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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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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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金南柱


파일:/image/301/2008/11/06/2008110563341.jpg

출생
1946년 10월 16일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1]
사망
1994년 2월 13일 (향년 47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서울 고려병원[2]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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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시인
학력
해남 삼화국민학교 (졸업)
해남중학교 (졸업)
광주제일고등학교 (중퇴)
대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 / 제적)

1. 개요
2. 생애
3. 시
4. 여담
5. 작품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시인.


2. 생애[편집]


1946년 10월 16일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에서 아버지 김봉수와 어머니 문일님 사이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향 해남군에서 삼화국민학교,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시로 올라왔다. 1964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이듬해 자퇴했고, 1969년 대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1972년 유신 헌법이 선포되자 이강(李綱) 등과 전국 최초로 반(反)유신, 반(反)파쇼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했다. 《함성》지는 주로 유신독재에 대한 고발을 주제로 다뤘고 후에는 전국적으로 신문을 확산시키고자 《고발》로 명칭을 바꾸기도 했다. 이로 인해 1973년에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다. 8개월 만에 출소했지만, 이 사건으로 전남대학교에서 제적당한다.

출소 후 해남군으로 낙향하여 잠시 농업에 종사하는 중에 《창작과 비평》지에 《진혼가》, 《잿더미》 등 7편의 시를 발표했으며, 1975년에는 광주시로 다시 올라와 사회과학서점인 '카프카'를 개설했다. 1978년에 상경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약칭 남민전)에 가입, 활동하다가 1979년 서울에서 체포되어 구속됐다.[3] 이듬해에 이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계급적인 적들을 증오하라. 철저히 증오하라. 남조선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이 사회의 민족반동세력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는 것이다. 그 숫자는 2백만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을 완전하게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1979년부터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에 첫 시집인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같은 굵직한 시집을 출간했으며 시집들은 교도관에게 부탁했다. 시집은 주로 우유갑이나 심지어 낙엽에 손톱이나 이쑤시개, 날카로운 도구들로 꾹꾹 눌러 썼으며, 교도관이 시인의 아내[4]에게 전달했다. 이렇게 옥중에서 쓴 그의 첫 시집이 《진혼가》로 1984년에 출간됐으며, 문학계에서 큰 파장이 있었다.

이후 광주교도소에서 전주교도소로 이감되었고, 1988년 12월 21일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994년 2월 13일 새벽 2시 45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서울 고려병원(現 강북삼성병원) 지병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사후 유해는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3. 시[편집]


일부 학자들은 민족시인으로 칭하지만 실은 계급에 대한 비판을 적나라하게 담은 시들이 참 많고, 혁명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주로 통일된 세상을 염원하거나 노동자에 대한 사회와 착취에 대한 고발적인 시들을 썼다.

이 벽은

나라 안팎의 자본가들이

그들의 재산 그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벽이다.

놈들로 하여금

놈들의 손톱으로 하여금

철근과 콘크리트로 무장한

이 벽을 허물게 하라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 中


날카롭고 투쟁적으로 쓰인 시어가 주조를 이룬다. 시들 중 일부는 민중가요로 제작되기도 했다. 번역시집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는 시선들 중에서도 일품인 시들을 모았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사랑」 中


교도소에 있을 때 쓴 시 중 위의 구절이 인상깊던 독자가 후일 '감옥 안에서 어떻게 이런 구절을 썼느냐'고 물었다. 이에 시인은 '사과 하나를 반으로 쪼개니 하트라서'라는 일화가 있다.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가야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 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가자 우리 이 길을」 中


4. 여담[편집]


  • 슬하에 자녀가 있다. 이름을 특이하게 '토일(土日)'이라 붙였는데, 성을 합치면 김(금)토일(金土日). 요일에서 따온 이름이다. 노동자는 (금,토,일)요일에 휴일을 누려야 한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 정치권에서 가끔 인용되며, 2016년에 필리버스터 정국으로 주목받았다. 남민전에서 함께 활동했던 시인이자 한때 민주화 운동 전력이 있는 국회의원 이학영은 필리버스터 발언 중 김남주의 시들을 낭송하기도 했다.

  • 그의 모교였었던 전남대학교에서는 인문대학에 김남주 기념관이 있다.[5] 대강당이며, 생전에 쓴 저작들과 원고가 있다.

  • 시인이 된 계기는 《창작과 비평》에 실린 시를 읽다가 나도 써볼 수 있을거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시인으로 등단했다.

  • 생전에 계급사회에서 시인은 '시인'이 아니라 '전사'라고 자처했다.[6]

5. 작품[편집]


시집

《진혼가》, 청사, 1984
《나의 칼 나의 피》, 인동, 1987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
《솔직히 말하자》, 풀빛, 1989
《사상의 거처》, 창작과비평사, 1991
《이 좋은 세상에》,한길사, 1992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창작과비평사, 1995

선집

《학살》, 한마당, 1988
《사랑의 무기》, 창작과비평사, 1989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꽃 속에 피가 흐른다》, 창작과비평사, 2004

번역서

프란츠 파농,《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 청사, 1978
하이네·브레히트·네루다,《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남풍, 1988
하이네,《아타 트롤》, 창작과비평사, 1991

전집

《김남주 시 전집》, 푸른사상, 2015
《김남주 산문 전집》, 푸른사상, 2015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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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도 이 주소지에 시인김남주생가가 보존되어 있다.[2] 지금의 강북삼성병원[3] 그가 구속된 사건이 민투위 강도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진 남민전 사건이다.[4] 부인과 남민전에서 활동하면서 알게 된 사이라고 한다.[5] 정작 시인 생전에 전남대학교는 그의 민주화 운동 이력을 문제삼아 퇴학시켰다.[6] https://www.youtube.com/watch?v=nmZ7siOR5_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