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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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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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길선주 선생.jpg

출생
1868년 3월 15일
평안남도 안주군 성내 후장동
사망
1935년 11월 26일 (향년 67세)
평안남도 강서군
묘소
서장대(西章臺)
국적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
종교
개신교(장로회)
본관
해평 길씨
별칭
자(字)는 윤열(潤悅)
호(號)는 영계(靈溪)
직업
독립운동가, 목사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도사, 기독교에 입문하다
2.4. 민족운동
2.5. 종말신앙론
2.6. 사망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장로회 목사.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1868년 3월 15일 평안남도 안주군 읍내면 후장동에서 길봉순(吉鳳順)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길재의 19대 손으로, 유교적 전통을 신봉하는 평안북도 영변군해평 길씨 가문에 속했다. 4살 때 어머니로부터 한학을 수학한 그는 7살 때 정씨 성의 학자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으며, 11살 때 16살의 처녀 신선행과 결혼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걸출한 골격을 갖췄고 힘이 매우 셌으며 또래들에 비해 총명했다. 12살 때 '일은 아니 하는데 옷상자에 옷이 가득하네'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서당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다. 이 시는 일상적인 농가의 모습을 다루고 있지만, 그 내면엔 가부장 제도 아래에서 고통받는 여인들의 한이 담겨 있다는 평을 받는다. 이는 그가 기생 첩 때문에 고통받는 어머니와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어린 지아비를 섬기며 시집살이를 하는 아내의 처지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882년 부친이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안주 노강첨사(老江僉事)로 부임하게 되자, 길선주는 부친을 따라가 상서호(上西湖)의 장씨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또한 그는 평안도 안주본부 초인 직을 맡으면서 <칼이 다하니 비수가 나타난다>라는 제목의 한시를 지었다. 이 시는 "강호에 검광이 빛나니 찬란한 아침에 백제의 아들에게 닿는다"라고 서술하며, 가을을 주재하는 서편의 신인 백제(白濟)의 아들과 자신을 연결시킴으로서 사회의 암울한 정세 속에서 장부의 기길을 섬광처럼 번뜩이고 싶은 그의 심정이 담겨있다는 평을 받는다.

1885년, 인근에 살던 불량배 윤학영 형제가 야음을 틈타 길선주의 집에 난입해 재물을 빼앗고 이를 막으려던 길선주를 난타해 거의 죽일 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부친은 가족을 데리고 평양으로 이주했다가 얼마 후 병에 걸려 퇴직했다. 길선주는 부친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꾸려야 했기에 남의 집 가게에서 점원 노릇을 하며 장사를 배운 뒤 상점을 운영했지만 1년만에 빚만 지고 결국 문을 닫았다. 결국 그는 실패를 거듭하는 삶에 회의를 느끼고 집을 떠나 각지를 정처없이 떠돌았다.


2.2. 도사, 기독교에 입문하다[편집]


길선주는 집을 떠난 뒤 각지를 정처없이 떠돌다가 도교의 일종인 관성교(關聖敎)에 빠져들었다. 관성교는 관우를 모시는 종교로, <각세진경(覺世眞經)>과 <명성경(明聖經)>을 경전으로 삼고 관성제군보서고(關聖帝君寶書誥)를 암송하며 관우를 천신으로 떠받드는 도교의 분파다. 길선주는 매일 '관성제군보서고'를 암송하면서 환성을 보고, 김순호에게서 산신 차력 주문을 받아 일주일간 외우면서 심신이 유쾌해지는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수십년간 <옥경(玉經)>을 연구한 장득한으로부터 구령삼정(九靈三精) 주송법과 삼령(三靈) 주문 등을 배우고 평양 대성산에 들어가 밤낮으로 주문을 외우며 수련했다. 그는 21일, 49일, 혹은 100일 수련 기간 동안 금식기도, 철야기도, 통성기도, 새벽기도를 했다. 또한 운동과 단약 복용을 통한 차력으로 몸을 단련했으며, 정좌법, 도인법, 호흡법을 체득했다. 아들 길진경이 저술한 <영계 길선주>에 따르면, 길선주는 이러한 수행을 한 결과 웬만한 냇물은 건너뛰고 목침을 주먹으로 부수며 정좌한 채 공중에 부양하는 등 초인적 힘을 얻었으며 하늘의 영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게도 도교 주문을 가르치고 한밤에 함께 경건히 기도했으며, 영웅을 생산하기 위한 부부 생활을 고안했다.

그는 이렇게 8년동안 이러한 혹독한 수행을 거듭하면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수행을 계속했고, 곧 선도에 통달해 사람들로부터 '길 장수', '길 도인'이라 불리며 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했다. 이후 그는 도인들을 만나 토론하기를 즐겼지만, 지나친 수행으로 인해 시력이 약해지고 배탈에 시달리는 등 몸이 갈수록 허약해졌다. 게다가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한 뒤 피난민들과 함께 전화를 피하던 그는 도탄에 빠진 민중을 도와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관성교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이후 그는 성천 영대산에 1년 이상 은거하며 도교를 가르치고 수련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도교에는 민족을 구원할 만한 힘이 미약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1896년 봄 평양에 돌아온 그는 자신의 친구 김종섭이 예수교 신자가 된 것에 경악했다. 길선주와 가까이 지냈던 제임스 S. 게일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길선주가 김종섭에게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수련하던 도를 버렸단 말인가?"라고 꾸짖자, 김종섭은 "우리가 찾던 것을 예수교에서 찾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길선주는 서양 종교는 거짓이며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단정했다. 이에 김종섭은 <그리스도 신문>을 주고 기독교 신자가 될 것을 권유했지만, 길선주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김종섭이 나중에 전해준 <이선생전>을 읽고 한 아편 중독자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진실한 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뒤이어 <장원량우상론>과 천로역정을 읽고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품기 시작했다. 다만 그는 기독교 안에 다소 진리가 있다는 건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그 동안 삼령 주문과 구령 주문으로 늘 기도하며 삼천존(三天尊)의 성호를 높였는데, 이는 예수교의 삼위일체 신과 다름이 없으므로 굳이 예수교의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천로역정이 감동적이라는 것도 인정했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수 없었고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차츰 기독교와 도교 사이에서 번뇌했다. 길진경의 <영계 길선주>에 따르면, 김종섭이 예수교의 천부(天父)인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권하자, 길선주가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지존막대하신 상제님을 어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러자 김종섭이 아래와 같이 답했다고 한다.

그러면 상제님이라고 부르고 상제께 기도해보라.


길선주는 훗날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그(김종섭)의 모든 행동, 그가 앉고 일어서는 것, 잠자리에 드는 것, 걷는 것을 눈에 불을 켜고 주시했다. 여러 날이 지나면서 공포가 엄습했는데, 그가 나를 이긴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옛 방법인 기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길선주는 1896년 가을에 이른 새벽마다 겸손히 상제께 기도했다. 그는 예수교가 진리인지,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인지 상제께 묻는 순수한 진리 탐구로서의 기도를 '예수의 이름'으로 드렸다. 그는 훗날 게일 선교사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점차 나는 그렇게 완강히 붙잡고 있던 밧줄을 놓기 시작했고, 밧줄은 한 가닥씩 풀렸으며, 내 영혼은 심연 위의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이어 상실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그 고뇌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었다. 일곱 째 되던 날 지치고 절망한 나는 반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나는 갑자기 “길선주야!”라고 크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고, 그 소리는 반복해서 울렸다. 어리둥절한 채로 일어나 앉아 있는데 내 앞에 신비한 무엇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방 자체가 변형되었고 영광스러운 빛이 내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내 영혼에 안식과 용서와 애정이 자리 잡았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이를 증명했다. 지금 와서 뒤돌아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 얼마나 기뻤던가! 모든 기도가 응답되고, 내가 수 년 간 고뇌하며 찾았던 하나님을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 죄 사함을 받고 용서받은 자가 되어 마음이 편했다.


그 자신이 게일 선교사에게 고백한 바에 따르면, 길선주는 이후 사도 바울처럼 얼마 동안 맹인이 되었다가 시력이 도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기독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기로 결심한 그는 1897년 8월 15일 28명의 교인들과 함께 장대현(章臺峴) 교회에서 그레엄 리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2.3. 1907년 평양 대부흥[편집]


길선주는 기독교 신자가 된 뒤 먼저 상투를 자르고 온 가족을 전도했다. 또 금식과 철야기도에 정진했는데, 한번 손에 성경을 쥐면 놓지 않을 정도로 열중했다. 그리고 1898년 봄에 영수로 선출, 임명받았으며, 1902년 장대현 교회 조사(助事) 겸 황해, 평안 2개도의 조사에 취임했다. 또한 1903년 봄에는 모펫(마포삼열) 선교사가 평양에 세운 평양신학교에 입학했고 1907년 졸업하여 7명의 동료와 함께 평양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장대현 교회 목사가 되었다.

한편, 길선주는 자신이 과거에 산 속에서 수행한 방식을 교회에 다닐 때도 접목시켰다. 그는 새벽, 정오, 밤에 반드시 기도했고, 개인적으로 하던 새벽 기도를 교회 신자들 전원에게도 수행할 것을 권고했다. 사실 그가 새벽 기도를 교회에 처음 도입한 건 아니었다. 첫 새벽기도회는 1898년 평양에서 가까운 황해도의 수안군 강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초보적 형태로 시작되었고, 휘트모어와 리 목사는 이들의 신앙적 열성이 대단했다고 보고했다.

이 사람들의 열심은 놀랍다. 이 사경회에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아침 해가 올라오기 훨씬 전에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공부하는 소리가 옆방에서 들렸다. 같은 찬송들을 하루 종일 밤늦게까지 들을 수 있다. 모든 비용은 본토인 그리스도인들이 부담했는데, 선교사들의 한국인 수행자들의 식비까지 부담했다.


길선주가 한 일은 이 새벽기도를 교회의 정식 프로그램으로 도입하고 교회의 모든 신도들에게 새벽 기도에 참여할 것을 권장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집 벽에 작은 통을 달아 놓고 적은 돈이라도 받아 오면 늘 십일조를 떼어 넣었고, 주일 아침에 전 가족이 통 주변에 모여 함께 기도한 후 돈을 꺼내 각자 연보할 돈을 받아 교회로 갔다. 길선주는 이 통을 ‘희락과 즐거움의 통’이라고 불렀다. 언제나 주님을 섬기기 위한 돈이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흉내만 내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외형적 신앙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1906년 2월 15일 <그리스도신문>에서 축음기에서 나는 기계적 소리나 앵무새처럼 뜻도 모르고 스스로 생각지 않고 하는 말을 예로 들고, 성령을 받지 못했으면서 학문과 말만 배워서 연설을 하거나 신문상에 논설을 하는 자는 실로 앵무새나 다름없다며, 성령을 받은 신령한 자만이 언행이 일치하는 성실한 인격자로 봤다.

길선주는 1904년부터 1906년까지 감리교 선교사들이 주도한 부흥운동이 개성과 원산, 서울에서 성공한 것을 보고 평양에서도 대부흥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07년 1월 14일부터 시작된 평양 대부흥 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매일 저녁 부흥 집회가 진행되던 중, 1월 20일 주일 오후 예배 때 행한 그의 설교는 회중들의 회개를 불러 일으켰다. 그레엄 리 선교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주일 오전 중앙 교회[장대현교회]에서 우리는 평소대로 성경 공부반을 열었다. 오후에 다른 위대한 능력이 나타났다. 길선주가 설교했는데 그는 매우 생생한 예화로 설교를 마감했다. 그는 한 손으로 밧줄을 잡고 한 손을 밧줄로 허리에 묶은 뒤, 한 영수에게 밧줄을 잡아 달라고 부탁하고, 매큔에게는 설교단에 서서 자신을 오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길 씨는 이것은 죄에 묶인 죄인이 밧줄을 끊고 하나님께 가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은 자처럼 나아가려고 하면서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마침내 손에서 밧줄 을 풀고 강단을 가로질러 달려가, 그와 매큔은 두 팔을 벌려 서로 끌어안았다. (중략) 길씨가 밧줄을 풀려고 할 때 회중은 숨을 죽였다. 그러다가 손이 풀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포옹했을 때 그 효과는 형용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즉시 일어나서 죄를 고백하겠다고 외쳤고, 다른 사람들은 울면서 너무나 괴로워서 몸부림치면서 바닥에 뒹굴었다. 길 씨는 그들에게 집에 가서 그들의 죄를 사람들에게 말하고 저녁 집회에 다시 오라고 말했다.


김양선 목사의 저작 <한국기독교사연구>에 따르면, 당시 예배에 참석했던 정닉노 장로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한다.

길선주 목사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 찬 얼굴이었고 순결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다. 그는 길 목사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눈이 소경이어서 나를 보지 못하였을 터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어버릴 수 있고 도피할 수 있을까 나는 몹시 번민하였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나 전보다 더 극심한 근심에 쌓인 얼굴과 죽음에 떠는 영을 가지고 예배당 안으로 돌아와서 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울부짖었다.


그 후 길선주는 2월 서울 사경회에 강사로 가서 2월 17일부터 3월 초까지 3주일간 서울 3개 장로교 연합 사경회에서 설교했다. 그는 서울에서도 열성적으로 설교에 임해 수많은 신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한 서양 선교사의 보고에 따르면, 양반과 '상놈'은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각각 떨어져 앉았지만 그의 설교가 끝나기 전엔 함께 앉아 서로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으며, 여인들도 남자들과 함께 죄를 빌었고 길선주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옷 한 벌을 만들어 선물로 주기도 했다.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도 자신들이 엄청난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듯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 운동은 이내 전국으로 번졌다. 길선주는 '복음의 열정으로 불타는 젊은 부흥사'로 불렸으며, 1907년 9월에 열린 제4회 노회 임원 선거에서 부회장에 당선되었고 전도국장을 겸하며 '백만인 구령(救靈)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당시 그는 황해도의 김익두(金益斗), 의주의 이기선(李基宣)과 함께 '3대 권능(權能)목사'로 불렸다.

길선주는 한국교회의 개혁에도 힘을 기울였다. 우선 교회 안에서의 남녀 구별을 없애기 위해 교회당 안에 설치된 남녀 좌석 사이의 장막을 철거하였다. 또 우리의 전통음악인 아악(雅樂)을 교회음악으로 도입하여 행사 때나 교회 명절에 연주하게 하였다. 아울러 국내 최초로 성가대와 교회음악단을 조직하여 선교 활성화에도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랑이 없는 교회는 지탱할 수 없다"며 교회의 양적 팽창을 경계하며 신앙의 성숙을 강조했다.


2.4. 민족운동[편집]


길선주는 장대현교회에서 민족문화 운동을 강조했다. 그는 문맹 퇴치의 기치를 들고 한글 교육에 전력을 다했고, 교회의 중요한 행사에서는 아악과 미술 등 다양한 예술, 오락 활동이 시행되었으며, 그 중에는 여승들의 춤을 흉내낸 춤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는 이에 대해 "한국의 기독교는 우리 민족의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창조하는 전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교회 구내의 청년회관을 조선식 건물로 세우고 낙성식을 거행하면서 '내일의 일꾼에게'라는 제목의 연설을 발표했다.

과거를 잊지 말라. 현재에서 단결하라. 내일의 터를 오늘에 닦아라. 우리의 것을 버리지 말라. 시대 양상은 변화한다. (중략) 오늘 우리는 우리의 민족문화와 외국 문화와의 갈등이 시작된 현실에 살고 있다. 외국 문화와 우리의 문화의 교차로가 된 오늘의 교회가 외국문화의 산실의 전제적인 그림자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의 문화 위에 꽃을 피우는 기독교가 되는 때 우리 민족의 종교가 될 것이다.


길선주는 이후에도 전국을 순회하면서 교회부흥운동을 지속했고,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민족개조론과 민족 고유문화의 시대화를 제창했다. 그는 자립 생활을 장려했고, 생활 개선을 위해 언어의 순화, 식생활, 주방, 부엌과 굴뚝 개조 등을 종용했다. 또한 물산 장려운동, 금주, 금연 운동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안창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조직, 사업부장을 맡아 구국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리고 그의 아들 길진형신민회에 가담해 열성적으로 참여했지만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른 후 1913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4년만인 1917년에 사망했다.

1919년 2월 14일, 이승훈이 환자로 가장해 평양 기홀 병원에 입원한 뒤 목사들을 그곳에 모이게 했다. 이때 길선주도 이승훈을 찾아갔고, 그로부터 3.1 운동 계획을 전해듣고 적극 찬동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2월 27일, 그는 평양에서 안세환이 보낸 사람을 통해 3월 1일 독립 선언식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이에 따라 황해도 장연에서 설교를 마친 뒤 2월 28일 장연을 출발했다가 도중에 사리원에서 하루를 묵고 3월 1일 오후 6시에 경성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인사동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 선언식이 끝난 뒤였다.

경성역에 내린 길선주는 만세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헌병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고 민족대표 33인도 전부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접했다. 이에 서명까지 한 자신이 도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여긴 그는 그 길로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가서 자수했다. 이후 그의 발언은 후에 그를 진정한 독립운동가로 봐야 하는지를 의심하는 의견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3월 14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그는 형사로부터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극도의 근안(近眼)이고 또 몸이 불편하여 앞으로는 (독립운동은) 하지 않고 나는 정치적인 일에는 일체 관계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고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그는 자신이 외국에 보낼 청원서나 독립선언서에 어떠한 취지의 내용이 있었는지 몰랐으며 독립선언서를 본 일도 없다고 진술했으며, 독립선언을 발표하면 어떠한 결과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국민에 대한 영향에 대하여 생각한 일이 없다. 청원할 것만을 원하여 청원을 하는 것은 어린 아이가 아버지에게 분가하는 문권(文券)을 내달라고 의뢰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므로 허락하여 줄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그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독립청원을 하는 일에 찬성하여 명의를 내었으나 이렇게 되었으니 독립은 세계에서 줄 것이라는 계획에 참가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며 독립선언 계획에 가담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7월 18일 경성지방법원의 신문 과정에서는 "청원서에 명의를 내는 데 승낙하였고 인장을 보냈지 (독립)선언서에 대해서는 찬성한다거나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한 일이 없다."고 진술했다.

이후 길선주는 미결수로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날 재판에 회부된 민족대표 33인 중 무죄를 선고받은 이는 그가 유일했다. 무죄 사유로는 3월 1일 태화관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지 않은 점, 당일로 경무총감부에 자수한 점 등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2.5. 종말신앙론[편집]


길선주는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을 때 요한계시록을 1만 번 통독했다. 이후 석방된 그는 1920년 <평화의 서>라는 제목의 설교를 발표했다. 그는 이 설교에서 지금은 말세이고 재림은 멀지 않았다는 종말신앙론을 분명하게 선언했다. 그는 약소 국가에겐 평화가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으며, 그 평화가 '위로부터' 내려와 초월적인 힘에서만 이뤄지므로 하나님이 역사에 간섭하시기를 기다리며 그 결정적 순간이 빨리 도래하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인간 본위의 현 세계에서는 진정한 평화가 없지만 신본위의 천년 세계에서는 평화의 낙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길선주는 1922년부터 전국을 대상으로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이러한 말세신앙에 기초하여 요한 계시록을 강해했고 100여 회에 걸쳐 말세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1926년 그가 목사로 19년간 전임했던 장대현 교회에서 박윤근 등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청년들이 장로 투표 때 장로회 회원들이 검표 발표를 정확하게 하지 않은 것을 빌미로 그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뿌리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후 정대현 교회 내에서 길선주를 지지하는 구파와 박윤근을 지지하는 신파 사이의 분쟁이 일어났고, 급기야 신도들간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1927년엔 사회주의자들이 그를 습격해 부상을 입혔으며, 그를 비난하는 유인물들이 사방에 확산되면서 그의 입지는 계속 줄어들었다. 결국 평양노회는 1931년 10월 길선주를 사직시켰고, 길선주는 평양 시내에 이향리(履鄕里) 교회를 세워 분립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감행하자, 길선주는 '주의 재림'이 다가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있는 평양의 교회를 향해 "평양아, 화있을 것이다! 평양 교회에 재앙이 내리리라."고 선언했고, 기독교를 박해하는 러시아에 대해 "소련아 너는 망하리라"고 선언하고 러시아를 승인하는 등 친 러시아 정책을 펴는 미국에 대해서도 "너 미국도 벌이 있으리라."고 비난했다. 길선주는 자신의 종말신앙론을 '말세학'으로 더욱 체계화하고 1935년 7월부터 1936년 11월까지 14호에 걸쳐 <신앙생활>에 연재했다. 그는 서두에서 재림을 통해 이 땅 위에 이루어질 평화의 천국을 소망하고 깨어 준비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라고 주장했다.

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의 신앙의 토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에 있는 것이고, 신자들의 불변불후의 무궁한 소망은 주님이 다시 오시어서 평화의 천국을 건설하심에 있는 것이다. 깨어 준비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소망 가운데 즐거움으로 주의 재림을 기다리기 바라는 바이다.


길선주는 성경이 세 개의 시대, 즉 '아담 시대', '노아 시대', '예수시대'로 나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담 시대'는 다시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 무죄 시대',와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노아 홍수 때까지 양심 시대'로 나뉘며, 노아 시대는 '홍수 후부터 아브라함 때까지 인권 시대', '아브라함부터 모새 때까지 허락 시대', '모세 때부터 예수 때까지 율법 시대'로 나뉘고, 예수 시대는 '예수 때부터 칠년 대환난 끝까지 은혜 시대', '천년 왕국 시대부터 무궁 시대까지 안식 시대'로 나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마지막 시기인 안식시대에는 천년 세계 이전에 공중재림(공중혼인연석), 7년 대환난을 거치고, 이어서 예수가 지상재림과 천년 세계를 다스리다가 최후의 심판을 거쳐 말세 삼계인 천상낙원계(새 예루살렘), 지상낙원계(새 에덴), 지옥계의 삼계가 이뤄져 영원무궁히 존속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의 재림은 천년 왕국이 이뤄지기 전에 두번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1차 공중 재림시엔 부활한 성도와 지상의 참된 성도가 공중으로 들려 올려(휴거) 공중에서 신랑 예수가 베푸는 혼인잔치에 참석한다. 들려 올라가지 못한 게으른 교회와 성도는 7년 대환난을 겪어야 한다. 이 기간 동안 숨어서 신앙을 지킨 성도들은 예수의 2차 재림, 즉 지상 재림 때 천년시대의 주인공들이 되어 지상낙원을 이룬다. 그리고 천년이 지난 후 최후의 심판이 모든 죄인들과 마귀들을 영원한 지옥계로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말세 삼계설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지옥, 연옥, 천국 삼계설과 다르다는 걸 강조하며, 자신의 삼계 설은 지옥계와 이 땅의 무궁세계와 천성의 새 예루살렘이라고 했다. 이는 한국의 재래 민간 신앙과 무속신앙에서 전승되어 온 천상계와 지상계와 지하계의 삼계설에 상응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그는 지구가 최후의 심판 시 멸망하여 사라져 없어져 버린다는 주장은 "성경에 위반이며, 진리에 위반이며, 과학에 위반"이라고 비판하며, 이 세상에 이뤄질 영원무궁 안식세게는 현재의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새롭게 개조된 세계라며 '지구개조설'을 주장했다. 이는 지구영존설로 이어진다. 지구는 태초의 에덴 안식 세계에서 무궁안식세계로 변화해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 역시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 나무 가지 하나도 꺽지 말고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해 지상에 강림할 무궁세계가 빨리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길선주의 말세론이 추구하는 사명이었다.


2.6. 사망[편집]


길선주는 이향리 교회를 세운 후에도 북간도와 함경북도를 순회하며 전도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35년 8월 평안북도 선천군 월곡동교회에서 부흥회를 주관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졌다. 주변에서는 그에게 요양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교를 지속했다. 결국 그해 11월 26일, 그는 평안남도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이끌던 중 마지막 축도를 마친 후 다시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졌다. 차남 길진경이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왔지만, 길선주는 눈을 뜨지 못하고 그날 오전 9시에 사망했다. 향년 67세.

그의 유해는 평양 상수구리 자택으로 운구되었고,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하였다. 장례식은 12월 3일 숭실전문대 강당에서 평양노회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유해는 장로교 공동묘지인 서장대(西章臺)에 안장되었다. 또한 그는 평소 성경연구에 몰두해 <해타론(懈惰論)> <만사성취(萬事成就)> <강대보감(講臺寶鑑)> <말세학(末世學)> 등의 저서를 남겼고, 기독교 교육 사업에도 참여해 숭실학교, 숭덕학교 등 설립에 관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길선주가 3.1운동 관련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단순한 참여자일 뿐 독립운동에 열성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포상을 미루다가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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