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폭탄 테러 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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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후미오 총리 폭탄 테러 미수 사건
(きし((ふみ((しゅう(げき((けん[1]
Raid on Fumio Kishida / Saikazaki Bombing[2]


▲ 긴급 체포된 용의자



▲ 폭발 직후 현장

발생 일시
2023년 4월 15일 오전 11시 30분경
발생 장소


와카야마현}}}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사이카자키어항(雑賀崎漁港) 인근)
유형
테러 (미수)
혐의
위력업무방해 (폭탄 테러)[3]
피의자
기무라 류지 / (1998~99년생 / 남 / 24세)
관할
와카야마현 경찰본부
범행 동기
조사 중[4]
피해자
기시다 후미오 (일본국 제100·101대 내각총리대신)
30대 남성 경찰관 1명 부상[5]
70대 어부 부상[6]
1. 개요
2. 사건 전개
2.1. 사건 발생 전 상황
2.2. 사건 발생
2.3. 사건 이후
3.1. 범행 동기
3.2. 범행도구
4. 반응
5. 경호 문제
6. 영향
6.1. 보안 강화
7. 기타
8. 유사 사건



1. 개요[편집]


KBS 뉴스 9의 사건 보도
닛폰 테레비의 사건 보도
2023년 4월 15일 11시 30분경 일본 와카야마현 제1구 보궐선거를 앞두고 후보 지원 유세를 하기 위해 찾아온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게 괴한이 사제 폭탄 테러를 감행했으나 실패해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2. 사건 전개[편집]



2.1. 사건 발생 전 상황[편집]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이날 오전 11시 30분 경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1구 보궐 선거 유세를 위해 시내 어항 단지인 사이카자키교코(雑賀崎漁港, 〒641-0062)를 찾았다.


2.2. 사건 발생[편집]


시찰을 마친 기시다 총리가 연설에 나서려는 순간 한 남성이 은색 통으로 보이는 물체를 연설대를 향해 던졌다. 물체는 그가 자신의 배낭에 담아 준비해 온 파이프 폭탄이었다. 둔탁한 소리에 기시다가 돌아보자 그의 뒤에 있던 경호원이 해당 물체를 발견하고 기시다에게 다가가며 폭탄을 걷어낸 뒤 방탄 가방을 펼쳤다. 용의자가 재빨리 두 번째 폭탄을 던지려고 하였으나 시민들이 그를 저지하였고 경호원이 총리를 대피시켰다.[7]

남성이 투척한 폭탄은 50여초 후 큰 폭발음과 함께 폭발하였다. # 기시다 총리는 폭탄 투척 직후 피신하여 무사했고 이후 와카야마현 경찰본부로 대피하였으며 현지 소방당국의 초기 발표에 따르면 사상자는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나 현지 경찰관 한 명이 왼팔에 봉합수술이 필요한 수준의 부상을 입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와카야마현경 본부로 호송되었다.


2.3. 사건 이후[편집]


13시 06분 예정된 가두연설은 그대로 진행했다. 기시다 총리는 와카야마현 지원 유세를 마친 뒤 치바현으로 이동해 보궐선거 지원 유세를 이어갔다. # 또 범인 체포에 공헌한 어부들에게 전화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와카야마현 경찰에 따르면 폭발의 영향으로 30대 경찰관 남성 1명이 왼팔을 꿰매야 하는 부상을 입었다고 하며, 그 밖에 부상자가 없는지 조사 중이라고 하였다. #

폭탄은 총 2개로 하나는 현장에서 기폭하고 나머지 하나는 기폭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불발을 대비해 2개를 준비한 걸로 추정된다. 한편 폭발물 낙하지점으로부터 약 40m 떨어진 창고 외벽에 직경 5㎝ 정도의 팬 자국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6일부터 선거유세 현장의 보안검색이 강화되었으며 # 용의자의 자택 압수수색이 진행됐다.

17일 8시 40분쯤 용의자는 와카야마 지방검찰청에 보내졌다.

20일, 기시다 후미오를 살해하겠다는 협박성 이메일이 중의원에 접수됐다. #

5월 6일, 화약류 단속법 위반 혐의로 재체포했다.

5월 18일, 정신감정을 받기로 결정했다. #

청중 입장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경찰청 조사 결과가 나왔다. #

9월 6일, 와카야마 검찰로부터 기소되었다. #

3. 용의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기무라 류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체포되는 기무라 류지(24) 용의자.


3.1. 범행 동기[편집]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어 범행 동기는 조사 중인 상태이나 과거의 행적이 밝혀지면서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다.

용의자 기무라 류지는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선거 제도에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는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공탁금을 내지 않았고 연령 제한에 걸려 출마하지 못했다. 이에 그는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피선거권을 30세 이상으로 제한한 것은 평등의 원칙에 위배되는 위헌이라며 고베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고 이에 불복하여 오사카 고등법원에 항소했고 5월경에 2심 판결이 나올 예정이었다. #MBS #YTV #KBS #関西テレビNEWS 해당 소송 중 법원에 제출한 서류에서 기무라는 아베 신조의 국장을 용서받을 수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판하고 아베가 계속 정치가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옛 통일교 같은 컬트 단체와 조직표를 가진 단체가 유착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등 아베 전 총리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으며# 보도 영상 기시다 내각의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을 용서할 수 없다며 아베 및 기시다 등의 자민당 총리들과 내각을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써넣었다. 출처 오사카 고법에 제출한 서류에서도 “나라에서 피선거권을 제한하니까 입후보가 억제되고, 정치가는 국민의 신임을 얻지 않고도 통일교의 조직표로 당선돼 이익을 부당하게 독점하고, 지속적으로 국민에 손해를 끼친다”고 기술했다. #

기무라의 것으로 보이는 트위터 계정에서도 그는 기시다 수상이 아베 신조의 국장에 대해 설명하는 뉴스 기사를 링크한 트윗에서 기시다를 세습 3세 정치인이라 비난하고 민의를 무시하는 인간이 정치인이 되어선 안 된다며 아베 및 기시다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출처(요미우리 신문) TV아사히 보도 연힙뉴스TV 보도

발언을 종합해 보았을 때 용의자 기무라 류지는 아베, 기시다로 대표되는 자민당 세력에 대해 정치적인 이유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가 저지른 폭탄 투척 사건 또한 정치적인 동기에 의한 테러 행위일 가능성이 높다.

법원 소송에 기무라 본인이 제출한 서류에서 "선거공탁제도는 무산정당[8] 내지 무산자(프롤레타리아)의 의회 진출을 억제하는 것을 진정한 목적으로 도입되어 현재까지 그 목적 하에서 존속해 온 것이므로 공공의 이익 확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9]고 적었다.(출처[10]) 종합해 보면 극단적 좌파 성향인 것으로 보인다.

용의자 기무라 류지가 2020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일본 공산당, 사회민주당, 입헌민주당 등 일본의 진보 및 좌파 정당들의 지원을 받아 진보 측 단일 후보로 출마했던 우쓰노미야 겐지를 자신의 변호사로 선임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 우쓰노미야를 통해 일본의 진보주의 세력과 연계하려던 의도로 보인다.


3.2. 범행도구[편집]


용의자가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사제 폭탄
사제 파이프 폭탄으로 알려졌으며 길이는 20cm에서 30cm 정도였다고 현장에 있던 관계자가 증언했다. # 제작 기술이 미숙했던 것인지 투척 후 거의 1분이나 돼서 터진 것을 보면 지연 신관 세팅을 실수한 모양이다. 비록 사람으로 약간 가로막힌 상태였지만 문제의 폭탄이 나름대로 기시다 총리 근처에 떨어졌던 만큼 만약 바닥에 닿자마자 터졌다면 기시다 총리는 부상당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남성에게 파편이 튀어 부상을 당했다.

폭탄 이외 투척한 은색 통 형태의 폭발물과 생김새가 매우 흡사한 또 다른 물체를 소지하고 있었고 경찰 조사를 통해 배낭에 칼도 숨겨 뒀던 것으로 드러났다.

화약은 인터넷으로 구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

4. 반응[편집]


  • 입헌민주당 이즈미 겐타 대표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행위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




5. 경호 문제[편집]


  • 아베 신조 피살 사건이 일어난 지 9개월 만에 또 다시 발생한 전·현직 총리를 겨냥한 테러였다. 시기상으로도 중의원 보궐선거, G7 정상회의를 비롯하여 국내외 차원에서 중요한 정치일정들이 진행 중이던 와중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사건의 심각성이 부각되었다. 또 앞선 아베 총격에서와 유사한 형태로 방어에 실패해 경호기강의 붕괴가 개선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 아베 사건의 교훈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며 현지 전현직 경찰 등 전문가들의 지적이 이어졌고 경호계획의 재검토를 촉구하는 기사도 등장했다. 1 2

  • 범인을 잡는 데 큰 도움을 준 건 바로 옆에 있던 어부였다. 어부가 범인을 파악한 후 기지를 발휘해 손을 결박하고 헤드락을 걸어 버린 덕분에 뒤에 대기 중이던 경호원이 달려와 제압한 뒤 대처할 수 있었다. 현지에서는 범인을 잡은 게 민간인이라는 것에 대해 아베 피살 사건 때처럼 총리급 인물에 대한 경호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비판과 '안전한 일본에 대한 신화가 깨졌다'는 의견이 공감을 얻었다. #[11]

  • 대중 유세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장소 및 인원에 대한 검색과 외곽 경호가 작동하지 않았다. 경호가 제대로 작동됐다면 피의자가 폭탄을 꺼내기 전 기시다 총리를 주시할 때 이미 SP들이 이상을 느끼고 피의자를 감시하고 있어야 했고 거기에 품속에서 명백히 무기로 의심되는 물건을 꺼내는 순간 또는 적어도 투척하는 순간에는 경호원이 범인을 덮치고 방탄판을 펼치는 등의 반응을 했어야 했으나 실제로는 폭탄이 바닥에 떨어진 이후에야 반응하였다. 폭탄이 충격식이었거나 총기를 사용했다면 범인이 무기를 꺼낸 순간 이미 경호대상은 취약 상태에 놓이며, 던지는 행위 자체가 제지 없이 달성된 순간 이미 경호는 실패한 것이기 때문이다.[12] 경호원들은 주변을 살핌과 동시에 주변 인파를 주시하여야 했다.

  • 현장에서는 폭탄 투척 이후 용의자를 체포하면서도 현장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취재진이나 연설을 보러 나온 주민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사건 현장에 달려들었으며 폭탄이 폭발한 후에도 인원 통제나 대피 등과 같은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즉, 폭발의 세기가 더 컸거나 폭발 시간이 더 빨랐다면, 혹은 군중과 같은 불특정 다수도 목표일 경우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범인이 자폭을 기도하거나 현장에 또 다른 범인이 있었다면 추가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아직 기폭되지 않은 폭탄이 있었다.

  • 이 사건 이후에도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현지에서 선거 유세를 이어갔으며, 이어 전용기 편으로 도쿄 국제공항으로 돌아온 뒤에도 치바현으로 이동해 유세를 이어갔는데 # # 이 후속 유세가 과연 적절했는지 의문이 많이 쏟아졌다. 당장 테러범이 한 명이 아닐 수 있고 조직적인 테러 기도였다면 추가 공격 가능성도 있었다. 테러 조직들은 암살의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여러 요원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령 100여년 전에 일어난 사라예보 사건이 첫 저격이 실패한 뒤 다른 범인이 공격에 성공한 케이스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기시다 총리처럼 경호가 뚫린 위험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현지에서 일정을 이어나가다 변을 당했다. 또한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2세 역시 비슷하게 조직적인 테러 위협에 노출되었음에도 바로 피신하지 않았다가 이어진 폭탄 투척에 치명상을 입고 사망한 사례이다.[13] 때문에 만일 범인이 조직적으로 기시다 총리를 노렸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 비슷하게 선거유세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그를 경호하는 미국 시크릿 서비스의 모습이다. 경호원들이 어떻게 다수의 대중 속에서 경호를 펼치는지를 보여주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로, 경호원들은 주변을 무의미하게 살피는 게 아니라 행사에 참석한 참가자들을 주시한다. 그리고 이미 시선이 4~5차례 자신과 마주친다면 그 사람을 주목해 감시한다고 경호원이 이야기한다. 쉬지 않고 관중 전체를 감시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경호를 하면 수상한 인물이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경호원들이 주목하고 있으며 뭔가를 꺼내는 등의 행동을 취하는 순간 곧바로 경호원들은 제지하러 움직인다. 하지만 이 사건 당시의 경호원들은 폭탄이 기시다 총리의 발 끝 1m 거리에 떨어지고 나서야 반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6. 영향[편집]



  • G7 외교장관 회의를 하루 앞두고 일어난 사건으로, 해외 요인 경비에도 비상이 걸렸다. 당장 5월에는 G7 정상회담이 예정되었다.

  • TV 아사히에 따르면 해당 사건 이후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이 기존보다 10.2% 상승한 45.3%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


6.1. 보안 강화[편집]


사건 발생 이후 여야를 가리지 않고 선거 유세장의 보안검색이 강화되었다. 금속탐지기가 설치되었고 수하물 검사가 진행되었다. 인근 건물 옥상에는 경찰이 배치되었다. JR 벳푸역 유세에서는 주변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경찰들이 현장 주변에 5미터 간격으로 배치되었다. 유세에 참여한 현지인들은 강화된 보안검색에 당혹감을 표했다고 보도되었다. #

북한도 이 사건 이후 경호원들의 방식을 맨손에서 검은 가방으로 교체하였다. # 맨손을 통해 옷에 숨겨둔 총으로 제압할 수는 있지만 검은 가방은 방탄용으로도 쓸 수 있기 때문.


7. 기타[편집]


범인을 제압하는 데 기여한 어부는 붉은 셔츠에 검정 바탕·흰 눈 결정체 무늬 조끼를 걸친 도미잡이 어부 니시데 겐고(西出賢吾 54세)[14]와 인터뷰에서도 등장한 데라이 마사미(寺井政見 68세)였다.[15] 두 명이 제압한 후 이케다 가쓰히코(池田勝彦 62세)라는 어부가 한 명 더 가세해 범인의 다리를 잡아 제압했다. 기시다 총리는 사건 이후 직접 어부들에게 전화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16일 어부는 산케이 신문과 인터뷰를 통해 "범인이 물건을 던진 후 또 뭔가 손에 쥐는 행동을 하길래 '이건 안 되겠다' 싶어 제지했다"고 회상했다. 사건 당시 정신 없이 직감적으로 움직였다고 설명했다. 또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총격이 떠올랐다고 밝혔다. 이후 '어항의 아저씨'(漁港のおっちゃん)라고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1234

8. 유사 사건[편집]


  • 아베 신조 피살 사건 - 선거 지원 유세를 위한 가두 연설 중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전현직 총리를 저격했다는 점에서 같다. 당시에는 범인인 야마가미 데쓰야가 범행 도구로 총기를 썼으나 이번에는 폭탄이 사용되었다. 또 이 사건은 미수에 그쳤지만 당시에는 기수, 즉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 송영길 피습 사건 - 총기나 폭탄에 의한 건 아니었지만 집권여당 당대표가 선거 지원 유세를 하는 도중 피습당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범인은 강성 민족주의 성향의 유튜버 표삿갓TV로 구치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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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에서는 "기시다 후미오 습격 사건"이라고 칭한다.[2] 영어 위키백과 문서[3] 긴급체포 당시 와카야마현 경찰이 밝힌 혐의다.[4] 현재 묵비권을 행사 중이다.[5] 왼팔 봉합술이 필요한 부상이라고 한다.[6] 폭발물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파편에 맞아 등에 부상을 입었다.[7] 파란색 옷을 입은 사람 기준으로 왼쪽에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 기시다 총리다. 그리고 기시다 총리의 왼쪽 공간을 잘 보면 어떤 물체가 위에서 떨어지는 걸 볼 수 있는데 그게 폭탄이다.[8] 일본에서 사회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을 의미함.[9] 公選法92条の選挙供託制度は、無産政党ないし無産者の議会への進出を抑制することを真の目的として導入され、現在に至るまでその目的のもとで存続してきたものであるから、公共の利益の確保とは何ら関係がない。[10] 해당 기사의 2번째 페이지에 있는 내용.[11] 사실 이 사건이 아니라도 일본에서는 정치인에 대한 총기 테러가 아베 이전에도 이미 여러 번 있었다.(ex. 1990년 나가사키 시장 총격 사건, 2007년 이토 잇초 나가사키 시장 총격 피살 사건 등)[12] 사건 화면을 보면 대다수의 청중들이 무슨 연예인이라도 온 듯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을 하고 있었고 특별한 제재 또한 없었다. 만일 군중들 중에서 누군가가 촬영기기로 위장한 총기를 들고 촬영하는 척하다가 발사라도 하면 상황 종료다.[13] 한국에서도 1974년 8월 15일 발생했던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당시 육영수 여사가 피격을 당해 실려간 뒤에도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을 계속 이어갔던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박 대통령 개인의 용기를 보여준 사례라고 미화되기도 하지만 만에 하나 암살자가 문세광 외에 추가로 대기한 상태였다면 자칫 박 대통령마저 위험을 피하기 어려웠을, 경호 측면에서는 바람직하다고 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14] 처음 헤드락을 건 어부.[15] 범인의 한쪽 팔을 끌어 잡아서 머리를 눌러 제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