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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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로동당 간부부장
김국태
金國泰 | Kim Kuk Thae


파일:정치국원 김국태.jpg

출생
1924년 8월 27일 함경북도 성진군
사망
2013년 12월 13일 평양시
국적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직업
정치가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 개요
2. 생애
3. 장의위원회 구성
4. 수훈
5. 여담
6.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가. 김책의 아들로 비서, 정치국 위원 등 고위직을 두루 역임하며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를 섬겼다.


2. 생애[편집]


1924년 8월 27일, 함경북도 성진에서 빨치산 김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빨치산들 중에서도 김일성이 특히 존중을 표했던 최측근 김책의 아들이었던 덕분에 김일성대학 특설학부를 거쳐 모스크바종합대학으로 유학갈 수 있었다. 1956년 귀국 후 간부부 지도원으로 당직을 시작했다. 간부부 과장을 거쳐 1961년 간부부 부부장으로 승진한 후 1962년 중앙당학교 지도부 부부장으로 배치되었다. 여기서 눈에 띠는 것이 1963년에는 중장 계급을 부여받고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에 임명,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등 무력기관 직책을 역임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김국태는 30대의 젊은 나이부터 김일성에게 중용되고 있었다. 부고의 발표를 보면 간부부 및 총정치국, 사회안전성 복무 시기에 소위 반당 종파분자들을 숙청하는데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1967년,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 숙청당한 김도만의 후임으로 선전선동부장에 임명되었다. 이 경력 역시 특기할만한데, 당시 선전선동부에서 일하고 있던 김정일과 인연을 맺게 되고 이후 그의 후계세습을 적극적으로 돕게 된 것이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69년 1월, 김갑순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70년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선전선동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역사, 선전선동 문제를 담당하여 유일사상, 혁명전통교양을 정리하여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에 큰 공을 세웠다. 1972년 12월, 리경석 장의위원, 1974년 9월, 김경인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76년에는 김일성고급당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1977년 12월, 에티오피아 대사에 임명되어 잠시 중앙정계에서 멀어졌다. 김국태가 지병으로 중앙에서 활동을 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으로 알려져있다.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도 탈락한 것이 확실한데, 4,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도 분명히 지냈음에도 로동신문 부고에서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부터 했다고 구라를 친 것이다. 1980년 7월 21일, 멩기스투와 작별방문을 하고 나서 귀국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83년에 선전선동부장으로 복귀, 교육부장을 거쳐 1985년에 간부부장에 임명된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3년 9월, 김일대 장의위원,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 1987년 8월, 리진수박영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88년에 발생한 대양무역 사장 김정민 귀순 사건에 휘말려 간부부장에서 해임, 1990년에는 김일성고급당학교장을 맡았고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20중전회에서 간부비서로 복귀하여, 1993년 1월에 간부부장에 재임명되었으며 리계백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무려 17년간 간부부장을 역임하였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김정일이 집권한 후 그를 열심히 보좌했으며 김정일은 그를 특별히 심장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김국태가 맞느냐 아니냐 설왕설래가 많았는데, 2001년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은 러시아 극동연방관구 대통령 대리인인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에게 김국태가 얼마 전 뉴욕에서 심장 수술을 받았다고 자랑한 바가 있다.

김정일이 정상회담을 한다고 하면 으레 김국태가 동행했으며 10기 최고인민회의와 12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 자격심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2009년 3월, 홍성남 장의위원,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0년 9월, 김정은 세습을 준비하기 위해 3차 당대표자회가 열리면서 간부비서 및 간부부장 자리는 김평해에게 물려주었으나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 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에 선출되었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월, 박정순 장의위원장을 지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2년 2월 9일, 김정일훈장의 1차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새 수령이 된 김정은 치하에서도 주요 행사에 등장하는 등 잘 나갔으나 이미 80대 후반의 고령인지라 골골대더니 2013년 12월 13일 오후 6시 20분에 89세를 일기로 급성심부전 및 호흡부전으로 사망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김국태동지는 당과 수령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주체혁명위업의 승리적전진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여온 우리 당의 충직한 혁명전사이다. (...) 김국태동지는 전후 당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나선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의 여독을 청산하기 위한 원칙적인 투쟁을 벌려 당과 수령의 사상과 권위를 견결히 옹위하였으며 사회주의 전면적건설시기 당중앙위원회와 인민군대, 인민보안기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면서 전당에 유일사상체계를 튼튼히 세우며 혁명무력에 대한 당의 령도를 확고히 보장하는데 기여하였다. (...) 김국태동지는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중앙의 령도에 무한히 충실하였다. 김국태동지는 당과 수령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인복무정신, 확고한 혁명적원칙성과 겸손한 품성으로 하여 우리 당원들과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김국태동지를 잃은것은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 큰 손실로 된다."라고 크나큰 찬사를 보냈다.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 위원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조선로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충직한 혁명동지'의 한 사람으로 허담, 연형묵, 김중린, 허정숙, 김용순, 김양건, 전병호, 박송봉, 리찬선, 리제강, 리용철, 강량욱, 리종옥, 김락희, 안달수와 함께 김국태를 언급하였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4. 수훈[편집]



5. 여담[편집]


김국태의 딸 김문경은 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을 지냈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딱히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않았다.

동생 김정태는 조선인민군 정찰국장에 이르렀으나 1969년 1월, 김창봉, 허봉학이 숙청될 때 같이 숙청되어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이후 복권이 되어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것이 확인되었다. 북한의 설명에 따르면 3년 후에 복권되어 대흥총국 부총국장으로 일했으며 1987년 11월 12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최측근이자 선배 격이었던 김책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김정일도 사석에서는 김국태를 형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6. 참고문헌[편집]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0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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