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진

덤프버전 :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大韓帝國中樞院議長

{{{#!wiki style="margin:-5px -10px; padding: 5px 10px"
[ 펼치기 · 접기 ]


초대

김병시

제2대

정범조

제3대

김홍집

제4대

어윤중

제5대

박정양

제6대

정범조

제7대

민영휘

제8대

이호준

제9대

박정양

제10대

한규설

제11대

이종건

제12대

이하영

제13대

조병식

제14대

정낙용

제15대

임상준

제16대

신기선

제17대

김가진

제18대

조병세

권한대행

김가진

제19대

민영소

제20대

박정양

제21대

심상훈

제22대

민종묵

제23대

이근택

제24대

한규설

제25대

서정순

제26대

김윤식


좌의장


우의장

조병세
정범조


부의장


초대

김영수

제2대

어윤중

제3대

신기선

제4대

윤치호

제5대

이하영

제6대

윤치호

제7대

홍종억

제8대

서정순

제9대

김가진

제10대

이유인

제11대

이용태

제12대

이도재

제13대

이종건

제14대

이근호

제15대

이건하

제16대

김가진

제17대

이근호

제18대

이종건

제19대

이근상

제20대

이재곤

제21대

성기운

제22대

신기선

제23대

이근상
제국 중추원 의장
국회의장 · 국회부의장



역임한 지위
[ 펼치기 · 접기 ]








대한제국 조선귀족 남작

대한제국 제17대 중추원 의장
김가진
金嘉鎭 | Kim Ga-jin


파일:0804_478.jpg

대한제국 대귀족 대례복 차림
출생
1846년 2월 24일[1]
사망
1922년 7월 4일 (향년 76세)
본관
신 안동 김씨[2]

덕경(德卿)

동농(東農)
학력
정시문과 (급제)[3]
역임 지위
약력
규장각검서관(奎章閣檢書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涉通商事務衙門)
내무부주사(內務府主事)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총리교섭통상대신(總理交涉通商大臣)
주진종사관(駐津從事官)
일본공사관참찬관(日本公使館參贊官)
주일판리대신(駐日辦理大臣)
우부승지(右副承旨)
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會議員)
외부협판(外部協辦)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법부대신(法務大臣)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

[ 펼치기 · 접기 ]
종교
유교 (성리학)
부모
친부 김응균, 친모 함안 박씨
형제자매
양형 김화진, 친형 김영진
친인척
고조부 김도순, 고조모 달성 서씨
증조부 김세근, 증조모 성주 이씨
친조부 김병성, 친조모 반남 박씨
부인
첫째부인 남양 홍씨
둘째부인 부안 임씨
셋째부인 경주 최씨
넷째부인 전주 이씨
자녀
장남 김중한
차남 김정한
삼남 김의한
손자
첫째손자 김자동
둘째손자 김석동
셋째손자 김세동
증손
첫째증손녀 김정원
둘째증손녀 김영원



파일:김가진_초상화.jpg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생애
2.1. 조선 외교관으로서
2.2. 대한제국 대귀족으로서
2.3.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서
2.4. 사후
4. 독립문관련
5. 갤러리
6. 둘러보기
7. 참고문헌
8. 대중매체



1. 개요[편집]



파일:9240db781a327aeb3d9d6fd875657339.jpg

김가진 조선귀족 남작의 사진

조선 말기의 개화파 문신, 정치가, 외교관, 독립유공자, 조선귀족. 한국 최초의 외교관. 제17대 중추원 의장. 자는 덕경(德卿), 호는 동농(東農).


2. 생애[편집]



2.1. 조선 외교관으로서[편집]


나는 운 좋게 김가진이라는 조선의 거물 정치인과 잘 알고 지냈는데, 실내에서 항상 말총 두건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주기도 했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재기가 출중했으며, 내가 만난 수많은 훌륭한 외교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를 쩔쩔매게 할 수는 없었다.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보다 더 예리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대응하는 사람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는 한때 조선의 사절로 일본 막부(幕府)에 파견되었는데, 매우 짧은 시간에 일본어를 완벽하게 숙달했다. 그는 중국어에도 아주 능통했다. 나는 그가 쉽게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그는 공부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아주 짧은 시간에 실제로 며칠 내에 영어를 이해하고 읽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의사소통도 했다.


김가진은 다재다능할 뿐만 아니라 대단한 용기와 독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의 측근 대부분의 간사하고 모함을 일삼는 관리들은 종종 그가 왕과 마찰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머리가 어깨 위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경이로운 일이라고 익살맞게 얘기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다른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는 열렬한 개혁가였고 서구 문명을 극찬했다. 그의 가장 큰 희망은 얘기로만 숱하게 들어 왔던 영국미국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같은 대화를 나눈 바로 다음 날 아침, 그는 사소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때문에 왕명으로 가장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 새비지랜도어(Arnold H. Savage-Landor), 《한국 혹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95[4]


1846년 2월 24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계 신교(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의 신 안동 김씨 세도가에서 아버지 김응균(金應均, 1801. 1. 6 ~ 1875. 4. 28)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가 소유한 노비의 수는 150여 명이었는데 이들을 해방해주었다.

그는 문충공 김상용의 11대손으로 태어났으나 어머니(? ~ 1853)가 첩이었던 탓에 서얼이었으므로 과거 응시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1877년, 서얼들에게 허용된 관직인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83년, 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신설되자 유길준과 함께 주사로 임명되었다.

강직한 반청자주의 신념을 가졌기에, 리훙장의 기록에 따르 1884년, 고종명성황후를 알현한 면전에서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를 배격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갑신정변 이후 적서차별이 철폐되자 41세 되던 1886년 (고종 23) 정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修撰:정6품)이 되었으나, 같은 해 청나라 배격을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다가 적발, 위안스카이의 압력을 받아 전라도 남원도호부로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 청나라 톈진에 잠시 파견되었다가, 1887년 주일공사관이 개설되자 그를 눈여겨 본 고종의 특별한 낙점을 받아 초대 주일공사관 참찬관으로 일본행에 올랐다. 초대 공사 민영준이 국서만 일본에 전달한 뒤 그냥 귀국해버리자, 뒤이어 주일공사가 된 김가진은 공사관 개설부터 모든 외교 업무를 직접 처리하며 사실상 최초의 재외공관 주재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주일 청국 공사 리수창(黎庶昌)은 상국 공사에게 와서 부임신고를 하라는 뜻으로 김가진 외교관을 불렀다. 김가진 외교관은 이를 굴욕으로 여겨 안 가고 버티다가 1년만에 청국 공사관을 방문했는데,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김가진 외교관은 4년간 일본에 주재하면서 일본을 통해 서양 산업기계와 과학기술서적을 구해서 조선으로 보내고, 유학생들 뒷바라지에 애썼다. 울릉도에 불법으로 상륙해 나무를 베어가던 일본 목재업자들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기도 했다.

어느 날 청국공사 왕펑짜오(王鳳藻)가 “동양의 독립국은 청국과 일본뿐”이라고 하자, 김가진 외교관은 “조선은 오랜 역사와 사직(社稷)을 가지고 있는 독립국이다. 누가 황탄무계(荒誕無稽)하게 우리를 욕하고 타국에 예속되었다고 하는가?”라며 맞받아치기도 하였다.

1890년 10월, 일본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靑木周藏)가 김가진에게 수 년 전 남대문에 “조선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라는 방문이 걸린 일을 상기시키며, 조선은 반독립국(半獨立國)이 아니냐고 넌지시 물었다. 이때 김가진 외교관은 “조선은 요(堯) 임금 때부터 국가임금이 있었다. 설혹 중국에 패하였더라도 이제까지 한 번도 지배받은 적이 없다. 중국과의 사행(使行, 책봉과 조공을 위한 사신행차)은 실익(實益)은 조선이 챙기고 중국은 명분만 가져간다. 조선국왕은 일언일령(一言一令)도 자주(自主)한다.” 하며 맞서기도 하였다.


2.2. 대한제국 대귀족으로서[편집]




동농 김가진 을사조약을 반대하다

1891년, 귀국해 안동대도호부사(정3품)를 역임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 개전의 시발점인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당시 안경수와 함께 일본군에 협력하여, 경복궁 내에서 저항하던 조선군에게 저항을 중지하고 투항하라는 거짓 왕명을 전달했다. 이후 갑오개혁에도 참여했다. 1895년, 농상공부대신[5]을 지내며 그의 호위무사 2백여 명을 동원해서 독립협회 창설을 주도하였고, 만민공동회 개최에 참여했으며, 1900년,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6]으로 군림했으며, 1902년, 한글 학교를 설립하고 법부대신[7]을 맡았다. 최종적으로 정1품으로 오르는 위치에 도달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하다가 충청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었고, 1907년, 규장각 대제학을 마지막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3.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서[편집]




동농 김가진과 대동단의 잊혀진 전쟁, 두 번째 독립 운동

1910년, 경술국치 시기에 일본에게서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제2의 독립만세 시위를 기획한 조선민족 대동단의 총재로 추대되었으며, 그해 10월 의친왕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몰래 망명시키려 준비했다가 중간에 발각되었고, 아예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이때 나이가 이미 74세였는데, 신념을 떠나 육체적으로 이미 허약해지기 쉬운 시기임에도 거친 풍찬노숙의 길을 택한 것. 이후 임정과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조선 국왕과 대한 황제에게 충직했던 유신(遺臣)이었음에도 왕조 복벽(復辟)을 주장하지 않고 민국(民國)의 일원임을 자처했으며, 평생을 외교관으로서 살아 왔음에도 외교론보다는 무장 투쟁의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그의 유연성과 과감함이 빛난다. #

1920년 3월, 대동단 총재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했으며, 대동단의 박용만·나창헌·손영직(孫永稷)·고광원(高光元)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회유하고자 상하이에 밀정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분명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스스로 내다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한국의 조선귀족 중엔 정말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일제로부터 받은 남작 작위는 공식적으로 박탈된 것이 아니어서 사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2.4. 사후[편집]


1922년, 중국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장례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국가장으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당시 전국민의 절반 이상이 동원됐다.

김가진 귀족은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 남작 작위를 일제에 '공식적으로' 반납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이유로,[8] 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보류했다. 다만 그 아들인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자신은 작위 문제 등으로 서훈은 받지 못했으나, 자녀들에게 자신이 받을 서훈을 대신 주었으니 어느 정도 독립운동의 결실은 이룬 것. 또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도 그의 항일 행적을 인정하여 사전에 김가진 조선귀족은 등재하지 않았다. 현대로 비유하면 국가정보원 블랙 비밀요원으로 활동했듯이 상하이 임시정부 블랙 요원으로 활동했기에 대놓고 서훈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001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에 터 표석이 설치되었으며 그의 뜻을 기리는 재단이 건립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가진/가족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독립문관련[편집]




동농 김가진 현판문을 적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독립문 편액 글씨는 이완용이라고 주장하지만, 손자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이 2010년에 한겨레와 중앙선데이에 건의 주장을 폈다.

독립협회 결성의 주역 중 한 사람이던 할아버지는 당대 명필로도 꼽혀 돈의문 밖에 세운 ‘독립문’의 한자 · 한글 제자 모두 쓰셨다. 비원에 있는 현판도 대부분 할아버지 글씨다. 독립문의 제자가 ‘역적’ 이완용의 글씨로 일부 잘못 알려져 있는데, 육안으로 서체만 비교해도 틀린 주장임을 알 수 있다.

- 한겨레 2010년 1월 3일자 기사 [길을찾아서] <일본 작위 내던지고 망명한 할아버지 / 김자동> 중에서


우리 집안에서는 당연히 할아버님(동농 김가진·1846년 ~ 1922년) 글씨로 알고 있습니다. 강단이 남달랐던 어머니(정정화·1900년 ~ 1991년)의 회고록 장강일기에도 한문과 한글 현판을 정성 들여 쓰셨다고 나와 있고요. 어머니는 홀로 상하이에 건너가 시아버지를 모셨어요. 할아버님은 1903년 중추원 부의장으로 계셨을 때, 비원 감독직을 맡아 창덕궁 모든 현판 글씨들도 쓰셨습니다.

- 중앙SUNDAY 2010년 9월 18일자 기사 <일제의 만행 증언하는 사형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 중에서


중앙SUNDAY 기사에서 제3자인 서예 전문가 김선원은 독립문의 ‘문 문(門)자’와 ‘설 립(立)자’의 체형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이완용의 글씨가 아니라고 단언했으며, 이완용 글씨로 알려진 경복궁 함원전(含元殿) 현판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이로써 그는 완숙한 독립문 글씨와는 체형과 서법이 다르다고 전했다.

그 증거로 김가진이 1903년에 창덕궁 후원감독을 맡아 쓴 몽룡정, 부용정, 애련정, 희우정, 금마문, 폄우사, 운경거 등의 편액 역시 전부 글씨체가 뭉텅하며 예리하지 않은 스타일이다. 이는 독립문 편액 글씨체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미스테리를 풀 핵심인 독립문의 한글 현판은 현재 그가 쓴 한글 친필이 전무한 관계로 '비교의 대상'은 한문 편액밖에 남지 않는다.

독립협회는 출범 뒤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면서 현판을 내걸었는데, 현재 현판은 전해진 것이 없으나 1897년 5월 25일 독립신문 잡보에 따르면 태자 시절의 순종황제썼다. 또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에선 당시 황해도 관찰사인 김가진 조선귀족이 독립문에 관심을 지녔을 것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황해도 관찰사 김가진 씨가 해주 먹판을 금번에 새로 만들어 먹에 박아서 전국에 반포하였는데. 그 먹 전면에는 제국 독립문(帝國獨立門)이라 박아 도금 하였고 후면에는 독립문을 온통 모본하여 박고 국기와 독립문에는 또한 도금을 하였더라. 물건에 까지 이렇게 판각하였으니 김씨의 마음에 독립이자 사랑하는 것을 깊이 치사하노라. 전국 인민이 일심으로 애국하여 독립이자 생각하기를 이 먹에다 각(刻)한 것과 같이 함을 우리는 바라노라.

-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


그러나 제국독립문(帝國獨立門)의 글씨를 누가, 언제 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므로 서체 고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정운현은 위와 같은 견해들을 종합해 보아 그의 것이 맞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5. 갤러리[편집]



파일:김가진.jpg


파일:김가진().jpg


파일:김가진(나름대로 잘 나가던 시절).jpg


파일:김가진(관복).jpg

대례복을 입은 모습[9]
백운장에서[10]
관직 생활 때 모습
관복을 입은 모습

파일:IE002456923_STD.jpg


파일:김가진(().jpg


파일:김가진_초상화.jpg


파일:IE002465431_STD.jpg

상하이 임시정부 망명 때
노년의 모습
대례복 초상화
김가진
초상화


6. 둘러보기[편집]


김홍집 내각
(갑오개혁을미개혁)


[ 펼치기 · 접기 ]
차수
제1차
제2차
제3차
제4차
내부대신
군국기무처를 통한 개혁
박영효
박정양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엄세영
김가진
정병하
신기선
이범진
군부대신
조희연
안경수
조희연
법부대신
서광범
서광범
장석주
탁지부대신
어윤중
심상훈
어윤중
외부대신
김윤식
김윤식
김윤식
학부대신
박정양
이완용
서광범
※ 2차 내각은 출범당시 3차 내각은 특정기간을 기준으로 함.
을미사변 이후 친일성향으로 조각되어 을미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고종에게 을미사적으로 불리고 처형 명령이 떨어지면서 실각한다.



조선귀족
朝鮮貴族


【 펼치기 ・ 접기 】
수작
후작
백작
완순군 · 의양군 · 창산군 · 청풍군 · 박영효 · 윤택영
민영린 · 이완용 · 이지용[1]
자작
고영희 · 권중현 · 김성근 · 김윤식 · 민병석 · 민영규 · 민영소 · 민영휘 · 박제순 · 송병준 · 윤덕영 · 이근명 · 이근택 ·이기용 · 이병무 · 이완용[2] · 이용직 · 이재곤 · 이하영 · 임선준 · 조민희[3] · 조중응
남작
김가진[4] · 김병익 · 김사철 · 김사준 · 김영철 · 김종한 · 김춘희 · 김학진 · 남정철 · 민상호 · 민영기 · 민종묵 · 민형식 · 박기양 · 박용대 · 박제빈 · 성기운 · 윤웅렬 · 이건하 · 이근상 · 이근호 · 이봉의 · 이용원 · 이용태 · 이윤용 · 이재극 · 이정로 · 이종건 · 이주영 · 이항구 · 장석주 · 정낙용 · 정한조 · 조동윤 · 조동희[5] · 최석민 · 한창수
습작
후작
백작
이달용 · 이덕용 · 이덕주 · 윤의섭 · 박찬범 · 이병길
고중덕 · 고흥겸 · 송종헌 · 이영주
자작
고희경 · 권태환 · 김호규 · 민병삼 · 민충식 · 민형식 · 민홍기 · 박부양 · 윤강로 · 이규원 · 이종승 · 이창훈 · 이충세 · 이택주 · 이해국 · 이홍묵 · 임낙호 · 임선재 · 조대호 · 조용호 · 조원흥 · 조중수[3]
남작
김교신 · 김덕한 · 김세현 · 김석기 · 김영수 · 김정록 · 남장희 · 민건식 · 민영욱 · 민철훈 · 민태곤 · 민태윤 · 박경원 · 박서양 · 박승원 · 성주경 · 윤치호 · 이규환 · 이기원 · 이능세 · 이동훈 · 이범팔 · 이병옥 · 이원호 · 이인용 · 이장훈 · 이중환 · 이풍한 · 장인원 · 정주영 · 정천모 · 조중구 · 조중헌 · 최정원 · 한상기
승작
후작
백작
이완용
고희경 · 송병준
반납
김석진 · 민영달 · 유길준 · 윤용구 · 이용구 · 조경호 · 조정구 · 조희연 · 한규설 · 홍순형
[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2] 1872년생 이완용(李完鎔)으로 1858년생 이완용(李完用)과 동명이인임. [3] 1927년 파산자로 선고되어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1928년 2월 29일부로 자작의 예우가 정지되었지만 자식이었던 조중수에게 자작 작위가 승작됨.[4]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협조해 습작 불능 처리됨.[5] 재산 분쟁으로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오등작일제강점기 조선귀족에 공작은 없었으며, 그에 준하는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왕공족 문서 참고.※ 취소선 표시는 작위를 박탈당한 인물을 뜻함.
작위 박탈 사유 [ 펼치기 · 접기 ]
  • 윤치호 : 1913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작위 박탈
  • 김사준 : 1915년,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작위 박탈. 신한혁명당의 간부 중 하나인 성낙형이 고종을 망명시키고자 했는데, 김사준이 이를 수락하고 실행에 옮기려다 일제에 발각되어 김사준을 비롯한 고종 망명 사건 관련자들 다수가 검거
  • 김윤식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이용직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민영린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김병익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민태곤 : 1941년 12월, 도쿄에서 조선민족독립운동 사건으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7. 참고문헌[편집]




8. 대중매체[편집]


  •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이낙훈이 연기했다.

  • 1998년 연극 <아!정정화>에서는 배우 이의일이 연기했다.

  • 대체역사소설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조선의 역사가 변하면서, 그가 가게 될 행보도 변화하게 된다. 조선애국당에서 고종이 속한 당 외의 당에서 선발된 첫 의원이 되었고 고종이 의회에 출석하여 자신의 말에 네 네만 대답하면 의회가 왜 있냐고 분노하자 꿀먹은 벙어리가 된 다른 의원들과 달리 지금 조선이 주변국과 달리 강대국이 된건 모두 전쟁에서 승리하여서 일 뿐 조선이 뛰어난게 아니니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발전을 시켜야한다는 의견을 올린다. 차후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하면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유사해질 듯. 거기다가 딸과 흥영군 이우가 혼담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혼담이 오간 것이 확실히 이우인지는 불분명하다(이우 밑으로도 의친왕의 아들이 많다. 공식적인 의친왕의 자녀는 12남 9녀). 조선귀족으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망명한 그는 의친왕과 친분이 있었고,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는 사건에 가담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며느리 정정화는 《녹두꽃》에서 "시아버님은 당시 의친왕과 친근한 사이였으며, 사돈까지 맺기로 약속된 관계였다. 시누이 김영원이 한때 의친왕의 차남과 약혼했던 사이였는데,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혼사가 깨진 것은 어쩌면 일본인들의 압력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회고하였으며, 그의 손자 김자동의 인터뷰에 따르면 "나라가 망한 후에 의친왕과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나라 걱정을 하였고 친분이 있었지요. 의친왕의 아들이 많죠. 어떤 아들인지는 모르겠는데 의친왕 아들하고 작은 고모하고 약혼까지 했대요."라고 인터뷰한 내용은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가진(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을 참고.

  • 대체역사소설인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첩보조직의 수장으로 활약한다. 본인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고, 서자로서의 설움 때문에 러시아의 스파이 노릇을 할 뻔하다가 적발되어 대원군의 수족이 되었던 끝에 그렇게 된 것이다. 대원군 아래의 사조직에 가깝던 공안서에서 활약하다가, 대원군 사후에 공안서가 그대로 정부기관이 되면서 관리까지 된 것. 공안서에서도 거물이다보니 블라디미르 레닌이 젊을 적에 만나보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대활약한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개화당 지도자중 하나로 독립문 현판을 썼다. 2부부터는 개화당 중진이자 민의원 의장, 칭제건원 당시에는 로마의 사례를 통해 조선이 명나라의 적통을 이었으니 황제를 칭해도 된다고 주장했다. 김성규(金星圭)와 함께 토지조사사업에 참여하며 실무형관료로 평가된다. 한참 등장없다가 2부 선거때부터 민의원의장으로 다시등장, 청나라를 당장 멸망시키자는 젊은 의원들을 진정시킨다. 중화민국 설립 후 초대 주중공사가 된다. 3부에서는 황태자에게 서예와 외국어를 가르쳤으며 총리가 아님에도 황태자곁에 앉으며 모든 의원들에게 존경받는 살아있는 의회정치의 화신임을 보여준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01:48:55에 나무위키 김가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음력 1월 29일.[2] 문충공 상용(尙容)파 26세 진(鎭) 항렬.[3] 장원급제로 입격하였다.[4] 신복룡 역,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집문당, 1999[5] 오늘날의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6] 오늘날의 국회의장.[7] 오늘날의 법무부 장관.[8] 석연치 않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당시 김가진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공식적으로' 작위를 반납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십중팔구 일제는 직접 나와서 반납하라고 했을 것이고, 그랬다가는 바로 억류당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를 제하고서라도 김가진 본인이 남작위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쉽게 말해 일본으로부터 받은 작위는 작위로 보지도 않고 무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작위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침투 등 공작활동에 용이하기 때문에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게 낫기도 하다.[9] 예술가, 장인들이 귀족과 황족들의 옷을 제작했고 당시 귀족, 황족들이 입던 의상이다.[10] 서양식 프록코트로 한국 최초로 프록코트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