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림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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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라의 제15대 군주. 칭호는 이사금.
제14대 유례 이사금부터 석씨 왕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제16대 흘해 이사금까지 세 명의 자세한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제13대 미추 이사금 이후에는 김씨가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후 석씨 왕실이 무너지며, 김씨가 왕실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석씨 왕실의 계보가 실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림 이사금은 제11대 조분 이사금의 아들, 손자, 증손자라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나이 차이로 보아 아들일 가능성은 적고, 일반적으로 《삼국유사》가 석걸숙을 누락한 것으로 본다.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는 설을 따르면 아버지는 이찬 석걸숙인데 《삼국사기》에는 석걸숙이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는 주장도 함께 싣고 있다.
2. 업적[편집]
300년 정월 왜와 화친하고, 비열홀에 순행해 노인과 빈민들을 위문하며 식량을 하사했다. 비열홀이 현재 비정되고 있는 함경남도 안변군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고 있는데 경상도 지역도 제패하지 못한 3~4세기 신라의 상태에서 그 정도 북쪽까지 올라갈 능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록상으로는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근방인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고, 그 해 음력 3월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왔다고 한다. 다만 낙랑과 대방이 이 시기에 항복해왔다는 기록은 다소 믿기 어렵다. 신빙성을 찾아보겠다고 생각하고 봐도 낙랑과 대방의 항복 기사는 진짜 항복이 아니라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한 수교 요청일 가능성이 높은데[1] 바로 직전에 고구려와 맞대고 있는 지역인 비열홀에 순행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이때 신라가 비열홀까지 갔을 가능성도 드물어서 기사 자체에 의문이 들기도 한다.
307년, 탈해 이사금(제4대)이 '계림'으로 바꿨던 국호를 다시 '신라'로 되돌렸다. 신라로 확정한 것은 후대의 지증왕(제22대)때의 일이다. 서라벌의 음차인 신라, 사로, 사라 등이 왔다갔다하고 있었고 국호를 확정했다는 언급은 지증왕대에 나온다.
기림 이사금의 행적은 동시대의 다른 신라 왕들과 비교해봐도 기이하며, 위와 같이 시기적으로 모순된 기록이 자주 나타나는 것 때문에[2] 미추 이사금(제13대), 유례 이사금(제14대)과 더불어 후대의 기록이 앞당겨졌다는 설도 있는데 구체적으로 기림 이사금이 충주 고구려비(480년 건립 추정)에 나오는 매금 기(忌)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북사》와 《수서》에 기록된 다소 뜬금없는 신라 건국 신화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조위의 장수 관구검과의 비류수 전투에서 패배한 동천왕을 따라 옥저로 이동한 고구려의 유민이 훗날 동천왕이 고구려로 돌아갈 때 돌아가지 않고 남아 세운 나라로, 백제 사람을 왕으로 세웠으며 한 / 예 / 옥저 / 불내에 걸쳐 있다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건국했다고 전한다.
3.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기림 이사금 본기>
一年冬十二月 기림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장흔을 이찬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一月 왜국과 강화를 맺다
三年春二月 비열홀에 순행하다
三年春三月 태백산에 망제를 지내고,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오다
三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七年秋八月 지진이 일어나 샘물이 솟아오르다
七年秋九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年 나라 이름을 다시 신라라 하다
十三年夏五月 죄수들을 사면하다
十三年夏六月 왕이 죽다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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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슷한 사례로 중국 측 사서에 몇 번이고, 현도군에 귀속을 청하는 고구려가 있다. 이것 또한 현대적인 관점의 항복이 아닌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정상적인 외교 강화를 맺은 것으로 본다.[2] 조분 이사금(제11대)의 아들인지, 손자인지, 증손자인지 기록마다 전부 다른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