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쇼트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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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
金琪焄 | Kim Kihoon


파일:울산과학대학교 김기훈 교수.png

출생
1967년 7월 14일 (56세)
서울특별시 중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리라초등학교 (졸업)
배재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체육대학 (체육학 / 학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체육학[1] / 석사[2])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 (체육학[3] / 박사[4])
종목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주종목: 1000m, 1500m
소속
울산과학대학교 스포츠재활학부 교수
신체
172cm, 76kg
가족
배우자, 아들 김태형(2010년생)[5]

1. 개요
2. 선수 경력
3. 은퇴 이후
4. 평가
5. 수상 기록
6.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남자 쇼트트랙 선수. 대한민국 최초의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대한민국 쇼트트랙 역사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를 획득했다.[6][7]


2. 선수 경력[편집]


이승훈과는 반대로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쇼트트랙으로 전향한 케이스에 속한다. 스피드 스케이팅 장거리 선수로 활동하던 고등학교 시절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했다가 선발된 것이다. 참고로 이때 1984년에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은 최초로 시행된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으로 김기훈은 선발전을 거쳐 선발된 최초의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종목을 바꾼 데 대한 어려움도 있었으나 태릉선수촌에서의 혹독한 훈련과 당시 정상급 쇼트트랙 선수들의 비디오를 구해 분석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1500미터 금메달을 획득했다.[8] 이어 이듬해 소피아에서 열린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 3개를 쓸어담았다. 그리고 2년 뒤 1990 삿포로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도 3관왕을 달성했다.

잠시 인대 부상으로 대표팀 에이스 자리를 이준호에게 넘겨주기도 했으나 지독한 의지로 재활에 매진한 끝에 다시 국가대표에 선발되고,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 이 대회 1000미터에서 김기훈은 선배이자 라이벌인 이준호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9]가 되었다. 5000미터 계주에서는 에이스의 상징인 마지막 주자로 출전하여 이후 김기훈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날내밀기로 극적으로 캐나다를 꺾고 팀에 금메달을 안겼다. 당시는 개인전이 1000미터 한 종목밖에 없긴 했지만 전종목 석권을 달성했다. 마지막 코너에서 인코스의 좁은 틈을 파고들고 날내밀기로 역전하는 마지막 장면에선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없다.[10] 당시 계주 경기에 출전한 국가대표 멤버들은 김기훈을 비롯해 모지수, 송재근, 이준호로 공교롭게 넷 모두가 이후 국가대표 지도자를 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올림픽 이후 미국 덴버에서 열린 1992 세계선수권에서 전종목을 석권하며 5관왕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2년 뒤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도 출전했다. 이 때 당시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아 세대교체론까지 제기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김기훈은 보란 듯이 1000미터에서 신예이자 자신을 이을 차세대 에이스 채지훈을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여 올림픽 쇼트트랙 최초의 단일 종목 2연패를 달성했다.[11]이후 1998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다가 은퇴했다. 이 때 나이는 31세였다.


3. 은퇴 이후[편집]


울산과학대학교 교수와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았다. 안현수를 국대 초기에 집중적으로 지도해 당대 최고의 선수로 키워냈다. 여기에 있어서 다른 선수들에게는 지도를 소홀히 함으로써 한체대파와 비한체대파의 파벌 갈등에 책임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12] 2005년에 안현수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대표 선수들이 코치의 차별대우에 반대하며 집단으로 태릉 입촌을 거부한 사건이 있었다. 안현수의 부재로 전력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던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남자대표팀이 상당히 좋은 성적을 냈던 뒤에는 김기훈의 지도가 있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에는 강릉 선수촌장을 맡았다.

2021년부터는 뭉쳐야 쏜다에 출연하고 있는데, 그가 세계적인 쇼트트랙 레전드로 불리웠을 때는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태어나기 전이었기에, 이 분은 어떤 전설인거지!?라고 의아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상이 어째 편성국장님 같다는 분위기 때문에 졸지에 별명이 김 국장님이 되었다. 같은 팀 멤버인 김용만과는 동갑내기로, 팀 내 공동 연장자이며 꼬꼬즈로 묶인다. 다만 방송에서의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은 탓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농구 기량도 기량이지만 예능에서 존재감도 약하다.


4. 평가[편집]


여러모로 현대 쇼트트랙의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쇼트트랙은 김기훈이 완성했다고 봐도 될 정도다. 쇼트트랙하면 떠오르는 장면 중 하나인 왼발을 빙판에서 떼고 오른발만으로 코너를 도는 자세를 처음 고안한 인물이 김기훈이다. 또한 아웃코스 추월만이 일반적이던 당시 쇼트트랙계의 상식을 깨고, 코너를 돌자마자 인코스로 추월한 후 아웃코스로 빠지며 코너를 돌고 다시 인코스를 차지하는 소위 호리병 주법을 창시한 인물이다. 지금은 정석이지만 당시에는 혁신적인 발상으로 끊임없이 연구와 자기 발전에 힘썼기에 가능했다. 또한 선수들이 코너링 시에 빙판에 짚는 왼손과 빙판 사이의 마찰력을 줄이기 위해 장갑에 에폭시 수지를 부착하는데 이것도 김기훈이 선수 시절 장갑에 본드를 붙인 것이 시초다.[13]


5. 수상 기록[편집]


파일:오륜기(여백X).svg 올림픽
금메달
1992 알베르빌
5000m 계주
금메달
1992 알베르빌
1000m
금메달
1994 릴레함메르
1000m
파일:오륜기(여백X).svg 올림픽 시범 종목[14]
1위
1988 캘거리(시범)
1500m
파일:국제빙상경기연맹 로고.svg 세계선수권
금메달
1989 솔리헐
1000m
금메달
1991 시드니
500m
금메달
1992 덴버
종합
금메달
1992 덴버
500m
금메달
1992 덴버
1000m
금메달
1992 덴버
1500m
1위
1992 덴버
3000m S.F.
은메달
1989 솔리헐
종합
은메달
1989 솔리헐
1500m
2위
1989 솔리헐
3000m S.F.
은메달
1991 시드니
종합
은메달
1993 베이징
1500m
2위
1993 베이징
3000m S.F.
동메달
1988 세인트 루이스
5000m 계주
동메달
1989 솔리헐
5000m 계주
동메달
1994 길포드
500m
파일:국제빙상경기연맹 로고.svg 세계 팀 선수권
금메달
1992 미나미마키
단체전
금메달
1994 케임브리지
단체전
은메달
1991 서울
단체전
파일:아시안 게임 로고.svg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0 삿포로
5000m 계주
금메달
1990 삿포로
1000m
금메달
1990 삿포로
1500m
은메달
1990 삿포로
500m
동메달
1986 삿포로
1500m
파일:FISU 로고.svg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1989 소피아
5000m 계주
금메달
1989 소피아
1000m
금메달
1989 소피아
1500m
금메달
1991 삿포로
500m
금메달
1991 삿포로
1000m
금메달
1991 삿포로
1500m
금메달
1991 삿포로
3000m
동메달
1989 소피아
500m


6. 여담[편집]


  • 아폴로 안톤 오노가 김기훈을 보고 쇼트트랙에 흥미를 가졌는데, 실제로 김기훈을 우상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 날 들이밀기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당시 극적인 상황 때문에 간혹 김동성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기술은 김기훈이 가장 먼저 선보였다.


[1] 스포츠심리학 전공[2] 석사 학위 논문 :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선수의 불안에 관한 분석 연구(1996. 8).[3] 스포츠심리학 전공[4] 박사 학위 논문 : 빙상선수의 지도자 행동유형과 역할모형 및 응집력의 관계(2007. 2).[5] 뭉쳐야 찬다 방송을 좋아해서 방송에 합류하는 것을 추천했다고 언급했다. 이후 2021년 5월 2일 방송분에 출연했다. 부친과 43세 차이가 나지만 다른 자녀가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김병현처럼 자녀가 모두 출연한 경우도 한명 있었지만, 대부분 일부만 출연했다. 이동국도 첫번째 쌍둥이 딸들은 나오지 않았고, 이형택의 경우도 막내딸 한명만 나왔고, 홍성흔도 은 나오지 않고 아들만 나왔다. 김기훈도 출연한 외자녀만 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나, 개인정보를 대부분 공개하지 않은 만큼 그들처럼 태형이의 친형이나 친누나가 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6] 하계올림픽을 포함한다면 양궁김수녕이 있는데, 이쪽은 대한민국 최초로 2관왕을 달성한 첫 번째 선수로, 김기훈보다 먼저 달성한 인물이다. 또한 대한민국 남자 선수들 중에서 최초로 2관왕 및 2연패를 달성한 인물은 김기훈이 맞다.[7] 현재는 윤미진과 올림픽 3관왕을 달성한 진선유안산도 김기훈에 이어 금메달 3개를 획득하여 동률이 되었다. 안현수는 2006년에 올림픽 3관왕을 달성한 후 러시아로 귀화하여 2014년에 다시 올림픽 3관왕을 달성한다.[8] 당시 쇼트트랙은 시범종목이었다.[9] 동시에 대한민국의 올림픽 통산 20번째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10] 이같은 날내밀기 기술은 지금은 볼 수 없다. 피니쉬 장면을 자세히 보면 김기훈과 캐나다 선수 모두 뒷발이 빙판에서 떨어져 있는데 현재는 피니쉬라인 통과시 스케이트날이 빙판에서 일정 정도 이상 들리면 실격이 주어진다.[11] 두 번째는 사격의 진종오로, 이쪽은 대한민국 하계올림픽 최초로 2관왕과 2연패를 달성했고, 3연패까지 해낸 남자 선수이다. 같은 종목 선수인 전이경은 동계올림픽 여자 선수 한정으로 최초로 2관왕과 2연패를 달성했고, 쇼트트랙 외에는 스피드 스케이팅의 이상화와 태권도의 황경선, 펜싱 사브르 남자 단체전의 구본길김정환이 2연패를 달성했다.[12] 김기훈은 2018년 인터뷰에서 안현수만 특별히 더 가르친 건 아니다. 대표팀에서 모든 선수를 똑같이 지도했는데 안현수가 더 자주 나를 찾아왔다고 말하였다.[13] 개구리 장갑으로도 불린다.[14] 올림픽 메달집계가 되지 않으며, 이준호나 월프 오라일리 리옌등은 올림픽 홈페이지에 참가와 순위확인이 되는데, 김기훈은 확인이 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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