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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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나사우 왕조 제2대 대공
기욤 4세
Wëllem IV., Groussherzog vu Lëtzebuerg

파일:William_IV_Grand_Duke_of_Luxembourg.jpg
출생
1852년 4월 22일
나사우 공국 비브리히 성
사망
1912년 2월 25일 (향년 59세)
룩셈부르크 베르크 성
재위기간
룩셈부르크 대공
1905년 11월 17일 ~ 1912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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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
이름
기욤 알렉상드르 드 나사우
(Guillaume Alexandre de Nassau)
아버지
아돌프
어머니
안할트데사우의 아델하이트 마리
형제자매
힐다
배우자
포르투갈의 마리아 아나 공주 (1893년 결혼)
자녀
마리아델라이드, 샤를로트, 힐다, 안토니아, 엘리자베트, 소피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2대 룩셈부르크 대공.

2. 생애[편집]


아버지 아돌프독일 연방 나사우 공국의 공작이던 시절에 태어났다. 하지만 나사우 공국이 1866년에 일어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원했다가 프로이센 왕국의 눈 밖에 나 오스트리아가 패전한 이후 프로이센 왕국에게 흡수, 멸망 당하면서 12살 나이에 모국을 잃었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 복무했다.

1884년, 네덜란드의 왕세자 겸 룩셈부르크의 대공세자였던 알렉산데르 왕세자가 사망하자 네덜란드 국왕이자 룩셈부르크 대공이었던 빌럼 3세에겐 적자인 아들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이로 인해 빌럼 3세는 살리카법이 적용되는 룩셈부르크 대공위를 딸인 빌헬미나에게 물려줄 수 없게 되자[1], 자신의 37촌 조카[2]인 기욤 4세의 아버지 아돌프 공이 어부지리로 추정상속인이 되면서 1888년에 전역했다.

1890년 부친이 룩셈부르크 대공위를 승계하면서 38살에 대공세자가 되었다. 이후 1893년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미겔 1세[3]의 딸 마리아 아나와 결혼했다. 본래 아돌프 대공과 기욤 4세가 속한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개신교 신자로, 당장 기욤 4세 본인도 개신교도였다. 하지만 아버지 아돌프 대공이 새로 대공위를 승계한 룩셈부르크 국민들은 거의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였다. 이로 인해 룩셈부르크의 후계자인 기욤이 가톨릭 왕가에서 신부를 들이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후계자도 가톨릭 신자로 키우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마리아 아나와 결혼한 이후 태어난 자녀 6명이 모두 딸이었다.

1905년에 아버지 아돌프 대공이 서거하자 그의 뒤를 이어 룩셈부르크 대공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다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 구성원들은 사망하거나 귀천상혼한 인원들밖에 남지않게 되었고, 기욤 4세 역시 부인 마리아 아나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새로 낳을 희망도 없었다. 결국 기욤 4세는 귀천상혼으로 파생한 가문인 메렌부르크 백작가(Graf von Merenberg)[4] 대신에, 망국의 군주였던 자신의 아버지를 룩셈부르크 대공으로 만들어 준 살리카법을 폐지하고 1907년에 맏딸 마리아델라이드를 후계자로 정했다.

하지만 메렌부르크 백작가가 룩셈부르크 대공위를 계승하지 못한 결정적 원인은 메렌부르크 백작의 아내 나탈리아 푸쉬키나 때문이였다. 푸쉬키나라는 성씨에서 짐작하겠지만, 나탈리아는 바로 흑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딸이었다. 즉, 메렌부르크 백작가로 대공위가 넘어가면 흑인 혼혈이 대공이 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었다.[5] 이러한 이유 때문에 메렌부르크 백작가가 대공위를 계승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나탈리아의 집안은 러시아에서 남작보다 아래로 취급되는 dvoryanin으로 순혈 유럽인이라도 대를 이은 귀천상혼으로 판명되었을테니 그들의 후손이 대공위를 계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08년부터 병이 악화되어 대공비 마리아 아나를 섭정으로 세웠으며,[6] 1912년에 서거하면서 맏딸 마리아델라이드가 대공위를 이었다.


3. 여담[편집]


  • 현재까지의 룩셈부르크 대공들 중 재위 중에 사망한 마지막 대공이다.[7]

  • 역대 룩셈부르크 대공들 중 나무위키에 마지막으로 등재되었다.

  •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와 그 사촌인 루트비히 3세[8][9], 그리스의 올가 왕비[10]와 6촌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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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덜란드 왕위는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아 순조롭게 물려받을 수 있었다.[2] 이 부분 세계 신기록이다.[3] 포르투갈 내전에서 패해 쫓겨났다.[4] 이 가문도 1965년에 남계가 단절된다.[5]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나탈리아 푸쉬키나의 흑인 피는 1/8이었다. 따라서 메렌부르크가에서 나올 '흑인 혼혈 대공'의 흑인 피는 1/16이 된다.[6] 이때는 마리아델라이드가 아직 미성년자였다.[7] 마리아델라이드 - 생전 퇴위, 샤를로트 - 생전 퇴위, 장 - 생전 퇴위, 앙리 - 2023년 현재 재임 중[8] 루트비히 2세와 루트비히 3세의 할머니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테레제(루트비히 1세의 왕비)가 기욤 4세의 할머니 나사우 공작부인 루이제의 언니다.[9] 기욤 4세의 4녀 안토니아는 루트비히 3세의 장남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의 두번째 부인이다. 즉, 안토니아와 루프레히트는 8촌 지간.[10] 올가 왕비의 외조부인 작센알텐부르크 공작 요제프가 기욤 4세의 할머니 루이제, 루트비히 2세와 루트비히 3세의 할머니 테레제의 오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