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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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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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32대 검찰총장
김각영
金珏泳 | Kim Gak-yeong


파일:2006121000546_0.jpg


황농(惶農)
본관
연안 김씨[1]
출생
1943년 9월 12일[2] (80세)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내현리 437번지[3]
현직
하나고등학교 이사장
재임기간
제32대 검찰총장
2002년 11월 11일 ~ 2003년 3월 10일
제44대 법무부 차관
2002년 8월 19일 ~ 2002년 11월 10일
제14대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2002년 2월 8일 ~ 2002년 8월 18일
제41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2000년 7월 15일 ~ 2001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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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조중순[1]
자녀
장녀 김연주[2], 아들 김일주[3], 차녀 김은주[4]
학력
청라국민학교 (졸업)
대전중학교 (졸업)
대전고등학교 (졸업 / 41회)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중위 전역 (군법무관)
경력
제12회 사법시험 합격
제2기 사법연수원 수료
대구지방검찰청 검사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 검사
제주지방검찰청 검사
서울지방검찰청 의정부지청 검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마산지방검찰청 충무지청장[5]
대구고등검찰청 검사
청주지방검찰청 부장검사
광주지방검찰청 형사1부장검사
수원지방검찰청 특수부장검사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특수부장검사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형사2부장검사
법무부 법무심의관
남북고위급회담 정치분과위원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차장검사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장[6]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
서울고등검찰청 부장검사
사법연수원 부원장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대검찰청 공안부장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대검찰청 차장검사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법무부 차관
제32대 검찰총장 (국민의 정부)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4. 기타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법조인. 김대중 정부 말기에 제32대 검찰총장으로 재직했다. 현재 하나고등학교 이사장을 맡고 있다.


2. 생애[편집]


1943년 9월 12일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내현리 437번지에서 청라면장을 지낸 아버지 김종진(金鍾珍, 1911. 8. 9 ~ 1992. 9. 21)과 어머니 순천 김씨 김세희(金世喜, 1908. 8. 17 ~ 1998. 6. 30)[4]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62년 대전고등학교(41회)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1966년 고려대학교 졸업 후 1970년 제1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72년 사법연수원을 2기로 수료했다. 그의 합격기는 지금도 인터넷에서 읽을 수 있다.# 1973년 군법무관으로 병역을 이행한 뒤 1975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법조계에 입문했다. 이후 1976년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 검사, 1979년 제주지방검찰청 검사, 1980년 서울지방검찰청 의정부지청(現 의정부지방검찰청) 검사, 1982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등으로 재직했다.

1985년 3월 12일 마산지방검찰청 충무지청장(現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장)에 전보되었으나 1985년 4월, 해상밀수 사건과 관련해 뇌물수수 및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된 전 장승포세관 직원 천 아무개로부터 선처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100만원 가량의 '떡값'을 제공받아 4월 중순에 보석으로 풀려나 1985년 8월 집행유예 선고를 받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드러나 승진이 늦었다. 그러나 이 일로 별다른 징계는 받지 않았고 1985년 12월 26일까지 임기를 지낸 뒤 1986년 대구고등검찰청 검사로 문책성 인사조처되었다.

1987년 청주지방검찰청 부장검사로 재직했고, 1988년 광주지방검찰청 형사제1부장검사로 전보되어 재직 중이던 1989년 조선대학교 재학생 변사 사건을 맡아 이를 깔끔히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같은 해 수원지방검찰청 특수부장검사, 1990년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現 서울동부지방검찰청) 특수부장검사, 1991년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형사제2부장검사, 1992년 대한민국 법무부 법무심의관 및 남북고위급회담 정치분과위원, 1993년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차장검사, 1994년 9월 23일부터 1995년 9월 26일까지 제12대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장(現 울산지방검찰청장), 1995년 9월 27일부터 1996년 7월 31일까지 제8대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장(現 서울서부지방검찰청장), 1996년 서울고등검찰청 부장검사 등으로 재직했다.

1997년 8월 14일부터 1999년 2월 21일까지는 제15대 사법연수원 부원장을 지냈다. 1999년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1999년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 직후 대검찰청 공안부장검사에 발탁돼 능력을 인정받았다.

2000년 7월 15일 제41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임명돼 2001년 5월 30일까지 역임했고, 그 뒤 대검찰청 차장검사로 전보되어 2002년 2월 진승현·정현준 게이트의 수사를 맡았다. 그러나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에서 '대통령 아들 봐주기' '부실수사' 등을 문제 삼으면서 그해 2월 8일 부산고등검찰청장으로 좌천성 승진인사를 당했다.[5] 그 후 2002년 8월 19일 제44대 대한민국 법무부 차관으로 중앙에 복귀했다.

2002년 11월 11일 '피의자 사망사건'의 여파로 이명재 당시 총장이 전격사퇴하자, 그 뒤를 이어 검찰총장 자리에 올랐다. 당시 언론에서 검찰내 충청 인맥의 대표주자로 '공안통'이며, 외유내강형으로 일처리가 꼼꼼하고 빈틈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3년 2월 25일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노무현 대통령한테서 '임기 보장' 약속을 받자, 전국 평검사 회의를 상설화하는가 하면, 대검찰청 홈페이지에 `국민의 소리' 코너를 신설하는 등 개혁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검찰인사와 관련해서는 강금실 법무부장관과 마찰을 빚었다. 김각영이 천거한 몇 사람의 검사에 대해 강금실이 "정치적으로 의혹을 받았던 분들이 있어 받아들일 수 없다. 고문사건과 관련된 분도 있다"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 특히 법무부와 검찰의 가교역할을 하던 검찰국장이던 장윤석 검사장을 서울고등검찰청 차장으로 좌천시킨 것과 한참 후배였던 장관[6]과의 관계 등도 이에 영향을 주었다.

결국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12일만인 2003년 3월 9일에 가시돋힌 퇴임사를 남기며 물러났다. "새 정부가 파격인사라는 이름 아래 서둘러 기준 없는 인사를 벌이고 있다"는 발언을 한 것.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에서 공개적으로 "현 검찰 수뇌부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는 평가다. 이후 변호사 김각영 법률사무소를 개업해 개인 변호사로 활동했고, 2004년에는 하나은행 사외이사, 2006년 대전고등학교 총동창회 회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2016년 11월, 김승유 전 이사장의 뒤를 이어 하나고등학교 제2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2020년 금태섭 전 의원의 발언에 따르면 검사와의 대화를 TV로 본 김각영 당시 검찰총장이 퇴근하려고 대검찰청 청사를 나서고 있는데 대검찰청 기획과장이 슬리퍼 차림으로 쫓아와 그 날 안으로 사표를 내야 한다고 강권해 사직했다고 한다. #


3. 가족관계[편집]


아내 조중순(趙重順, 1947. 10. 20 ~ ) 여사[7]와 결혼하여 슬하에 장녀 김연주(金姸柱, 1972. 8. 8 ~ ), 아들 김일주(金一柱, 1974. 8. 18 ~ ), 차녀 김은주(金恩柱, 1979. 4. 2 ~ ) 등 1남 2녀를 두었다.


4. 기타[편집]


외모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과 닮았다는 이유로 한때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마이 프레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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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자시윤공파(內資寺尹公派)-보령 종중(保寧宗中) 26세 영(泳) 항렬.[2] 연안김씨대동보 3072쪽에는 8월 23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4] 김환(金煥)의 딸이다.[5]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은 2004년에 서울중앙지방검찰청장으로 개편되기 전까지 지방검찰청 검사장 보직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 서울고등검찰청장이나 대검찰청 차장으로 올라가지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같이 지방고등검찰청 검사장 보직으로 가지는 않는다.[6] 강금실 장관은 사법연수원 12기로 해당 기수의 선두주자는 차장검사 정도에 그쳤다.[7] 양주 조씨 조창희(趙昌熙)의 딸이다.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중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