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우(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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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우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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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통령배고교야구심볼.png
2002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s-2|{{{#a78329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김진우
(진흥고등학교)

김대우
(광주제일고등학교)


권영진
(대구고등학교)

파일:KBO 퓨처스리그 엠블럼.svg
2006 KBO 퓨처스 북부리그 다승왕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6번
손용석
(2006~2007)

김대우
(2008~2009)


손용석
(2010)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8번
김휘곤
(2008)

김대우
(2010~2015.5.14.)


박세웅
(2015.5.15.~2015)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0번
안중열
(2015.5.3.~2015.5.14.)

김대우
(2015.5.15.~2015)


황재균
(2016)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2번
이지모
(2012~2015)

김대우
(2016~2017)


구승민
(2018~)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41번
정대현
(2017)

김대우
(2018~2022)


윤명준
(2023)



파일:2022 김대우 프로필.png

김대우
金大宇|Kim Dae-Woo

출생
1984년 7월 26일 (39세)
광주광역시 남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광주대성초 - 무등중 - 광주제일고 - 고려대[1](중퇴)
신체
190cm|104kg
포지션
지명타자, 1루수, 좌익수(2012~2017. 6.)
투수 (2003~2011, 2017. 6.~2022)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2003년 2차 1라운드 (전체 1번, 롯데)
소속팀
청타이 코브라스 (2007)[2][3]
롯데 자이언츠 (2008~2022)
병역
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4년 12월 ~ 2006년 12월)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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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곡
Roy Jones - 《Can`t be touched》
응원가
Dschinghis Khan - 《Moskau[가사]

1. 개요
3. 플레이 스타일
3.1. 타자
3.2. 투수
4.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고교시절 전국구 유망주로 주목 받았으나 대학시절과 대만 리그 육성선수 시절 우여곡절을 거치고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입단 당시 투수를 선택하였으나 2군을 전전하다 타자로 전향하였고, 타자로서는 1군에서 활약하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투수로 재전향하였다. 기대는 받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는 전형적인 애증의 프랜차이즈의 모습을 보이다 어느덧 베태랑의 연차인 2020 시즌 투수로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고 팀에 보탬이 되며 오랜만에 존재감을 알렸다. 이후 2022 시즌을 마치고 은퇴하였다.


2. 선수 경력[편집]


김대우의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편집]


2019년까지의 김대우는 투수, 타자 양쪽에서 모두 재능을 가진 보기 드문 선수지만 둘 다 1군 급에는 못 미치는 애매함의 끝판왕이란 평가가 많았다. 최고의 하드웨어(189cm, 95kg)를 가진 덕분에 투수로는 강속구를 던질 수 있지만 제구가 안되며, 타자로는 펀치력이 있지만 절망스러운 컨택 때문에 장점이 상쇄되었다. 즉 다듬기만 한다면 1군에서 통하고도 남을 피지컬을 가졌지만 그것을 까마득히 상쇄해버리는 절망스러운 BQ가 더해진 말 그대로 2군 여포라는 평가가 많았다. 30대 후반에도 150km/h대의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정도라 진지하게 트레이너로 전직하는 게 낫지 않냐는 의견도 있을 정도였다.


3.1. 타자[편집]


파워는 있지만 전형적인 거포보다는 2루타를 많이 생산하는 중장거리 타자에 가깝다. 2010년부터 2017년까지 8시즌 동안 퓨처스 리그에서 타/출/장은 각각 .290/.372/.475에 홈런을 48개 치는 동안 도루를 47개나 기록했다. 한편 2013년 맹타를 휘두르면서 4월 말까지 3할 타율을 기록하며 신인왕 후보에도 올랐지만 좋지 않은 선구안과 변화구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드러나자 하락세를 탔고, 약점을 고치지 못한 채 결국 타자는 포기하고 다시 투수로 전향했다.


3.2. 투수[편집]


140km/h 중반에서 155km/h까지 나오는 속구 구속을 가진 파이어볼러지만 입단 당시 구속과 맞바꾼 제구 덕분에 볼질이 심했다. 게다가 구속에 비해 구위가 좋지 않아 140km/h 후반의 포심도 난타당한다. 패스트볼이든 변화구든 제구가 전혀되지 않아 위에 서술한 좋은 구속은 사실상 전혀 의미가 없는 수준이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구속이 좋은 선수라서 제구만 개선하면 잠재력이 있다고 봤는지 대부분 팬들의 예상을 깨고, 노장 축에 든 2020년 이후까지 오랫동안 살아남고 있다.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이라고 할 정도로 혹사에 민감한데 그는 타자로 활동한 기간이 상당히 길고, 투수와 타자는 사용하는 근육이나 운동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김대우는 프로야구 선수치고 나이에 비해 어깨가 매우 싱싱하다고 볼 수 있다.[4] 그리고 2020년 들어선 제구 문제 등 위에 서술한 고질적인 문제점도 다소 완화된 모습도 보이고 있다. 워낙 투타 양면에서 부진한 장면을 많이 보여 상당수 팬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가 적립돼있긴 하지만 결국 중간계투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구단에서 커터를 추천하여 던지게 된 2020년에는 6월부터 각성하여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평균 구속 146km/h을 넘는 포심을 갖고 있으나 주무기는 평균 구속 145km/h에 육박하는 강력한 투심이다. 2020 시즌 KIA 타이거즈의 에이스 애런 브룩스가 이와 비슷하게 포심과 투심을 모두 던지는데, 두 선수 다 투심은 30% 이상, 포심은 15% 내외로 던져 타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앞서 구단에서 커터를 추천했다고 했는데, 일반적인 컷 패스트볼보다는 슬라이더에 가까운 꺾임을 보여주나 평균 구속이 135km/h를 넘어 구종 가치 양수를 찍을 정도로 위력적이다. 여기에 롯데 자이언츠 투수들이 주로 장착하는 스플리터 또한 구사율이 꽤 높고, 표본이 많진 않으나 컨택률이 50% 내외에 불과할 정도로 타자들이 많이 속는 구질이다. 스플리터의 구속 또한 140km/h를 종종 넘는다.

번외로 왜 지명순위가 중요한지 알려주는 진정한 살아있는 예시다. 12년동안 별다른 실적을 거두지 못했음에도 35살까지 안고 가서 겨우 불펜에서 터졌는데, 전체 1픽이니까 12년간 방출을 안 했지 지명순위가 낮았다면 이미 10년전에 방출되고도 남았다. [5]


4. 여담[편집]


  • 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잘생긴 얼굴이다. 39살이 된 현재도 여전한 피지컬과 동안 외모를 유지하고 있다.
    파일:external/lh4.googleusercontent.com/%25EA%25B9%2580%25EB%258C%2580%25EC%259A%25B0_.jpg파일:external/lh6.googleusercontent.com/%25EA%25B9%2580%25EB%258C%2580%25EC%259A%25B0__.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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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많이 쓰이는 별명은 야민정음으로 머우, 투수와 타자를 둘다 해 봐서 머우타니. 그리고 같은 팀 김원중에게 붉은 전갈[6]이라는 별명이 생기자 김대우도 전라도 출신에 장발 헤어스타일 등 외모도 비슷하다보니 늙은 전갈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혹은 GM대우쉐보레로 바뀌었단 이유로 쉐보레, 쉐보레킴이라고도 부른다.

  • 구단 유튜브 라이브 인터뷰에서 3대 운동이 몇이냐는 질문에 3대 600이라고 밝혔다.

  • 구단 유튜브 라이브 인터뷰에서 본인이 오타니 쇼헤이보다 먼저 이도류를 도전하려 하였지만 주위에서 한 가지라도 잘하라는 소리를 듣고 포기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투타 각각 커리어하이 시즌 기준으로 보면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2020년 겨우 자리잡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를 감안하면 이 발상은 무리수였던 듯하다.

  • 호남 출신이지만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면서 부산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서남 방언동남 방언이 섞인 묘한 말투를 쓴다.[7]

파일:김머우루틴.gif
  • 타자 시절 독특한 타격 준비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스즈키 이치로처럼 방망이를 세워 투수 쪽을 겨냥하는 폼인데 스즈키 이치로처럼 멋지게 하는 것이 아닌 몸을 곱추처럼 구부린 채 완전히 투수 쪽으로 돌려서 정면으로 방망이를 세워 투수를 겨냥하고 위아래로 톡톡 후 좌우로 서너 번 흔들고 어깨에 걸치며 타격자세로 들어가는 루틴이다. 엉거주춤한 자세와 방망이를 흔들면서 입이 헤 벌어져 모지리같은 표정이 어우러져 병맛 가득한 루틴으로 유명했고 머트로놈 타법이라 불렸다. 이제는 투수로 다시 전향하면서 이벤트나 지명타자가 소멸되는 극한의 상황이 아니면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특유의 루틴은 투수 전향 이후에도 하나 생겨났는데 투구 이전 허리를 90°로 숙이고 일어난 다음 투구를 한다.

  • 삼진을 잡을 때보다 공이 빗맞아 땅볼이 될 때의 희열을 더 크게 느낀다고 한다.

  • 본인의 인생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타이타닉이라 답했다. 영상

  • 노경은과 함께 45세까지 야구를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100승이나 100세이브 같은 걸 도전할 순 없다는 셀프 디스는 덤. 그러나 2022년 롯데에서 방출되며 이 목표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는 머우단이라는 단체가 존재했다. 선발투수로 등판한 날 창단되어 털리는 즉시 해체하기로 하였으나 2020년 중순 들어 털리지 않고 안정적인 피칭을 보여주며 해체가 미뤄졌다. 7월 16일 드디어 터지나 싶었는데 수비 과정에서 가벼운 부상 탓에 내려가버려 해체를 면했다. 그리고 시즌 중반부터 쌩쌩한 강견을 바탕으로 강팀 두산 베어스부터 삼성 라이온즈까지 올라오는 이닝마다 상대 타선을 압도적인 구위로 제압하고 내려갔기 때문에 당분간 해산은 요원해보였다. 그리고 2021년 4월 16일 4,374일 만에 데뷔 첫 승리투수가 되어 승리의 머우단이 되었고, 2022년 10월 19일 김대우가 방출되며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 2002년 천안 북일고 야구장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광주일고의 게임이 있었는데 게임을 관람하러 온 어느 남성이 '저 선린상고 후배입니다.'라고 자신을 김대우의 아버지[8]에게 소개하고 같이 관람하다가 헤어질 때 김대우의 아버지가 '후배님 차비하시게.'하면서 손가방에서 돈을 꺼내 줬는데 상당한 액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 외에도 최저연봉을 받던 시절에도 2군 후배들에게 매일 밥을 사줬다는 등 잘 사는 집안이라는 추측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그간 김대우가 워낙 실적이 별로였던지라 35살까지도 연봉이 3,000만원을 못 넘어서[9] 대체 뭘 먹고 사는지, 고작 저 돈 받고 야구를 왜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았으나, 저 집이 잘 사는 편이라는 증언들이 네티즌들의 의문을 풀어주었다.[10]

  • 위의 일화에서 나왔듯이 김대우의 아버지도 야구선수 출신이다. 포지션은 투수였고 이름은 김화일. 고려대에 진학한 아들과는 반대로 연세대를 나왔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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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체육교육학과 03학번.[2] 대만 리그에 있었던 팀. 승부조작에 구단 단위로 참가하여 1년 뒤 팀은 제명당했다. 앤디 밴 헤켄도 이 팀에서 뛴 적 있다.[3] 공식 입단은 규정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연습생으로만 잠깐 있었지만, 그래도 2군 경기에 등판한 기록도 있으므로 취소선 긋고 추가함.[4] 코치진에 의하면 어깨 나이가 겨우 18세라고 한다.[5] 롯데 팬덤 사이에서도 김대우가 터진 2020년 이전까지는 왜 김대우가 방출되지 않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다.[6] 전라도 갈매기의 줄임말.[7] 1분 50초부터[8] 김대우의 아버지는 선린상고-연세대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9] 최고 3,800만원, 30대 이후로는 쭉 2,900만원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2,900만원이면 동년배 일반인 기준으로도 낮은 편으로 중소기업 신입사원 수준의 박봉이다.[10] 물론 아버지도 그냥 금수저여서 아닐 수도 있지만 김대우의 아버지는 2002년에 48살이었으니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 대학을 졸업하고 구직을 했을 것이다. 그 당시 연세대와 같은 초일류 대학 출신들은 학과나 스펙 상관없이 고연봉 일자리를 원하는대로 골라 가던 시절이었으니 아버지가 돈을 꽤 잘 벌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