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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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箕錫
1828년(순조 28) 2월 14일 ~ 1920년 1월 28일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광산(光山)[1], 자는 성극(聖極), 사호(賜號:왕에게 하사받은 호)는 우정(藕汀). 시호는 정무(貞武).


2. 상세[편집]


1828년 2월 14일 병마절도사(종2품)와 중군(中軍:종2품)을 지낸 아버지 김상순(金相順)과 어머니 여흥 민씨 민영길(閔永吉)의 차녀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845년(헌종 11) 정시(庭試) 무과에 급제하여 1847년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일찍이 2, 30대에 홍산현감과 금천군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876년에 당시 어영청의 어영대장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후 지속적인 승진을 거쳐서 1877년에는 총융사와 무위도통사를 역임하고 통제사, 금위대장, 강화부유수 등을 거쳐서, 마침내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흥선대원군이 다시 집권하며 복설한 삼군부의 '지삼군부사'에 임명되게 되었다. 그리고 1884년에는 수원유수에 임명되었다가, 같은 해 설치된 친군영의 우영사를 비롯한 별영사를 역임한 뒤 마침내 최고 관직중 하나인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또한 1886년 해방총관이 개칭된 해방영사를 역임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1888년 춘천유수를 지내며 춘천이궁 공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춘천유수를 지낸 이후로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것으로 보아서 춘천유수를 역임한 뒤에 관직을 내려와 사직을 한 듯하다.

이후 여생을 보내다가 1920년 1월 28일 별세하였다.

[1] 양간공후-판군기감사공파 33세 기(箕) 항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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