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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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니비사우에 대한 내용은 기니비사우 문서, 적도 기니에 대한 내용은 적도 기니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기니는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대서양의 연안국으로, 수도는 코나크리(Conakry)이다. 참고로 기니(Guinea)는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어로 "흑인의 땅"이라는 의미로, 대항해시대에 백인들이 피부색 검은 원주민이 사는 땅에는 가리지않고 붙였기 때문에 서아프리카에서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 기니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들이 존재한다. 기니비사우, 세네갈, 말리, 코트디부아르,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인접 국가인 기니비사우와 국명이 유사하기 때문에 수도 이름을 따와 기니코나크리(프랑스어: Guinée-Conakry, 영어: Guinea-Conakry)로 불리기도 한다.
국기의 빨강·노랑·초록은 에티오피아와 가나에서 최초로 사용한 범(凡)아프리카 색깔인데, 빨강은 독립투쟁에서 흘린 피를, 노랑은 황금과 태양을, 초록은 농업·삼림·나뭇잎·번영 등을 상징한다.
2. 국기[편집]
2.1. 도안법[편집]
3. 지리[편집]
아프리카 서부의 대서양과 인접해있는 나라로 북서쪽으로 기니비사우, 북쪽으로 세네갈, 서남쪽으로 시에라리온, 남쪽으로 라이베리아, 동북쪽으로 말리, 동남쪽으로 코트디부아르와 인접해있으며 서남쪽 일부는 북대서양과 인접해있다. 중부 내륙 고원 지대는 감비아 강, 세네갈 강, 나이저 강을 비롯한 서아프리카의 주요 강들의 수원지이다.
4. 행정구역[편집]
- 보케주
- 코나크리주
- 파라나주
- 캉칸주
- 킨디아주
- 라베주
- 마무주
- 은제레코레주
5. 인구 및 언어[편집]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13,235,517명이니 한국의 25% 좀 넘는다. 아프리카계 흑인이 대부분으로 풀라족, 만딩카족, 수수족이 주요 인구 구성원이며 그 외에 밤바라인, 소닝케족, 로마족을 포함한 소수 종족이 있다. 과거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공용어는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시골 지역에 가면 아직 원주민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세대가 바뀌고 점점 도시로 이주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특정 언어도 사라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공동체와 집안에서는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만딩카어(Mandingo)는 북부 지역에서, 풀라어(Fulfulde)는 푸타잘롱 지역에서, 수수어(Sosoxui)는 남부 지역과 코나크리 주변에서 많이 쓰인다. 또한, 밤바라어, 소닝케어도 쓰이고 있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면 언어를 이해할 수 있으나, 현지인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를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6. 문화[편집]
6.1. 식문화[편집]
자세한 내용은 기니 요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역사[편집]
역사적으로 유구한 말리·송가이 왕조가 이 땅에 들어섰고, 16세기 풀라인들의 지하드 이후 서서히 이슬람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기니도 세네갈, 감비아와 함께 졸로프 왕국의 일부이기도 했다. 이후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기니는 가나와 더불어 서구에 맞서 독립 투쟁을 활발하게 이어나간 나라였다. 1958년 10월 2일에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독립하였고,[1] 프랑스가 대안으로 내세운 프랑스 공동체에서 탈퇴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샤를 드골 대통령이 프랑스 자본을 전부 철수시키면서 급속히 경제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초대 대통령 아메드 세쿠 투레(Ahmed Sékou Touré)는 소련과의 우호 정책을 취하면서 한편으로는 미국과 서방의 원조와 투자를 계속 받았다.
1984년, 아메드 세쿠 투레가 미국에서 심장 수술을 받던 중에 사망하자 대령이었던 랑사나 콩테(Lansana Conté, 1934년 11월 30일 ~ 2008년 12월 22일)가 대통령이 되어 그나마 투레보다는 온건했다고 평가받긴 해도 24년간 독재정치를 펼쳤다.
2008년 12월 22일, 그가 죽은 뒤 이번에는 대위였던 무사 다디스 카마라(Moussa Dadis Camara, 1964년 1월 1일 ~ )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임시 기니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2009년 9월 28일에 수도 코나크리에서 군사정권에 항의하며 경기장에 모여 항의시위를 하던 사람들을 대규모로 학살하며 전세계적으로 악명을 얻었다.
당시 학살은 매우 잔혹했다고 전해지는데, 대통령 경호원들과 보안군들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거나 최루탄을 투척하는 것은 기본에 총검으로 찌르거나 특히 AK-47 소총을 발포하여 대규모 사망자가 나왔다. 게다가 군인들은 경기장의 문들을 잠가 탈출을 어렵게 해 많은 사람들이 탈출하다가 압사하기도 했으며, 경기장을 빠져나와 도망치는 사람들을 추격하며 총기를 발포하거나 총검, 마체테로 찔렀고, 시민들에게 카마라를 지지하는지 묻고는 아니라고 말하면 즉시 총살했으며, 특히 여성들을 대낮에 공개적으로 강간, 윤간하기도 하여 무려 109명이 강간 피해를 입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날의 학살로 단 하루 만에 5만 명에 달하던 시위대 중 최소 157명이 죽고 1,253명이 다쳤으며 수백 명이 혐의 없이 투옥되었으나, 정부는 '56명이 죽었고 그것도 대부분이 도망치는 시위대에게 짓밟혀 죽은 것이다'라고 허위 발표를 했고, 영안실에 있던 시신들을 빼돌려 암매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학살에 참여한 군대는 사건이 외국에 유포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인 기자의 장비를 뺏고는 부쉈으며, 대놓고 상점을 약탈하기도 했다.[2] 2009년 코나크리 학살과 관련된 휴먼라이츠워치의 자료
카마라는 이 학살 이후 라디오 프랑스 앵테르나쇼날(RFI)와의 인터뷰에서 '이 매우 긴박한 상황에서 국가 원수인 나조차도 군대를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자신은 시위 당시에 자신의 사무실에 있었다며 발포 명령을 내린 사람은 본인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카마라는 그로부터 고작 2개월 뒤인 동년 12월 3일에 측근인 디아키테 중위에 의한 암살 미수 사건을 겪으며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3] 결국 국방장관인 세쿠바 코나테가 임시 대통령직을 이어 받아 1년간 취임했고 2010년에 민정으로 이양하였다.
2010년 선거에서 야당 지도자인 알파 콩데와 전 총리인 디알로가 맞붙어 알파 콩데가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1990년대 말, 이 나라 출신 소년 두 명이 비행기로 벨기에 밀입국을 시도하려다가 얼어죽은 사건이 있었다[4] . 그러나 소년들의 시신이 발견되자마자 바로 매스컴을 타 전세계에 널리 퍼진 이 사건은 정작 기니에는 바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걸작이다. 너무나 가난해서 일간지 하나조차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알래야 알 수가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나라 정부는 예상대로 "별 관심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014년 에볼라 확산으로 인해 오랫동안 특별여행경보가 풀리지 않고 있었다가, 2017년 3월 14일에야 해제되었다. 그리고 2016년 8월 16일에 기니에서는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50만 명의 시위가 발생하였다. #
알파 콩데 대통령이 헌법을 고쳐 3선에 도전하면서 다시 정치적 혼란이 왔다.# 10월 18일에 열린 총선에서 알파 콩데 대통령이 승리했지만#,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발생하고 진압 과정에서 21명이 사망했다.#
11월 7일, 기니 헌법재판소가 알파 콩데의 3선을 확정했다.#
2021년 1월 말에 기니에서 에볼라가 발견된 뒤, 사망자가 4명 발생했다.# 이에 에볼라 유행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에볼라가 발생하자 세계보건기구는 며칠 내로 에볼라 백신 1만 1천 회분을 보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4월 2일에 에볼라 감염자가 발견되면서 에볼라가 확산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2021년 기니·콩고 에볼라 전염 사태 참조.
기니에서 마버그바이러스 감염 사례가 처음 발생했다. #
2021년 9월 5일(현지시간)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2021년 기니 쿠데타 참조.
2022년 2월 27일, 서아프리카 지역블록과 유엔 사절단이 신군정과 대화를 위해 방문했다. #
2022년 2월 28일에 기니 서부의 비인가광산이 무너져 최소 18명이 사망했다.#
2022년 3월 16일, 기니 신정권이 중국이 참여한 세계 최대 미개발 철광석 광산 개발을 중단시켰다.#
2022년 10월 23일, 기니 군정이 민정 이양을 요구하는 시위 속에 2025년에 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
2022년 10월 25일, 서아프리카 기니만 인근 해상에서 한국인 2명이 탄 선박이 해적에게 끌려갔다가 하루 만에 무사히 풀려났다. #
2023년 1월 13일, 기니 공화국은 새로운 국가 브랜드 이미지인 님바(Nimba)를 공개했다. #
8. 정치[편집]
1958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고 아메드 세쿠 투레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1984년까지 강경한 반프랑스 정책을 바탕으로 독재 행각을 벌였는데, 그가 죽자 무사 다디스 카마라가 쿠데타를 일으켜 임시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다른 독재자가 되었다. 2009년 9월 28일에 있던 반정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가 동년 12월 3일 암살미수 사건을 겪으며 사임하였다. 이후 임시 대통령이 된 세쿠바 코나테 국방부 장관은 민정 이양을 승인하였고, 2010년에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화운동가 출신의 알파 콩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1년간 집권하며 독재자가 되었다. 2021년에 마마디 둠부야 특수부대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현재까지도 임시 대통령직을 역임하고 있다.
9. 경제[편집]
알루미늄의 원료가 되는 보크사이트의 주 매장지로 유명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자원이 이 나라에 축복을 가져다 주었느냐면 천만의 말씀이다. 기니는 취약국가지수가 2022년 기준 12위로 상당히 혼란스런 나라인데, 이것도 그나마 불과 12년 전이었던 2010년의 9위에서 3계단 내려갔던 것이다. 그보다 더 위에 있는 나라들의 수준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나라가 얼마나 상태가 안 좋은지 순위만으로도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그리고 보크사이트의 매장량이 많지만, 토지를 기니 정부가 헐값에 사들이면서 지역 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환경파괴 등의 피해가 속출하자 반발한 주민들이 지난해 4월과 9월에 폭동을 일으켰을 정도이다. 관련 기사.
10. 스포츠[편집]
여느 아프리카 국가들답게 축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이나, 정작 나라 사정이 엉망진창이다 보니 실력은 하위권. 나비 케이타가 이 나라 출신이다.[8] 자세한 것은 기니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조.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 204개 참가국 선수단 가운데 항상 처음으로 입장하는 그리스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입장한 국가 선수단이 바로 이 나라 선수단이었다. 당시 참가국 선수단은 개막식 선수단 입장시에 올림픽의 발상지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항상 처음으로 입장하는 것이 관례인 그리스[9] 와 맨 마지막에 입장하는 것이 관례인 개최국(중국), 그 외 IOC가 정한 규칙을 제외하면 중국 간체자로 음차한 국가 이름의 맨 첫글자의 획수 순으로 입장했는데, 기니의 중국어 표기는 几内亚로 맨 첫 글자인 几가 2획으로 다른 국가들보다 간체자 획수 순에서 앞섰기 때문에 기니가 그리스 다음으로 입장했다. 반대로 개최국인 중국을 제외하고 가장 마지막에 입장한 국가는 같은 아프리카 국가인 잠비아였는데, 잠비아 역시 중국식 표기가 赞比亚로 첫글자인 赞의 획수가 16획으로 가장 많았기 때문에 개최국 바로 앞 순서를 배정받아 입장했다. 참고로 잠비아는 알파벳 순으로 나열해도 국명의 첫글자인 Z가 알파벳의 맨 끝글자이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올림픽 개막식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입장하게 된다.
11. 외교[편집]
자세한 내용은 기니/외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 기타[편집]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는 전자비자를 받아 입국할 수 있다. 관광비자는 90일에 80달러, 통과비자는 3일에 50달러로 가격이 다소 센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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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여행경보[1] 참고로 프랑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떠나면서 병원, 학교 등 식민지 시절 만들어놨던 모든 사회기반시설들을 다 부숴버리고 떠났다.6분 10초부터[2] 반면 휴먼라이츠워치에 따르면 야당 지지자들이 무장을 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던 것은 물론, 경기장에서 야당 지지자들에 의해 부상을 입은 보안 요원도 없었다고 한다.[3] 치료를 위해 모로코로 후송됐고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결국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부르키나파소에서 요양 겸 망명했다. 2016년에는 자신의 당인 민주주의와 발전을 위한 애국군 의장직에서도 완전히 물러났으며, 2022년 9월 27일, 즉 2009년의 학살의 13주기가 되기 하루 전에 2009년 학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면서 투옥되었다.[4] 정확히는 아프리카의 참혹한 실상을 유럽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는 마음으로 결행한 것. 실제로 시신에서 자신들 및 아프리카의 실상에 대해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내용의 편지도 발견됐다. 법적으로는 밀입국이 맞지만 아프리카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고자 어린 소년들이 죽음을 자초하면서까지 행동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준 사건이기도 하다.[5] https://en.wikipedia.org/wiki/Economy_of_Guinea [6]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countries_and_dependencies_by_population [7]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countries_by_public_debt [8] 한때 케이타 역시 한국에서 기니에스타와 같은 별명을 가졌지만...2년동안 부진한 모습만 보여줘서 아예 축구 못하는 선수로 낙인찍혔다(...)[9] 참고로 그리스의 중국어 표기는 희랍(希腊)으로 앞글자인 希자가 7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