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태(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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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경태(金慶泰)
출생
1935년
경기도 경성부, 고양군 용강면
(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사망일
1995년 8월 20일 (향년 60세)
학력
휘문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법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공군 공보정훈장교
경력
1964년 TBC 입사
MBC PD
KBS PD
SBS 코미디 전망대 앵커
종교
개신교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개척자. MBC, TBC, KBS 등에서 PD로 활동하고, SBS의 시사 코미디 프로그램인 코미디 전망대 앵커를 맡기도 했다.


2. 생애[편집]


1935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에서 태어났다. 다섯살 때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숨을 거두었고, 술로 소일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등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 힘겨운 상황에서 김경태는 교회를 다니면서 삶의 보람과 희망을 찾으며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1954년 휘문고등학교, 1958년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1] 공군 공보정훈장교로 복무한 뒤에[2] 1964년 TBC에 입사하여 방송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TBC에서는 자신만의 프로그램 연출은 커녕 선배 PD들이 만든 방송만 내보내는 AD(조연출) 역할에만 머물렀다.

1969년 개국한 MBC TV로 이적하여 본격적인 PD 타이틀을 달게 된 김경태는 당시 이름난 희극배우인 구봉서, 배삼룡과 지방 유랑극단에서 활동하던 이기동, 송해, 서영춘 등의 코미디언들을 끌어들여 웃으면 복이와요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웃으면 복이와요는 코미디 프로그램의 전설이 되었으며, 1985년까지 무려 16년간 방송되었다.

웃으면 복이와요 이후 아나운서 변웅전의 예능감을 알아보고 그를 유쾌한 청백전 MC로 발탁하여 당대 최고의 사회자로 스타덤에 올렸으며, 한국 최초의 시트콤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 부부만세를 연출하여 두 프로그램이 번갈아서 시청률 1위와 2위에 오르면서 한국 코미디 프로듀서의 귀재로 평가 받았다.

1973년에는 TBC로 되돌아갔는데, 이 때 서영춘, 배일집, 배연정 등이 그를 따라 TBC로 적을 옮겨 좋았군 좋았어, 고전 유머극장 등을 연출했다. 1980년에는 토요일이다 전원출발[3]을 연출했는데, 이 때 변두리 3류 극장을 떠돌던 이주일[4] 송해의 추천으로 출연시켜[5] 단 2주 만에 스타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KBS로 자리를 옮기면서 전두환 독재정권에 회의를 느꼈고, 결국 1983년 미국으로 가족과 함께 이민을 갔다. 미국에서 8년간 생활하며 처음엔 식당을 운영했지만 화재 사고로 전 재산을 날리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이후 기독교방송, 교포방송 등을 운영하다가 1990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91년 12월 개국한 SBS-TV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 PD가 아닌 연기자로 시사 코미디 프로그램인 코미디 전망대의 앵커를 맡았다. 코미디 전망대 첫 방송때 김경태는 가발을 쓰고 나와서 "저는 앞으로 거짓없는 진실된 방송만 하겠다"는 멘트를 치면서 가발을 벗고 자신의 대머리를 확 공개했는데, 그게 빵 터지면서 단박에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올 수 있었다. 코미디 전망대 1화 풀버전[6]

이후 김경태는 대머리 기믹과 더불어 오랜 기간 코미디 현장에서 구르면서 습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공동 MC인 박미선, 이성미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 예능감을 선보이며 노익장을 과시하였다. 이 덕분에 1992년 연말 SBS 올해의 스타상 코미디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기 절정이던 1993년에 간암[7] 판정을 받아 2년간 투병했으며, 결국 1995년 8월 20일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KBS 아나운서 출신 아내 오신근과의 사이에서 딸 셋(수미, 수진, 수경)을 두었다.[8][9]

그의 저서로 자신의 인생과 신앙간증을 담은 웃으며 살자구요를 남겼다.


3. 여담[편집]


  • 김경태가 MBC로 이적한 후 얼마 안 되어 집을 장만했는데 그곳이 와우아파트 12동이었다. 1970년 4월 8일, 밤새 편집을 마치고 숙직실에서 눈을 붙이던 중 새벽에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다는 속보를 접한 김경태는 울부짖으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달려갔는데 다행히 12동은 건재했지만 15동이 처참하게 붕괴되어 있었다. 집에 들어가 보니 아내와 세 딸은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고 독실한 크리스천 김경태는 가족들을 깨워 감사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김경태는 얼마 안가 부랴부랴 다른 집을 구하여 이사를 갔다고...

  • 정치인 홍준표는 김경태의 고려대학교 법학과 후배이다. 1972년 고대 법대 신입생 환영회에 MBC PD이던 김경태가 OB 자격으로 참석을 했었다. 홍준표 자신은 환영회 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잘 안나지만 무대에서 선배들에게 인사하면서 1~2분 정도 이런 저런 넉살을 떨었는데 이를 지켜본 김경태가 "너 이리 좀 온나" 라며 홍준표를 불러서 "올해 11월에 MBC 코미디언 공채 시험이 있다. 한번 응시해 볼래?"라며 직접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 10월 유신이 터지고 학교는 물론 방송국도 스케줄이 된통 꼬이는 바람에 없었던 일이 되었다고... 만약 홍준표가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면 이경규, 박명수 보다 먼저 호통 전문 개그맨으로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 TBC로 복귀하여 고전 유머극장을 연출하던 어느 날, 방송에서 한 노인이 검은 안경을 쓴 황소를 끌고 나왔는데 동네 사람이 왜 황소에게 검은 안경을 씌웠냐고 묻자 그 노인이 "이 놈의 황소가 늙어서 앞이 잘 안보인다" 라고 답하는 장면을 내보냈다. 그런데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의 상징이 황소였고[10] 마침 공화당의 장기 집권으로 국민들의 염증이 쌓여있던 시기였는지라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인 어떤 기관에서 김경태와 TBC 방송 관계자를 소환하여 호되게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코렁탕 취식 여부는 확인불가

  • 1990년대 중반 SBS의 개그프로 웃으며 삽시다 에서 한국 코미디 역사를 소재로 한 꽁트개그실화극장 코메디 천국을 방영했는데 김경태 역할을 윤정수가 연기하였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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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조인이자 정치인인 홍준표의 대학교 선배다. 홍준표 문서에 보면 그가 MBC 공채 코미디언이 될 뻔했던 에피소드가 있는데 고려대 법학과 신입생 환영회 때 선배들을 상대로 익살을 떨던 홍준표에게 김경태가 코미디언 시험을 쳐 보라며 제안했다고 한다.[2] 공군장교 시절 '빨간 마후라'라는 드라마의 검열을 담당하면서 방송국을 계속 출입했다고 한다. 이때 한운사 작가와 친해졌다고...[3]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레전드 예능 프로인 8시라구! 전원집합을 본딴 프로그램 이다.[4] 이주일은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하춘화에게 생명의 은인이 됐고 하춘화에 의해 1979년 MBC에 추천돼 웃으면 복이와요에 출연했지만 "못 생긴 사람이 TV에 나와서 기분이 나쁘다"는 시청자들의 항의 때문에 1회차만에 하차당했다. 결국 이후에도 극장 쇼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5] 송해의 추천도 있었으나 송해의 동료였던 서영춘의 역할도 있었다. 1979년 서영춘은 이주일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야말로 빵 터지고 말았는데 코미디언으로서의 가능성을 즉시에 알아봤다고 한다. 그가 당시 이주일을 향해 했던 말이 "저놈 저거 방송에 나오면 무조건 뜰거야"였다. 서영춘도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이었기에 김경태 PD에게 이주일을 추천했을 가능성이 크다.[6] 문제의 그 장면은 12분 49초 부터.[7] 스타 PD로 한창 바쁘던 시절 B형간염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방치했다가 간암으로 악화된 것이었다.[8] 큰딸 김수미는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철학박사 공부를 하였고, 둘째 김수진은 풀러신대원에서 상담학을 전공한 교수이며, 막내 수경은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석사공부를 하였다. 가족 중 유일하게 할아버지를 따라 PD인 이한길은 패사디나에 소재한 명문 Art Center College of Deisgn에서 석사공부를 마치고 현재 Los Angeles County Fire Department에서 Video Specialist로 활동하고 있다.[9] 준호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TBC AD 시절 어렵게 살던 중 독감에 걸려 어린 나이에 일찍 저 세상으로 보낸 아픔을 겪기도 했다.[10] 게다가 검은 안경은 당시 최고 권력자의 트레이드 마크였다![11] 이 꽁트의 주요 배역으로 최양락서영춘, 이봉원이주일을 맡았었고 해설성우 조경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