르다가, 나중에 가면서 십조직계제로 바뀌었다.
조선은 창업군주 태조가 정도전이 꿈꾼 왕권과 신하의 권력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위해 의정부서사제를 시행했으나 무인정사로 정도전을 죽이고 왕좌를 찬탈한 태종이 처음으로 왕권 지상주의의 6조 직계제를 시행했고 이후 세종이 왕권과 신하의 권력의 조화를 위해 의정부서사제로 되돌렸는데 계유정난 같은 불행한 사건이 없었음에도 태조대왕이 정도전이 그토록 바랬던 왕권과 신하의 권력의 조화를 위해 시행하고 세종대왕이 부활시키고 문종대왕이 이어간 의정부서사제가 폐지되고 권력의 조화로움과는 거리가 먼 왕권 지상주의의 6조 직계제가 실시된 것은 의아한 부분이다. 계유정난이 일어난 원 역사에서조차 왕권과 신하의 권력의 조화를 위해 6조 직계제가 오래가지 못하고 중종 시대에 의정부서사제로 돌아와서 다시는 6조 직계제가 부활하지 못하고 끝까지 의정부서사제로 운영되었는데 근육조선에서는 오히려 왕권과 신하의 권력의 조화를 이루는 시스템이 문종대왕 사후 퇴보하여 의정부서사제가 사라지고 왕권 지상주의의 6조 직계제가 시행된 것은 씁쓸한 부분이다. 왕권과 신하의 권력의 조화를 이루겠다는 태조대왕과 세종대왕의 의지와 정도전의 꿈이 어느 시점에서 끊긴 모양이다. 게다가 이 6조 직계제 때문에 임금의 업무가 과중될 수밖에 없으니 훗날 대한제국 황실이 군주제를 포기하고 제위를 내려놓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의정부서사제는 군주가 혼자서 나랏일을 다 해먹는 게 아니라 신하들과 충분히 논의하고 신하들과 업무를 분담하기에 군주도 어느 정도 한숨 돌릴 수 있으나 6조 직계제는 임금이 혼자서 나랏일을 다 해먹어야 하기 때문에 업무도 혼자서 다 해야 하고 당연히 군주가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과중될 수밖에 없다. 어째서 태조대왕과 세종대왕의 뜻이자 정도전의 꿈인 의정부서사제가 폐지되고 6조 직계제로 바뀌었는지 명확한 설명은 없다.[18]

한편 새로 항로를 개척하는 탐검사, 개척한 항로로 외교 관계를 다지는 서행사 등이 설치된다.

왕족이 문제를 잘 안 일으킨 덕에 종친사환금지법은 없다. 제한법 정도는 있지만, 그래도 정2품까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안평대군의 후손 회령군이 정2품 공조판서로 10년 가까이 있었다.

참고로 십조간의 대외적 의전서열 외에 실제로 통용되는 서열이 실전으로 단련된 병조가 1등이고, 자신들이 보기에는 불필요한 예산 지출을 막기 위해 평소에도 삼대운동을 꾸준히 하는 호조와 수조가 공동 2등이고 삼대운동을 겨룰 일이 적은 외교를 담당하는 외조가 가장 아래이다.


5.3. 행정[편집]


원 역사에서는 수양대군이 왕이 된 후 한명회오가작통법을 만들면서 면리제를 실시했고 오가작통법은 조선 후기까지 면리제는 현대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사용 중인데, 근육조선의 역사에서는 수양대군에 빙의한 최영직이 왕위에 오르지 않아 역사가 바뀌어 계유정난이 일어나지 않았고 한명회가 세계를 떠도는 일이나 하게 되면서 오가작통법과 면리제를 시행하지 못했지만, 2부에서 일본이 조선 본토를 침략하였을 때 오가작통법에 대한 언급이 나온 걸 봐선 원 역사의 것과 비슷한 행정제도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명회가 아니라면 누가 오가작통법을 만들었는 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5.4. 사법[편집]


1부 초기에는 원 역사와 같은 사법체계였지만 양녕대군의 강간 미수 사건을 계기로 쳬계화된 법의 필요성을 느낀 세종대왕이 경국대전 집필에 박차를 가하여[19] 1462년에 완성 및 보급했으며, 수양대군의 제안으로 기존의 곤장형, 유배형 등 비효율적인 형벌 대신 형무소를 건립하여 노역을 시키는 등 현대와 유사한 형벌체계를 확립하였다.[20] 기술 교육도 시켜줬으며, 식자층에게는 교화 업무에 종사시키는 등 나름 맞춤형 형벌이 확립된다. 특히 유배형이 재미있는데, 귀양틀이라 하여 보행기를 하루 20리 정도 걸으며 노역을 제공하고 음악 대신 유교 경전을 듣는(...?) 형벌로 바뀐다. 중죄인의 경우 유황 광산으로 보내 사실상의 사형을 내리기도 하지만[21] 2부의 윤원형 같은 악독한 죄인은 바로 사형을 집행하기도 하였다.

차별도 굉장히 완화된다. 세종이 상왕 재위 중에 제안한 정책으로 부민고소금지법이 폐지되었으며, 노비종모법은 종부법으로 대체된다. 서얼금고법은 당장 시행하자니 관직의 수가 너무 적다는 문제 때문에 단숨에 폐지하지는 못하고, 서얼이 변방에서 일정 기간 교화에 종사하거나 입신체비를 배우면 과거를 볼 수 있도록 완화된다.[22] 그 외 양반이 실사구시를 중시하고 천민도 훈련도감 등을 이용해 면천되는 등, 계층 이동이 쉬워지고 계층의 거리가 줄어든다. 2부 중반시점에는 과거 시험으로 선발한 관료들만으로는 인력 수급이 모자라 관료들을 보조하기 위한 공무원 제도와 고시가 도입되어 신분에 상관없이 관련 분야의 지식만 있으면 공무원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고,[23] 대한 제국 시기에는 과거 시험이 폐지되고 완전한 공무원 체제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6. 인문환경[편집]



6.1. 언어[편집]


강대한 국력, 전통개념으로 도입된 구(舊) 현대개념 등등 덕택으로 외래어의 비중이 줄어들고 우리말/한자어의 비중이 높아졌다. 입신체비사는 외국어로 헬스 용어를 입밖에 냈다가는 욕먹을 정도.[24]

세종대왕이 건강해진 덕분인지 훈민정음은 원 역사보다 훨씬 빠른 1442년에 반포된다. 해례와 언해본이 동시에 출간되었으며, 관료층 설득 작업도 하루이틀에 끝나 훨씬 더 잘 보급된다. 물론 고위층까지 가려면 한문은 필수지만, 2부 시점에는 한문을 잘 못 읽고 정음을 위주로 공부하는 유생도 등장할 정도다.[25] 수양대군이 창제에 참여하며 띄어쓰기, 문장 부호, 숫자 등도 도입된다. 마사이 사람은 합자를 쓰기 어려워 풀어쓰기를 바탕으로 한 개조된 훈민정음을 창안해내기도 한다.

2부 시점에서는 우리말이 워낙에 공통언어로 입지를 쌓아서인지, 조선의 우방국인 북원(몽골) 사람과 마사이 사람이 서로 우리말로 대화하기까지 한다.

한편 유럽과 교류하면서 라틴어가 수입되고, 세종이 불가타(라틴어) 사전을 편찬하면서 라틴어 사용자도 많아진다. 이때 편찬된 사전은 현대 라틴어 → 15세기 라틴어 → 15세기 훈민정음 → 명나라 시대의 중국어 순으로 당시 언어를 유추할 수 있는 역사적 사료로써 가치를 가졌다고 1부 에필로그에서 언급되기도 하였다. 한명회는 유럽에 들어오자마자 만난 사람과 라틴어로 대화할 정도인 걸 보면 외교관 내지 탐검사의 기본 소양이라 할 듯하다. 물론 거꾸로 유럽에서 조선말을 배워오는 사람도 등장한다.


6.2. 종교[편집]


원 역사에서처럼 숭유억불을 내세우고 있어 종교적으로는 원 역사의 조선과 큰 차이는 없는 상태. 다만 대우가 좋지 않던 1부 때도 수양대군의 비호 아래 불교의 과도한 억압을 피해갔으며,[26] 북방에서 여진족이 발굴한 불교 유물들로[27] 흑룡사를 세우고, 서방 원정 중에 벵갈 술탄국에서 원정대와 헤어진 효령대군이 티베트에서 겔와 겐뒨둡을 만나 수계를 받아[28] 제자가 되어 티베트 불교가 들어오는 변화가 있었다.[29]
2부 시점에서 일본의 침략에 서산대사를 포함한 승병들이 게릴라 전법으로 108발의 납환을 담은 장총통을 쏴대면서 승리에 기여하였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한양 인근에 원 역사의 원각사에 해당하는 사찰의 건립을 허가받으면서 비교적 유해진 상황. 한편 당시 승병들이 사용한 탄압(彈壓: 말 그대로 '탄환으로 억누름')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기도 하였다. 미주 진출 당시에는 비록 호신용이라지만 승려들이 장총통 하나씩은 들고 다니는 게 상식(…)이 되었다.[30][31] 이후 사명당이 미주로 진출하면서 많은 미주 원주민들에게 탄압과 불교를 퍼뜨리게 된다.

기독교의 경우 초창기에 선교사들의 활동이 잠깐 허가되었다가 문화 차이로 인한 충돌 때문에 금지되었다. 하지만 경진만란 이후 조정의 허가 하에 조선 사절단이 로마에서 성직자들과 장시간의 토론 끝에 가톨릭의 교의를 확립하여[32] 조선에 가톨릭 선교가 허용되었으며,[33] 대신 가톨릭 허용에 아쉬워할 불교계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조선령에 왕래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개신교의 경우 별다른 세부 묘사가 나오지 않았지만, 현실 세계의 남미계 개신교와 비슷한 이유로 조금 더 늦은 시기에 전래가 되었으나 현실과 달리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34]

  • 그 외
이슬람교는 경직된 교리 때문에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는 상황. 안평대군을 따라와 조선에 정착한 화학자들의 후손들 사이에서 가문 전통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그리고 조선에서 허용된 종교들의 공통점으로 너나할것 없이 입신체비를 실시하고 있는데, 어느 종교든 신도들이 입신체비를 권유하면 두말 않고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 불교의 승려들도 입신체비로 근육을 다지고 있으며,[35] 유럽에서 조선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신체비에서 벗어나려는 신부들을 굴릴 목적으로 입신체비로 단련한 조선의 관원들 + 승려들 + 아메리카 원주민 천주교 신도들이 힘을 합치기도 하였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다른 곳이면 몰라도 조선과 그 속령에 한해서는 입신체비를 원칙 삼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조선에 주교구 2개(조선 본토 담당의 한양 주교구, 미주 담당의 후성 주교구)를 신설하여 젊고 체격 좋은 신부들을 선발하여 파견하였다. 그리고 이 신부들을 열심히 입신체비로 봉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부들은 내가 주교가 되면 이것만큼 굴리겠다는 물귀신 마음가짐으로 악착같이 입신체비를 하게 되었다.[36]


7. 경제[편집]


사농공상을 내세우며 상업을 등한시하던 원 역사의 조선과 달리 해외 진출 및 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벽란도를 기점으로 해외무역이 활성화되고 청계천에는 2층 상가들이 밀집한 저잣거리가 생길 정도로 상당히 발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1부에서 등장한 홍길동이 세운 율도상회는 온갖 물품을 취급하며 조선의 세력권이라면 못 가는 곳이 없어서 조선에서도 알아주는 거대 상회로 조정에서 이들에게 물자 및 공문서 배송업무 일부를 맡길 정도이다. 작가 해설에 따르면 원 역사의 영조 시절 은 보유량의 60%를 매년 수익으로 거둔다고 한다.

세조 이홍위의 재위 시기에 새로 얻은 사도 섬의 금은광을 바탕으로 대동통보라는 화폐를 도입한다. 화폐 단위는 금화 1개당 은화 10개, 은화 1개당 동화 10개. 금화와 은화의 가치를 맞추고자 금화에 은을 섞는 은본위제를 도입했다. 위조 방지 장치도 물론 있다. 모두 틀에 찍어서 발행하는 방식인데, 은 단단해서 찍어내기 어렵다는 점을 홍위가 말했다가 수양대군이 돈 찍는 틀을 맨주먹으로 내려쳐서 힘으로 돈을 직접 찍어내는 묘기를 보여준다. 홍위는 체통 좀 지키라며 기겁하면서 관료들이 직접 은화를 찍는 방식은 좋다고 생각해서 은화 찍는데 쓰라고 나무망치를 나눠줬는데, 수양대군의 소문이 퍼져 관료들이 쓰라는 망치는 안 쓰고 누가 더 녹봉을 맨손으로 깔끔하게 찍어내느냐로 내기하면서 놀고있다(…) 가장 잘 찍혀나온 은화를 수양전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를 들은 유럽인은 (당연히) 헛소리 말라며 믿지 않는다. 진짜만 말했는데 헛소리 취급받는 화자만 억울하다.

현대 시점 기준 총 경제 규모 14조 달러 정도. 화폐 단위는 원을 쓰지만, 대공황 인플레의 영향을 거의 입지 않아서인지 대한공화국 1원 = 대한민국 원 1,800~2,000원 정도이다. 덕분에 액면 대비 가치 문제는 해결된 셈.

대한공화국에 속해 있다가 분리해 나간 국가들과 일종의 블록경제를 형성하고 있어서, 기축통화로서의 원화의 가치는 실제 역사의 달러와 거의 같은 수준으로 탄탄하다.


7.1. 홍삼[편집]


원 역사에서나 작중에서나 인삼이 조선의 전략산업 수출품인 건 마찬가지다. 1부 초기에서는 수양대군의 노력으로 인삼 재배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원 역사보다 일찍 획기적인 가공/보존 방법을 만들면서 해외교역에서 어마어마한 이득을 안겨준 것은 물론, 일본에 기술 전수 없이 무작정 인삼씨만을 수출하며 일본 열도의 기근, 세력 분열을 유도하는 등, 외교적 무기로 활용되기도 한다. 재배되는 인삼은 "조선삼"이라 하고, "고려인삼"이라는 이름은 산삼이 가져간다. 조선삼의 가치는 고려인삼의 절반 정도.

홍삼이 발명된 것은 첫 아랍 원정 즈음이다. 원래 아랍에 인삼을 수출하려 했으나, 바닷바람에 시달리면 효험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나오자 수양대군이 완전히 현대 지식에서 끌어낸 건 아니고 개성에서 봤다는 설명을 붙여서 홍삼 제조법을 제안한다. 이 홍삼 제조 방법이 확립되고 일정 수준에 보존성을 확보했으며 조선의 경제를 책임지는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고 명과 일본은 물론이고 중동과 유럽에서도 매우 귀하게 여기는 영약이다. 1부에서 조선과의 무역을 시작한 메흐메트 2세가 자신이 홍삼을 먹고 기력을 회복했다며 그 증거로 다시금 유럽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였기에 유럽에서는 같은 무게의 금의 5배 값까지 치솟았을 정도였다.[37]

2부 시점에서는 유럽과의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상대적으로 값싸지긴 했지만 여전히 동방의 영험한 약재로써 조선에 방문하는 유럽인들은 사비를 털어서라도 홍삼을 잔뜩 사가서 귀국 후에 선물용으로 쓰거나 팔아서 막대한 차익을 얻어내곤 한다.[38] 시세에 관해서는 조선 본토에서는 1근당 은 1냥, 일본에서는 1근당 은 2~3냥, 유럽에서는 1근당 은 20냥에 거래되고 있다고 언급되었다.


7.2. 승자기[편집]


유성룡이 현대의 지식을 동원하여 만들어낸 상품 중 하나로 황해도 여행 중에 버려진 소뼈들을 보고 개발에 착수하였다. 휴가 중에도 일을 하냐며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히고 도자기 장인들과 함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제작 기술을 확립하였는데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려면 수십년에 걸쳐 기술을 익힌 장인이 만들어야 하는 기존의 도자기와 달리, 틀에 찍어내는 방식의 승자기는 경험이 부족한 도제들도 쉽게 만들어낼 수 있고, 행여 망치기라도 하면 재료(고령토)가 말라붙어 그냥 버려야 하는 도자기와 달리 물반죽 안에 처박으면 얼마든지 재활용 가능한데다, 복잡한 문양도 틀에 새겨넣으면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다는 대량 생산에 특화된 물건이기에 수출 상품으로 자리잡았다.

유성룡이 미주 관찰사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무렵에는 현대의 연금공단과 같은 성격의 조선회사가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면서 승자기를 보다 비싸게 팔아먹기 위한 명품화 전략으로 한정판[39]을 만들어 펠리페 2세를 통해 유럽 각국의 군주와 명사들에게 배포하였다. 사용해 본 유럽인들 모두 승자기의 아름다움과 뛰어난 보온성에서 비롯된 차 맛에 감동하여 입소문이 쫙 퍼졌으며, 승자기를 받은 사람 중 셰익스피어는 동방의 해룡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쓰고있던 이순신의 모리셔스 해전을 선물받은 찻주전자에 반해 대규모 연극으로 고쳐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만 명품화 전략이 지나치게 잘 먹혀서 유성룡이 예측한 수요보다 4배나 많은 약 4천 세트의 주문이 몰려들었고 이 물량을 소화해내기 위해 유성룡을 비롯한 관원들이 고생하기도 하였다.[40]


8. 과학, 기술[편집]


상술한 수양대군의 쇠질로 인한 나비효과는 군사 기술 뿐만 아니라 기계공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보다 효율적인 헬스 트레이닝, 다시 말해 보다 효율적인 입신체비를 위해선 운동기구의 존재가 필수불가결 했는데, 근육을 더욱 자극시키기 위한 고중량에 고강도의 금속제 도구를 다뤄야 하니 자연스래 공학기술이 발전한 것. 이렇게 발전한 공학기술은 보총 개발에 영향을 줘 군사력 증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수양대군이 명나라의 사절단 활동 중, 정화의 대원정의 선박 기술자들을 설득해 조선에 귀화시키면서 선박 기술력과 항해 실력 등이 월등히 향상되었는데, 이는 조선이 대양도와 일본을 복속시키거나 제압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은 물론, 대식국과 그 사이의 여러 나라와 국제 무역 교류와 외교의 물꼬를 틀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더 나아가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과 베니스의 학자, 기술자, 예술가들이 조선에 와서 천문학, 화학, 건축과 치수 기술 등의 여러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실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졌는데, 이는 입신체비 구상 초기부터 계속 원인과 결과를 명확하게 분석하던 빙의자 수양대군의 행동과 원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뭐든 다 기록으로 남겨두는 조선의 성향이 시너지를 이룬 덕분에 어쩌다 얻어지는 산물이 아닌 확고한 기술로 정립시키는데 지대한 기여를 하였으며, 2부 시점에서는 유성룡의 현대 지식에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지만 16세기 말인 작중 시점에서 조선보다 뛰어난 과학 기술을 가진 국가는 일부 분야[41]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가 되었다.

2부 시점의 조선의 경우 빙의자 유성룡의 활약으로 보다 효율적인 도시 건설이나 개발, 더욱 견고한 성채의 설계나 발달된 수성전 체계를 도입하면서 지나치게 확장되어 부실해져 가던 내실을 성공적으로 보완하게 된다. 건축 및 제작 등에 쓰이던 목업(Mockup)은 유성룡이 목재로 만든 선박 축소 모형을 선보이면서 무심결에 현대의 의미 그대로 사용하였지만 듣는 사람들은 목업(木業)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이후 철업(鐵業), 지업(紙業) 등의 원자재 + 일 업 자로 해당 원자재를 사용한 축척 시제품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근현대 시점에서는 세계에서 좀 유망하다 싶은 공학자나 기술자들이 있으면 모조리 초빙해, 가장 먼저 입신체비 도구부터 개선한 듯. 당대 아시아의 과제였던 근대화도 증기기관을 개발한 제임스 와트[42]를 스카웃 하며 성공적인 공업화를 이뤄냈는데, 본래 역사에서 동북아 3국이 이래저래 근대화의 부작용이 있었던 것에 비해 워낙 나라 자체의 세력과 힘이 크다 보니 체질개선 이라는 너무나 가벼운 비유로 표현할 정도로 큰 부작용 없이 근대화를 이뤄냈다.

이후에도 페르디난트 포르셰를 대학교수로 영입해 하이브리드 기관으로 작동하는 보행기를 제작하게 하는 등 효율적인 입신체비를 위해 국가 차원의 투자를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43]

다만 이 빛나는 업적에도 그림자가 있다면 환경 파괴 문제가 훨씬 빨리 찾아왔다는 것. 석감으로 씻겨진 오폐물 때문에 개천이 오염되는 문제로 시작해 이후에도 이따금씩 언급된다. 다만 이 부분은 조선인보다는 타 민족이 석감을 사용했을 때 더 부각되었는데, 1부에서는 조선에 갓 편입된 여진족들이 개천에서 석감으로 목욕을 하자 조선인이 물 색깔이 왜 이러냐며 기겁하기도 하였고, 2부에서는 여송도(필리핀)에 정박한 스페인 선원들이 씻으면서 나온 물이 너무나도 더러워서 코끼리조차 뒷걸음질 칠 정도였다고 언급되었다. 2부 후반에는 조선의 지원을 받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포로로 잡은 스페인 개척단을 강제로 씻기면서 나온 구정물을 보며 더러운 놈들이라고 까는 장면도 나왔다.[44] 그 외에도 2부 시점에는 샷 타워를 개발해낸 부작용으로 중독이 부각되기도 한다.

IT산업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는 상당한 수준이지만, 디자인적으로는 발전이 더디다. 그 이유는 스티브 잡스가 입신체비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하드웨어는 2025년, 소프트웨어는 2020년, UI는 1995년 수준이라고.[45] 스마트폰도 성능은 둘째치고 물리버튼이 많이 남아있는 형태라서 1부와 2부 주인공이 바뀐 역사의 현대로 돌아온 뒤에 적응되지 않아 투덜댄 것은 덤.[46]


9. 문화[편집]


한민족, 여진족, 폴리네시아인을 비롯해 여러 전통문화가 융합된 다민족국가. '피부색이 다르고 다른 전통을 가졌어도 조선 옷을 입고 조선 말을 하면 조선인'이라는 사상이 조선 초기부터 발생하여, 현실 세계의 미국과 비슷한 다민족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매우 이른 시기부터 확립하게 되었다. 환종의 방침으로 외국인 포용에 너그럽게 변한 것 역시 한 몫한다. 과거부터 이루어진 각종 동화 정책 덕분에 유교의 약점인 다민족&다문화 대처 방안이 좀 다른 의미로 보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발적으로 귀화한 외국인뿐 아니라 전쟁 포로로 조선에 잡혀온 외국인(주로 일본인)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에 적응해 후손들이 모태 조선인으로 살고 있는 장면도 등장한다.[47]

실제로 2부 중에는 피렌체 출신 혼혈[48] 관료나, 폴리네시아 출신의 부사관 등이 활약하는 등 입신체비(효)라는 사상 아래서 모두가 같은 조선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조선의 문화에 상당히 동화되어 있지만 본래 가지고 있던 신앙이나 문화는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에를 들어 폴리네시아인의 경우 조선에 복속하면서 식인 문화으로서의 마나 문화가 사라지고 전투에서 상대방을 죽이거나 입신체비를 단련하면서 자연의 마나를 흡수할 수 있다는 식으로 입신체비와 마나 신앙이 변질된 방식으로 융합되었고, 그 중에서도 하와이 출신들은 마우이 전설로 전해지는 바위를 움직일 수 있으면 하와이를 지배하는 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 입신체비에 몰두하고 있다.

2부 시점에서 조선의 주요 인종 구성은 조선인을 주축으로 다음과 같다.

1부에서 조선에 귀의한 여진족들의 후손. 부상자가 속출하는 과격한 내수린을 즐기는 등 여진족 시절과 다를 바 없는 호전적인 성격으로 북인들로 구성된 기병들은 조선의 강력한 전력 중에 하나이다. 2부 시점에서는 조선에 완전히 동화되어 전문적인 훈련을 받는 병사들을 제외한 평범한 북인들은 완전히 농사꾼이 되어 몽고에서 온 병사들이 보고 열네 살짜리 자기 아들보다 말을 못 탄다면서 까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입신체비와 훈영제식법 덕분에 전투력만큼은 매우 출중하며[49] 1부에서 김시습의 노력으로 자신들을 고구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으며, 유성룡이 유적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듣고 요동 땅의 고구려 유적을 발굴해 달라고 환갑이 다 된 유성룡을 상소수단으로 행가래치면서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50][51]

  • 하주도인(일본 큐슈)
1부에서 조선땅으로 편입되어 하주도로 명명된 큐슈 북부지방[52]에 살던 일본인들의 후손. 2부에서 일본과의 전쟁 이후 명나라의 영역이였던 육주성까지 할양받아 큐슈땅 전체가 조선의 영역이 되면서 큐슈인 모두가 조선인이 되었다. 하주도에 살던 일본인들은 100여 년의 시간동안 조선화가 많이 진행되어 일본어 어휘가 조금 섞인 조선말을 쓴다는 것을 제외하면 조선인과 다를 바 없이 동화되었다.[53] 미주 지역 개척을 위해 개척민을 모집하는 유성룡의 방을 보고 하주도인 3만 명이 몰려들기도 하였다.

  • 대양도인(대만)
1부에서 명나라가 왜구를 막기 위한 수군 운용을 주문하면서 조선에 할양해준 대만에 살던 원주민들. 일부 부족들은 성인식을 위해 목을 베어가는 등 조선에 적대적이였지만, 홍윤성을 필두로 한 도감군에게 박살난 뒤 조선에 복속되었다. 이들의 호전성을 눈여겨본 조선에서 임해도감을 창설하여 대만인들을 편입시켰는데 정찰, 잠입 등 현대의 특수부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성인식은 역기를 들어올리는 걸로 바뀌었지만 전투가 벌어졌다 하면 적의 목을 따가는 등 옛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는 상태.

1부에서 한명회의 활약으로 태평양 대부분이 조선의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폴리네시아인 역시 조선인이 되었다. 이들이 지닌 천부적인 항해술은 조선이 해외로 진출하는데 막대한 기여를 하였을 정도로 중요한 인적 자원이며, 원래부터 강인한 이들이 입신체비까지 전수받으면서 개인 무력으로는 2부 시점에서도 상위권을 다투고 있다.

조선이 미주(아메리카)에 처음 진출했을 때는 조선에 호의적이였지만 임사홍, 윤원형 등 일부 간신들의 악행과[54] 천연두 등 조선에서 전래된 전염병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면서 2부 초반에는 적대적 무시 상태였다. 이후 우두의 발견으로 천연두를 막아낼 방법을 찾으면서 이들에게 이를 전파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덕분에 미주 서부의 부족들이 조선에 복속을 청하였다.[55] 조선에서 전해준 농사법 등 선진화된 문물을 받아들여 번창하고 있으며 서산대사 등 승려들이 장총통(산탄총) 사용법과 게릴라 전법을 전수해주면서 스페인 개척단과의 충돌에서 큰 희생없이 이들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문화에 잘 녹아들은 모양인지 부족 중 가장 뛰어난 입신체비사를 힘 추장으로 임명한다고 언급되었다.

2부에서 조선이 본격적인 호주 개척에 나서면서 호주에 살던 호인들 역시 조선인으로 편입되었다. 조선에서 각종 작물과 농사법 등을 전수해주면서 철기 문명에도 진입하지 못했던 이들의 생활수준이 단숨에 끌어올려졌다. 조선인들이 근육의 힘으로 에뮤들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 입신체비에 대한 열의를 가지게 되었고, 일부 호인들은 한양에서 율곡 이이에게 입신체비를 배우고 있다고 언급되었다.

이외에도 소수의 유럽인 및 아랍인의 혼혈 후예, 호주 개척단에 합류하여 호주에 정착한 몽골인들과 호주로 이주한 영국인 및 네덜란드인이 조선의 영역에서 조선인으로 살고있다. 특히 호주의 경우 온갖 인종이 혼합되어 현대 시점에서는 전체 인구의 15%가 인종 분류가 불가능한 기타로 분류될 정도.


9.1. 스포츠[편집]


수양대군은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입신체비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노력을 꽤나 기울였다. 그 덕에 생활체육에 대해서는 할머니도 취미가 서클피트인 강국이다.[56] 정부에서 국민 평균이 3대 300이 안 된다며 우려하는 기사를 내보낼 정도고[57], 특히 입신체비는 아예 전담하는 부서가 따로 있는 국기. 내수린도 매우 활성화된 듯하다. 물론 전통 스포츠가 된 우모구, 정구 이외에도 축구, 농구, 야구 등도 들어와 있다. 국민의 체력 평균치가 아득히 높은 대한 공화국의 특성상 뛰어난 선수가 많이 발굴되었는지 웬만한 종목은 메달을 쓸어담다시피 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20세기 초에는 아예 (구)황실에서 일부러 경쟁국을 키워줘서 스포츠 산업의 침체를 막으려고 할 정도로 그 예시로써 성림왕 이형의 제자로 가르침을 받아 원 역사 이상의 전설을 찍은 베이브 루스가 언급되었다.[58]

대역갤에서 작가가 밝힌 설정으로는, 올림픽 메달 1위는 맞지만 실제 역사의 미국보다 약간 높은 정도라고 한다. 웬만한 스포츠는 경쟁 상대가 충분하고, 대한 공화국이 압도적인 종목은 역도 등 힘 쓰는 스포츠. 이것도 웬만한 체급은 금메달을 못 따는 것 자체가 이슈가 되지만 무제한 급만은 절육을 안 한다는 이유로 별 관심이 없다고 한다.


9.2. 음식[편집]


원활한 입신체비를 위해서는 식자재의 원활한 공급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입신체비가 퍼진 조선 초부터 양질의 식자재의 안정적인 공급은 그야말로 국가적 과제 중 하나였다. 1부, 2부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묘사되는 것이 바로 해외에 있는 보다 양질의 가축과 종자를 조선에 도입하는 것이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현대 시점에서는 한반도, 만주, 동남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등 공화국의 드넓은 땅덩어리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농수산물을 값싸고[59] 풍부하게 유통하고 있다.

특히나 근육에 직결되는 단백질의 경우 1부에서 수양대군이 조선 토종 품종보다 훨씬 크게 자라는 명나라 돼지와 더 크고 알을 많이 낳는 천축의 닭을 확보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양돈/양계 사업에 착수하였다.[60] 이렇다보니 단백질 공급에 가장 중요한 고기, 달걀, 우유를 생산하는 축산업은 1부 당시 입신체비를 도입하면서 당시 들여온 돼지 품종을 백정들이 돌보는 것을 시작으로[61] 국가의 지원 속에 점차 성장해갔고, 근대 시점에서는 황실 종친이 앞장서는 것을 시작으로 국가와 기업 모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물론,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종 품종과 유명한 학자를 긁어모아서 세게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심지어 현대에 들어서는 일반적인 고기와 비교해도 모자람 없는 배양육도 대중적으로 보급되고 있다.

흔히 헬창 하면 닭가슴살만 먹고 사는 삭막한 식생활을 연상하기 쉬우나,[62] 과도한 입신체비를 방지하기 위한 휴식월의 존재 덕분에 미식으로서의 식문화도 발전할 수 있었다. 다양한 식자재를 값싸게 유통한다는 점, 입신체비의 영향을 받아 과도한 기름기와 단맛, 짠맛을 자제하며 식이찬요에 의거해 곡질, 육질, 지질, 그리고 세견물 같은 이름으로 각종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는 것을 중시하는 점 등을 보면 원래의 한식보다 재료의 다양성과 영양학적으로 더욱 발전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2부 시점에서는 프랑스에 사절로 방문한 유운룡이 당시 유럽의 미칠듯이 기름진 음식을 차마 보다못해 당시 유럽에서 쓰이지 않던 식재료로 조선식 조리법으로 담백한 음식을 만드는데, 이게 '조선 퀴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다. 다만 조선 사절단이 프랑스를 방문하였을때 앙리 3세의 음식 투정에 시달린 유성룡과 그의 형 유운룡이 작심하고 기름을 퍼먹일 요량으로 시카고 피자, 마요네즈에 찍어먹는 츄러스, 기름에 튀긴 소고기를 번으로, 푸아그라를 패티로 삼은 버거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63][64]

단백질 하면 떠오르는 식품 중 하나인 유제품은 의외로 비중이 적은 편이다. 1부 시점에서는 축산업이 본궤도에 오르기 이전이라 버터나 치즈는 존재만 알지 왕족들도 입에 댄 일이 드물고, 조정에서 우유를 보약으로 내려줄 정도로 귀한 취급을 받았기 때문. 때문에 수양대군을 비롯한 입신체비사들은 유청으로 만든 보충제 대신 두유나 미숫가루를 마셔야 했고, 2부 시점에서는 보다 나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널리 퍼지진 못해서 유성룡이 유제품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프랑스에서 젖소 품종을 들여오기도 했다. 이후 시간이 흘러서 황실과 국가의 지원을 받고 축산업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 근대 시점에서는 유청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대중화되는 것은 물론, 현대에서는 공장제 유청이 아닌 전통 수제 유청이 고향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전통식품으로 여겨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버터를 숟가락으로 퍼먹으며 지질을 보충한 한국군의 일화나 개변된 역사에서 어린 시절 1부 주인공이 좋아하던 음식으로 치즈감자가 나오는 등, 치즈와 버터가 대중적으로 퍼졌음을 확인 할 수 있다.

1부 당시 수양대군이 말년에 저술한 영직서에 가장 좋은 육질(단백질)은 하얗고 향이 없는 것이라고 써놓은 것을 근거로, 2부 시점에서는 입신체비사들이 단백질을 보다 더 많이 보충하기 위해 닭가슴살이나 미숫가루도 모자라 하늘소 애벌레흰개미먹기도 할 정도다.[65] 여기에 경남 지방에 나타난 대만산 흰개미의 완벽한 방제를 위해 유성룡이 흰개미를 집어먹으며 가장 훌륭한 육질 공급원이라고 언급하자 유생들이 앞장 서 솥을 짊어지고 산을 쏘다니기도 하여 웃돈을 주고 구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충식 문화는 단순히 일부 입신체비사의 일탈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근대를 지나 현대 시점에서도 남아있어 2부 외전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민간시장에 닭가슴살 공급량이 줄어들자 대체품으로 고소애를 볶아먹는 사람도 있었다는 서술이 나오며. 에필로그에서 주인공이 아내와 애벌레 꼬치구이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보다 먹기 편하게 품종개량도 거쳤다는 설명은 덤.

농업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조선 초기부터 만주와 대양도를 차지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땅의 어떤 기후에서든 일단 키울 수 있는 작물은 다 재배할 수 있게 되면서 기존의 쌀 생산량도 크게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1부에서부터 왕실 직할령에서 멜론을 키우거나 시장에서 여주같은 열대 작물을 흔히 볼 수 있다고 언급될 정도다. 특히 은 토종과 외래종을 재배하며 여러 가지 시도해보던 중 우연히 품종개량에 성공하며 대량생산의 길이 열린다. 귀하다고 붙은 이름인 "진가루"도 그냥 "밀가루"가 된다.[66] 밀이 많이 재배되면서 북방에서 빵을 주식으로 삼게 되자 풍차와 화덕을 중심으로 한 호구조사법을 수양대군이 건의했고 이후 북방 여진족의 인구 통계도 원활해진 것은 덤.

구황작물의 대표주자 고구마는 태풍에 휘말린 한명회의 함대가 뉴기니 쪽에 표착했다가 원주민에게 받아온 종자를 수양대군의 둘째딸 주현이 길러 키워낸 것을 시작으로 전해지게 된다. 재밌는 것은 원래 역사에선 조엄이 일본에 가서 한국으로 수입해온 건데, 작중에서는 경인왜변 당시 잠시 한반도에 상륙했던 왜구들이 고구마를 먹고 조선에서는 토란을 꿀에 절여먹을 정도로 부유한 곳이냐며 신기해 하고 전후에 일본 본토에 전파되면서 정 반대의 처지가 되었다. 같은 구황작물인 감자는 1부 당시 혈당치가 높다는 지극히 헬창적인 이유로(...) 수양대군이 고구마를 적극 퍼트려서 등장하지 않는다.[67] 2부에서 감자를 재배하는 모습이 나왔지만 문제는 품종개량이 덜 되어 덩이줄기에 아직 독이 남아있던 시절의 감자였고 본토에서 감자의 독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워와도 기후차이 탓에 여전히 독이 남아있어 2부 시점에서는 양민들이 잠시 재배해 새참정도로 먹다가 독이 생기면 가축용 사료로 쓰는 정도에 불과하며 어린 시절의 유성룡이 현대의 감자를 생각하고 집어 먹었다가 졸지에 경구수액 치료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시점에서 웨지 포테이토나 치즈감자를 먹는 것을 볼 때 품종개량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향신료는 오스만 제국과 교역을 시작하면서 후추 종자를 들여온 것을 계기로 정향과 계피를 비롯한 다양한 향신료가 조선에 도입되었고 일부는 대양도에서 직접 재배하기도 한다. 식재로는 물론이고 약재나 방향제[68](...)로도 쓰이는 등, 다양한 곳에 사용되고 있으며 2부 에선 품종개량이 덜 되어 지나치게 매웠던 고추도 유운룡의 노력 끝에 고추장의 형식으로 널리 퍼지게 된다.

기호식품인 커피도 잘 정착되어 있다. 적당량의 카페인이 운동효과를 증진시키는 것을 알고있던 수양대군이 오스만 제국에서 커피콩을 들여온데다 눈물을 더한다는 의미의 가누(加淚)라는 이름으로 드립커피를 창안했고,[69] 우연히 밀반입된[70] 생 커피콩 종자를 대양도에 재배하면서 자급이 가능해졌다. 1부 당시 많은 신료들이 나이들면 은퇴해서 대양도로 이주해 가배를 마시며 지내는 느긋한 노후 생활을 꿈꿨고 2부 시점에서는 야근에 지친 신료들의 친구로 곧잘 등장한다.

음주문화는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술을 즐기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인지 딱히 금지하지 않고 있다. 되려 온 국토에서 곡물이 넘쳐나니 묵은 쌀을 주체 못해 술로 담궈먹고 있는 판국이다. 다만 입신체비의 존재 덕분에 근손실이 일어날 정도의 지나친 음주나 입신체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고열량 고지방 안주는 좋은 소리를 못 듣기 때문에 입신체비사들 사이에선 술 대신 가배(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적당히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2부 시점에선 해외 영토에서 들여오는 당밀주가 너무나도 싸서 돈 좀 있는 사람들은 항아리째로 사서 퍼마신다고 언급되는데, 문제는 이게 너무 지나쳐서 잔뜩 취해 길바닥에서 자다가 얼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기에 가격을 올려 소비를 억제할 방책으로 주세가 도입되었다. 그 외에도 유성룡이 정철에게 만들어준 칵테일은 겹술이라는 이름으로 현대에도 전해지고 있다.


9.3. 대중문화[편집]


2부 시점에선 입신체비내수린에 영향을 받아 남사당놀이서커스화되었고, 스페인에도 공연을 하여 태양의 곡예단으로 불린다. 어원은 당연히 태양의 서커스.

드라마나 영화 같은 전반적인 대중문화 역시 입신체비의 영향으로 연예인들이 하나같이 엄청난 근육을 자랑하며, 근육멜로물 같이 기묘하기 그지 없는 장르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래서인지 마철석 같은 근육마초 스타일의 남배우가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2부 에필로그에서는 살아있는 근육들의 밤이라는 근육좀비 영화까지 나왔다고 언급되었을 정도.[71]

이 때문에 오타쿠 문화나 E스포츠 문화 같은 서브컬처 계열 문화는 발전하지 못했다. 특히 대한 공화국의 경우 오타쿠 계열로 일하는 프로 일러스트레이터가 단 30명에 불과하다고 할 정도로 완전히 말라 비틀어졌다.[72] 오타쿠 문화는 중화민국이 본고장이 되었고, 현실 세계 오타쿠 산업 규모의 1/3 수준에 불과하다. E스포츠도 마찬가지로 중국이 본래 역사에서 한국의 자리를 가져갔으며 현실 세계보다 그 위세가 축소된 듯한 묘사를 보였다.

1부 에필로그에서 주인공의 할머니가 서클피트[73]를 즐긴다던가 2부 에필로그에서 세계의 전차[74]를 즐기는 사람이 나오는 걸 봐선 근육과 화력 관련 게임은 나름대로 인기를 가진 모양.


9.4. 학문[편집]


고고학과 사학에 대해서는 상당한 강국. 1부에서 수양대군이 명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각종 사료를 쓸어담아오고, 아들인 도원군 이장은 금석학에 심취해 북한산 순수비를 시작으로 삼한과 발해의 각종 유물을 발견했다.

2부에서는 미터법을 만들려는 유성룡의 주도 하에 폐사찰 등 유적지를 발굴하기 시작했고,[75] 이 과정에서 유성룡이 알고있는 고고학 발굴 지식을 전파하여 현대의 것에 근접한 발굴 기법이 정착되었으며, 발굴한 유물들은 조정에서 관리하는 박물관에 전시하게 되었다.

덕분에 본래 역사에서 상당 부분 유실된 삼한 시기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성공한 듯. 거기다 2부에서는 유성룡이 적당히 찍은 유적 발굴터가 안시성임이 밝혀지는 등[76] 원 역사보다 훨씬 정확한 사료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 같은 사건이 터지지 않은 덕분에, 승정원일기의 조선 전기 분량 등 원래는 소실된 여러 기록매체와 실물 유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황실과 여러 문중의 지원에 힘입어 전시 보존되고 있는데, 조선 초중기와 근현대는 물론 조선 이전 국가들의 유물도 있다보니 이촌동 일대가 모조리 박물관으로 들어차 있다.

한편 서학이 훨씬 빨리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종교 부문에서도 꽤 빠른 시기부터 동서양 융합이 이뤄졌다.[77] 덕분에 조선은 성리학의 늪에 빠지지 않게 되었고, 시민 의식 성장이 정체되지 않으면서 다민족국가로서 발전할 기반이 만들어졌다.

동의보감은 똑같이 허준이 저술하지만, 당시 전세계의 의술을 집대성한 당대 세계 최고의 의서가 된다. 호주에서 발견해 들여온 종두법, 말라리아를 치료할 초보적인 키니네 등도 여기 담겨 있다.


9.5. 생활사[편집]


근손실을 피하도록 삼년상은 사라진다. 조선 중기 정도 되면 마음을 추스르고 빨리 복귀해서 갈리도록 1년 휴가를 주고, 3년 동안은 몸가짐을 조심하는 선에서 그친다.


10. 사회[편집]



10.1. 사농공상[편집]


신분제 자체가 근본적으로 소멸하지는 않았지만, 양반들이 입신체비를 하면서 먹거리와 입신체비 기물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역할이 많이 유연해졌다. 양반이 텃밭을 두고 찬거리를 키우는 건 흔하고, 좋은 고기를 얻고자 닭 같은 가축을 직접 기르기도 한다. 2부에서 유성룡은 고추감자를 개량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데, 원역사라면 잡기로 취급받고 말았을 활동이 어엿한 취미생활로 대접받는 듯하다. 유생들이 농사철이 되면 발벗고 농민을 도와주기까지 한다. 물론 노동을 입신체비 삼아 행하는 목적도 있지만...[78] 그 외에도 잠깐 지나가듯 언급된 내용으론 양반가 자제들이 단련한답시고 어릴 때부터 머슴 대신 지게를 지고 다니기도 하는 모양.[79]

그밖에 2부에서 세조(원역사의 단종)때부터 노비에 세금을 매겨서 노비 가지는 게 선호되지 않는다고 요동도적 토벌편에서 언급되었다.

아마 대한공화국 시점에선 신분제가 무의미해졌을 듯 하다.

10.2. 복지, 의료[편집]


입신체비의 부작용으로 인한 신체의 손상을 대처하기 위해 최영직이 헬스 트레이너로 익혀온 재활의학을 보급한 결과 외과적인 의학기술을 시작으로 다양한 의료기술이 발전했다. 현대 시점에서는 오랜 전통을 지닌 재활의학은 물론이고, 나라에서 비용을 부담하는 인공관절 수술이 보편화될 정도로 제도와 기술이 잘 정비되어 있다.

그리고 현대에도 도시의 여러 시설에 장애인 복지 설비가 잘 구비되어 있는 등, 장애인 인권이 매우 발달했다. 이는 조선 초기부터 건강한 육체로 효를 추구하는 입신체비의 가르침이 퍼지자 선, 후천적인 질환으로 입신체비를 행하지 못하는 이들을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마땅히 도와야 한다고 여겼고, 이 정신이 현대까지 잘 이어내려져 왔기 때문이다. 대한 공화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유도 나치의 인종 차별은 물론, 장애인들을 숙청하는 반인륜적 행위에 충격을 받아서였다. 정작 히틀러는 대한 공화국의 장애인 복지시설에 대한 걸 듣고 자신들과 똑같이 장애인들을 모아놓고 절멸시키려고 만든 수용소인 줄 알았다고 한다.[80]

뿐만 아니라 석감과 주정소독법이라는 시대를 초월한 개념을 도입, 보급시키면서 위생과 평균 수명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1부에서 조선 세력에 합류한 북인 세력이 조선인들과 융화될 수 있는 간접적인 요인으로 묘사되었으며, 2부 시점의 조선의 세력권에서는 손발을 씻는 것이 상식으로 정착하며 당시 위생이 최악을 달리던 서양 문화권과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수양대군의 식이찬요 저술을 통해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비타민의 존재와 원리가 대두되어 영양학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발전을 거듭했으며 괴혈병을 비롯한 영양불균형에서도 해방되었다.

2부 시점에서는 우연에 가깝기는 해도 영국에서 호주를 경유하여 우두가 들어왔는데, 이를 이용하여 종두법이 개발된다. 조선 국왕 이연은 이 우두를 영길리(영국)에서 들여온 두창(천연두)이라 하여 영창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당연히 댓글창에는 온갖 개드립이 쏟아졌다.맑고 고운 소리 영창 모든 해군은 입대하면 가족과 함께 영창에 간다~~

2부 외전에 따르면 페니실린 대량생산을 처음 성공한 것이 대한공화국이라 나온다. 원래 세계 2차대전 당시 미국의 록펠러 재단이 돈을 쏟아부어서야 겨우 양산체제가 갖춰진 것과 다른 이유인데, 바로 상처를 입어서 파상풍에 걸려서 앓아누으면 그 기간동안 근손실이 일어난다라는 매우 (근육적으로) 단순한 이유 때문. 발터 모델은 그 비싼 페니실린을 전군에게 지급하는 이유가 그저 앓아 누운 동안 일어나는 근손실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11. 군사[편집]


과거와 현재 모두 군사적으로는 이견이 없는 세계 최강국이다. 장병 개인의 체력, 근력이 화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전근대 시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전에서도 장병의 체력은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만큼 입신체비 보급 이래 줄곧 세계 최상위권의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기술과 육체가 발달하면서 자연스레 한반도 종특인 화력덕후 특성은 본래 역사 이상으로 강력해졌다.

조선 초기의 경우 빙의자 수양대군의 영향으로 속이 빈 철봉을 개발하거나 바벨이나 아령같은 쇳덩어리를 다루면서 자연스레 축적된 야금 기술로 제작한 보총부터 비롯해 작렬신기전이나 대장군전같은 시대에 맞지 않는 고화력의 각종 화기들을 조선 초기부터 만든 것은 물론, 보다 효율적인 초석 생산법을 고안하고 국외 속령에서 유황을 대량으로 채굴하는 등, 화약의 원료를 충분히 구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했으며 나중에는 갈색 화약과 같이 더욱 가성비 좋은 화약을 고안하기도 한다. 이렇게 화약 수급이 원활해지자, 이게 조선의 화력덕후 특성과 맞물려 다른 나라들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화약을 아낌없이 쓰고 있다. 일례로 2부19장6화에서 현자총통(원역사의 천자총통)은 작은 화포라 화약을 두 근(약 1.2Kg)도 안 먹는다며 계속 쏘라고 말할 정도다. 화약 수급 면에서 동양보다 우월했던 서양과 비교해도 호주에 드나들던 드레이크가 조선 수군의 잦은 실사격 훈련을 보고는 조선에서는 화약의 원료인 초석이 솟아나는 광산이 있나며 궁금할 정도니, 작중 조선은 전세계에서 화약을 가장 많이 쓰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빙의자 유성룡이 활약하는 조선 중기에 가면 화포기술의 발달로 기존 천.지.현,황 총통의 분류에서 한 단계 더 강한 화포를 개발하여 원 역사의 기존 화포들의 등급을 한 단계씩 낮췄는데, 중간에 이를 한 단계씩 더 내렸다.[81]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순신이 현대적인 포격 개념을 깨우치고[82] 이를 운용교리에 성공적으로 접목시키는 등, 화력증강 뿐만 아니라 화기 운용에 대한 각종 노하우를 축적했다.

화기가 너무 발전하다 보니 전통적 무기인 은 비중이 확 줄어버렸지만, 그래도 사대부들의 육예(六藝)의 하나로 남은 건 마찬가지고 태조 이성계, 수양대군 같이 존경받는 전설의 명궁들도 많은지라 유생이나 장수들은 곧잘 사용한다. 2부 시점에서는 총화기는 일반 병졸들이 맡고 장수나 유생들이 활을 쓰는 것이 통념으로 여겨지고 있다. 작중에서는 신립이 활로 일본군을 도륙하는 장면이 나오며, 그 외에도 유럽으로 간 조선 사절단이 일반적인 성인 남성이 용을 써가며 쏘는 잉글랜드 장궁[83]을 보통 활처럼 손쉽게 쏴서 표적을 맞추는 모습을 보며 스페인인들이 기겁하기도 하였다.

수군의 경우 기존의 훈련도감 이상으로 투자 비용이 너무 큰 탓에 조정에서도 주저했지만 대외활동의 중요성을 실감한 수양대군과 왕실의 노력 끝에 명나라에서 허송세월하던 방길주나 요동에서 고생하다 조선으로 탈출한 여국강같이 정화의 대원정에 조선공과 선원으로 참여했던 경력자를 확보하면서 보다 우수한 선박을 찍어내고 경험있는 선원들을 양성하는 것에 성공한다. 마침 화기의 발전으로 벽력포나 대장군전 같이 시대를 초월한 고화력 화기를 탑재하게 되는 것은 덤. 이 성과는 후일 첫 해외 활동에도 성공하면서 탐검사라는 직책을 만들며 온 바다를 탐험하거나 경인왜변에서 일본군 함대를 무수히 갈아버리거나 오스만 제국의 함대를 두 차례 박살내는 것으로 당당히 증명하였다. 2부에서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정면으로 격돌해 승리를 거뒀고 이순신이 작정하고 지휘하는 수군이 일본 본토의 해안을 모조리 초토화시키고 영국 해적을 도륙내면서 그 위용을 과시했다.

훈련도감이 보병 소총수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기병의 비중이 약해졌는데, 이건 기갑사 전용 훈련이 따로 생기고 후일 여진족이 북인으로 동화되면서 어느 정도 해결된다. 또한 해외에서 들여온 한혈마 같은 우수한 품종을 만주지대에서 길러내면서 역으로 기병의 질이 더욱 상승했다. 이는 1부에서 일어난 경인왜변 당시에 조선의 기병과 일본의 기병 사이의 압도적인 체급 차이를 비교하는 식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수성전, 화력전 비중이 늘어난 2부에서도 기병 돌격으로 일본군 본대를 밀어버리며 활약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입신체비를 기반으로 현대의 군 훈련 시스템을 접목하여 보다 발달된 육성시스템을 갖춘 훈련도감에서 양성한 강군을 토대로 군사력이 대폭 증강되었다. 덕분에 본래 역사보다 일찍 일어난 토목의 변에서 조선이 몽골 + 여진 세력을 제압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후일 도감군은 대양도를 조선에 복속시키는 과정을 거치며 지형기물을 이용한 위장과 은폐의 중요성과 유격전의 개념을 깨닫고 함대함 백병전과 유격전에 특화된 임해도감이라는 새로운 부대를 창설한다.

근현대 시기의 대한공화국군은 간단히 말해, 60kg짜리 기관총[* 최하 2명, 보통 3~5명이 함께 운용하는 M2HB 중기관총이 삼각대를 포함해야 58kg이다!, 빈 총 무게는 38kg 정도. 혼자서도 들고 쏠 수 있지만, 보통 2인 운용을 전제로 했던 M1919A6이 약 16kg. MG42가 약 11kg였다.]을 혼자 들고 쏘고, 쇠지렛대전차의 뚜껑을 따고 수류탄을 던져넣으며,십만 슈퍼 솔저 양병설[84] 장비를 운용하는 승무원들이 무거운 포탄을 더 빠르게 장전할 수 있으니 다른 나라보다 화력과 사거리가 우월한 장비를 마음껏 운용하는 군대다.[85] 다른 나라에서는 중형전차로 분류되는 연운 전차가 대한 공화국에서는 경전차로 분류되며, 원역사의 퍼싱이 대한 공화국에서는 처음부터 중형전차다.[86]

게다가 생산력이 실로 엄청나서 2차 대전 당시 국가내에서 입신체비에 쓰이던 자원과 예산이 전쟁에 투입되자, 420mm(16.5인치) 주포를 장착한 이순신급 전함을 최소 12척을 생산하고,[87] 해방함을 15일에 한 척 꼴로 1천 척 넘게 찍어내는 위엄을 보였다. 이런 어마어마한 생산력이 있는 만큼 보급 능력도 엄청나서, 2차 대전때 보급품이 너무 남아돈다고 남는 총을 소련군한테 그냥 뿌리거나,[88] 전투식량인 닭고기에 기름이 너무 많다고 기름을 걷어내서 빵에 발라먹으라고 소련군한테 줘버리는 등, 다른 나라와는 차원이 다른 보급이 가능했다.[89] 기름은 근육에 안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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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훈련도감[편집]


이징옥이 '입신체비 그거 군대에는 별로 쓸모가 없을 거 같은데요?'라며 본의 아니게 어그로를 끌자, 군 시절 기억이 떠올라 내심 열이 오른 수양대군이 창설한 새로운 군 기관.[90] 현대의 군 양성 시스템을 도입하고 거기에 입신체비를 합친 훈련체계가 특징으로 병사들에게 국방색 가죽갑옷과 장화, 둥근 철모[91]를 사이즈에 맞춰 지급한다. 튼튼한 장비와 넉넉한 식량을 보급받고 입신체비를 응용한 훈영제식법이란 선진적인 트레이닝을 거친 도감군들은 당대의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굴강한 군사로 성장했으며 토목의 변에서 몽골 기병을 도륙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인왜변 당시 일본에서 '미도리오니(綠鬼)'라 불리며 악명을 떨친다. 이는 이후 조선이 적극적인 대외팽창을 꾀할 수 있는 동력원이 되었다. 훈련도감이 처음 운영되었을 때는 천민들이 신분 상승을 꾀하는 수단 정도로 여겨졌지만, 이들의 활약상과 전공이 널리 퍼지면서 군문에 투신하려는 명문 양반가에서도 훈련도감에 지원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무관을 꿈꾸는 자들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훈련도감에 자원하는 등 신분 차별을 완화시키는 제도로써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훈련도감 군사는 그래도 훈련도감 기병이 있던 원 역사와는 달리 아예 각종 보병들만을 전문 육성하는 시설이 되었으며,[92]방패수, 보총수, 창수, 장검수(협도를 다룸)로 구분된다. 방패수가 진형을 구축하고 보총수가 원거리, 창수와 장검수가 근거리 공격을 맡는 형태. 궁수도 있긴 한데 별로 부각되진 않는다. 기병 전력은 거의 놓다시피 해서 기동력은 다소 처지지만, 대신 험준한 지형을 이동하는 데는 타국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도감군끼리의 수직/수평적 관계는, 물론 공적 자리에서는 계급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기수에 따라 대접한다. 그래서 1부 후반에서 훈련도감 3기인 곽연성은 종3품인데도 훈련도감 1기인 정4품 정범수에게 존대한다.

각 도감의 지휘관은 절제사이다. 훈련도감 절제사는 훈영절제사, 화기도감 절제사는 화영절제사로 부른다. 훈련도감, 화기도감 절제사는 종3품, 임해도감 절제사는 정4품이다. 각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의 관계와 비슷할지도? 이 셋을 통할하는 기관이 훈련원이다.


11.1.1. 임해도감[편집]


훈련도감의 또다른 계통으로 대양도의 토인으로 병력이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도감군보다 가벼운 병장을 갖추고 있으며 작은 손도끼 2개를 소지하는 것이 특징. 초기에는 왜구들을 상대로 백병전에나 투입되는 정도에 그쳤으나 시긴이 지나 경험을 쌓고 이전 대양도 개척 중 무력 충돌에서 얻은 군사적 경험을 적용해 유격전이나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성장한다.


11.1.2. 화기도감[편집]


훈련도감의 각종 화기를 관리, 운용하는 직책을 담당하는 부대. 문종이 즉위 초기에 보총수 훈련 과정이 너무 어렵다는 점을 들어 아예 특화 부대로서 분리했다.


11.1.3. 훈영제식법[편집]


입신체비를 처음 접한 이징옥이 힘 키우는데야 좋겠지만 병장기를 다루는 건 힘만 있다고 되는건 아니기에 군에서는 별로 쓸모없을 거라 평가를 했고, 여기에 열받은 수양대군이 훈련도감 장병을 위해 입신체비에 본인이 알고있던 실전용 훈련법을 조합하여 새로 만들어낸 훈련법. 기본적인 제식이나 체력 단련부터 많은 현역 출신 병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 줬을 유격 훈련[93]까지 망라하고 있다.

경례도 생겼다. 상급자에게는 현대 같은 거수경례에 "충성" 구호를 외치지만, 왕에게는 가슴에 손을 얹는 경례(국기에 대한 경례처럼)에 "단심" 구호를 외친다. 단심 구호는 대한 공화국 시절에 김상옥홍범도에게 경례할 때 단심을 외쳤으며 별다른 이유가 없는 한 현대 시점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얼차려도 개편되어, 군법에 정해진 대로 스쿼트 200회를 시키는 등 입신체비 동작을 행하는 매우 건강한(?) 체벌로 바뀐다. 여담으로 이순신은 하급자에게 얼차려를 내릴 때 본인도 옆에서 같은 회수를 시행하는 남들이 볼 때 독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것도 여송도(필리핀)의 무더운 날씨에도 갑옷을 착용한 채로 시행했다고.

입신체비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미관을 위해 근육을 만드는 입신체비와 달리 실전에서 무기를 휘두르고 장비를 두르고 움직일 수 있도록 근육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운동 동작이나 과정에서 많은 변경점들이 있으며, 작중에서도 유생과 군관을 몸을 보고 구분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94]


11.2. 화기[편집]



11.2.1. 보총[편집]


수양대군이 덤벨 운동을 위해 속이 뚫린 철봉을 만든 것을 계기로 왕세자 시절 문종이 화력덕후 기질을 발휘해 만든 휴대용 화포. 최초의 총기이자 초기형태의 머스킷이다. 개발 초창기엔 속이 뚫린 철봉을 만드는 기술이 미비하여 비용 대비 명중률이 시원찮았지만, 총기 특유의 짧은 훈련기간과 간편한 운용 덕분에 정식으로 도입된다.

훈영제식법으로 강인해진 도감군에게 맞춰 제작된 만큼 그 사거리와 화력은 후일 등장할 조총과 비교해도 우위에 있으며,[95] 미흡한 명중률은 다수의 보병이 일제히 발사해 탄막을 만드는 전법으로 이를 보충하였다.

장인들이 숙련되기 전의 초기 생산품은 중국에 조공 명목으로 떠넘겨 장인의 숙련도 상승과 외교적 이득을 동시에 꾀했다. 이 안을 제시한 수양대군은 보총의 위력으로 토목의 변의 피해를 줄이려고 했으나, 명에서는 무거운 청동으로 보총을 제조한데다 부패한 관료들의 착복으로 품질도 엉망이고, 훈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명에서는 제대로 쏴보지도 못한 보총의 위력을 과신해 몽골이 보총을 눈치채 대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고, 막상 토목의 변이 벌어지자 불량 보총 일부가 폭발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결국 명에 바치던 조공 품목 중에서 보총이 제외되었다.[96]

11.2.2. 운총[편집]


보총을 개발하면서 같이 만든 화력과 사거리를 강화한 중화기로 개인화기와 대형화기의 애매한 경계에 놓여있는 대물저격총에 가까운 물건.

그 무게와 반동은 3대 천근을 넘기는 수양대군이 겨우 들고 쏘는게 고작일 정도. 또한 연철기둥에 구멍을 내는 보총과 달리 강철판을 말아 총신을 만들거나 총신 내부에 강선을 새기는 등, 재료와 제작법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후 금성대군이 개발한 괘종탄(掛鐘彈, 미니에 탄)을 사용해 적 지휘관을 정밀저격하는 용도로 운용된다. 그 사거리와 위력이 보총보다 우월하여 천보총이라고도 일컬으며, 이후 조선 중기에 들어서도 운용되지만 비싼 제작 단가와 보총보다 오래 걸리는 느린 장전시간 등 여러 난점 때문에 보총 10개당 하나 정도로 운용 수량은 여전히 적은 상황. 유럽측에서는 동양식 머스켓이라 칭하며 유럽의 아르케부스보다 긴 사거리에 뛰어난 정확성을 지닌 운총의 존재를 아는 이들이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운총은 원칙적으로는 대외 유출 금지이지만 마사이족에게는 일부 판매하여 마사이족과 스페인 상단과의 국지전에서 저격용으로 운용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였다.[97]


11.2.3. 장총통[편집]


군용으로 납품된 보총들 중에서 성능이 기준치 미달이거나 사용한 지 오래된 것들을 총열을 잘라서 시중에 풀어놓은 민간용 화기.
일반 보총보다 성능이 떨어지지만 여전히 조총과 비교해서 성능상의 우위를 보였으며 특히 입신체비로 강인해진 조선의 승려들이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승려들은 산 깊은 곳에 위치한 사찰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레 현대의 산림감시원의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맹수가 드글거리던 조선의 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가 필수였기 때문. 특히 후일 산탄이 개발되면서 산림에서 덮쳐오는 호랑이 같은 맹수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했다고 하며, 일본의 침략 당시에도 108번뇌를 담은 산탄을 장전한 장총통으로 게릴라전을 펼쳐서 쏠쏠한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나무아미타 불! 이후 미주 개척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에 복속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승려들이 사용법 및 일본과의 전쟁에서 습득한 노하우와 함께 장총통을 전수하였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입신체비로 향상된 육체 스팩에 전수받은 노하우를 접목시켜 스페인 개척단을 적은 피해로 박살 내기도 하였다.


11.2.4. 나팔총[편집]


2부의 조선에서 유성룡의 제안으로 새롭게 개량한 총기. 총열을 줄이고 나팔처럼 확장시킨 개인 화기로 당시 유럽에서 사용하던 블런더버스와 유사하게 생겼으며 작중에서는 수렴진화로 설명하고 있다. 기존에는 보총과 마찬가지로 1개의 탄환을 날리는 물건이였지만 보총 자체도 50m 이상에서는 정확도와 살상력이 급감하는 물건이였기에 이보다 약한 나팔총은 볼 것도 없어서 개량 요청이 폭증하던 상태였고, 이걸 들은 하급관리였던 시절의 유성룡이 포도탄(확산탄)을 쏘는 화포처럼 작은 탄환을 한꺼번에 날리면 되지 않냐고 언급하며 산탄 제작설비를 정립하면서 완전한 산탄총으로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보통 2개 이상씩 들고 다니다가 사격 후 곧바로 곤봉처럼 휘두르는 방식으로 그 특성상 기병과 수병들이 즐겨 사용하였으며, 경진만란 당시 스페인 해군과의 백병전에서 블런더버스를 능가하는 화력을 보여주었다.


11.2.5. 산탄[편집]


2부의 유성룡이 창안한 탄환으로 최전선에서 사용하는 휴대화기 나팔총의 저지력에 대한 불만이 나오자 화포로 사용하는 포도탄처럼 작은 탄 여럿을 한번에 쏘아내자는 의견을 냈고, 건축학과의 경험을 떠올려내 높은 건축물 위에 녹은 납을 조금씩 떨어트려 납 방울이 자연히 산탄 알갱이가 되는 서양의 샷 타워 방식을 도입하게 된다. 초기에는 노하우 부족으로 만든 탄의 불량률이 높았지만 여러 지원과 노하우 축적을 거듭해 개선해 나갔으며, 시험사격에서 그 위력을 입증하며 정식으로 도입하게 된다. 이후 높은 탑이나 절벽이 많은 절에서 제작을 담당했으며, 산골이나 숲을 감시하는 승려들 입장에서도 정밀한 조준이 필요없는 산탄을 애용했다. 이후, 일본의 침략 당시 험한 산세를 이용한 게릴라전에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개발과정 중 산탄을 식힌 물을 연못에 버리자 잉어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건을 계기로 납과 수은 등의 중금속 중독의 위험성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납이 들어가는 화장품인 백분이 금지되었으며 납 광산 인근의 마을의 돌림병의 원인이 지면에 스며든 납물인 것이 밝혀져 마을을 옮기고 광부들의 근무를 조정하는 등 여러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광부들을 설득하기 위해 납에 중독되면 안 선다고 말하며 처음 등장한 허준의 재치는 덤.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조선에서 제공받은 장총통에 산탄을 장전해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원주민들의 기술 부족으로 샷 타워 방식이 아닌 손으로 직접 산탄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덕분에 탄환 한 발의 크기가 조선산보다 굵어졌고, 조선의 산탄이 살을 도려내는 위력인데 반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산탄은 뼈를 부수는 위력이 나오기도 하였다.


11.2.6. 작렬신기전[편집]


보총과 함께 조선에서 개발된 신형 화기. 그 형태와 운용법은 쉽게 말하자면 현대의 로켓 추진식 탄두 그 자체로 주로 말의 양 옆에 하나씩 거치하고 목표를 향해 조준 후 발사한다. 기존의 신기전과 달리 화차같이 안정된 발사장치 대신 움직임이 많은 말 위에다 설치하기 때문에 사거리나 정확도가 상당히 떨어졌고, 말과 기수에게도 상당한 반동을 안겨주지만 그 위력은 상당했으며 빠르게 돌진하는 와중, 그 짧은 순간 최대한 화력을 투사해야 하는 기병과 궁합이 좋아서[98] 만주의 야인여진 토벌 당시 여진족의 기병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세웠고 이후에도 조선의 기병부대가 즐겨 쓰는 화기가 되었다.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발사 시의 화염으로 인해 말이 말고기가 돼버릴 때도 있었다는 언급은 덤.

화포 제작기술자이자 더욱 강한 화력을 추구하는 화력덕후인 김지는 작렬신기전 4개를 하나로 묶어낸 무기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안 그래도 반동이 강한 작렬신기전 4개를 동시에 쏘는 녀석인지라 근육질의 유생이 간신히 쏘는 괴악한 무기지만 일본의 조선본토 침공 때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갈아버리는데 쓰이기도 하였다.
이후 꾸준히 개량된 건지 아니면 이름을 따온 별개의 화기인지는 불명이지만 세계대전이 벌어질 당시에는 대전차화기로 운용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11.2.7. 비격진천뢰[편집]


원 역사에서는 임진왜란 시기에 처음 사용되었지만 근육조선에서는 화약무기의 빠른 도입으로 문종 시기에 개발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만 원 역사와 달리 조선의 적극적인 해외 진출에 힘입어 화약과 구리의 공급량이 풍족해졌고, 자연스레 화포의 구경과 위력도 증가하자 발사 시의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자폭해버리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어서 2부 초반 시점에서는 거의 잊혀진 상태였다. 이러한 것을 2부 중반 시점에서 이장손[99]이 실전에 쓰일 수 있는 수준으로 개량하여 조선군은 물론이고 영토를 대가로 사들인 뒤 역설계를 통해 도입한 스페인군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100]


11.2.8. 그 외[편집]


  • 자모포(子母砲): 1부 초반에 보총, 운총과 같이 개발된 무기. 처음에는 총으로 분류해서 두치총이라고 불렀다. (구경이 두 치라 해서 두치총) 그러나 총이라지만 화포가 될락말락한, 조금 작은 팔코넷이었는지라 북방 개척 당시 자모포로 개칭되고 화포로 편입되었다. 무게는 70근(42kg), 48돈 탄환에 24돈(90g) 화약을 넣는다. 포 중에서 위력과 사정거리는 낮은 편이지만 장전속도가 빠른 점을 장점으로 삼는다.
  • 진천뢰: 수류탄. 작중에서는 비격뢰(飛擊雷)라는 이름이 더 잘 쓰인다.

  • 용천포[101]: 2부에서 등장한 화포. 파괴력이 크나 화약소모와 반동이 너무 심해 잘 쓰이지 않는다.

  • 천원소총: 2부 외전 에서 등장한 대한공화국 전용 소총. 무게가 9kg대라 소련병사들은 무겁다고 욕했다.


11.3. 전술[편집]



11.3.1. 근육겁박지계[편집]


야인여진 토벌 중 성안에 틀어박혀 농성이 길어지자 도감출신 하급 군관이던 홍윤성이 고안한 즉흥적인 계책. 도감군 여럿이 줄지어 성 앞에 도열한 뒤 갑옷을 벗어 근육을 드러내고 각종 운동을 하면서 힘을 과시하며 상대의 전의를 꺾는 것이 해당 전술의 주요 골자다.[102]

사실 빨리 전역해서 느긋한 생활을 원하던 홍윤성이 추운 북방에서 맨몸을 드러내 감기에 걸리면 후방에서 꿀을 빨 수 있을 것이라는 잔머리에서 착안해 낸 별 의미없는 전술이었으며, 실제로도 강자존의 법칙을 따르는 야인들 이외엔 사용하는 장면이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은 임기응변식 일회용 전술에 불과하다. 하지만 야인들에게 유의미한 성과를 낸 것은 분명하고, 더 나아가 훌륭한 심리전 그 자체였기 때문에 홍윤성은 퇴직은 커녕 그의 유능함에 주목한 조정에서 승진만 거듭하게 되었다.

이후 근육겁박지계라고 언급은 되지 않지만, 강자가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전 세계 공통이었기 때문에 해외 진출한 조선인들이 자신의 근육과 힘을 보여 주어 현지인들의 호감을 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식으로 한명회가 폴리네시아인들을, 구성군이 마사이족을, 유성룡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복속시키게 된다.


11.3.2. 람보[편집]


근육겁박지계와 마찬가지로 홍윤성이 창시한 개념. 대양도 개척 당시 상대의 목을 잘라 성인으로 인정받는 풍습을 가진 고산족들은 대양도를 조선의 영토로 개척하기 위해선 필히 회유 내지는 제압해야 할 대상이였다. 첫 조우에서는 도감군의 신체능력과 압도적인 화력으로 우세를 점했지만, 이후 도감군과 정면 승부를 피하고 지리적 이점을 살려 밀림에서 습격하는 게릴라 전술을 펼치며 인명 소모를 강요했고, 조선군은 이런 게릴라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별다른 성과 없이 무더운 대양도의 기후에 지쳐가던 중, 홍윤성이 경계를 소홀히 한 장병을 꾸짖다가 해당 병사가 용변을 해결하기 위해 수풀 사이에 쭈그려 있어서 원주민들에게 들키지 않아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착안해 철모에 구멍을 내 나뭇가지를 꽂고 갑옷을 벗고 알몸 차림을 한 뒤 온몸에 쑥물과 먹을 발라서 고산족 장정들을 기습하는데 성공하며 위장의 전술적 가치를 발견한다.[103]

이후 위장한 홍윤성과 휘하 장병들이 그동안 도감군을 괴롭히던 고산족 마을을 덮쳐 성공적으로 제압, 족장을 비롯해 마을의 장성한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면서[104] 그동안의 고통을 완벽하게 설욕해 준다. 홍윤성의 활약과 소식을 전해 들은 한확은 이를 진심으로 기뻐했고[105] 이들이 보여준 전술을 쪽빛(밀림)을 거침없이 활보한다 하여 람보(藍步)이라 칭했고 위장무늬의 개념을 새로이 도입하여 람보를 행하기 위해 만든 군복을 람보복(藍步服) 이름 붙이게 된다.

여담으로 람보복이 없던 초기 람보 전술을 행할 때 원활한 위장을 위해 군복을 벗고 온 몸에 위장크림 마냥 쑥물을 발랐는데, 이게 색이 잘 빠지질 않아 람보를 처음 선보인 홍윤성은 얼굴과 온 몸에 색이 잘 빠지질 않아 군데군데 초록 반점이 남아있어 골치를 앓았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아교를 동원했으나 눈썹을 비롯한 온 몸의 터럭은 모조리 날려먹고 색은 색대로 빠지질 않아 결국 한동안 눈썹을 칠하고 다녀야 했고(...) 이것이 수양대군과 오스만 제국을 방문하던 중 사건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12. 단위[편집]


박물관에서 "한명회는 30만 km를 항해했다"라고 하거나 수양근을 근이 아닌 kg로 매기는 등, 영국에서 제시한 야드파운드법을 무시하고 그건 너무나도 흉측해서 프랑스에서 제시한 미터법이 도입되었다. 다만 약간의 오차가 있어 기존에 쓰던 단위와 미터와의 차이가 8mm 정도 났다고 한다.[106] 또한 배수량의 단위 료(料, 1료 = 140kg)가 헷갈렸던 유성룡이 쌀 10석 기준을 잡아 톤(ton)과 비슷한 단위 돈(墩, 1돈 = 890kg)을 도입한다. 또한 서학이 현실 역사보다 빨리 전파된데다 성리학이 입신체비를 통해 진작에 종교로서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인지, 기년법기독교식의 서력기원법이 들어왔고 단기와 불기는 거론되지 않는다.[107]

2부 에필로그의 댓글에 달린 작가의 답변에 따르면 야드파운드법은 현대 와서는 영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만 쓰이는 마이너한 도량형이며, 세계의 대세는 프랑스와 조선의 공동연구로 개발된 미터법이라고 한다. 에필로그에서 자세히 밝혀지는데, 세계척의 재정의를 위해 측량을 다시 시도하려는 무렵, 세계 각지로 뻗어가는 대영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정부가 조선에 공동연구를 제의했고, 이를 통해 현대의 미터법이 완성되었다고 한다.[108] 유성룡이 만든 세계척은 8mm의 오차가 생겨서 팔미리라는 관용어가 만들어지지만, 매다/세치라는 세계척의 단위계는 미터/센티미터와 공용으로 사용하게 된다.

[1] 문종의 경우 원 역사에서는 소헌왕후와 세종의 장례를 연이어 치르다 건강악화로 요절하였지만 근육조선 세계관에서는 입신체비로 건강해져서 뇌종양으로 말년에 골골대다 만69세에 사망한 수양대군보다 훨씬 정정한 모습을 보였다.[2] 유성룡에 빙의한 김성원이 중계무역을 제외하면 경쟁력이 부족한 상품을 대량으로 파는 나라라고 평가할 정도. 거기다 명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문제도 있었다.[3] 을병대기근 당시 40만 명 가량의 아사자를 냈지만 본래 역사에서 141만의 희생자가 나왔고 근육조선의 조선의 당시 인구가 본래 조선의 3배인 3200만 가량이였던 것을 생각하면 인구 비례로만 따져도 420만명이 희생되었을 대참사를 극도로 최소화한 셈이다. 참고로 대참사를 이렇게 줄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2부에서 유성룡(김성원)이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모티브를 선점해서 국가에서 운영하는 대규모 상단기업을 연금기금과 연동되게 구상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상단기업과 연금기금 자체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연금의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였으나, 만에 하나 대기근이 들 경우 연금기금을 이용해서 대량의 구휼식량을 해외에서 사들인다는 것까지 목적으로 두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당시 송시열의 정적이었던 예당이 자신들의 부를 책임지는 연금기금을 빼서 구휼미를 사는 것을 반대하며 1년치의 곡식만을 사도록 주장했으나, 을병대기근이 2년이나 이어지면서 결국 대혼란이 발생한다. 그나마 아사자가 적은 건 송시열이 속한 송당의 선비들이 대기근이 끝나기까지 입신체비를 포기하고 사재를 털어 구휼을 한다거나, 혹은 송시열의 제안대로 미주로 사민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인구압을 최대한 분산시켰기 때문.[4] 특이하게도 황가가 제위를 스스로 내려놓았는데, 다름이 아니라 일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며 내려놓은 것. 문종 이후부터 왕가는 전통적으로 최소한 3대 700근 이상의 근육과 솔선수범하는 업무량을 유지하는 게 기조가 되었는데,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나이가 들면 양위하는 전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커진 대한제국과 발달한 시대로 인해 폭증하는 업무를 황제가 버틸수가 없어 제위를 내려놓게 된다. 게다가 같이 갈릴 신하들은 유성룡 이후 무조건 60세면 정년퇴직시키게 되었지만, 왕은 양위를 하기 전까지는 정년이 없으니... 명분은 큐슈 반환과 (1차) 세계대전 참전 거부라는 실책에 대한 책임이지만, 사실상 황밀레에서 도망친 것. 물론 황실이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고 핑곗거리를 찾아 제위를 내려놓은 거라, 여전히 구 황실 가문은 대한공화국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제위를 내려놨다고 해도 황실 소유였던 거대한 목장 등의 재산은 여전했기 때문에, 그 재산을 토대로 낙농업 사업에 뛰어들어 전 세계 낙농업의 20%를 장악한 재벌기업으로 재탄생했다고 한다.[5]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입신체비 기구만 평균 900kg에 달해서 공령(플레이트)만 모아 와도 전함이 천 대 단위로 튀어나온다. [6] 본래 역사에서도 조선은 선천적, 후천적을 가리지 않고 장애인을 차별하기는 커녕 도리어 나라에서 챙겨줄 정도로 장애인 인권이 발달한 국가였다. 거기에 근육조선의 대한 공화국은 1950년에 장애인 복지 시설이 생겨날 정도로 선진적이다. 그런데 입신체비를 찬양한 국가가 인종 청소, 장애인 대상 생체실험 등을 자행했으니 나라 전체가 진주만 공습 당시의 미국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분노에 들끓어 버린다.[7] 암군이라 해도 나라를 갉아먹는 해충은 세자로써 국정에 임하는 과정에서 갈려나가고, 국제적 대국적 발전 기회를 놓치는 정도다.[8] 수양대군이 원역사의 간신들을 전부 해외 개척으로 보내 대성공하는 쾌거를 이뤘고, 이 과정에서 갈려나간 한명회가 자기 혼자 개고생하는 게 억울해서 초임 관리들을 전부 외방 근무로 시작하는 제도를 우겨서 만들어 간신의 새싹들은 외방에서 걸러지게 되었다.[9] 대역기만큼 무거우면서 무게중심이 맞지 않는 도끼를 가지고 휴식 없이 입신체비를 시행하기에 며칠 지나지 않아 척추가 틀어지고 끝내 폐인이 되는 위험한 행위라고 한다.[10] 참고로, 2부 외전에 언급된 목종의 경우는 본인의 정치적 정통성의 부재를 부패한 근적들의 비호로 채우고 있었던 데다가, 올바르게 입신체비를 행하는 선비들은 경신대기근 당시 사재를 털어 백성을 구휼하면서 세력이 많이 깎여나갔기 때문에 송시열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조선을 망하게 했을 지도 모를 상황이었는데, 2000여명의 유생들이 지력상소를 하고 1만여 명의 백성들이 도성을 포위하자 정치적으로 생명이 끝장나버리고 만다. 반대로 말하면 나라를 망하게 만들 혼군이라 할지라도 조선의 왕이라면 지력상소만큼은 절대로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11] 사림은 성리학적 이념에 집중하느라 현실 인식과 실무 능력이 형편없다는 단점이 있는데, 사람이 모자라서 신료들이 매일같이 야근에 시달리고 과거 시험도 훨씬 자주 치르고 합격자도 늘리는 판에 실무 능력이 전무한 사림이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다.[12] 일단 이 시기쯤 되면 필리핀도 조선 영향권 끄트머리쯤에 있는 동네고, 필리핀 호족들은 조선과 우호 관계였다. 그러니 조선이 잘못했다고 말하기도, 필리핀이 잘못했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림 중 그나마 눈치 빠른 몇몇이 '필리핀이 잘못한 거 아닐까요' 라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세조가 '그럼 너희들이 가서 알아 봐라'라고 하며 필리핀으로 보내 10년을 고생시켰다.[13] 유성룡의 외할아버지가 산림인데, 자기 입으로 ‘틀어박혀 책만 읽느라 세상물정 모르는 헛똑똑이들’이라고 자조할 정도다.[14] 본래라면 계유정난을 통해서 사라졌을 노하우였다.[15] 가장 평화로운 시기에도 황제의 하루 수면시간이 6시간밖에 안될만큼 업무에 치여 살았고 황실 해산 전의 전대 황제는 과로사했던 상황이였기에 일반 노동자처럼 하루 8시간 수면을 취하고 싶어서 황족 전원이 황실 해산에 찬성하였다.[16] 실제 이 소리는 모처럼 뽑은 인간이 업무 과다로 입원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나온 말이다.[17] 파도가 거친 동해의 특성상 선원들을 훈련시키기 딱 좋은 장소였던데다 마실 수 있는 물도 구할 수 있는 장소였기에 여국강이 매우 좋아했다.[18] 더군다나 원 역사와는 달리 군주제가 폐지될 때까지 왕권과 신하의 권력의 조화를 추구하는 의정부서사제가 부활하지 못하고 6조 직계제로 운영되었으니 왕권과 신하의 권력이 조화를 이루는 재상 중심 체제를 원한 정도전은 원 역사보다도 더욱 박한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정도전 안습...[19] 양녕대군이 아들인 서산군 이해의 첩을 강간하려다 호신술을 배운 첩에게 역으로 다친 사건이지만, 당시 조선시대 법률로는 첩도 처벌받는 대상이 되기 때문. 다만 순수하게 정당방위였던 점을 감안해 장형을 선고했지만 때리는 시늉만 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원 역사에서는 호신술의 개념이 없었기에 미수에 그치지 않았고, 아버지에게 첩을 빼앗긴 서산군 이해가 미쳐서 온갖 막장짓을 벌였었다.[20] 임금의 은혜로 몸을 상하지 않고 죄값을 치르게 한다는 명분과 공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실익에 세종대왕이 활짝 웃었던 건 덤.[21] 현대와 달리 이렇다 할 보호도구가 없으니 독한 유황 증기에 노출된 죄인들은 1년여 만에 눈이 머는 등 쇠약해지다 피를 토하고 죽는다고 한다.[22] 그나마도 2부 시점에서는 인력 수요가 훨씬 늘어 조건이 더욱 가벼워진다.[23] 관료들이 분야별로 미리 만들어둔 문제 은행에서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고 있다. 또한 공무원으로 올라와서 근속기간에 일정 이상이 되면 정식 관료와 동등한 취급을 해 주도록 법률까지 제정되었다.[24] 실제로 이걸 이용해서 2부 주인공은 1부 주인공이 수양대군으로 빙의했음을 알아챘다. 일부러 헬스 용어를 영어로 말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 지 떠본 것.[25] 실제 역사에서 숙종 때 "시골 사람들은 아예 언문으로 공부한다"라는 말이 나온 적 있다. 이것이 가속화된 셈. 실제 역사의 한글 전용이 한겨레신문 창간, 중앙일보의 가로쓰기, 한글전용으로의 업그레이드에 큰 영향을 받았고 이는 서울의 젊은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된 것과는 차이가 있다.[26] 유생들이 절에 시비걸러 가다가도 수양대군을 모델로 한 사천왕상을 보고 이곳은 수양대군의 손길이 닿은 절이라며 그냥 돌아가기도 하였다. 다만 그 부작용(?)으로 수양대군의 근육질 몸매가 조선 불교의 사천왕상 표준이 된 것은 덤. 2부 시점에서는 수양대군의 후손들이 조상의 손길이 닿은 사찰은 보호해야 함이 마땅하다며 꾸준히 시주하고 있다고 언급되었는데, 이 중 한 사찰에서 대만산 목재를 수입하면서 대만 흰개미도 같이 딸려오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는데, 이것들은 옻칠한 목재는 물론 벽돌도 갉아대서 일대의 숲을 태우고 베어내어 땅을 파내 굴을 태워서 구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해당 절을 헐어버리는 일이 있었다.[27] 목책 작업으로 파던 곳이 하필 옛 발해의 사찰 대웅전이었다. 그만큼 나온 물건들도 천수관음상, 삼존불 등의 고대 유물들이다.[28] 물론 출가하지 않는 몸으로 수계받았다.[29] 티베트의 승려들을 데려올 때 승려라고 하면 반발할까봐 언어학자라고 소개했다.[30] 원 역사에서도 조선시대에는 산에서 호랑이가 출몰하던 시기이기에 산에서는 몸을 보호할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사라진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시행된 해수구제사업 이후이다.[31] 근육조선 세계관에선 문종 치세에 이미 산군(호랑이)의 씨가 마를 지경이라는 보고가 올라왔고 2부 267화에서 50년 전에 도성 인근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지금은 울창한 산에서만 볼 수 있다고 했다.[32] 제사는 지내는 것으로 하되,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불러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자리로서 지내게 되었다. 한 집안에 기독교인과 비교인이 있으면 제사를 따로 지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집안의 어른이 있는 쪽의 제사를 먼저 지내며, 위패는 신상정보를 적는 곳이라는 의미 정도를 남겼다. 이것도 조선 사절단에서는 못내 아쉬운 결과였다는데, 조선식이라면 토론이 격해지면 일반적으로 삼대운동이나 내수린을 통해(..) 토론의 승자를 정하는데, 로마의 성직자들에게 그러면 죽을 수도 있으니(..) 근육의 대화를 나눌 수도 없어 결국 스트레스가 쌓인 사절단은 자기들끼리 내수린을 벌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33] 원래 조정에서는 중인 계급을 예상 포교층으로 잡았지만, 이산해 등 성경을 학문으로 공부하던 선비들이 자의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다. 원 역사에서 서학을 공부하다 스스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유생들과 비슷한 경로. 그런데 근육적으로 개조된 선비들인만큼 세례를 내려준 신부들의 빈약한 근육을 보다 못해 입신체비로 굴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34] 남미계 가톨릭은 현지의 토속 신앙과 적절하게 융합해 토착화되어 성공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을 신자로 만들었고, 서민들 사이에 뿌리 깊게 스며들어 후발 주자인 개신교가 자리를 잡을 틈조차 주지 않고 있다. 입신체비와 유교적 질서가 잘 융합된 대한제국 산하 가톨릭도 같은 전철을 밟았을 것이다.[35] 근육조선 세계관에서는 승려들에게 닭가슴살을 시주한다고 하며, 승려들은 시주받은 고기를 섭취하며 입신체비에 매진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일반적인 요리방법이 아닌 잘게 손질해서 최대한 고기의 식감을 없애고 다른 재료에 섞어 요리한다는 게 차이점. 본디 불교에서는 본인이 섭취할 목적으로 동물을 죽여 고기를 섭취하는 것을 금지하였지, 순수히 시주하기 위해 동물을 죽여 얻은 고기가 아닌 이상 신도들이 시주해준 음식을 가리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다. 불교에서 육식을 금지한 것은 중국 남북조 시대의 양무제 집권 시기에 정해진 것이고, 현대 불교에서도 동자승들에게는 올바른 성장을 위해 육식을 권유하고 있다.[36] 재밌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이렇게 건강하게 입신체비를 한 신부들이 다른 신부들보다 오래 살고, 오래 살면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서 가톨릭 안에도 입신체비가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다는 것.[37] 이는 홍삼을 유럽에 비싸게 팔아먹기 위한 메흐메트 2세의 계획이였다. 다만 그 부작용으로 유럽에서는 악마의 화신으로 취급받는 메흐메트 2세였기에 조선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시점에서 유럽에서는 조선을 악마같은 오스만을 돕는 나라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었다.[38] 원 역사에서의 후추 등 향신료와 비슷한 위치. 콜롬버스가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의 서인도제도가 이 역사 속에서는 지팡구(일본)제도로 이름이 바뀌었다.[39] 조선-스페인 동맹 10주년을 기념하여 1부터 100까지의 번호를 매긴 한정판 100세트.[40] 어찌어찌 물량을 맞추고 여분도 같이 보냈는데 이걸 사려고 부호들이 경쟁을 벌여 경매에 붙였더니 은자 200냥이던 승자기 세트가 1천 냥까지 치솟았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몰이 중이다.[41] 선박제조 기술의 경우 영국이 앞서 있어 나대용이 영국의 기술을 습득하기 전까지 시행착오를 많이 겪기도 하였고, 증기기관은 원 역사에서처럼 제임스 와트가 상용화시킨 것을 대한 제국에서 그를 초빙해 도입하였다고 언급되었다.[42] 1부 외전에서 이에 관해 잠시 짧은 만담이 나오는데, 와트가 증기기관이 있으면 공장에서 12시간 노동이 가능하다고 선전하자 조선 관료가 어떻게 '관료'가 아닌 사람을 8시간 이상 일을 시키냐며 크게 호통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서양과 근육화된 조선의 압도적인 의식 차이를 드러내는 장면. 이후 와트는 조선은 운동에 미친 나라라며 혀를 내두른다.[43] 1부 에필로그에서 주인공이 길거리에 다니는 차들 상당수가 포르셰의 전기차라고 언급한 걸 봐선 독일이 아닌 대한 공화국에서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듯 하다.[44] 그 당시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의 문화 자체가 씻으면 병에 걸린다는 믿음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필리핀에서 스페인 선원들이 씻었던 건 안 씻으면 조선측에서 입항 허가를 안 내주니 반강제로 씻었던 것. 이러다보니 신대륙 개척에 나선 유럽인들은 질병 전파의 매개체가 되어 아메리카 대륙 등 개척한 땅에 온갖 질병을 퍼뜨려 내성이 없던 원주민들을 떼죽음으로 몰고가기도 하였다. 권율도 스페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마음같아서는 총으로 쏴죽이고 비료더미에 처박아두고 싶었다고 생각했을 정도.[45]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자면, 2019년까지도 MS-DOS 수준의 텍스트 인터페이스 기반 OS를 메인으로 사용하고 Windows 3.1에 준하는 프로그램을 곁다리로 사용하다가, 2020년에야 겨우 Windows 95 수준의 OS로 방향을 선회한 셈이다.[46] 1부 주인공 왈 은하수 9는 온데간데없고 옴니스 13이냐며 투덜거렸다.[47] 대표적으로 김충선은 1부에서 전쟁 포로로 끌려온 일본인의 후손인데, 그의 집안은 지역에서도 나름 잘나가는 부잣집이고, 할아버지인 김우겸은 외동아들이라 집안을 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관직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60넘은 나이에도 입신체비를 즐기거나, 고니시를 조선식 이름으로 착각하고 고 서방이라고 부르거나, 고니시의 풀네임을 듣고 사람 이름이 세 글자면 됐지 뭔 일곱 글자나 되냐며 투덜대는 등 정신적으론 100% 조선인이다.[48] 피로 따지면 1/8이나 격세유전으로 인해 완연한 서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49] 몽고와 북인들이 연합해서 요동 도적들을 토벌할 때, 전쟁에 대해선 완전 문외한인 북인들은 단순한 함정에도 쉽게 걸렸지만, 함정에 걸렸는데도 힘으로 함정을 씹고 역으로 털어버리는 괴랄한 전투력을 자랑한다. 갈고리나 그물에 걸려도 안 끌려가고 버티고, 조선의 성능 좋은 장비로 어지간한 도적들은 그냥 털어버리며, 무기를 못 쓰게 갈대밭으로 숨으면 맨손으로 뛰어들어 내수린으로 두들겨 팬다.[50] 다만 유적 발굴은 명분일 뿐이고 요동으로 이주하고 싶다는 속뜻이 담겨있는 상소였다. 소빙하기가 다가오면서 기존에 살던 땅이 점점 살기 힘들어져가기 때문.[51] 이 지인상소(?)는 해당화의 작가의 댓글이 말하길 17XX년 좌의정 XXX가 바닥에 떨어져 급사하고 중단되었다고 한다.[52] 일본토벌 후 조선의 군사력을 확인한 명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큐슈 남부를 명에 바쳤고 명에서는 이를 육주성으로 명명하고 2부 중반 시점까지 통치하였다.[53] 다만 일부 큐슈인들은 끝까지 자신들만의 생활을 이어나가며 조선과의 동화를 거부하였고, 근대에 큐슈가 일본으로 반환되면서 대다수의 주민들은 대한 공화국으로 이주할 때 이들은 큐슈에 남았다고 한다.[54] 이 중 윤원형은 고의로 천연두를 퍼뜨려 미주인들을 쫒아내고 사금을 훔치는 등 생물학 테러를 저지르는 미친 짓을 벌이다 암행어사에게 붙잡혀 거열형에 처해졌다.[55] 아파치와 코만치 부족은 처음엔 적대적이였지만 대전사로 선출된 구름 낀 산을 유성룡이 팔씨름으로 꺾으면서 이들 역시 복속하었다.[56] 심지어 서클피트 게임은 대역기를 쓰는 대한공화국 전용 난이도가 따로 있다.[57] 현대 기준으로 '성인 남성' 평균이 3대 200이 안 된다. 여성과 청소년은 포함하지 않은 경우에도 그 정도이니 근육조선 속 현대인들은 현대 한국인들보다 근력이 최소한 2배 이상은 더 높을 것으로 보인다.[58] 원 역사에서는 자기 기량만 믿고 훈련을 게을리하며 폭음을 일삼는 등의 문제로 기량이 들쭉날쭉하였는데 여기서는 체계적인 관리를 받아 본디 타고난 육체가 더욱 발전하여 원 역사를 초월한 기량을 뿜어내었다고 한다.[59] 일례로 개변된 역사의 대한 공화국에서 일반적인 햄버거 세트가 현실의 환율과 비교해 4000원대의 지극히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다.[60] 덕분에 등뼈탕이 원 역사보다 약 400년 일찍 등장하였다.[61] 이때 본래 역사에서는 조선에 융화되지 않고 계속 범죄를 저지른 탓에 천민 취급받던 백정들도 축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한 조정과 수양대군의 노력 덕분에 사회에 완전히 융화되는데 성공하는 선순환이 일어났다.[62] 실제로 근육조선 2부 시점에서는 다른 부위중에서 닭가슴살이 가장 비싸다.[63] 그리고 이 기름에 절여진 음식 역시 조선식 요리법으로 프랑스에 퍼진 바람에 면직물 판매를 위해 프랑스를 방문한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시카고 피자를 먹고 3일 내내 설사를 했다면서 기름에 절여진 미친 요리라고 영국인이 프랑스 요리를 디스하기도 하였다.[64] 드레이크 본인도 영국 요리가 악명이 높다는 건 인정했다.[65] 2부의 주인공인 유성룡이 결혼 후 피골이 상접해가던 중, 몸보신용으로 하늘소 애벌레를 선물받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였고, 율곡 이이는 체질적으로 근육이 잘 붙지 않아 고향 땅의 하늘소 애벌레는 죄다 집어삼켰다고 지나가듯 말하기도 했다.[66] 품종개량 과정 자체는 우연으로 토종 품종인 앉은뱅이 밀 + 피렌체의 예술가들이 들여온 이탈리아 밀 + 오스만 제국에서 이주해 온 농민들이 들여온 터키 레드 밀이 혼합되어 현대의 품종과 유사한 품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67] 애초에 1부의 시간대는 조선 초기라서 수양대군이 뇌졸중으로 골골대던 당시에야 아메리카를 탐사하던 시점이니 감자가 도입되기엔 무리가 있었다.[68] 입신체비장은 그 특성상 땀냄새에 쩔어있기 쉬워서 정향을 담은 주머니를 방향제 삼아 걸어놓았다고 한다.[69] 사실 淚의 발음은 루이고, 뒤에 오므로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아 가루가 맞는 발음이지만 수양대군이 가누라고 밀어붙여서 가누가 정식 이름이 된다.[70] 원래는 특산품의 의미가 없어지는 걸 막기 위해 재배할 수 없도록 수출하기 전에 커피 콩을 볶는데, 이슬람이 정복한 땅 출신 농민들이 메흐메트 2세에게 복수하기 위해 조선으로 보내지면서 몰래 생 커피콩을 숨겨서 가지고 나온다.[71] 죽은 시체가 되살아난 개념의 좀비가 아니라 28일 후와 비슷하게 살아있는 입신체비사들이 어느 과학자가 만든 단백질 보충제를 먹고 좀비가 되었다는 골때리는 스토리다. 여기서 나온 좀비들은 입신체비사의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입신체비로 근육을 키우다 사람을 발견하면 문제의 보충제를 먹이고 동료로 만들던가 단백질 보충을 위해 먹어치우던가 하고, 거울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수양팔근도의 8가지 자세를 취하는 기묘한 좀비가 되었다.[72] 현실 세계에서도 대한민국에서 프로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남기가 상당히 어려운 편이며, 이미 2010년경에 레드오션화가 심하게 진행되어 2015년 난나 작가의 자살 사건이 터지는 등 저변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러스트레이터 숫자 자체는 꽤 되는 편인데, 대한 공화국은 아예 머릿수를 그냥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서브컬처 관련 문화가 전멸한 것이다. 역사 발전 구도를 살펴봤을 때 단순히 일본 애니메이션 계열만 전멸한 것이 아니라 미국 애니메이션 계열도 다 죽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순수 교육용 아동 애니메이션을 제외한다면, 잘해봐야 마블 코믹스DC 코믹스 등의 근육 빵빵한 남정네들이 메인이 되는 슈퍼히어로물 정도나 살아남았을 듯.[73] 센서를 역기에 연결해서 현실의 삼대운동과 동기화해서 즐길 수 있는 물건이며 대한공화국전용 난이도가 있다.[74] 대한 공화국의 41식 전차가 관통력 115mm 점착유탄으로 경사장갑을 채용한 티거 2를 제외하고 한 방에 다 때려잡고 다닌다고 언급되었다. 밸런스 붕괴가 아니라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결과라고 한다.그럼 5~6티어인 셔먼, T-34와 7티어인 판터의 예처럼 티어를 올리면 되는데[75] 현대인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진흥왕 순수비의 치수를 이용해 1미터를 제정하려 하였는데 원 역사보다 400여년이나 일찍 측정하게 되니 400여 년 동안 풍화되어야 할 외곽이 남아있어 오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이를 직감한 유성룡이 오차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유물들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76] 환갑이 다되가서 하루빨리 은퇴하고픈 마음에 상대적으로 작은 유적지를 하나 골라 적당히 발굴하고 돌아가려 했는데 제대로 걸렸던 것.[77] 유럽 석공들이 청계천 공사 중에 기도하는 손을 그렸다가 문종에게 강화도로 거처를 옮기는 처벌을 받는다. 다만 자신들이 다닐 성당 정도는 짓도록 허가받았다. 정식으로 포교가 인정된 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78] 2부에서 유성룡의 어린 시절에 하체단련 겸 공좌(스쿼트) 자세로 모를 심는 유생이나 수차를 돌리는 유생이 등장한다.[79] 이 경험 덕분에 프랑스에 있던 조선 사신단은 반란이 일어났을 때 신속하게 지게를 급조해 짐을 챙겨 탈출할 수 있었다. 짊어진 짐의 무게도 상당한지 나중에 반군 측에서 조선 사신단에게 수레를 제공했는데 수레가 못 버티고 퍼지기까지 한다.[80]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장애인 부양자는 노역을 면제하고 학대하는 자는 엄벌에 처했다.[81] 그러니까 원 역사의 천자총통이 근육조선에서는 유성룡 빙의 초기에는 지자총통이었고 중간에 한단계 더 낮아져 현자총통이 되었다.[82] 원흉은 전생에 즐기던 세계의 전차에 대해서 대충 써놓은 유성룡의 흑역사. 유성룡은 해당 책자를 쓰면서 포병은 군사 중에 으뜸이라던지 곡사포격으로 성벽 등의 엄폐물을 무력화시킬수 있다는 등의 말을 잔뜩 써놓았다.[83] 주변국들이 쓰는 활의 평균 장력이 45kg인데 반해 잉글랜드 장궁은 평균 장력이 약 68kg에 달하는 물건이다. 그렇기에 보통 활처럼 서서 쏘는 게 아니라 바닥에 쭈그려 앉아서 쏘는 모양새가 나온다. 지나치게 강한 활의 장력으로 인해 장궁병들의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골격이 서서히 뒤틀릴 정도였다.[84] 2차대전 참전 초기에는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대전차병기가 모자라서 했던 일이라고 한다. 후에 보급 상태가 나아지면서 이런 일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이 방법으로 40명이 희생해 26대의 전차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고 대전차총검술을 사용한 현실 일본군도 10명이 붙어야 겨우 전차 1대 잡을까말까였다.[85] 원 역사에서는 88mm포의 장갑 관통력과 두터운 장갑으로 유럽 전선에서 상당한 전적을 쌓은 티거가 대한 공화국을 상대로는 자주포의 240mm 포격 세례와 전차의 130mm 포탄을 버텨내질 못해 시가지에서 숨어다니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어쩌다가 지근거리에서 전차 대 전차로 1:1 상황에서 붙어도 티거가 1발 쏠 때 대한 공화국 전차는 2발 쏘는 장전속도를 선보이는지라 티거 승무원들이 저 새끼들은 지 몸을 포신에 쑤셔박아 쏘아대는 거냐며 욕설을 퍼부을 정도.[86] 원 역사의 퍼싱은 중전차였다가 중형전차로 분류 강등되었다. 다만 이러한 분류에는 대한 공화국 군인들의 체격이 타국에 비해 너무 큰 것도 한 몫했다. 우락부락한 근육질들이라 일반적인 사이즈의 전차는 비좁기 짝이 없어서 그렇다고 한다.[87] 대한 공화국 해군과 결전을 벌이다 사망한 에리히 레더의 추측으로, 오랜 적대국인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전력을 남겨두고 유럽까지 보낼 정도면 눈 앞에 보이는 이순신급 전함이 최소 12척은 돼야 한다며 언급하였다.[88] 대한 공화국 군인에 맞춘 크기다 보니 소련군 병사들은 상당히 무거워했다. 그것만 빼면 성능 좋고 쓰기 편해서 애용했지만.[89] 스탈린도 이런 정신나간 보급력을 보고 소련군으론 죽었다 깨어나도 대한 공화국을 이기는 게 불가능하단 걸 깨달았는지, 카틴 학살이 발각되자 겁을 먹어 점령했던 동독을 반환하고 사실상 칩거했다고 한다.[90] 현대에서 "근돼들 근육만 많지 싸움 못하지 않냐." 라는 떡밥을 자주 들었던 수양대군이기에 인정은 하면서도 약이 올라 작정하고 실용적인 훈련법으로서 군용 입신체비를 창안하였다.[91] 현대의 것과 유사한 모양새지만 상투를 틀던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되어 정수리 부분에 살짝 튀어나온 모양새가 되었다.[92] 현대에도 승마는 돈 많이 들기로 유명하고,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라 기병은 요즘으로 치자면 외제차 서너대 굴릴 재력이 되는 부잣집 자식이나 가능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육체적 소양만을 보기 위해 재력이 필요한 기병은 제외한 것[93] 피투(避鬪) 체조도 물론 들어 있다.[94] 우락부락한 근육질이면 유생, 단단하지만 비교적 체격이 작으면 군관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일본인이나 유럽인들은 유생들을 보고 엄청난 무력을 보유한 장수일 것이라 착각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였다.[95] 조총 탄환이 12mm 밖에 안 되는데 보총 탄환은 18mm라고 언급되었다. 작중에서도 보총에 맞는 적들이 사지나 머리가 날아가는 것을 묘사하는 것을 쉽게 볼 수가 있다.[96] 다만 경진만란당시 명나라에서 보총이 사용되기는 했다.[97] 여담으로 마사이족의 숙련된 노병이 사용하는 운총의 개머리판에는 상당수의 킬마크가 새겨져 있었다.[98] 현대의 공격헬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99] 원 역사에서 비격진천뢰를 개발한 사람이다.[100] 스페인이 비격진천뢰를 도입한 결과 원 역사에서는 스페인의 패배로 끝난 칼레 해전이 영국 해군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혀 영국의 해양 진출이 늦춰지게 되었다. 특히나 선박에 접근하여 나포해야 이득을 얻을 수 있는 해적들에게는 함부로 접근했다가 폭사시킬 수 있는 하드카운터로 작용하여 영국 해적의 활동을 위축시키기도 하였다. 심지어 프란시스 드레이크도 도저히 수익이 안나와서 카리브해를 떠나기도 한다.[101] 광철포라고 부르다가 용천포가 정식 명칭이 됐다.[102] 통나무로 하면 속이 비었다고, 무쇠를 들면 나무를 무쇠처럼 보이게 칠했다는 등 속임수로 여겼겠지만 작중에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운동기구 삼아 입신체비를 했기에 어떠한 부정도 못한다.[103] 이는 기존 전쟁의 상식과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엄청난 발견인지라 1부 에필로그 시점에서는 2부에서 일본 수군 및 영국 해적을 박살내며 원 역사 이상으로 전과를 올린 이순신을 제치고 홍윤성이 조선 최고의 무장으로 선정되어 박물관에 관련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104] 다른 곳에 있을 고산족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장정 하나는 살려서 내쫒아 보냈다.[105] 당시 고령의 노신이였던 한확은 무더운 대양도 날씨에 진이 빠져나가는 와중에 성과도 나질 않아서 심신 모두 피폐해가던 중이었다. 이후 상황이 호전되고 대양도의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설탕을 보약 삼아 완전히 회복한다.[106] 유성룡으로 빙의한 김성원이 북한산 순수비의 크기를 기억하고 있어서 미주에서 돌아오기 전에 미주의 위도를 측량하라 시켜서 얻어낸 지구의 둘레를 측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머리 속의 수치에 따라서 계산해서 1m를 맞춘 건데, 정작 북한산 순수비의 크기가 측정된 건 20세기이므로 400여년 동안 풍화되고 떨어져 나갔어야 할 외곽이 보다 두텁게 남아서 8mm의 오차가 생겼다고 한다. 실제로 8월 2일자 에피소드에 이 내용이 나오는데, 별 생각 없이 북한산 순수비를 이용해서 새 단위법을 만드려고 했던 유성룡이 순수비를 다시 한번 만져보고는 바로 그랬다가는 오차가 장난 아닐 거라는 걸 직감하고는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이 아는 것과 비슷한 치수의 석물을 모아서 수치를 대입한다라는 수단을 쓰게 되어, 본의치 않게 유물을 모은 박물관을 만들어야 할 판이 되어버렸다(...) 즉, 꾀를 부리려다 일을 부르고 만 것.[107] 성리학은 숭유억불의 끝판왕이었고, 단기가 재조명되는 것은 현실 역사에서 조선 성종 때 만들어진 동국통감에서 기반하고 있으므로, 입신체비 때문에 역사가 바뀐 작중에서는 단기와 불기 모두 나올 여지 자체가 없다. 더군다나 근육조선 세계관의 조선은 발달한 천문관측 기술로 위도와 경도에 대한 개념이 잘 정립되어 그레고리력에 근접한 자체적인 양력을 꽤나 일찍부터 사용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비슷한 연구과정을 거쳐 거의 같은 규격이 정해진 서력기원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108] 그리고 그 결과 야드파운드법은 거의 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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