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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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감독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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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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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1997년
이름
김기영
분야
영화
보관문화훈장(3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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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상
제7회
(1970년)


제8회
(1971년)


제9회
(1972년)

최하원
(독 짓는 늙은이)

김기영
(화녀)


김효천
(소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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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부문 감독상
제8회
(1972년)


제9회
(1973년)


제10회
(1974년)

신상옥
(전쟁과 인간)

김기영
(충녀)


이원세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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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최우수영화상 감독상
우수국산영화상
(1960년)

제1회 한국최우수영화상
(1961년)


제1회 대종상
(1962년)
유현목
(구름은 흘러도)

김기영
(하녀)


신상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김기영
金綺泳 | Kim Ki-young



출생
1919년 10월 10일[1]
경기도 경성부 교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사망
1998년 2월 5일 (향년 78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 자택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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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중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 / 학사)
부모
아버지 김석진, 어머니 한진초
배우자
김유봉(1928년 10월 13일[2] ~ 1998년 2월 5일, 향년 69세 #)
자녀
아들 김동원(1952년생)
아들 김동양(1958년생)
종교
불교
데뷔
1955년 영화 '죽엄의 상자'
1. 개요
2. 생애
3. 영화 스타일
4. 이야깃거리
4.1. 기묘한 죽음
5. 작품
6. 참고 자료
7. 수상
8. 말말말



1. 개요[편집]


대한민국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 제작자, 편집자.

당대의 대표적인 작가주의 감독이었던 것과 동시에, 최고의 흥행 감독었으며, 박찬욱, 봉준호, 임상수, 류승완 등 200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후배 영화광 세대 감독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김지미, 안성기, 이은심, 윤여정 등 수많은 신인 배우들을 발굴하고 스타로 만들기도 했다. 명실상부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세계관을 가진 감독이다.


2. 생애[편집]


1919년 경성부 교동에서 태어났지만 소학교 3학년 재학 중 평양으로 이사를 하면서 평양에서 자라온 그에게 평양은 제2의 고향이었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으로 올라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고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교토에서 요리사로 일하며 고학했다.[3] 1942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944년 장기 무단결석으로 퇴학당했다.[4]

광복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가 1950년 졸업했다.[5] 연극부에서 연출을 맡던 중 평양에서 헨리 입센의 유령을 공연했다. 공연은 기성 연극 수준을 뛰어넘는 가작이라는 극찬을 들었고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연극이나 영화의 검열을 담당하는 관계자로부터 모스크바 유학 제의를 받기까지 했었는데, 거절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하였고, 이때 부인과 결혼하였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부인 김유봉도 1950년에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전문부를 졸업한 치과 의사였는데, 대학 시절 연극부 활동을 같이 했었다고 한다.

이후 주한미국공보원에 스카우트 되어 <나는 트럭이다>, <수병의 일기> 등의 문화 영화, 홍보 영화를 만들다가 미 공보원의 지원으로 장편 극영화 <죽엄의 상자>를 1955년에 완성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상업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시절 영화 필름이 그러듯이 초창기 영화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필름이 남아있는 첫 상업 영화 <양산도>는 필름의 훼손이 심해 결말부 부분이 아예 사라져 버렸고, 데뷔작인 <죽엄의 상자> 같은 경우 그 필름이 뒤늦게 발견되었지만, 사운드 네거티브 필름이 아예 소실 되었다.

당대의 흥행 감독이자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예술성으로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던 대표적인 감독이었지만 점점 대중들에게 외면 받아, 1990년대 초반 쯤에는 거의 잊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영화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던 박찬욱, 봉준호, 임상수, 류승완 등의 후배 감독들과 여러 신진 영화 평론가들이 적극적으로 그의 작품을 재조명하고 연구한 덕에 덕에 다시 빛을 발하게 되었다.

김기영은 하녀의 새로운 리메이크작인 악녀를 기획하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집안에서의 화재로 부부 모두 사망하게 되었다. 부부가 사망했을 때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김기영 회고전이 열리기 며칠 전이었다고 한다.

2018년 11월 CGV 아트하우스 명동씨네라이브러리에 헌정관이 설립되었다. 임권택, 안성기, 박찬욱에 이어 네 번째이며, 사망한 인물 중에서는 첫 번째다.


3. 영화 스타일[편집]


김기영의 영화는 전체적으로 남성미를 강조하던 당시 시대상과는 사뭇 다른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하며,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부인에게 의지하는 남성상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이와 반대로 여성들은 강인하고 노동에 적극적으로 종사하며, 개인적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하녀의 역할로서 외부에서 침입한 여성은 계급적 욕망을 위해 집안의 본처와 충돌하며, 본처는 중산층의 삶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동 계급의 여성과 대립하는 내용이 '하녀 시리즈'의 기본 구조다. '이어도'에서도 남성은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으며, 경제 활동 뿐만 아니라 자신과 공동체의 운명까지 여성들이 모두 결정한다.

하녀 시리즈부터 김기영의 영화에는 쥐, 계단, 담배, 독약 등이 주요하게 쓰이는데 특히 쥐가 자주 등장한다. 김기영의 광팬인 봉준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히치콕에게 가 있다면, 김기영에게는 쥐가 있다"고(...) 참고로 영화 촬영 중에 윤여정, 이은심 같은 여배우들이 직접 쥐를 잡고, 때리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쥐에 맞기까지 한다. 이 경험 때문에 화녀에 출연했던 윤여정은 당시 "촬영만 끝나봐라, 이 감독 내가 다신 말이나 거나 봐라" 하고 이를 갈았다고 한다. 물론 그래놓고 윤여정은 다음작 충녀에 또 출연했다.(...)

김기영의 영화들은 전체적으로 묘한 에로티시즘이 풍기는데, 그러면서도 굉장히 기괴하다. 충녀에서의 알사탕 위에서의 정사씬도 그렇고. 충녀가 시체스 영화제와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 때, 현지 관객들도 하수도 장면을 보고 경악을 했다고 한다. '이어도'에서의 시체와의 섹스신도 그랬다. 이게 국내 방영 및 극장 개봉당시 검열에 의해 잘려나갔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일본 NHK-bs 2 방영 당시 이 장면이 그대로 실리면서, 이 버전을 녹화한 것이 고가로 팔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다행히 영화사에서 원본 필름을 소장하고 있었던 터라, 이후 삭제 장면 없이 그대로 디지털로 복원될 수 있었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에서는 심지어 '뻥튀기 과자' 위에서의 정사씬까지 등장한다.

김기영을 알리는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는 하녀 시리즈의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가 붙잡은 여자의 머리가 계단 층계 하나하나에 부딪히는 장면. 특이한 것은 이런 기괴한 장면을 스스로 찍으면서도 그걸 싫어했다는 것이다.

영화에 그때의 시대 상황과 현실을 집어넣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10대의 반항'이라는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만든 적도 있다. 또한 세계적인 문화 트렌드를 읽어내는 능력도 뛰어나서 그의 작품들을 보면 당시의 트렌드를 알 수 있다.[6] 놀라운 점은 그런 트렌드를 단순히 따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트렌드를 자신의 영화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완전히 자기화시켰다는 점이다.

또 하나 독특한 점은, 자신의 영화를 여러번 반복해서 리메이크 했다는 점이다. 김기영의 초기 히트작인 하녀는 당대의 흥행 영화이면서도 동시에 작품성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본인도 하녀 시리즈에 애착이 있었던 터라,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여 반복해서 리메이크 했다.

4. 이야깃거리[편집]


  • 중학교 때 쓴 시가 일본 신문에 실리는가 하면, 틈틈이 그린 그림이 공모전에서 1등으로 뽑히기도 하는 등 글과 그림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술 교사로부터 김 군은 재주가 너무 많아. 그걸 모두 할 수 있는 직업은 소학교 선생밖에 없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 전쟁 시절에 미 공보원에서 혼자 영화를 습작하며 감독이 된 사람이라 많은 해프닝이 존재한다. 조명 기술자, 장비가 없어 거울 등으로 조명을 내거나 사진 기술자가 하는 걸 보고 그대로 영화에 적용하는 등 직접 부딪히고 연구하며 영화를 익혔다. 당시 미 공보원은 첨단 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두고 '난 미국 유학 공짜로 다녀왔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 이은심, 이화시, 윤여정 같은 배우들을 봐도 알겠지만, 김기영은 전형적인 미인 여배우보단 좀 특이하고 퇴폐적인 느낌의 여배우를 선호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윤여정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윤여정에 대해 자기의 말을 알아들은 유일한 배우라 평했으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에도 크게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고 난 후에도 그녀에게 '내 작품에 출연해달라는 건 아니고, 미스 윤이 살던 집값이 내렸으니 한국에 한 번 와봐요.'라는 식으로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 윤여정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과 끈질기게 대화하며 영화 속 자신의 캐릭터 형성을 위해 연구하는 등 김기영의 열의가 당시에는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에게 늘 존댓말을 사용했던 점이 굉장히 인상 깊었던 점 중 하나라고. 김기영이 거의 30살 이상 나이가 더 많은 데다, 당시에는 배우들을 함부로 대하는 감독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기에 이는 굉장히 특이한 점이다.

  • 그는 시나리오도 자기가 늘 직접 썼다. 특유의 문어체 대사는 매우 독특해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일 정도. 한편 김기영은 시나리오를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아서, 영화 연출을 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된 노년 즈음에는 영화화 되지 않은 시나리오가 자택 서랍에 가득 있었다고 한다. 생전에 그의 미발표 시나리오를 몇편 봤던 박찬욱 감독의 증언에 의하면, 김기영의 작품 답게 하나같이 내용들이 기기묘묘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수중 세계에서의 삼각관계 멜로 드라마, 화성의 우주 식민지를 정복하는 어느 여성의 이야기, 뱀장어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이야기 등이었다고(...)[7]

  • 어려서부터 워낙 다재다능했고, 워낙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였기에 조명부터 디자인까지 본인이 직접 손대야 직성이 풀리던 성격이었던 것 같다. 하녀 같은 경우는 본인 손이 안 닿은 것이 없었을 정도라고. 조명과 카메라, 디자인에 대한 감각과 이해가 매우 뛰어났으며 카메라 배치도 본인이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 그의 영화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집과 인테리어가 하나의 배우로서 역할을 한다고 할 정도로 소품 하나하나가 공들여진 모습(특히 시계, 벽지, 스테인드글라스)은 박찬욱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박찬욱 영화의 특징 중 하나인 벽지에 대한 강한 집착도 사실 이 양반이 원조다. 박찬욱이 김기영 영화 중 제일 좋아한다는 화녀 82와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를 보면 그가 김기영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박찬욱 본인도 박쥐, 스토커 같은 작품들의 예시를 들며 자신이 무의식중에 김기영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하녀 블루레이 해설에서 밝힌 바 있다.

  • 워낙 역량도 뛰어나고 논리적인 사람이라 배우, 스텝들이 잘 따랐다고 한다.

  • 이데올로기나 형식, 틀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다. '난 무슨 무슨 주의 같은 것들을 젊은 시절부터 싫어했다'고 말한 적도 있고, 부산 영화제에서 30년대 이후 발달된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았냐는 칸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질문에 '난 그런 거 잘 모른다. 난 무슨 무슨 주의 같은 것들이 싫다.'고 답하기도 했다. 자신은 그저 자기 내면의 무의식을 영화에 그대로 옮긴 것 뿐임을 강조했다.[8]

  • 그것과는 별개로, 김기영은 평소 카를 마르크스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존경하여, 그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가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김기영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두가지 개념이 바로 계급욕망이기 때문. 위 각주에서 언급한 부뉴엘도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영향을 받았던 걸로 유명하다.

  • 대한민국 영화 감독들 중에선 대표적으로 봉준호, 박찬욱, 임상수 등이 김기영의 열혈 팬이다. 박찬욱은 영화 평론가 시절에 기회만 되면 김기영에 대한 평론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대중들에게 알렸으며, 임상수는 아예 하녀를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특히 봉준호는 1971년작 '화녀'의 대사를 모두 외우고 있을 정도로 팬인 터라, 한국영상원에서 나온 하녀 복원판 DVD 코멘터리도 녹음에도 참여한 바 있다. 심지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소감에서도 김기영에 대한 존경을 따로 표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경외감은 봉준호의 영화 세계에도 상당 부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봉준호는 황금종려상 수상후 김기영에 대한 존경을 표하며, 그의 영화들 하녀, 충녀, 바보사냥 등에서 그의 칸 그랑프리 영화 기생충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대표적인 블루레이(Blu-Ray) 브랜드 크라이테리언과의 인터뷰에서는 하녀를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 마틴 스콜세지도 하녀를 보고 호평을 하면서 필름 복원 작업에 투자하기도 했으며 외국 컬트팬들에게도 상당히 높게 평가된다.

  •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미국에서 이걸 보고자 찾아온 어느 백인 관객은 1960년에 이런 영화가 있을 줄은 몰랐다면서 감탄한 적도 있다. 김기영 컬렉션 소개 포스트. 김기영에 대해 굉장히 잘 소개되어 있다.

  • 엄청난 영화광이었다. 무려 5살때부터 영화관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때로는 몰래 들어가서 영화를 즐겼었다고 한다. 이 시절 수많은 무성 영화들을 탐닉했다. 말년에는 보고 싶은 영화를 일본에 가서 먼저 보고 오기도 했다. 일본에서 생활했던 적도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거의 모든 국내 개봉작과 국내외 비디오를 꾸준히 섭렵하고 지냈다고.

  • 생전에 남긴 글에 의하면 일본에 있던 시절, 당시 일본엔 외국영화만을 틀어주는 극장이 있었다. 1960년대 일본은 이미 인디 영화 조류인 아트 시어터 길드(ATG)를 비롯해 미니시어터 같은 예술 영화 시장이 활성화된 상태였다. 심지어 장 뤽 고다르 영화가 거의 동시기에 소개되었을 정도. 그 시절 시네필들이 대게 그렇듯 영화관에서 거의 살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매일 영화를 보러 다녔다고 한다. 이 시절 르네 클레르 같은 감독들의 영화를 많이 봤었다고 한다.

  • 심지어 그는 최신 음악 트렌트에도 밝았다. 영화 음악 감독 한재권이 1990년대 초 즈음 영화 음악 작업과 관련해서 김기영을 만났던 적이 있었는데, 만나기 전에는 '그 노인네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하나' 하면서 전전긍긍했지만, 정작 김기영을 만나서는 한 시간 동안 같이 힙합 음악 이야기만 하다가 왔던 일화가 있었을 정도(...)

  • 프로필에 대해 인터넷 등에서 치과대학으로 잘못 수록된 정보가 많다. 그 이유는 그가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한 1950년 같은 해에 그의 부인인 김유봉도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한 데다가 하필 치과대학에 동명이인인 다른 김기영(金基永, 한자가 다르다.)도 같이 졸업을 하게 되어 엮이면서 이력이 섞였기 때문이다.

  • 생전에 모르는 영화가 없는 수준이었으며 생전에도 새로 나온 영화들은 극장에 걸리자마자 모두 보곤 했었다고 한다. 무슨 영화 봤냐고 물어보면 그 영화에 대한 세부적인 것, 느낀 점, 분석 등을 줄줄이 쏟아냈다고. 쿠엔틴 타란티노, 박찬욱 뺨칠 수준. 생전에 촬영된 다큐멘터리에서 '영화가 없으면 난 죽는다. 영화는 내 모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영화를 사랑했다. 때문에 영화를 잘 보지 않는 영화인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 김기영 감독에 대한 대표적인 팬으로 꼽히는 류승완 감독은 "그런 기괴한 영화들을 만들었는데 충녀나 하녀 같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다니, 그때 한국 관객들 수준이 지금보다 더 높았던 건지..."하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정확히는 그때는 TV나 라디오 등의 다른 미디어가 귀한 시절이었던지라, 고급 문화이자 대중 문화로써의 영화 매체가 유독 더 관심을 받았던 점도 있고, 특히 60년대에서 70년대 초반까지의 기간은 한국 영화의 첫번째 전성기에 해당되는 시기였으므로, 영화관에 관객도 매우 많이 들었던 때다. 물론 그런 점을 감안해도 김기영 같은 철저한 작가주의 감독이 대표적인 흥행 감독이었던 점은 매우 독특한 부분임에 틀림 없다.

  • 사인을 쉽게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인을 해주기 전에 영화를 보았냐고 물어본 후, 봤다는 대답이 돌아와야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 촬영장에 콘티를 직접 그려 오기는 했는데, 다른 스태프들이 못 보게 조그마한 종이에 그려와서 혼자만 봤다고 한다.

  • 히치콕을 좋아하여 <히치콕과 트뤼포의 대화>를 일본 번역본으로 읽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히치콕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는 하스미 시게히코로 김기영도 하스미 시게히코 번역본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여튼 이런 식으로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책이나 영화는 직접 일본의 잡지, 시나리오를 구해서 읽었었다고 한다. 김기영보다 훨씬 어린 최인훈 세대만 해도 한국어보다는 일본어에 익숙한 세대다. 김기영에 이르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 오우삼의 영화 브로큰 애로우가 흥행에 성공한 원인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적이 있었는데 이 역시 흥미롭다.

자네한테만 말해주지. 그건 말이야, 주인공이 아무리 쌍권총을 들고 설쳐대도 나쁜 놈들이 쏘는 총은 하나도 안 맞잖아. 그건 게임 같은 거거든. 바로 그거야. 요즘 애들은 게임을 좋아한다. 그 영화는 게임처럼 찍었어. 그래서 손님이 드는 거야. 쉿,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게. 비밀이니까. 우하하핫...! #


  • 기인이라는 별명답게 제작진을 따돌리고 혼자 고기를 구워 먹었다거나, 집값이 싸다고 폐가를 구입해 살았다거나, 하녀 시리즈에 나온 쥐들이 실은 그가 직접 키운 쥐들이었다거나 하는 그의 특이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아주 수두룩하다. 다만 혼자 고기를 구워먹었다는 이야기는 김기영 감독이 워낙 독특한 캐릭터이다 보니 근거가 없는 소문으로 퍼졌던 이야기였던 듯 하다. 김기영의 페르소나 중의 하나인 이화시 배우가 증언한 바로는, 좋은 음식이 있으면 배우나 스태프들에게 늘 나눠 주곤 했다고 한다.

  • 목소리가 상당히 굵고, 말투가 어눌하다. 웃음소리도 매우 특이했던 듯하다. 톤이 높고 쩌렁쩌렁하지만, 아이들이 킥킥대는 것처럼 때로는 순진하게도 들리는 웃음소리였다고. 그리고 의외로 상당히 유쾌한 성격이었다. 젊은 영화 학도들과의 대담에서 과거 재밌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기도.

  • 생전에 컬트 감독으로 재조명받으면서 촬영된 다큐(감독의 인터뷰도 들어있다.)가 하나 있는데, 그의 가치관 등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KMDB VOD로 감상할 수 있다.

  • 그의 이름은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이 수상 소감에서 자신이 첫 영화를 찍었던 감독으로 언급하면서 전세계에 회자되었다.

  • 존 포드가 내한한 적이 있는데 이때 한국 감독들과 환영회를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김기영만 허름한 차림이어서 [9] 감독 맞냐고 놀랐던 모양. (출처: 이영일의 한국영화사 강의록)

  • 신연식 감독이 근현대사 예술인 10명의 삶을 영화화 하는 아티스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해당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품으로 김기영 감독이 겪었던 일을 모티브로 하여 2023년에《거미집》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신연식 감독이 직접 연출할 예정이었으나 김지운 감독이 각색해 연출하였으며 2023년 칸 영화제에 진출하였다.#
    • 김기영 감독의 유족들이 영화 《거미집》의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유족들은 주연 송강호가 맡은 배역이 김기영 감독을 모티브로 한 것이며 고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해 인격권과 초상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4.1. 기묘한 죽음[편집]


김기영의 아들 김동원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기영의 죽음에 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영화처럼 기묘한 죽음과 또다른 유작들
누가 봐도 기묘한 죽음이었다. 김기영 감독 부부는 1998년 2월 5일 새벽, 명륜동 집[10] 화재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까지 미공개 작품이었던 그의 영화 <죽어도 좋은 경험>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 부부가 화재로 죽는 것이었다. 그로테스크, 괴짜. 1960년대 신문에 실린 영화 인상평부터 김 감독을 따라다니던 말이었다. 그가 전에 기거하던 주자동 양옥집은 귀신이 나오는 흉가라서 싸게 구입해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들 동원씨는 처음에 살던 젊은이가 철조망에 목이 걸려 죽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앞서 인용한 <전설의 낙인>에 따르면 대학로의 집은 이미 두 차례나 노부부가 죽었는데, 대들보가 무너지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한날 한시에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새벽 2시에 달려갔다. 잿더미가 내 키보다 높게 쌓였다. 아들 동원씨는 집이 화재로 전소된 후 기이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잿더미 속에서 비닐에 싸인 문서가 발견되었다. 동원아 보거라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유서였다. 너무 놀랐다. 유서 첫 마디는 내가 이 한옥을 사지 말자고 했는데 네 엄마가 우겨서 샀다는 책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그 다음이 이것이다. 내가 공중에 떠서 우리집 마당을 내려다 보는데 아마도 내가 죽은 모양이다. 네(동원씨)가 마당에 삼발이를 치고 땅을 파고 있는 것이 보인다. 김 감독이 묘사하고 있는 모습이 마당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았던 것이다.
[단독]고 김기영 감독 유작 시나리오 생존자 찾았다


5. 작품[편집]


김기영 감독 장편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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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죽엄의상자.png
파일:양산도.png
파일:봉선화(김기영).png
죽엄의 상자 (1955)
양산도(1955)
봉선화 (1956)
파일:여성전선.png
파일:황혼열차.png
파일:초설.png
여성전선 (1957)
황혼열차 (1957)
초설 (1958)
파일:슬픈목가.png
파일:10대의반항.png
파일:하녀(김기영).png
슬픈 목가 (1959)
10대의 반항 (1959)
하녀 (1960)
파일:현해탄은알고있다.png
파일:고려장.png
파일:아스팔트(김기영).png
현해탄은 알고 있다 (1961)
고려장 (1963)
아스팔트 (1964)
파일:병사는죽어서말한다.png
파일:여(김기영).png
파일:렌의애가.png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 (1966)
여 (1968)
렌의 애가 (1969)
파일:미녀홍낭자.png
파일:화녀.png
파일:충녀.png
미녀 홍낭자 (1969)
화녀 (1970)
충녀 (1972)
파일:파계.png
파일:육체의약속.png
파일:혈육애.png
파계 (1974)
육체의 약속 (1975)
혈육애 (1976)
파일:이어도(김기영).png
파일:살인나비를쫓는여자.png
파일:흙(김기영).png
이어도 (1977)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1978)
흙 (1978)
파일:수녀(김기영).png
파일:느미.png
파일:반금련.png
수녀 (1979)
느미 (1979)
반금련 (1981)
파일:화녀82.png
파일:자유처녀.png
파일:바보사냥.png
화녀 '82 (1982)
자유처녀 (1982)
바보사냥 (1984)
파일:육식동물.png
파일:죽어도좋은경험천사여악녀가되라.png
파일:김기영서명.png
육식동물 (1984)
죽어도 좋은 경험(천사여 악녀가 되라) (1990)
상세정보 링크 열기



김기영은 총 32편의 장편 영화를 연출했다. 이 문서에 소개된 영화는 김기영 연출작의 극히 일부분이다.

  • 나는 트럭이다: 1953년작. 트럭의 '1인칭 시점'으로 독특하게 진행되는 영화이다.


  • 양산도: 1955년작. 당시 상당히 흥행하여 극장이 늘어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2번째 장편 연출작.


  • 하녀: 1960년작.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영화. 주연은 김진규, 주증녀, 이은심이지만 현대인들은 조연으로 나온 안성기(아역)나 엄앵란을 더 잘 알 것이다. 감독이 애착을 가져서 1970년대에는 <화녀>로도 리메이크했고, 1980년대에는 <화녀82>로도 리메이크했다. 1990년대에는 악녀로 리메이크하려 했으나 결국 감독의 사망으로 불발되었다. 원래는 20분이 잘려나갔으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겨우 복원에 성공했다. <충녀> 같은 경우는 <하녀>와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만든 하녀의 변주 영화에 가깝다. <육식동물>은 <충녀>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 고려장: 1963년작. 나이 칠십이 되면 산봉우리에 올라가 죽는 관습이 있는 산악 마을에 하나 남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여인(주증녀)이 시집을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영화의 도입부에 현대 사회의 인구 증가 문제를 다루는 심각한 분위기의 토론회 장면이 등장하는데, 갑자기 아무 설명 없이 한자로 적힌 영화 타이틀과 사극톤의 본편으로 연결되는 기묘한 편집으로 유명하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4K 화질로 복원되었다. 영화 필름의 일부가 유실된 상태인데, 복원판에서는 유실된 해당 부분에서 시나리오 내용을 화면상에 띄웠다.

  • 아스팔트: 1964년작. 이건 필름이 소실되어서 줄거리만 남아있다. 형사 김진규는 밀수범 장동휘의 아내를 검거 도중 살해하고, 승진하지만 장동휘는 여장을 하고, 다리를 끌면서까지 김진규의 아내를 미행하는데... #

  • 화녀: 1971년작. 11년 만에 하녀를 리메이크 했다. 배우 윤여정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하다.


  • 육체의 약속: 1975년작. 이만희의 1966년 영화 <만추>의 리메이크작. 물론 원작과는 괴리가 커서, 그야말로 김기영 영화라 할 수밖에 없다.

  • 이어도: 1977년작.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를 영화화한 작품이지만, 별개의 작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소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천남석'이라는 남자의 미스테리한 실종과 죽음을 추적하면서, '파랑도'라는 섬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오묘한 심리, 섹슈얼리티, 독특한 모계 사회적 구조와 샤머니즘적 코드를 다룬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드물게, 환경오염과 공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비판하는 사회 참여적 코드가 등장한다.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1979년작. 김정철, 김자옥 주연의 옴니버스 괴기 영화(라고 밖에 말할 길이 없다). 남자 주인공이 여러 가지 일에 휘말리는 에피소드들을 엮었다.

  • 반금련: 1981년작. 중국의 소설 금병매를 원작으로한 작품. 당시 전두환 정권의 극심한 검열로 거의 영화가 난도질된 상태로 개봉했고, 이 때문에 더욱 기괴한 영화가 되었다. 김기영 특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천착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

  • 화녀 '82: 1982년작. 화녀를 11년만에 리메이크 했다.

  • 바보사냥: 1984년작.




6. 참고 자료[편집]




7. 수상[편집]


  • 1960년 제3회 부일영화상 감독상(10대의 반항)
  • 1961년 제1회 한국최우수영화상 시상식(현 대종상) 감독상(하녀)
  • 1964년 제7회 부일영화상 최우수작품상(고려장)[11] · 감독상(고려장)
  • 1971년 제8회 청룡영화상 감독상(화녀)
  • 1973년 제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충녀)
  • 1997년 보관문화훈장
  • 1998년 제1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공로상


8. 말말말[편집]


인간의 본능을 해부하면 검은 피가 난다. 그것이 욕망이다.[12]

김기영


단 한 마디로 괴인(怪人), 그 이전에 아무도 그렇게 영화를 만들지 않았고 그 이후에 누구도 그렇게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정성일


그 분은 정말 기인이셨어요.

윤여정, JTBC 뉴스룸 문화 초대석에서


이 상을 제 첫 영화의 감독이자, 천재적인 김기영 감독님에게도 바칩니다. 저는 그와 첫 영화를 만들었어요. 현재 살아계셨다면 제 수상을 무척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하셨을 거예요.

윤여정,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수상소감

[1] 이효인 영화평론가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 1922년생이라고 주장했다.[2] 출처[3] 어느 자전적인 글에서 이 시기 "교토의 대학 의학부에서 공부"했다고 서술하였으나, 또 다른 기록에서는 "문화 방랑자"의 생활을 했다고 하는 등 이 시기 이력이 확실하지 않다.[4] 김청강, 김기영 감독의 제국체험과 식민지적 무의식, 동아시아문화연구 제93집, 125~126, 2023.5[5] 1950년 치과대학을 졸업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는데, 앞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사실과 혼동된 듯 하다. 또 부인 김유봉이 같은 해 치과대학을 졸업한 사실, 같은 해 치과대학을 졸업한 동명이인 김기영(金基永, 한자가 다르다)이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혼동을 부추긴 듯 하다.[6] 1970년대, 호스티스물이 유행하자 그런 요소들을 집어넣은 화녀, 충녀와 청춘물이 유행하자 그런 코드를 집어넣은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가 대표적.[7] 이 내용은 박찬욱이 신인 감독 겸 영화 평론가 시절, 정은임의 영화음악 라디오 프로그램에 고정 패널로 출연할 때 김기영에 대한 팬심을 밝히며 증언했던 것들이다. 1995년 3월 1일 방송분.[8] 다만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김기영에게 영향을 준 감독으로 루이스 부뉘엘이 언급되곤 한다. 실제로 부뉘엘의 작풍은 김기영의 그것과 유사하다.[9] 전날 세트 촬영을 하다가 떨어져 팔이 부러졌다며 붕대는 감고 하얀 고무신을 신었으며 빗질 안 한 머리에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고.[10] 현재위치는 종로구 혜화로 45[11] 작품상은 제작자가 수상하는데, 《고려장》은 김기영 감독이 제작했다.[12] 그가 평생동안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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