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남(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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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선전선동부장
김기남
金己男 | Kim Ki Nam


파일:국무위원 김기남.jpg

출생
1929년 8월 28일 (94세)
함경남도 금야군
국적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직업
정치가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지역구
평양시 락랑구역 정오선거구(제48호)

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선전선동 전문가이다.

2. 생애[편집]


1929년 8월 28일, 함경남도 금야군에서 태어났다. 강원도 원산의 중학교에서 민청위원장으로 일하다가 외국 유학 간부로 선발되어 1946년 5월, 중견간부훈련소에 입학하여[1] 몇달간 공부한 후 1946년 9월 18일에 소련으로 보내져 모스크바 국제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김기남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유학생 일동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참전을 탄원했으나 김일성이 만류하여 계속 공부를 하게 되었고, 1951년 여름에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유학파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그의 략력을 발표할때 정확히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지는 은근슬쩍 말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첫 전공은 선전이 아니라 경제 쪽이었으며 경제전문가 자격을 취득하고 처음에는 김일성대학 교수로 일하다가 학부장까지 승진했다.

1952년 내각 외무성 참사에 임명, 1957년에 주중 북한 대리대사, 1958년 당 국제부 과장, 1961년, 중앙위원회 과학교육부 부부장 등을 거쳤다고 한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 때 외국에서 온 공산당 대표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김기남이었다.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의 주도권 투쟁 속에서 1963년 10월 28일, 논설 <사회주의 진영을 옹호하자>를 발표하면서 김일성의 박쥐외교를 옹호하였다. 근데 이때 무리하게 밤을 세워가면서 글을 쓰다가 앓아눕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로도 건강이 썩 좋지 않아서 김일성이 주치의를 보내서 치료해주는 등 김기남을 총애하였다. 1966년 8월 12일에는 논설 <자주성을 옹호하자>도 발표하였다. 그러다가 1966년에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되면서 선전전문가의 커리어를 밟기 시작했다. 김정일의 초기 호칭이었던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이 김기남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1972년 4월, 근로자의 부주필이 되었으며 1974년 12월에 근로자 책임주필이 되었다. 1976년 4월에 로동신문 책임주필에 임명, 12월에 조선기자동맹 중앙위원장을 겸하였다. 1977년 11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상설회의 대위원이 되었다. 당내에서 선비, 양반이라고 불릴 정도로 꼿꼿한 인물이지만 김정일의 연회에만 초대되면 갑자기 붕붕 날아다니면서 신나게 놀아서 김정일의 측근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로동신문 책임주필에 유임되었다. 1981년 10월, 국제기자동맹 부위원장에 선출, 1982년 2월에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겸 상설회의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5년 10월, 김국태의 뒤를 이어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86년 2월, 6기 11중전회에서 로동신문 책임주필에서 해임되고 리성복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86년 4월, 김좌혁천세봉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런데 1987년 9월에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으로 강등되면서 잠시 커리어가 주춤하는가 하더니 1989년에 선전선동부장으로 복귀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으면서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92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20중전회에서 그때까지 김정일이 맡고 있던 조선로동당 선전비서에 임명되었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김정일 시대에도 중용되었다.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3년에 강석숭이 사망하자 후임 당력사연구소 소장을 맡았고 2003년 8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2005년 8월, 조평통 부위원장 자격으로 6.15 공동행사 북측 대표단장으로 참석하였고, 이때 통일선전부 제1부부장 림동옥, 조평통 서기국장 안경호 등과 함께 북측 정치인 중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 2009년 4월, 홍성남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9년 12월, 김정임에게 당력사연구소장 자리를 물려주고 퇴임했다.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지낸 후 5월에 다시 선전선동부장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8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치국 위원 겸 선전비서로 발탁되면서 김정은 시대까지 3대에 걸쳐 선전선동부장을 하게 된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월, 박정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1년 5월, 김정일의 비공식 중국 방문을 동행하였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자 장의위원을 지내는가 하면 리영호, 장성택, 우동측, 최태복, 김영춘 등과 함께 장의차를 운구한 장의차 8인방 중 한명이 되었다. 2012년 2월, 김정일훈장을 받았으며 2012년 11월 14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국가체육지도위원회가 설치됨에 따라 초대 위원이 되었다. 2013년 12월, 김국태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4년 3월,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2014년 7월, 전병호 장의위원,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 2015년 12월, 김양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런데 일부 보도에 따르면 2015년 4월에 3개월간 가벼운 혁명화를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기존의 비서국 비서에 해당하는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선전선동부장에 임명되면서 그야말로 장수만세를 보여준다. 2016년 5월, 강석주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6년 6월, 최고인민회의 13기 4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가 국무위원회로 거듭나자 1기 국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다. 하지만 90이 가까워오는 나이는 어찌할 수 없었는지 2017년 이후론 활동이 상당히 줄어들었고 당 부위원장이란 직함이 보도된 것은 2017년 10월이 마지막이었다. 2017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 당 부위원장, 선전선동부장에서 소환되어 박광호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2018년 4월, 최고인민회의 13기 6차 회의에서 국무위원회 위원에서 소환되었다. 그럼에도 2019년 3월, 1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3월 6일부터 3월 7일 사이에 개최된 제2차 전국당초급선전일군대회에 중앙위원회 고문 직함으로 등장하였다. 2019년 12월, 7기 5차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착석한 것을 봐서 이 시점까지 당중앙위원회 위원 직함은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2020년 1월, 황순희 장의위원을 지냈다. 2020년 10월, 조선로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 김영남, 양형섭, 최태복, 최영림, 김정각, 김경옥, 리수용, 안정수, 박재경 등과 함께 초대받았다.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도 김영남, 최영림, 최태복, 리용무 등과 함께 초대되는 등 정권의 예우를 받으면서 좋은 말년을 보내는 중이다. 2021년 9월, 북한 창건 73주년 안전무력 열병식에 손님으로 초대되었다. 하지만 2022년 9월의 정권수립 기념일에는 초대받지 못했다. 딱히 그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진 않고 고령이 문제로 추정된다.

3. 참고문헌[편집]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1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21).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 인민들 속에서 100(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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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부에선 만경대혁명학원 등을 졸업한 것으로 파악했지만 김기남이 직접 쓴 글에 따르면 아닌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