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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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제1차 세계 대전 종결과 금본위제로의 복귀 문제
3. 일본의 금본위제와 금해금 논의
4. 과정
5. 농촌경제의 붕괴와 군부 폭주의 기반 형성
6. 일본 정당정치의 붕괴


1. 개요[편집]


금해금(金解禁)은 금 수출 금지의 해제를 뜻하는 경제학적인 일반용어이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적인 고유명사로 사용될 경우 일본 제국 시기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에서 1930년 초에 단행한 금 수출금지 해제결의(쇼와4년 대장성령 제27조) 이후 1931년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에서 결정한 금 수출 재금지 결의(쇼와6년 대장성령 제36조)가 발효되기 전까지의 경제정책을 가리킨다.

일본 제국 전간기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대표되는 정당정치가 군부의 패권주의로 넘어가게 되는 중요한 경제적 사건 중 하나. 초보적인 수준일지라도 그럭저럭 성장하고 있었던 일본의 정당정치는 이 사건으로 국민적 지지를 잃고 군부를 억누르지 못하게 되면서 붕괴하고 만다. 사실 '언젠간 했어야 하는 일'인데 이런저런 일로 지연되다가 실시한 그 시기가 하필이면 대공황과 겹쳐 버리는 바람에 단순히 정책이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국가 막장 테크의 길로 가게 만든 결정적 계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2. 제1차 세계 대전 종결과 금본위제로의 복귀 문제[편집]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다이쇼 버블에 호경기를 누린 일본이였지만, 전후 유럽의 제품이 아시아 시장으로 돌아오면서 1920년 (다이쇼 9년)에는 전후 공황이 발생해, 그것이 종식을 향해 하고 있던 치닫고, 가장 먼저 반동공황(反動恐慌)이 찾아왔다. 유럽이 전화에 휩쓸린 1차세계대전의 반사 이익에 따른 활황이 꺼져갈 무렵인 1920년 봄부터 과열 투자와 물가 폭등, 주가 하락, 예금 인출이 차례로 일어났다. 1923년 9월에는 관동대지진까지 발생해 경제가 더욱 망가졌다. 진재공황(震災恐慌:지진 피해로 인한 공황)이 봉착한 일본 정부는 피해 복구를 위한 어음 할인 지원 형식으로 특별자금을 방출했으나 효과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 재해지의 기업이 발행한 어음을 일본은행이 재할인하여 지진어음으로 한 것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

일부 대형 은행들까지 돌아오는 어음을 막기 힘들다고 호소하자 대장성 장관은 엄살을 부렸다. 야당의 협조를 압박하려고 ‘도쿄와다나베은행(東京渡邊銀行)마저 지금 어음 결제 불능 상태”라고 중의원에서 밝힌 것. 이때가 1927년 3월 14일. 정작 이날 도쿄와다나베은행은 무사히 어음교환결제를 넘겼다. 은행 중역들이 대장성에 찾아가 ‘자금부족으로 어음 결제가 지체돼 휴업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을 뿐 지급 불능은 아니었다.

모두가 쉬쉬했지만 일부 지방은행들이 사실상 휴업 상태였던 상황. 도쿄에서도 은행들이 지불 불능에 빠졌다는 현직 대장성 장관의 폭탄 발언은 금융가에 지진에 버금가는 피해를 안겼다. 이튿날부터 은행마다 예금을 빼가려는 인파가 장사진을 치고 44개 은행이 휴업에 들어갔다. 아예 파산하는 은행도 줄을 이었다. 문제의 정경 유착업체인 스스키 상회도 폭탄 발언 3주 뒤에 문을 닫았다. 대만은행도 휴업하고 대출로 연계된 조선은행과 일본은행까지 흔들리는 상황에서 지급정지와 은행 휴업령이 발동됐다. 내각도 물러났다.

전후공황에 진재공황에 쇼와금융공황까지 세 차례 연속으로 'KO펀치'를 맞은 일본경제는 그 상황에서 금에 대한 수출 규제를 풀고 금본위제를 채택(이라 하지만 달리 다른 선택은 없었다)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곧 '긴축'을 의미했다.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많은 기업과 정부 인사들이 반대 의견을 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1929년 6월 5일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의 하마구치 오사치(浜口雄幸) 총재는 한 연설에서 "조속한 금해금은 없다"며 불안해 하는 재계를 보듬었다.

그러나 이는 거짓이었다. 하마구치 총재는 내심 금본위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것이 '대세(大勢)'였고 따라서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한 달 뒤인 1929년 7월 총리 취임 후 그는 일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4개월 뒤인 11월 21일 그는 마침내 금본위제 도입을 천명했고 다음 해인 1930년 1월 11일 금 수출 금지를 해제함으로써 세계 금본위체제에 동참하게 됐다.

일본은 1853년 개국 이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하는 서구 열강 편에 서서 국익을 추구해 왔다. 영국과 미국 역시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견제하고자 일본을 암묵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879년 조선개국, 1894년 청일전쟁, 1905년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은 신흥 강국으로의 부상을 시작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이른바 '협상국' 측에 가담, 전쟁특수를 누리며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본에 준 선물은 대단했다. 엄청난 경제적 성과를 얻어내며 일본은 세계 5대 강국으로 인정받는다. 당연히 일본은 그 지위에 맞는 세계 정치ㆍ경제 시스템 구축에 참여한다. 1920년 출범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주요 재정위원회 회원국이었으며 1930년 설립 예정이었던 국제결제은행(BIS,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에도 주요 출자국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은 무조건 금본위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금본위제도 도입이 이 모든 활동의 전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국제 경제를 좌우하는 열강들은 영국 중심의 고전적 금본위제도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이 금본위제도는 큰 타격을 받았다. 전쟁이 예상보다 장기화되면서 각국은 자국의 금 유출을 의심하였고 결국 금태환(금과 본위 화폐의 교환)의 일시정지, 허가제와 금 수출 금지를 선언하여 금본위제도를 정지시킨 것. 이탈리아는 1914년 8월, 프랑스와 독일은 1915년 7월과 11월에 이를 단행하였고, 당시 세계 경제의 양대 축이었던 미국이 1917년 9월, 영국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19년에야 금 수출 금지를 걸었다. 일본 또한 국제경제의 흐름에 발맞추어 1917년 9월 12일에 대장성령 28호로 금수출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금 수출금지는 어디까지나 전쟁으로 인한 일시적인 것이라는 게 당시의 일반적인 시각이었으며, 실제로 미국은 1919년 7월에 금 수출금지를 해제하였고, 1922년 4월 10일 ~ 5월 19일 동안 개최된 제노바 회의에서 열강 각국은 최대한 빨리 금본위제로 복귀해야 한다고 결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은 1924년, 영국은 1925년 각각 금본위제로 복귀하였다.

1928년 열강 중 일본과 더불어 마지막까지 금 수출금지를 유지하던 프랑스가 금해금을 결정하면서 당시 인정받는 5개 열강(영, 미, 프, 이, 일)과 열강급 2개 국가(독일, 소련) 중 유일하게 일본만이 금 수출금지를 해제하지 않은 국가가 되었고, 그 결과 금 수출을 빨리 해제하라는 국제적인 압력을 받게 된다.

3. 일본의 금본위제와 금해금 논의[편집]


국내외 주요 경제/금융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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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442020,#ffd8d8 1929 ~ 1940년대
대공황

Great Depression
]]
[[대침체|{{{#133040,#cee3f6 2008 ~ 2010년대
대침체

Great Recession
]]
[[대봉쇄|{{{#200420,#d8bfd8 2020 ~ 2023
대봉쇄

Great Lock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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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침체가 정확히 언제 끝났는지는 경제학자나 역사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20세기 이전
(연준 이전)
네덜란드 튤립 투기 파동(1636) · 미시시피 거품(1718) · 남해회사 거품 사태(1720) · 1792년 공황(1792)· 1819년 공황(1819) · 1837년 공황(1837) · 1857년 공황(1857) · 검은 금요일(1869) · 당백전(1866) · 장기불황(1873-1896) · 1907년 은행 패닉(1907)
20세기
(연준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초인플레이션(1919) · 1929년 월가 대폭락(1929) · 대공황(1929-1939) · 쇼와불황(1930) · 석유 파동(1973-1979) · 검은 월요일(1987) · 일본 거품경제 붕괴(1985-) · 닷컴 버블(1995-2001) · 1997년 외환 위기(1997-2001)
2000년대
2002년 가계 신용카드 대출 부실 사태(2002) ·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2007) · 대침체(2008-) · 짐바브웨 초인플레이션(2008-) · 그리스 경제위기(2008-)
2010년대
베네수엘라 초인플레이션과 경제위기(2014) · 2014 브라질 경제위기(2014-2017) · 2015-2016년 중국 증시 폭락(2015-) · 브렉시트 증시 폭락(2016) · 튀르키예 리라화 폭락(2018-) · 아르헨티나 통화 위기(2018-) · 레바논 경제 위기(2019-)
2020년대
대봉쇄(2020-) · 2020년 주가 대폭락(2020) · 2021년 헝다그룹 파산 위기(2021) · 2022년 러시아 경제위기(2022) · 2022년 스리랑카 경제위기(2022) · 코로나 버블(2022) · 2022년 전 세계 물가 폭등(2022) · 레고랜드 사태(2022) · 흥국생명 채권사태(2022) · 실리콘밸리 은행 파산(2023) · 2023년 은행 위기(2023)




일본의 금본위제는 19세기 말에 확립되었다. 첫 시도는 1871년(메이지 4)의 「신화조례」 제정이었는데, 이때 신 화폐단위로 일본 엔을 결정하고 금본위제를 시도하였으나, 경제기반이 약했던 상황이다 보니 정화인 금화의 유출이 계속되면서 은본위제로 전환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인 1897년(메이지 30)부터야 금본위제를 본격적으로 체택하였다. 이때 금태환 비율도 화폐법으로 고정시켰는데, 1엔 = 0.75g이었다. 이 당시 미국에서는 1달러 = 약 1.5g 정도의 교환비를 보였기 때문에 엔과 달러의 교환 비율(환시세)은 1달러 = 약 2엔(정확하게는 100엔=49.85 달러)로 고정되는 고정환율제가 실시되었다. 이것이 일본 경제사에서 소위 말하는 "구 환율평가"(구평가/旧平価)이다.

제노바 회의에서 열강들은 조속한 시간 안에 금본위제로 복귀해야 한다고 결의되었을 때, 일본의 입헌 정우회 정권(하라 타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내각)은 북양군벌에 지원을 하기 위한 차관과 국내에서의 적극적 재정정책을 위해 금해금을 연기하였다. 이는 1차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에 전후불황이 몰아닥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금해금을 연기하는 중에도 무역수지는 적자를 보고 있었고 환시세는 구평가의 그것을 한참 밑돌았다.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해외의 일본 정부 자산을 매각하고 금을 매각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성과는 크지 않았다.

관동 대지진은 문제를 더욱 키웠다. 관동대지진의 복구와 그에 따른 국내경기부양 및 금융 조치가 필요해지면서 금수출해제는 더욱 요원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엔화가치의 하락은 과도한 수입 부담을 불러와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이 금 수출 해제와 긴축정책으로 지진재해 어음을 어떻게 해보려다가 경제공황을 불러와서 적극재정을 추구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성립되기도 하는 등 이 시기 일본은 금 수출 해제라는 과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골머리를 앓았던 상태였다.

1928년 프랑스가 금해금을 결정하면서 5대 열강의 일원 중 금해금을 하지 않은 국가는 일본 밖엔 남지 않게 되었고, 그로 인해 국제적인 압력이 심해졌다. 또한 도쿄, 오사카의 어음교환소와 도쿄 상공회의소에서도 지속적으로 금해금을 결정해 달라는 청원이 이어졌다. 거기다가 1930년 설립을 앞두고 있었던 국제결제은행(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출자국이 되는 조건과 국제연맹 재정위원회 구성국 요건에도 금 수출 해제가 들어가게 되면서 금해금은 일본에게는 피할 수 없는 당면과제가 되었고, 결국 다나카 내각에서도 대장성 재무관을 외국으로 파견하게 된다.

문제는 환시세였다. 구평가의 1달러 = 약 2엔의 교환비는 1920년대 말에 와서는 비현실적인 것이 된 상태였다. 관동 대지진의 여파로 1달러 = 2엔 63전 내외까지 떨어졌던 환시세가 1928년에는 1달러 = 2엔 30전(100엔 = 44달러) 내외까지 올라오긴 하였으나 구평가의 그것과는 여전히 가치 차이가 컸다. 따라서 일본 경제계에서는 과연 구평가로 돌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자체적인 엔화의 평가절하 후 해금해야 한다는 신평가 해금론으로 가야 하는지 논쟁이 벌어졌고, 신평가 해금론 쪽으로 기울게 된다. 그러나 금해금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장작림 폭사사건으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중지되고 민정당의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이 성립된다.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의 재정정책을 관장하는 대장대신으로는 전 일본은행 총재인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 1869 ~ 1932)[1]가 임명되었다. 이노우에는 이미 앞서 1923년 대장대신을 지냈던 적이 있었다. 본디 해금을 반대했던 그는 금본위제 복귀가 시대의 조류라고 보고 전격적으로 금해금을 결정한다. 그러나 그 교환비는 한참 의론이 모아지던 신평가가 아니라 기존의 구평가를 되돌리자는 구평가 해금이었다.

4. 과정[편집]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은 구평가제로 돌아갈 것을 결의하였으며, 강력한 긴축정책을 추진하였다. 국채의 신규 발행을 3924만 엔 감액하였고 일반회계에선 당초 예산 17억 7356만엔을 9165만엔이나 절약해 낸 것이다. 하마구치 내각은 중일간 평화 외교와 군비축소를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이당시 일본에서 가장 돈을 많이 끌어다 쓰는 게 군부였고 긴축정책과 전쟁은 원래 양립이 불가능하니 강력한 긴축정책을 추진하는 하마구치 내각 입장에서는 이는 지극히 당연한 공약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다나카 내각 시기에 금해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모두가 인식한 시점에서 내각이 바뀌면서 정책이 지연된 동안 대대적인 환투기가 일어났다는 데 있다. 즉 금해금이 지연되는 동안 국내외 은행에서 대량의 엔 매수, 달러 매도를 수행하여 100엔에 43달러 50센트의 환율을 만들었다가 구평가의 100엔 = 49달러 85센트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대량의 엔 매도, 달러 매수를 감행하여 1930년 1월부터 6월까지 단 6개월만에 2억 3000만엔의 금이 국외로 빠져나간 것.[2] 이걸로 일본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와 이노우에 준노스케 대장대신은 구평가제 상태의 금해금을 풀지 않았다. 이는 당시 일본의 심각한 정경유착(관료-군부-재벌)과 그로 인해 나약해진 국제경쟁력을 가진 일본의 산업구조가 1차대전 후의 장기불황을 불러온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여긴 하마구치와 이노우에가 이 기회에 디플레와 재정긴축 조치를 동시에 수행, 문제기업의 정리와 기업의 경영합리화를 유도하여 장기적인 국제경쟁력을 키우고, 일시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국제수지의 균형기능에 따라 회복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큰 오산이었다. 금해금 바로 전해인 1929년, 미국 월스트리트의 갑작스런 주가 폭락(the Wall Street Crash)을 시작으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금해금과 강력한 긴축정책은 끔찍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고, 실제로 대공황이 전세계로 퍼지면서 그렇게 되었다.

미국발 대공황이 일본으로 몰아닥쳤을 때 하마구치 내각은 당시 국제 금융의 중심지로 여겨진 시티 오브 런던만 안정되어 있다면 이 공황은 결국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기고 더 강력한 긴축 정책(14억 5천만 엔까지 세출을 삭감하기로 결정)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건 더 큰 오판이었다. 미국발 대공황에 런던의 시티가 버티다 못해 결국 두 손을 들고 말면서 경제 중심지가 미국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영국을 믿고 긴축 정책을 밀어붙인 하마구치 내각의 경제정책은 공황을 키우는 삽질이 되어버린 것이다.

세계 대공황금해금이 겹치면서 일어난 일본의 불황을 쇼와공황(쇼와불황)이라고 한다.

허나 이러한 관점은 이론의 여지가 매우 매우 많다. 일단 금해금을 비롯한 각국의 금 수출 해제조치가 대공황의 원인이 되었다는 관점은 유서깊은 것이지만, 당장 일본 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대공황에 휩쓸렸다는 점은 설명하지 못한다. 현대에 각국의 금본위제 복귀를 대공황의 주원인으로 꼽는 관점은 사장되거나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여진지 오래다. 당시 화폐가치가 뻥튀기되어 있던 것은 일본 뿐만 아니라 1차대전에서 예산 압박을 받았던 주요 선진국이라면 어디나 그랬던 것이었고 주요 선진국들이 전부 다 뻥튀기되어 있다면 상대적인 관점에선 과대평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대엔 대공황의 원인은 '아직 명확히 모른다'가 정답이며, 이러하게 금해금을 쇼와 공황의 원인으로 보는 관점은 공황이라는 사태의 본질을 오도할 위험이 있다.

5. 농촌경제의 붕괴와 군부 폭주의 기반 형성[편집]


쇼와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곳은 농촌이었다. 당시 일본의 농촌 경제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비단을 만드는 양잠업이었는데, 불황의 직격탄을 맞고 완전히 박살났다. 농촌 경제가 박살이 나면서 소작쟁의가 1931년 이후 급격히 증가하였고, 궁핍한 농가는 먹는 입을 줄이기 위해 딸을 사창가에 팔아가면서 근근히 살아나갔다.

이는 금해금을 주도한 당시의 정당정치에 대한 증오가 농가에서 양산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일본 군부에서 가장 우수한 인적자원으로 여긴게 바로 이 농가의 청년들이었다. 즉 일본 군부에서 우수한 인적자원으로 여기며 징병한 농촌 출신 사병들 사이에 정당정치에 대한 극한의 증오가 만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만주사변으로 시작된 일본 청년 장교진의 폭주를 든든하게 지지한 것은 바로 이 쇼와공황으로 당시의 정당정치를 증오하고 현재의 암울한 상황을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공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병들의 적극적인 협조였다.[3]

물론 농촌경제만 이런 타격을 입은 것이 아니다. 민영공장의 노동 인원지수는 1929년의 91.1에서(100이 max) 1930년에는 82.2, 1931년에는 74.4로 쭉쭉 내려갔고, 실수입 임금지수도 1929년의 103.9에서 1930년의 98.7, 1931년에는 90.7으로 심각한 임금삭감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실업자가 만연하고 실업자가 아니라도 임금이 팍팍 내려가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이 끌어오르는 상태였다는 것. 국가적으로 봐도 일본의 GNP는 1929년의 13,941백만엔에서 1930년엔 11,245백만엔, 1931년에는 10,678백만엔까지 감소하고 주가지수는 1929년의 104.5에서 1930년에는 71.5, 1931년은, 53.0까지 폭락하고 만다. 이는 국민들로 하여금 당시 정부에 대한 큰 불신을 안겨주었고, 만주사변5.15 사건에서 보여주는 군부의 폭주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행하게 되는 주요한 동기가 된다. 만주사변으로 시작된 본격적인 일본 군부의 대륙 침략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적극적인 재정을 하도록 만들었고, 적극재정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나아진 경기는 국민들로 하여금 이 심각한 경제위기에서 정부는 아무것도 안하는데 군부가 열심히 일해서 해결해 준다&해결해 주려 하고 있다는 여론을 형성하면서 대대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한 것.

결과적으로 금해금으로 인해 일본 군부의 폭주가 일어난 기반이자 폭주 증폭의 요소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금해금만으로 군부 폭주가 일어난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6. 일본 정당정치의 붕괴[편집]


1930년 11월 14일,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가 도쿄역에서 저격당한다. 하마구치 총리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회와 귀족원에 출석하다가 상처가 악화되어 1931년 4월 총리직 사임 후 곧 사망한다. 뒤를 이은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은 어떻게든 긴축재정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불황을 타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터지면서 결국 긴축재정은 무의미해지고[4] 만주사변을 국민들이 지지하는데다 만주사변으로 긴축정책이 끝났다고 여긴 은행 및 투기자본이 대거 달러를 매수하는 걸 막지 못하면서 와카쓰키 내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했다가 11월에 금해금을 포기하여 금본위제에서 이탈한 후 총사직으로 내몰린다.

이 상황에서 마지막 원로(일본)로 총리대신 임명권[5]을 갖고 있었던 사이온지 긴모치가 무너져가는 일본 정당정치를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내민 카드가 이누카이 쓰요시. 그러나 심각한 공황 속에서 국민들이 정당정치에 가진 불만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고, 폭주하기 시작한 군부는 전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게 혈맹단 사건. 이는 니치렌종 승려인 이노우에는 12명의 문하생들과 함께 일인 일살로 부패한 원로, 정당과 재벌의 거두를 암살한다는 모토를 지닌 혈맹단을 조직하여 1932년 2월 9일 금해제 추진을 주도한 이노우에 준노스케 전 대장대신을 암살, 3월 5일에는 금해제 당시 달러 매수, 매도 등 투기를 일삼은 것으로 지목된 미츠이 재벌의 단 타쿠마 이사장을 암살하는 일이 벌어진 것. 이는 이 시기 군부뿐만이 아니라 국민 여론 레벨에서 금해제를 주도한 정당정치인 및 관료와 재벌들에 대한 증오가 끓어오르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에 발생한 것이 군부의 폭주와 이를 적극 지지하는 일본 국민들을 상징하는 사건이 1932년 5.15 사건이다. 백주대낮에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암살당하는 사건으로 2차대전 전 일본의 마지막 정당내각은 이 테러사건으로 끝장나고 말았다. 그리고 군부의 폭주는 태평양 전쟁의 끝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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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2년 혈맹단 사건에 휘말려 오누마 쇼우(小沼 正, 1911 ~ 1978)에게 살해당한다.[2] 참고로 이건 금해금 전년도 일본 정부예산의 약 12%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라고 한다.[3] 이런 군부의 폭주는 신음하던 농촌경제에 최악의 결정타를 날린 결과를 낳게된다. 만주사변에 대한 항의로 미국에서 일본산 비단의 수입금지, 일명 Silk boycott이 시작되어, 그 결과 일본의 양잠업은 완전히 붕괴되었다.[4] 이때 와카쓰키 총리가 남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예산에서 특별 군사비를 지출할 필요가 있다."라는 발언은 하마구치, 와카쓰키 내각의 긴축정책이 끝장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발언으로 풀이된다.[5] 당시 총리대신은 원로가 덴노에게 천거하면 그걸 덴노가 추인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