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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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광국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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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8월 1일 선조에 의해 책록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 (1등)
유 홍
윤근수
황정욱1
수충공성익모광국공신 (2등)
윤두수
윤 섬
윤 형
이후백
한응인
홍성민
홍순언

수충공성광국공신 (3등)
기대승
김 주
류성룡
윤탁연
이산해
이양원
정 철2
최 황
황 림



1 1593년 임해군, 순화군을 보호하지 못한 혐의로 인한 제명, 1624년 인조 때 복권
2 1594년 탄핵으로 인한 제명, 1624년 인조 때 복권, 1691년 정무서 등의 상소로 인한 제명, 1694년 숙종 때 복권




이름
기대승(奇大升)
출생
1527년 11월 18일
전라도 광주목 소고룡면 송현동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1]
사망
1572년 11월 1일 (향년 44세)
전라도 고부군
(현 전라북도 정읍시)
본관
행주 기씨[2]

명언(明彦)

고봉(高峰)[3] 또는 존재(存齋)
시호
문헌(文憲)

1. 개요
2. 일생
2.1. 성장 배경
2.2. 출세가도
2.3. 유교사상에 대한 업적
2.4. 사망
3. 여담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신. 이황과의 사단칠정논변으로 유명하다.

2. 일생[편집]


1527년 11월 18일 전라도 광주목 소고룡면 송현동(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아버지 기진(奇進, 1487 ~ 1555)과 어머니 진주 강씨 강영수(姜永壽)의 딸(1501 ~ 1534)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2.1. 성장 배경[편집]


고봉전서에 수록된 고봉선생연보(高峯先生年譜)에 기대승의 행주 기씨 선조들은 대대로 한성부에 살았으나, 기대승의 아버지 물재(勿齋) 기진(奇進, 1487 ~ 1555)은 동생 기준(奇遵, 1492 ~ 1521)이 논죄를 당해 자결한 뒤로 출세에 대한 뜻을 접고, 어머니마저 이른 나이에 별세하자 복제(服制)가 끝난 뒤 곧 광주로 낙향하여 살았으므로 기대승이 광주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실제로 기진은 한성부 청파 만리현 출신이다.

5세, 6세 때 침착하고 묵직함이 성인과 같았고 1533년에는 글 공부를 부지런히 했고 1534년에 어머니가 죽자 매우 슬퍼했으며, 3년상을 마치자 향리의 서당에 나아가 글을 배웠고 총명해 기억을 잘하면서 여러 아이들이 배우는 것까지 통달했다.

시를 지으면 남들을 놀라게 했고 물재공(기대승의 부친 기진(奇進)의 호 '물재'(勿齋)를 높여 부른 호칭)의 훈계하는 글이 있어 마음에 두어 종사했으며, 자신을 위하는 학문의 뜻을 두어 과거 공부는 멸시했다. 중종, 인종이 훙서(薨逝)하자 베옷을 입고 제사를 지냈으며,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음식을 폐하고 눈물을 흘렸다.


2.2. 출세가도[편집]


1549년(명종 4) 식년시 생원시·진사시 양시에 각각 2등 15위, 2등 17위로 입격하여 그 명성이 사림에 드러날 정도로 문장은 그를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 이어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합격했으나, 복재 기준(奇遵)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시험관 윤원형이 그를 시기해 고의로 퇴출시켰다. 1555년에 아버지 물재공(勿齋公)이 사망하자 여묘 살이를 하고, 1557년에는 주자대전을 발췌해 주자문록 3권을 편찬했다.


2.3. 유교사상에 대한 업적[편집]


1558년 7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일재(一齋) 이항(李恒)을 배알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논하였다. 추만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얻어보았다.

1558년 10월 식년시 문과에 응시, 을과 1위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에 제수되었다. 그달에 서울에 와 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배알하고 사단칠정론(四端七情)에 대해 변론하였다.

1558년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던중 다시 일재(一齋) 이항(李恒)을 배알하고는 전에 의논했던 것을 재차 논하다가 미처 결과에 이르지 못하여, 하서 김인후(金麟厚)를 배알하고 분별하기 어려움을 들어 질문하니, 하서 김인후(金麟厚)는 그의 주장이 옳다하였다.

이후 1559년 1월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편지를 주고 받으며,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 등에 대해 깊이 의심이 나면. 인근에 살던 하서 김인후에게 번번이 나아가 질문하니, 하서 김인후가 이에 대해 세밀한 분석과 변론을 극히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

1559년부터 1566년까지 퇴계 이황과 8년간에 걸쳐 사칠이기논쟁(四七理氣論爭)을 펼쳤는데 이는 조선 유학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1566년 퇴계 이황을 스승으로 모셨다.

1562년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을 지냈으며, 1563년에는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외척이었던 명종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의 주도하에 문외출송(門外黜送) 당했다가, 종형 기대항(奇大恒. 복재 기준 아들)의 상소로 복직하여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2월 검토관이 되어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기대승이 과거를 볼 때 합격한 시문으로 '옛 사람들의 은현(隱見, 숨었다 나타났다 함)과 지업(志業, 지망하는 사업(事業))의 서로 다른 점을 들어보라'라는 것이었는데 그 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실제(失題)

대답하겠습니다.

천지 사이의 한 유생으로 만고의 일을 두루 살펴보매 한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인의 자취를 상상하고 전현의 뜻을 추구하여, 높은 난간에 기대고 경침(警枕)[4]

에서 잠을 깨는 회포를 한번 시원하게 펴 보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사 선생께서 시장(試場)에 책문(策問)을 내시되 특히 고인의 은현(隱見)과 지업(志業)의 서로 다른 점을 들어서 물으셨습니다. 어리석은 소생은 청하건대 그 밝게 물어 주신 질문 가운데 이른바 ‘마음가짐과 일을 행한 자취’의 뜻을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인의 행적을 논할 수 있는 것은 마음과 자취뿐입니다. 행(行)에는 깊고 얕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취로 인하여 드러나고, 자취는 같고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으로 인하여 드러납니다. 대체로 마음이란 일신의 주재(主宰)이며 만사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행이란 마음이 발한 것이요, 자취는 곧 행이 드러나고 마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혹 취향을 같이하면서도 자취의 은현(隱見)이 서로 같지 않은 경우는 의당 그 마음에 근원하여 보면 자취의 같지 않은 것이 저절로 같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자취의 순(順)과 역(逆)이 같지 않고 마음의 고(故)와 생(眚)[5]

이 서로 다른 경우는 의당 그 자취에 근원하고 마음에 근원하여 보면 자취가 순하거나 역하게 된 원인과 마음이 고하거나 생하게 된 원인이 각기 귀착되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서로 같지 않고 자취가 혹 추향(趨向)을 달리 해서 혹은 충효(忠孝)의 자취가 있고 혹은 편정(偏正)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지업(志業)이 다른 것도 또한 원인이 있어 자취가 거기에 붙여진 것으로, 행이 드러나는 것과 마음이 나타나는 것을 가지고 충분히 헤아려 분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마음으로 말하면 사람의 행이 드러난 것이고 자취로 말하면 사람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니, 어찌 마음이 자취의 바탕이 되고 행이 마음의 화응(和應)을 이루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으로 밝으신 물음의 의혹을 절충하고 나아가서 전현들이 논한 말로 증거를 댄다면, 밝으신 물음에 이른바 ‘의심스러운 것이 있다’는 것은 무어 의심할 게 있겠습니까. 밝으신 물음에서 언급한 일을 가지고 아뢰겠습니다.

자방(子房, 장량(張良))은 5세(世) 동안 한(韓)나라에서 상신(相臣)을 지낸 가문의 후예로서, 한나라가 망하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박랑사(博浪沙)에서 진 시황(秦始皇)에게 철퇴를 던졌습니다. 그 계획이 실패하자 하비(下邳) 고을에 잠복해 있으면서 나라의 치욕을 씻을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참다운 임금(한고조(漢高祖) )을 만나 기회를 타서 계책을 결단하여 진나라를 섬멸하고 항우(項羽)를 죽이고 한 고조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원량(元亮 도잠(陶潛) )도 대대로 진(晉)나라의 왕실을 보필한 가문에서 태어나 다시 새 왕조에 몸 굽히기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기노(寄奴 유유(劉裕) )가 한창 탐욕을 부리던 때를 당하여 팽택 영(彭澤令)의 인끈을 내던지고 돌아와 버림으로써 일에 따라 순응하여 진나라의 징사(徵士)[6]

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혹은 세상에 나가서 중요한 모신(謀臣)이 되기도 하고 혹은 은거하여 비좁은 오막살이에 처하기도 하였으니, 그 자취가 이토록 서로 다른데도 고인(古人)을 논하는 자들이 그들을 서로 비교하여 똑같이 보는 것은 그 마음에 근원하였기 때문입니다.

한신(韓信)은 맨 으뜸으로 큰 계책을 세워 패공(沛公 한 고조)을 위해 천하를 평정하였으나, 끝내는 실직(失職)으로 말미암아 앙앙불락(怏怏不樂)하다가 마침내 패역죄에 걸려 살육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욱(荀彧)은 능히 깊은 계책을 결단하여 조조(曹操)를 도와 패업(霸業)을 이룩하였으나, 끝내 구석(九錫)을 받지 말라고 권한 일로 드디어 조조의 뜻을 거슬러 약을 마시고 한(漢)나라에 순절하였습니다.[7]

이와 같이 혹은 거역하여 반도(叛徒)가 되기도 하고 혹은 순종하여 절사(節士)가 되기도 하였으니, 그 자취가 이토록 서로 어긋나는데도 고정(考亭 주희)이 한신을 용서하고 순욱을 거절한 것은 곧 그 마음의 고(故)와 생(眚)에 근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위원(偉元)은 자기 아버지 왕의(王儀)가 죄 없이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통분하고 원망하여 조정에서 아무리 불러도 나가지 않고 앉을 적에도 서쪽을 향해 앉지 않으면서 그 아버지를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였습니다.[8]

그리고 혜소(嵆紹)는 불공대천의 원수를 잊고 사마주(司馬主)[9]를 따라 탕음(蕩陰)의 전장(戰場)에 수행했다가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여 충성을 다하였습니다.[10] 이와 같이 혹은 효도를 하기도 하고 혹은 충성을 하기도 하여 마음과 자취가 각기 다른데,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이겠습니까.

제갈공명은 제왕을 보좌할 만한 재주로 한실(漢室)의 적통(嫡統)을 보좌하여 한(漢)나라의 적을 토벌할 것을 맹세하고 한실을 회복하기를 기약했으나, 구구하게 한쪽 구석에 머물러 있다가 뜻을 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경략(景略 왕맹(王猛) )은 권모술수를 써서 오랑캐 임금에게 벼슬을 하여 이웃 나라들을 차차로 침략하였고, 중국을 향해 호랑이처럼 덤벼들어 갑자기 중국 한가운데 자리를 잡음으로써 거의 패업의 공을 이루었습니다. 이와 같이 혹은 패하여 성공의 단서를 열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능히 강국을 이룩하기도 하였으니, 그 자취가 이토록 서로 현격한 차이가 나는데도 이를 논하는 자들이 무후(武侯 제갈량)만을 존숭하고 왕맹은 배척하여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 것은 곧 그 마음에 편정(偏正)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 사람의 마음가짐이 같지 않음에 따라 그 자취 또한 각기 달라지는 것입니다. 은현(隱見)과 역순(逆順)과 지(志)와 업(業)은 오직 그 행하는 바가 서로 타당함을 달리한 것일 뿐인데, 행에는 깊고 얕은 것이 있고 자취에는 같고 다른 것이 있으니, 진실로 능히 그 마음을 가져서 그 자취를 변석하고 그 자취를 변석하여 그 마음을 밝힌다면 그 같고 다름과 우월하고 졸렬함과 주거나 빼앗는 등의 뜻이 반드시 귀착되는 곳이 있어 백대의 공론을 없애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내가 그들을 헤아리는 데 있어서는 그들의 마음을 바로 이해하고 그들의 자취에 구애되지 않아서 그들의 참뜻을 얻어 내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우선 이상 거론한 몇 사람의 일을 가지고 논해 보겠습니다. 장량은 본디 한(韓)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제(高帝 한 고조)를 따라 자기의 뜻을 달성하였습니다. 비록 횡양군(橫陽君)의 목숨은 연장되지 않았고[11]

마읍(馬邑)의 도읍지는 이미 빈 터가 되어 버렸지만[12], 자신이 한나라를 위하던 뜻은 지도(軹道)에서 진왕 자영(秦王子嬰)이 목에 끈을 매게 하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몹시 추박(追迫)한 일[13]에서 거의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중(關中)에 들어간 이후로는 인간 세속의 일을 떨쳐 버리고 도인(導引)과 벽곡(辟穀)을 하면서[14] 저 팔방의 끝, 구천의 밖에 뜻을 의탁하며 형화(形化)와 시해(尸解) 등의 술수나 논하면서 선인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었으니, 그 뜻이 어떻다 하겠습니까.[15]

도잠은 뜻이 높고 식견이 원대하며 시속을 즐겨 따르지 않았습니다. 마침 종사(宗社)가 위태로운 지경을 당하고 신민(臣民)이 곤궁한 때를 만나 권신(權臣)이 왕명을 제멋대로 거역하여 형세가 장차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날 판이었으니, 비록 한 고조 같은 이를 얻어 그를 따르려고 해도 그때는 영웅호걸이 없었기 때문에 역시 끝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스스로 은거하여 호미를 메고 밭에 나가 김을 매는 것으로 악한 자를 미워하는 뜻을 부쳤고, 자신의 성정을 펴서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불평스러운 기분을 해소하면서 자신의 천진(天眞)을 즐겼으니 그의 절의가 어떻다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상의 두 사람은 비록 자취가 혹은 드러났고 혹은 숨었다 하겠으나 마음은 일찍이 숨거나 드러나는 그런 한계 밖에 초연한 것으로, 그 높은 풍도와 아름다운 운치는 천 년 전의 장량이나 천 년 후의 도잠이 똑같은 것입니다. 더구나 자방(子房)은 끝내 세상에 나가 크게 뜻을 폈지만, 연명(淵明, 도잠)이 세상에 나가지 않은 것은 자신이 의귀(依歸)할 만한 영웅호걸이 없었기 때문이니, 처지를 바꾸어 놓고 보면 다 그렇게 했을 것으로 서로의 마음이 똑같은 것입니다.

한신은 간악한 참소의 구설에 곤경을 당하고,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자신을 보전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사심(邪心)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간교한 속임수가 난무하고 질투가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상황에서 그의 실정을 묻지 않고 그의 정상을 살피지 않은 채 서로 원한 가진 사람의 말 한마디에 의해 결단을 내려 그를 처단하였으니, 이것은 한(漢)나라가 형벌을 잘못 쓴 것입니다.

순욱은 권모술수를 가지고서 도적의 권세를 빌렸습니다. 몸은 한나라 신하이면서 마음은 조조에게 바쳐 스스로 위국(魏國)의 원훈(元勳)이 되려고 하였습니다만, 동소(董昭)가 먼저 그의 계략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거짓 충언을 하였으나 조조가 기뻐하지 않자 그때는 다시 계책을 의탁할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 한나라에 몸을 바쳐 순절함으로써 온 천하 사람을 속여 후세의 명예를 보전하려고 하였으니, 그 마음 씀이 또한 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한신이 반신(叛臣) 같기는 하지만 그 일은 애매모호하고 그 정상은 어떤 환란에 의해 범하게 된 과실에서 나온 것입니다. 게다가 한나라의 과도한 형벌까지 뒤따랐으니 용서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문약(文若 순욱)이 비록 어진 사람인 듯하나 그 일은 은밀하고 그 마음은 흉험하였으며 죽음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하여 엄벌을 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왕부(王裒)는 천륜을 지극히 중하게 생각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통분하게 여긴 나머지 감히 나아가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여 후진을 교육하기만 하였으니, 효도를 충분히 한 것입니다. 혜소(嵇紹)는 정상(情狀)을 용서하여 우생(友生)의 말을 받아들인 끝에 벼슬에 나아가 전일에 있었던 임금에 대한 원한을 풀었으며, 끝내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호위하였으니 충절(忠節)이 충분합니다. 그러나 비록 충과 효를 본디 두 가지로 볼 수 없다고는 하지만 실천이 어버이로 말미암아 시작하는 것이고 보면 어버이를 잊고 원한을 풀어 버리는 것은 진실로 원수를 통분하게 여겨 효성을 다한 왕부만은 못한 것입니다. 다만 혜소가 후일에 충성을 다하여 살신성인한 것만은 또한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갈량은 신야(莘野)에서 농사짓던 이윤(伊尹)[16]

에게 은연중 부합하고, 한 번 조이고 한 번 푸는 것을 법도가 있게 하는 것은 위천(渭川)에서 낚시질하던 강태공(姜太公)[17]과 거의 같았습니다. 게다가 뛰어난 웅지를 분주히 펼쳐 한 세상을 좌우하면서 나라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다가 죽고 난 뒤에야 그쳤으니, 공명(孔明)의 소양(所養)이 어떻습니까. 이에 반해 왕맹은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힌 데 대한 수치심도 없고 신하가 임금을 시해한 상서롭지 못한 일도 잊은 채 구구하게 오랑캐들 틈에 끼어 벼슬하면서 자신의 권모술수를 폈으니, 경략의 마음가짐이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비록 제갈 공명은 겨우 한쪽 구석을 보존하였을 뿐이고 왕맹은 재빠르게 중원을 차지했을지라도 그 의로운 기절과 훌륭한 명성은 결코 같은 등급으로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공명이 대업(大業)의 단서를 열지 못한 것은 천명인지라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가령 하늘이 그에게 좀 더 오래 살게만 해줬더라면 한실을 흥복(興復)시키고 한실의 대업을 열었으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경략이 거의 패업(霸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수(奇數)의 변천을 잘 포착하였고 당시 영걸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영웅이 없어 그런 하찮은 사람이 천하를 얻게 된 것을 저는 일찍이 완 보병(阮步兵)의 말에서 몹시 한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18]

이것이 바로 군자가 성패를 가지고 인품을 논하지 않는 뜻이요, 또한 《춘추(春秋)》에서 융적(戎狄)을 제재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말한다면 사군자(士君子)가 이 세상에 처하는 의리는 반드시 그 도리가 있을 것이고, 사람을 논하는 데는 반드시 그 뜻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세상에 처하는 도리라고 하는가 하면, 아무리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고 현달하여도 도를 떠나지 않아서 쓰이고 버림받음을 시속에 따르지 않으며 나아가고 물러남을 오직 타당한 대로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사람을 논하는 뜻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 사람의 마음에 근원하고 자취에 근원하여 그 역순(逆順)과 편정(偏正)의 실상을 자세하게 조사하여 시비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아, 자취로써 마음을 근원하여 그 실상을 변석하고 마음으로써 자취를 자세히 조사하여 그 기변(機變)에 통달한다면 고인의 은현(隱見)과 지업(志業)의 다른 점, 처심(處心)과 행사(行事)의 자취에 대해서 말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요, 선철(先哲)들의 논의에 대해서도 그 사이에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미 집사의 물으신 뜻을 반복하여 익히 살핀 끝에 그 대강을 이상에서 진술하였습니다.

편의 끝에 또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천하의 선비들이 모두가 훌륭한 재능을 품고서 혼자 스스로 격앙하고 있으니, 누군들 자신이 직설(稷契)[19]

과 같이 되어서 전인(前人)들을 낮게 보아 같은 등급으로 치지 않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공업(功業)이 형세를 달리하고 현사(賢邪)가 추향을 각기 달리함으로써 후인들의 비판을 면치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것은 정(正)으로 내 마음을 함양하지 못하고 한갓 행사의 말단에만 구구하게 마음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은 사나워서 한신과 같은 패역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흉험하여 순욱과 같은 간인이 되기도 하며, 혹은 권모술수를 써서 왕맹과 같은 편벽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에 자방, 원량, 위원, 혜소, 공명만 한 이라도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겠고, 은현과 지업에 있어서 허물이 없지 않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앞에 논했던 몇 사람을 본받아 거기에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고 반드시 뒤에 논했던 몇 사람을 경계 삼아 혹시라도 그와 같이 될까 염려한다면, 필시 세상에 나가거나 은거하는 것이 사리에 타당하게 되어 세도(世道)가 또한 비루한 데로 치닫지 않으리라는 것을 취하는 바입니다.

저는 대체로 일찍이 서사(書史)를 토론하며 마음속으로 그 시비를 헤아리고서 한 시대에 잘 적용되기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도를 밝히고 공을 따지지 않으며, 의리를 밝히고 이익을 꾀하지 않는다.〔明其道 不計其功 正其誼 不謀其利〕”[20]

는 말을 은현(隱見)의 용(用)으로 삼고, “뜻을 얻으면 백성과 더불어 옳은 길로 가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서 몸을 닦아 세상에 드러낸다.〔得志與民由之 不得志修身見於世〕”[21]는 말을 지업(志業)의 실상으로 삼고 있으니, 오직 집사께서는 저의 논을 크게 칭찬하시어 뒤에 논하는 이들로 하여금 오늘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하지 말아 주신다면 후학으로서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답합니다.


옛 현인들을 논하면서 지금 조정에 어디 현인들이 있기는 하냐? 조정에서 정으로 마음을 함양하지 못하니 때문이다라고 비판했으니 과연 윤원형의 원한을 살만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과거에 합격하려면 이 정도는 써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책문[23]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봉교가 되었다가 고과(考課)에 응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벼슬을 깎아 임명되었고 1564년에 사임했다가 수찬에 임명되었으며, 병조 좌랑, 성균관 전적, 직강 등을 했다가 이조 정랑 겸 교서관 교리를 지냈지만 또다시 휴가를 요청해 고향으로 갔고 예조 정랑,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1566년 10월에는 헌납이 되었다가 의정부 검상, 사인으로 승진하고 1567년에는 장령, 사예, 사인, 장령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기대승은 스스로 학문이 성취되지 않았다고 여겨 중요한 관직을 여러 번 맡았지만 항상 한가한 직위를 원했는데, 5월에 홍문관 응교로 부름을 받아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의 사신을 영접하고 전송했다. 명종에게 사화로 죽은 조광조, 이언적을 표창할 것을 상소해 받아들여졌으며, 얼마 안 가서 전한, 직제학 겸 교서원 판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공조 참의, 우승지, 대사간, 좌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시대를 앞서간 워라밸 선호자


2.4. 사망[편집]


1570년 봄에 휴가를 요청해 고향으로 돌아갔고 고마산 남쪽에서 서실을 짓고 살면서 학문에 전념했는데, 제자가 되어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고 대사성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가는 사신으로 임명되었지만 사양했다. 1571년 여름에 홍문관 부제학, 이조 참의 등으로 임명받았지만 거절했고 1572년에는 종계변무의 일로 주청부사에 임명되자 그 일이 중요하다고 여겨 어쩔 수 없이 조정으로 나갔는데, 그 와중에 대사성에 임명되었다가 조정에 들어가자 사임하고 고향 광주로 돌아갔다.

공조 참의, 대사간에 임명된 것도 사양했고 천안군에 이를 때 종기를 앓다가 태인현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졌으며, 함께 가던 김점을 재촉해 김점의 집에 이틀간 머무르다가 사망했다.


3. 여담[편집]



지난번 장필무(張弼武)를 인견하실 때 전교하시기를 '장비(張飛)의 고함에 만군(萬軍)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正史)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삼국지연의(三國志衍義)》에 있다고 들었다.'하였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가 오래 되지 아니하여 소신은 아직 보지 못하였으나, 간혹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망하고 터무니 없는 말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략)

선조실록 3권, 선조 2년 6월 20일 임진 1번째 기사
정사 삼국지에서도 이 장판파 이야기가 비슷하게 있으나, 정사에서는 20여 명을 이끌고 '덤빌테면 덤벼봐라'는 식으로 버텨서 수백~수천 명의 조조군이 감히 추격하지 못하게 하는 정도였고, 연의에서는 깃발과 먼지로 대군이 있는 것처럼 속인 뒤 고함소리로 아예 10만 명의 조조군을 도망가게 한 정도였으니 연의에서 어느 정도 과장한 게 맞다. 이를 두고 장판파 이야기를 허무맹랑하다고 깠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위의 인용문에서도 본인은 아직 보지 못하였고 다만 다른 사람들이 허무맹랑하다고 반응한 것을 언급했을 뿐이다. 또한, 장판파의 장비 이야기가 정사에 없다는 말은 기대승이 한 말이 아니라 선조가 한 말을 기대승이 인용한 것이다. 삼국지연의가 한국에 유입된 것은 대략 16세기 초중반으로 추정하므로, 따끈따끈한(?) 신간의 내용을 두고 토론한 셈이다. 기대승이 '책이 나온 지가 오래되지 않아'라고 표현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실제로는 기대승이 위보다 삼국지를 언급한 내용이 더 많다. 본인은 주변 사람(지인)에게 들었다는데, 어쩌면 본인도 읽고 결말이 마음에 안들어서 기분이 안좋기에 안 읽은 척 하는 걸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사람(본인) 얘기 해줄게#

  • 삼국지연의에 대하여 무뢰(無賴)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잡박(雜駁)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치는 소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대의 꼬장꼬장한 선비인 기대승이 보기에는 격조있는 한시나 경전류와 비교해 잡기소설류가 천박해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삼국지연의는 모종강의 편집전이므로 관우가 승천하는 등의 부분이 있어 허황하고 터무니없다는 평가를 들을 여지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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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정동으로는 임곡동이며, 인근의 광산동과 함께 행주 기씨 집성촌이다.[2] 시조 기자의 126대손, 중시조 기우성의 78대손, 중시조 기순우의 13대손(14세손). [3] 이때문에 고봉선생(高峯先生)이라고도 불린다. 한편 고봉이라는 호는 세거지인 행주, 즉 고양군 인근의 고봉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4] 나무를 공처럼 둥글게 깎아 만든 베개를 말한다. 약간 잠이 들기만 하면 그 목침이 머리에서 빠져나가 바로 깨도록 한 것이다. 사마광(司馬光)이 이 경침을 사용하면서 독서하였다고 한다. 《范太史集 卷36 司馬溫公布衾銘記》[5] 고는 고의적인 것을 뜻하고, 생은 어쩌다 실수로 과오를 범하는 것을 뜻한다.[6]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나아가 벼슬하지 않는,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은사(隱士)를 말한다.[7] 순욱은 후한 헌제(獻帝) 때 조조(曹操) 밑에서 벼슬하여 분무사마(奮武司馬)에 이르렀는데, 뒤에 동소(董昭) 등의 대신(大臣)이 조조가 난리를 평정한 공이 많다는 이유로 구석(九錫)을 하사하고 국공(國公)에 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조조가 이 일에 대해 순욱에게 은밀히 물었는데, 순욱이 충의의 도리에 입각하여 그러한 일은 온당치 못하다는 의견을 개진하자 조조가 불쾌하게 여겼다. 그 뒤에 조조가 유수(濡須)로 진격했을 때 순욱은 병으로 수춘(壽春)에 남아 있다가 울화병에 걸려 죽었다. 《정사 삼국지 三國志 卷10 魏書10 荀彧 裴注》 그러나 《후한서》 권70〈순욱열전(荀彧列傳)〉에는 순욱이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8] 위원은 진(晉)나라 왕부(王裒)의 자이다. 그는 아버지 왕의(王儀)가 진 문제(晉文帝) 때에 사마(司馬)로 재직하면서 직간했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을 슬퍼하여 조정이 벼슬을 주려고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여막에서 지내며 아침 저녁으로 묘소 곁의 측백나무를 잡고 우니 흐르는 눈물에 젖어 나무가 말라 죽었으며, 조정이 있는 서쪽을 향해서 앉지도 않았다고 한다. 《진서(晉書) 卷88 王裒列傳》[9] 진 혜제(晉惠帝)를 말한다. 진나라의 왕실이 사마씨(司馬氏)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10] 혜소는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嵆康)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 혜강이 진문제(文帝) 때 참소를 입어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아버지의 친구인 산도(山濤)의 천거를 받아들여 진무제(武帝) 때에 비서승(祕書丞)이 되었고, 혜제(惠帝) 때에는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으며 탕음(蕩陰)의 싸움에 나가 임금을 호위하다가 순절하였다. 《晉書 卷89 嵆紹列傳》[11] 횡양군은 한(韓)나라의 공자(公子)로 이름은 성(成)이다. 장량(張良)이 항량(項梁)에게 권하여 그를 한왕(韓王)에 봉했으나, 얼마 안 되어 항우(項羽)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사기(史記) 卷93 韓信列傳》[12] 한왕 성(韓王成)이 죽은 뒤에 다시 한왕에 봉해진 한왕 신(韓王信)이 마읍을 도읍으로 정했다. 그러나 흉노(匈奴)의 협박에 못 이겨 그들과 화해를 맺는 한편, 함께 한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속하고 이어 도읍지인 마읍을 가지고 흉노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끝내 한(漢)의 장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史記 卷93 韓信列傳》[13] 한왕 5년에 항우(項羽)는 해하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는데, 군대의 숫자는 적고 군량은 다 떨어진 상태였다. 이에 한(漢)나라 군대와 제후들의 군대가 합세하여 항우를 겹겹으로 에워싼 채 극도로 추격하고 핍박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14] 모두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으로, 도인은 몸과 수족을 굴신(屈伸)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이고, 벽곡은 화식(火食)을 하지 않고 생식을 하는 것이다.[15] 모두 도가의 신선술로, 형화는 형체가 변화한다는 뜻이고, 시해는 몸만 남겨 놓고 혼백이 빠져 나가 버린다는 뜻이다. 두 가지 모두 신선으로 화함을 말한다.[16] 신야는 유신국(有莘國)의 들로 이윤이 이곳에서 농사지으며 살다가 탕왕(湯王)이 세 차례 정중하게 초빙하자 세상에 나와 상(商)나라를 일으켰다.[17] 태공은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을 가리킨다. 그는 위수(渭水) 가의 반계(磻溪)에서 낚시질하다가 주문왕(文王)을 처음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었다. 뒤에 문왕의 아들인 무왕(주)(武王)을 도와서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다.[18] 완 보병은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보병교위(步兵校尉)를 지낸 완적(阮籍)이다. 그는 일찍이 광무산성(廣武山城)에 올라가 초한(楚漢)이 전쟁했던 곳을 바라보며 탄식하기를 “당시에 영웅이 없어 하찮은 사람에게 공명(功名)을 이루게 했다.” 하였다. 《晉書 卷49 阮籍列傳》 [19] (舜) 임금 때 후직(后稷)으로서 농업을 담당한 직(稷)과 사도(司徒)의 직책을 관장한 설(契)을 가리킨다. 명신(名臣)의 대명사이다.[20]한서(漢書)》 권56〈동중서전(董仲舒傳)〉에 나오는 말이다.[21]맹자》〈등문공 하(滕文公下)〉의 “뜻을 얻으면 백성과 더불어 옳은 길로 가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도를 행한다.〔得志 與民由之 不得志 獨行其道〕”는 말과 〈진심 상(盡心上)〉의 “옛사람들은 뜻을 얻으면 은택이 백성에게 더해지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아 세상에 드러난다.〔古之人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修身見於世〕”는 말을 절충하여 쓴 것이다.[22] 원칙상 문과 33명, 무과 28명. 전란시엔 무신을 마구 뽑는 경향이 있어, 인조때는 몇천을 뽑기도 했다.[23] 策問, 전시(殿試, 대과의 마지막 관문으로, 최종 합격자들[22]의 등수를 정하는 시험)의 과목 중 하나. 왕의 질문에 답하는, 요즘의 논술시험에 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