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벨린 드 사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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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기벨린 드 사브란(Gibelin de Sabran : 약 1045년 ~ 1112년 4월 6일)은 아를(Arles)의 대주교(1080 ~ 1112)와, 교황 대사(1107 ~ 1108), 그리고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1108 ~ 1112)를 역임했다.


2. 생애[편집]


기벨린은 1080년 교황과 황제의 다툼이 극심하던 시절, 아비뇽 공의회에서 아를의 대주교로 지명되었으며, 동시에 아이카드 다를(Aicard d'Arles)은 아를의 대주교직에서 물러난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축복까지 받았지만 아를의 성직자를 위시한 도시 사람들은 아이카드를 상대적으로 더 선호했다. 당시 아를은 교황보다 황제의 입김이 더 센 지역이었고, 아이카드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적대관계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측근이었던 마르세이유[1]의 자작들과 친척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기벨린이 프로방스(Provence)의 백작 베르트랑 1세[2]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를의 대교구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가 아비뇽에서 아를로 접근 할 때 아를의 시민들에 의해 위협을 받았고 결국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했으며, 성난 교황은 아를이라는 도시를 통째로 종교적 국적 이탈의 무정부 도시로 선포해버린다.

기벨린은 수 년간 그의 정당한 자리를 차지하기를 소망하며 기다렸다. 절호의 기회였던 1096년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최초로 십자군 전쟁을 연설하기에 앞서 남부 프랑스를 순회했을 때도 아를을 방문하지 않아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1096년 이후 기벨린은 아이카드가 십자군에 매료되어 성지로 떠나 아를에 대주교가 부재하는 동안에 임시로 대교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아비뇽 교구도 지휘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르바노 2세가 1080년 아를의 시민들을 국적 이탈로 그들을 억압한 판결을 뒤집자 1098년이 되어서야 아를의 대주교를 정식으로 계승했다.

1107년 말, 기벨린은 교황 파스칼 2세의 교황 대사로 임명되어 레반트 지역으로 가기 위해 아를을 떠났다. 그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직에 대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다임베르트 다 피사(Dagoberto da Pisa)는 1102년에 총대주교직에서 파면되어 에브르마르 드 테루안(Evremar de Thérouanne)으로 대체되었다. 이후 로마로 돌아갔던 다임베르트의 항소로 인해 교황 파스탈 2세는 그를 복권을 시켰으나, 성지로 돌아 가기 전에 죽었다. 교황은 이제 에브르마르를 그대로 복직시키려 했지만,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1세(Baudouin I)는 그가 무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벨린이 선택되었다. 그는 에브르마르를 퇴임시켜 카이사레아 (Caesarea)의 대주교로 임명했고 보두앵 1세 자신의 사무직 제의에 따라 그 직책을 받아들였다. 그는 1112년 4월 6일 예룻살렘에서 프로방스로 여행하려 준비하던 중 그곳에서 죽었고, 초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였던 아르눌 드 쇼크(Arnoul de Chocques)가 다시 재임에 성공했다. 기벨린이 성지로 떠나 아를의 대교구는 1115년까지 공석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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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를은 마르세이유 관할권이고 마르세이유는 프로방스의 지방이다.[2] 아이카드의 사촌이지만 교황과 황제의 대립으로 가문이 두 토막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