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수(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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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
金綺秀 | Kim Ki-soo


파일:김기수1832.jpg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출생
1832년 3월 30일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사망
1894년 6월 10일 (향년 62세)
본관
연안 김씨[1]
학력
1875년 별시문과 병과 급제
대표 경력
1876년 조선국 수신사 대표
정당
온건개화파
부모
김준연(부), 평산 신씨 부인(모)
배우자
부인 기계 유씨
자녀
양자 김사중(金思重)[2]
친인척
조부 김선(金䥧)
장인 유운환(兪雲煥)
외조부 신재관(申在寬)

계지(季芝)

창산(蒼山)
종교
유교 (성리학)

1. 소개
2. 생애
3. 기타
4. 참고 자료



1. 소개[편집]


조선 후기의 관리.


2. 생애[편집]


1832년(순조 32) 한성부에서 아버지 김준연(金駿淵)과 어머니 평산 신씨 신재관(申在寬)의 딸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음서로 관직에 진출, 1869년(고종 6) 6월 종9품 정릉 참봉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1871년 7월 종6품 의금부 도사(都事), 1873년 12월 종6품 한성부 주부(主簿), 1874년 7월 정5품 강릉 령(康陵令), 같은 해 11월 종6품 노성현감(魯城縣監) 등에 제수되어 차례로 역임했다.

그 뒤 1875년(고종 12) 별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여 종5품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제수되었다.# 1876년 조선은 일본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외국과 교류를 시작했는데 당시 정부는 앞선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그래서 우선 가까이에 있는 일본의 여러 사정을 직접 알아보기 위해 수신사를 보내기로 하였다. 이 때 수신사로 당시 예조참의로 있던 김기수가 뽑혔으며 김기수는 일행 76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이것이 근대 일본과의 1번째 교섭이었다. 일본에 건너간 수신사들은 20여 일간 일본에 머무르면서 일찍 외국과 교역을 시작한 일본의 전신, 철도, 군함 등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군사, 기계, 학술, 교육에 관련한 여러 시설들을 관람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일동기유>와 <수신사일기>인데 김기수는 이 책에서 쇄국 정책만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일본의 곳곳을 관람한 결과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김기수의 이 기행문으로 일본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김홍집 일행을 일본에 보냈으며 1881년 박정양을 포함한 신사 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고 김윤식 등을 청나라에 영선사로 보내 새로운 문물을 배워 오게 했다. 김기수는 이후 덕원부사, 대사성을 거쳐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황간, 청풍 지방에서 민란이 발생하자 안핵사로 파견되어 민란을 수습하였으며 이 공으로 김기수는 참판에 올랐다.

1894년 6월 10일 별세하였다.

3. 기타[편집]


  • 김기수는 글씨를 잘 써서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시 <영매> 등이 전해져 온다.


4.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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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자시윤공파-도일리 종중 22세 수(秀) 항렬.[2] 내자시윤공파-원읍 종중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