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굉필

덤프버전 :

성균관 문묘 배향 아국 18현

[ 펼치기 · 접기 ]
서배향
제1위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홍유후(弘儒侯)
설총
동배향
제1위

제2위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문성공(文成公)
안유
제2위
제3위
문헌공(文憲公)
정여창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제3위
제4위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제4위
제5위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문순공(文純公)
이황

제5위
제6위
문간공(文簡公)
성혼
문성공(文成公)
이이

제6위
제7위
문열공(文烈公)
조헌
문원공(文元公)
김장생
제7위
제8위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문경공(文敬公)
김집

제8위
제9위
문순공(文純公)
박세채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제9위
■ 진한 색: (동배향) 조선 5현
■ 진한 색: (서배향) 조선 5현
{{{#c00d45
적색}}}: 조선 종묘 배향공신
※ 순서는 선후배 순으로, 동순위일 경우 동쪽이 서쪽보다 선배이다. ※ 조선 5현: 조선시대에 최초 종사된 5인.






파일:김굉필.jpg

성명
김굉필(金宏弼)

대유(大猷)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한훤(寒暄)·말곡(末谷)
시호
문경(文敬)
본관
서흥 김씨
종교
유교 (성리학)
출생
1454년(단종 2년)
조선 한성부 정동
사망
1504년(연산군 9년) 10월 7일 (향년 51세)
조선 전라도 순천군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참고
5. 관련항목



1. 개요[편집]


나는 소학동자, 나랏일을 어찌 알겠는가

남효온의 사우명행록


조선 전기의 유학자이자 관리. 본관은 서흥. 김종직제자이며 조광조스승이고 남효온친구이다.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과 함께 동방사현이라 불린다.참조[1]


2. 생애[편집]


30세가 될 때까지 소학을 읽으면서 수기를 하였다. 김종직은 김굉필을 극찬했는데 ‘성인(聖人)이 될 바탕이 있다’고 칭찬했다.

40세가 넘어서야 벼슬에 나갔다. 김종직의 제자였지만 김종직이 현실 타협적인 면을 보인다고 비판하여 사이가 나빠졌으며 김종직이 죽었을 때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참조

1498년(연산군 4년) 7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朋黨)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임금의 정치를 비난하거나 시국을 비방했다”는 죄로 벌을 받게 된다. 곤장 80대, 평안북도 희천(熙川) 유배형을 받았다.[2] 2년 후 다시 전라남도 순천(順天)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1504년(연산군 10년) 9월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다시 한 번 연루되어 사약을 받게 되는데 향년 51세였다.

그 후 김굉필의 부인은 "책을 봐서 사형에 처해졌다"고 책을 전부 불태우고 자식들과 함께 경상남도 창녕으로 내려간다.

1610년(광해군 2년)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 이황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3. 기타[편집]


  • 소학을 좋아했으며 친구인 남효온의 '사우명행록'에서는 자신을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불렀다고 한다. 제자인 조광조 역시 소학을 매우 좋아했다.참조



4. 참고[편집]


사옹(蓑翁) 김굉필 “겉은 젖을망정 속까지 젖지는 않겠다”


5. 관련항목[편집]



[1] 동방 18현에서 조선 시대 초기 4명을 이어놓으면 이렇게 되는데 조선 성리학의 초기 계보이다.[2] 이때 아버지 부임지에 거주하던 조광조가 희천에 김굉필이 유배왔다는 것을 전해듣고 배움을 청하여 제자가 되며 소학동자라 불리던 김굉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5 23:00:58에 나무위키 김굉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