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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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외교관.

2. 생애[편집]


1923년 11월 25일, 자강도 전천군 화룡리 빈농가에서 태어났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1937년 5월 진평간이학교를 중퇴하고 소작농으로 살다가 야상제지공장, 강계목재주식회사, 강계영림소 중앙제지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 하지만 남한 기록에 따르면 1939년 일본 주오대학 법과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이며 해방 이후 신의주 교원대학 부학장을 지냈다고 한다.

어쨌든 당간부로 발탁, 1947년 7월부터 평안북도 전천, 만포, 희천에서 민청사업 및 당사업을 하였으며 소련으로 유학하여 1955년, 소련공산당 고급당학교를 졸업하였다. 1956년 1월, 자강도 당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어 1958년 신의주 당위원장을 겸하였다. 1958년 1월, 자강도 당위원장 김용진이 평양시 인민위원장으로 이임하면서 후임 자강도 당위원장으로 승진하였다. 1959년,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보선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1년 11월, 소련으로 귀국해버린 한일무의 뒤를 이어 주 몽골 대사로 부임하였다. 1962년,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했으며 1964년 5월에 주 기니 대사로 이임하였다.

1967년 7월, 대외문화련락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68년 7월, 북한-몽골 친선협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1968년 10월, 북한-중국 우호협회 부위원장에 임명, 1969년 9월, 북한-북베트남 우호협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위원장 겸 당비서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1969년 10월, 도미니카 전 대통령 후안 보슈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그가 전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영빈관에서 대접하지 않고 일반여관에서 대접했다가 김일성에게 그런 문제를 묻지도 않고 멋대로 처리했다고 혼이 난 적이 있다고 한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유임되었으며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칠레, 우루과이,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스위스, 동독,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등을 열심히 다녔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위원장 및 정부대표단장 자격으로 인도, 네팔, 버마, 싱가폴, 핀란드, 시리아, 핀란드 등을 순방했다. 1973년 4월, 북베트남 지지 반미투쟁 조선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4년 11월에 방북한 일본 법률가 대표단이 자본주의 국가 법률가들이라고 푸대접했다가 또 김일성에게 혼나기도 했다고 한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에 재선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7기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4년 1월, 김만금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1985년 11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대외문화련락위원장,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모두 해임되었다. 현성일의 책에 따르면 만성 간염이 있어서 김정일 연회 참가가 불가능했고 김정일에게 자신은 더 이상 그를 모실 수 없다고 김정일의 측근연회를 사양했다고 알려졌다.

이 모든 공직에서 일시해임된 것을 보아서 숙청된 것으로 보이나 죽을 죄까진 아니었거나 건강 문제로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1990년 12월 27일에 간암으로 사망하였으며 부고 발표는 없었으나 나중에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편집]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 조선대백과사전 4권.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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