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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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유년
3. 청년사업가
4. 정치 입문 이후
4.1. 계속되는 국회의원 낙선
4.2. 대통령 후보로 급부상
4.3. 최초의 대선과 진산 파동
4.4. 유신 정권
4.5. 투옥과 망명
4.6. 거듭되는 대선 낙선
4.7. 4수 끝에 당선
4.9.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시절
4.9.1. IMF 외환위기 극복 및 경제 성장
4.9.2. 외교 & 대북 관계
4.9.3. 임기 후반기의 외교적 악재
4.9.5. 정권 말기의 곤욕
4.10. 퇴임 후
5. 사망
6. 묘역
6.1. 사망 이후


1. 개요[편집]


"어느 분야에서나 성공하려면 서생적 문제의식상인적 현실감각을 겸비해야 한다."

김대중의 일생을 요약해주는 자전적 어록[1]

김대중의 일생을 서술한 문서.

진보층은 상인의 현실감각적인 면모를 극렬히 비판하였고, 보수층은 서생의 이상주의적인 모습을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양쪽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으나, 다만 마찬가지 이유로 사랑받기도 했다. 정책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젊었을 때 공산주의자들에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임기 중 대북평화에 앞장 섰던 점, 친기업적 정책으로[2] IMF를 극복했지만 빈부격차가 심화된 점[3] 등으로 그의 철학[4]을 볼 수 있다.


2. 유년[편집]


일제강점기인 1924년 1월 6일에[5] 전라남도 신안의 작은 섬 하의도 후광리에서 김운식과 수금(張守錦)[6]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아버지 김운식은 장수금 말고 광산 김씨 출신의 본처[7]가 따로 있었다. 즉 김대중은 서자였다.[8] 이 때문에 어머니 장수금은 아버지 집이 아니라 다른 집에서 살았고, 김대중은 어린 시절을 어머니 집과 아버지 집을 오가며 자랐다. 부친인 김운식은 당시로써는 일부러 일본어를 공부하지 않았을만큼 항일의식을 지닌 지식인으로 이장을 지내고 암태도 소작쟁의 여파로 신안군 도서 지역에서 발생한 소작쟁의를 주도할 만큼 하의도에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다.[9] 김대중은 그런 아버지와 같이 지내면서 정치의식과 역사에 대해 어깨너머로 배웠고 김대중도 아버지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남의 것을 말도 없이 가져오면 도둑질이란다. 옳은 길이 아니면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해.

어린시절, 김대중의 어머니가 엿장수의 담배를 훔친 김대중의 종아리를 때리며 했던 말

친구들이랑 같이 놀던 어린 김대중이 나무그늘에서 낮잠을 자던 엿장수[10]의 짐보따리에서 담뱃대를 훔쳤고, 그것을 어머니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다가[11] 분노한 어머니가 김대중의 종아리를 걷은 뒤, 종아리 체벌을 한 적이 있었다. 먼 훗날 김대중은 그때 어머니로부터 옳고 그름, 선악에 대한 구별을 은연중에 배웠다고 회고하고 있다.

나중에 아버지가 본처와 이혼하면서 어머니가 본처 자리에 들어가고 김대중은 적자인 차남이 되었다.[12] 유년기에 하의도에 소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덕봉강당이라는 서당에서 초암 김연에게 소학, 천자문 등을 교육받다가 1934년부터 하의보통학교에서 2학년으로 월반해서 공부했고, 1936년 가을 김대중의 가족들은 목포로 이사하고, 김대중도 목포제1공립보통학교[13]에 4학년으로 편입한다.

이후 1939년 4월 5일 목포공립상업학교[14] 취업반에 수석 입학하였다. 그리고 만 16세인 상업학교 2학년 때 도요타 다이추[15](とよた だいちゅう[豊田 大中\])로 창씨개명하였다.[16] 3학년부터는 진학반으로 옮긴다. 이때 김대중은 자서전에 한국인들에게 문호를 연 대학 중 장학제도가 제일 나은 만주의 건국대학에 진학할 계획이었다고 하나 1941년 겨울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포기했다고 말한다. 이후 병역자원이 모자랐던 일제가 학생들을 조기에 졸업시키고 바로 병력으로 동원하기 위해 전시 특별 조치를 실시하면서 1944년 1월 일찍 졸업을 하게 되었고, 김대중은 졸업 후 전남기선주식회사라는 해운회사에 경리 담당 사원으로 일하게 된다. 원래 김대중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진학을 생각하고 진학반으로 옮겼지만, 전쟁 때문에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해운회사에 취직을 한 것.[17] 하지만 전쟁이 말기가 되면서 이렇게 해운회사에 취업했어도 결국 징집은 시작되었고 신검을 받고 징집되기 직전 광복을 맞이한다.

8.15 광복 이후에는 목포 상선 합동 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1945년 8월 19일 선 정부구성론을[18] 주장한 여운형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선전부원으로 참여, 목포 신민당 지부에서 활동하였다.[19] 그러나 박헌영 등에 의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선 정부수립 >> 노선문제였던 당초 의도와 다르게 좌경화 움직임을 보이자 이듬해 2월 탈퇴하였다.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져, 공산주의계열의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전적이 있으나, 소련을 추종하는[20] 무리들과 갈등이 생겨 얼마안가 탈당한다. 목포파출소 습격사건에 연루되었다가 한국민주당원이었던 장인의 도움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 가운데는 민족의 독립보다는 소련에 대한 충성으로 기울어진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 조국 소비에트 만세, 붉은 깃발만이 우리의 진정한 깃발이란 말을 하곤 해 나의 감정을 자극했다. 나의 반발심은 그들의 미움을 샀고 나는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됐다.

- 김대중, 행동하는 양심으로


3. 청년사업가[편집]


1946년 여름 좌익과 결별한 뒤에는 1947년 배 한척을 가지고 목포해운공사[21]로 사업에 뛰어들고, 50~70톤의 선박 여러척을 보유, 운영하게 되었다.[22]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목포를 점령한 조선인민군들에게 자본가라는 이유로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들이 철수해 처형은 면했다. 하지만 공산당원들한테 감금되었다가 탈출해 집에 은둔한다. 탈출길도 굉장히 험난했다고 한다. 이때의 기억이 인생에서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민족 간 전쟁으로 학살을 하는 모습, 이념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도 이념의 이름으로 서로 학살하고 증오를 뿜어대는 모습이 이후 그의 모토가 된 평화와 화해의 정신을 강력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생환한 김대중은 훗날 이 동족 상잔의 비극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술회한 적이 있다.

6.25 동란 때, 저는 서울에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공산당이 그렇게까지 잔인한 줄을 몰랐습니다.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공산당 얘기를 하면 자기들이 쫓겨 내려와서 저렇게 말하는 것이겠지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때는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남한 사람들이 공산당을 알고 정말 반공의식을 갖게 된 것은 6 25 동란 때문입니다. 6 25 때에 공산당이 인민재판을 하고 숙청을 하고 또 농촌에 가서는 감 한 개까지 옥수수 한 개까지 세고 벼이삭까지 세서 세금받아 낼 준비를 하고 있고, 게다가 길거리 좌판에 담배 몇 갑 놓고 파는 사람들한테까지 매일 세금을 걷어가는 짓을 했습니다. 나중에 쫓겨서 북으로 올라갈 땐 대량학살까지 했습니다. 반대파에 대한 숙청은 이쪽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그 정도가 북쪽이 훨씬 더 심했습니다.[23]

그때부터 남한사람 모두가 진짜 반공으로 돌아섰습니다. 오늘날까지 반공체제를 지탱해온 것도 안기부나 경찰의 노력보다는 그때의 산체험이 강력한 반공의식을 심어준 덕이 더 크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김대중, <나의 길 나의 사상>, 한길사, 1994


1950년 10월부터는 선박 두 척을 수리하여 사업을 재개하게 되었고 목포일보를 인수해 1952년 3월까지 사장으로 재임하였다. 사장 직책으로 있었지만, 전쟁으로 인적, 물적 여건이 부족했던 만큼, 김대중도 직접 취재를 나가 중요한 내용을 적어 오곤 했으며, 사설을 직접 작성해 송고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24] 이때 버릇들인 받아적는 습관이나,[25] 취재기술, 신문의 변두리칸 소식까지 꼼꼼히 살피는 습관 등은 측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만큼[26][27][28] DJ의 정치인생을 형성하고 대변하는 바탕이[29] 되었기 때문에, 김대중을 "사업가 출신"이라기 보단, "언론인 출신"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6.25 전쟁 당시 행적으로는 김대중 본인은 목포 해상 방위대에 복무하였다고 주장하나 목포 해상 방위대와 관련하여서는 해군역사기록관리단[30] 확인결과 보관된 자료가 없어 부대의 창설시기나 규모, 지휘관, 기타 등의 확인이 불가하다고 해군본부 측에서 답변하였다. 해상방위대라는 조직이 목포경비부 기구표상에는 없다는 것. 하지만 동 조직(목포경비부)의 연혁사 제39쪽에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해군으로 공식 보고가 올라갈 정도의 큰 활동(전공)은 없었지만, 엄연히 현지에서 해군에 협력한 민간 의용대 성격이 강했던 조직으로 추정된다. 행정력이 많이 미비한 전쟁 중에도[31] 이들을 기록한 해군 산하의 공식 조직이[32] 있기 때문.


4. 정치 입문 이후[편집]



4.1. 계속되는 국회의원 낙선[편집]


나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40년 동안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4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성취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이 어느 누구든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그 후 장인의 권고에 따라 한국민주당에 입당하여 시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당시 김대중은 해운 회사를 설립하고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사장 자리에 있었다. 사장을 지내면서 사설을 즐겨 쓰곤 했는데, 그 내용은 특히 농민이나 근로자, 혹은 실업자의 구제문제에 있어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 시기 장준하 선생이 발행하던 <사상계>에 <한국 노동 운동자의 진로>를 기고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시 선거구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지만 민주국민당 정중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자 이듬해 상경하였고, 1955ㆍ년에 야당 정치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1956년 9월 25일 민주당 신파에 입당한다.

이무렵 김대중은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었다. 1957년 7월 13일 천주교 서울대교구[33] 노기남 바오로 주교의 집무실에서 윤형중[34] 마태오 신부의 주례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대부는 장면 박사였다.[35] 세례명은 상술했듯이 영국의 유명 정치철학자이자 성인 토마스 모어. 이 세례명은 본인이 정했다기보다 정황상 세례 집전하는 신부나 대부 장면이 붙여준 듯한데, 본인은 "왜 하필 목 잘린 사람의 이름을 내 세례명으로 지어 주는가??"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고 자서전에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세례명대로, 김대중은 말 그대로 목숨까지 내걸린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겪게 된다.

3년 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래는 고향 목포에 출마하려 했지만, 지난 선거에서 김대중의 상대였던 정중섭이 하필이면 민주당 구파쪽이라 신파에서도 김대중을 강하게 밀지 못하던중 강원도 인제군 선거구에 공천신청을 한 후보가 없자 인제로 가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려 했다. 당시 선거에 출마하려면 주민들의 추천동의를 받아야 했는데[36] 인제를 가보니 자유당이 마을 주민들의 도장을 모조리 가져가버렸고 심지어 새로 도장을 파서 후보추천 동의서를 받으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경찰에서 도장파는 사람들까지 손을 써버려 어찌할수 없던중에 측근중 한사람이 우연히 호박을 보고선 호박으로 도장을 파서 해보는게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내 사상 초유의 호박도장으로 후보추천 동의서에 날인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유당이 후보추천 동의서에 날인된 도장이 나무가 아니라 호박이니 무효라고 주장해 후보등록도 하지못하고 만다.[37] 이에 김대중은 대법원에 제소하고 1959년 승소, 인제 국회의원인 나상근이 당선무효되어 1년 후 재보선에 다시 출마했지만 또 자유당 전형산 후보에 밀려 낙선한다. 이때도 자유당은 치졸하게도 경찰을 동원해 주민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게 방해했고, 인제 유권자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군인들은 아예 외출이 금지되어버렸다. 이당시 김대중을 지원하기 위해 인제를 찾은 윤제술 전 국회부의장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역만리에 아들을 두고 온 심정"이라고 했을 정도. 결국 21000 대 8000표라는 큰 격차로 낙선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하고, 같은 해 7월에 열린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인제군 후보로 출마하지만 또 자유당 전형산 후보에 밀려 낙선한다.

이 와중에 아내 차용애 여사[38]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모습을 지켜본 장면 전 국무총리가 60년에 DJ를 대변인으로 발탁해 중앙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4.2. 대통령 후보로 급부상[편집]


자유당 소속 인제군 전형산 국회의원이 3.15 부정선거로 인한 이유로 자격이 박탈당함에 따라 1961년 인제군 선거구에서 재보궐선거가 열렸는데, 김대중은 여기서 드디어 민의원에 당선된다. 하지만 이틀 뒤 5.16 군사정변이 발생해 국회가 해산된다(...)

1962년 이희호와 재혼한다.[39]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시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해서 당선됨으로써 처음으로 의정 활동을 하게 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일기본조약 당시 온 야당이 가두 투쟁과 반대 운동을 준비할 때 실익을 따져 할 협상은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당대에는 부친으로부터 걱정 어린 편지를 받을 만큼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지금에 와서는 재평가할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1964년 당시 야당인 자유민주당 김준연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민주공화당 정권이 한일기본조약 협상 과정에서 1억3000만 달러를 들여와 정치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폭로했다. 이에 공화당은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을 상정했고, 이때 김대중이 필리버스터 의사 진행 발언에 나섰다. 그는 5시간 19분 동안 원고 없이, 한일 협정의 잘못된 점, 김준연 의원 구속의 부당성 등을 조목조목 지적했고, 결국 구속동의안 처리는 무산됐다. 연설 중간에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했다고 한다.[40] 이 일로 초선임에도 정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분과 활동에서도 명문대학 출신의 동료 의원들에 뒤쳐지지 않고자 연구활동에 진력하며, 당의 중진인 유진오[41] 고려대학교 총장에게 인정 받아, 당내에서도 입지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1967년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시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박정희 대통령이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여는 악재[42]에도 불구하고 당선되는데 성공한다.[43]

마침내, 김영삼의 40대 기수론에 동참, 1970년에 치뤄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리 유력이 점쳐진 김영삼 후보를 2차 투표에서 역전,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4.3. 최초의 대선과 진산 파동[편집]


4·19는 학생의 혁명이었습니다. 5·16은 군대가 저질렀습니다. 이제 오는 4월 27일은 학생도 아니고 군대도 아닌 전 국민이 협력해서 이 나라 5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손에 의해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한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우리가 이룩하자는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7월 1일은 청와대에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입니다. 서울 시민 여러분, 7월 1일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71년 '장충단공원 연설'중에서)


선거 운동에서 김대중은 "이번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이 선거에서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주장했는데 결국 둘 다 현실이 된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겨우 2~3개 시군 차이까지(95만표) 추격하는 저력을 보여준 DJ는, 비록 낙선했지만 부유세 부과, 한반도 4대국 안전보장론(후일의 6자회담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예비군 폐지 등의 공약과 미국의 대선 캠페인을 차용한 선거 운동을 전개해, 사람들이 잊기 힘든 강한 인상을 받았으며, 역시 젊고 경쟁력있는 후보 김영삼과 함께 군사 정권의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약 95만 표(8% 차이)였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패배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지만, 조선일보에서 선거 다음날 게재한 기사에, "관심은 높았지만 투표율은 낮았다."자기 의견을 정직하게 나타내지 않는 습관은 지양해야 한다."[44] 표현을 내보냈을 만큼, 관권의 조직적인 개입이 (노골적으로) 있었는데도 이 정도였던 것. 박정희도 거액의 예산을 쏟아부웠음에도 1967년 대선에 비해 표차가 준 신승을 거둔 결과에 실망을 표현했을 정도이다. 참고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군인들은 여당을 찍지 않을 경우 뒷일을 장담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부재자투표함을 까면 민주공화당과 민주정의당의 몰표가 쏟아져나왔다.

여하튼 대선에서 선전했기에 총선에서의 선전도 기대가 되었지만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 당수 유진산이 자신의 지역구(영등포 을)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하는 이른바 진산 파동이 터진다. 당내 소장층은 유진산에게 당수 사퇴를 요청하고, 당수 사퇴 불가를 주장한 민주당 구파 계열들과 충돌을 맺었고 유진산은 사퇴한다. 여기서 '당수 권한 대행직'을 놓고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비주류와 김영삼, 이철승을 중심으로 한 주류가 충돌하게 되었는데, 김대중은 자신이 당수 권한 대행직을 맡겠다고 주장했다. 중재안으로 김홍일이 당수 권한 대행직을 맡으며 진산 파동은 마무리되었다. 진산 파동으로 인해 신민당이 크나큰 타격을 입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지만 막상 개표를 하고나니 신민당이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지역에서 압승을 거두며 예상을 뒤엎고 개헌저지선(69석)을 훌쩍넘은 89석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득표율에서도 공화당과 신민당의 득표율 차이는 고작 4.4%로 엄청난 선전을 벌였다. 이 선거에서 신민당이 진산파동의 여파를 극복하고 선전한 것도 전국구로 옮긴 대신 전국을 누비며 지역구 선거를 도운 김대중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이 기간 광주-목포 간 1번 국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는데 이 사고로 보좌관이 세상을 떠나고 본인도 중상을 입었다. 이때 입은 고관절 부상의 후유증으로 평생 지팡이를 짚고 오른쪽 다리를 절며 걸어다녀야 했다.
이 사고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데, 김대중 측에서는 맞은 편 트럭이 중앙선을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트럭은 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의 아들의 회사 소유였고, [45] 경찰서가 10분 거리에 있는데도 두 시간 후에야 경찰이 도착했으며, 언론 보도도 경향신문 1단 기사가 전부였다. 트럭 운전사를 살인 혐의로 조사한 검사는 다른 검사로 교체되었고, 교체된 검사는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해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중앙정보부와 같은 당시 정권에서 꾸민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희호 평전, '길을 찾아서'
이에 대해 조갑제우종창은 월간조선에서 당시 트럭 운전사와의 인터뷰를 근거로 반박하였다. 중앙선을 침범한 것은 김대중 쪽 차이며, 고의로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 검사였던 허경만은 자신이 끝까지 사건을 맡았으며, 외압은 없었다고 말했다. 고의성에 대한 의문이 있기는 하지만 설령 살인미수가 맞다고 하더라도, 증명할 방법이 없어 경찰 조사대로 트럭 운전자의 졸음 운전으로 인한 업무상 과실치사로 처리했다고 한다. [46] # #

이렇게 선거를 앞두고 많은 내부 갈등이 있었지만, 신민당은 김대중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공천하였다. 결국 김대중도 당선되고, 신민당도 의석을 두배 가까이 늘리며 전체 의석의 45%가량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런 신민당의 선전으로 개헌이 힘들어지고 차기 대권주자 내정 역시 난항을 겪던 박정희 정권은 1년 뒤인 1972년에 최후의 방법 10월 유신을 쓴다.


4.4. 유신 정권[편집]


“캄캄한 밤이라도 내일 아침이면 태양이 반드시 다시 뜬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악마가 지배하는 지옥에 떨어져도 신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나의 신앙은 역사이다. 나는 역사에서 정의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나에게 유일한 영웅은 국민이다. 국민은 최후의 승리자이며, 양심의 근원이다. 나는 이런 신념하에 살고 있다.”


1972년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를 위해 일본 도쿄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 소식을 듣고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 망명을 결정한다. 그리고 약 10개월간 일본미국 각지에서 기자 회견과 연설을 통해 반유신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이듬해 1973년 8월 8일 이후락에 의해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나 가택 연금 상태에 처한다. 자세한 내용은 김대중 납치 사건 문서 참조.

박 정권은 김대중이 납치에서 풀려난 그 다음 날부터 집에 가두었다. 기약 없는 가택 연금의 시작이었다. 서울 동교동 집을 빙 둘러 경찰 병력이 에워쌌다. 골목 어귀에는 여러 개의 감시 초소가 만들어졌다. 중앙정보부는 외부인의 동교동 출입을 철저히 막았다. 가족들의 전화 사용도 금지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인 셋째 아들이 등교할 때도 감시 요원들이 따라붙어 미행했다.

가택 연금 속에서도 반유신 투쟁은 계속되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삼일절 57주년 기념 미사에 참석하여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함세웅 등과 함께 3.1 민주 구국 선언을 하기도 했다. 물론 유신정권은 구국 선언에 참여한 김대중과 재야 인사들을 모조리 구속하였다. 이른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이다. 이때 김대중은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대법원에서 5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5년 징역형을 선고 받은 김대중을 유신정권은 감옥에 가두지 않고 서울대병원 병실에 감금하였다. 그 이유는 신병치료라고 했지만, 사람을 1년이나 밀폐상태인 병실에 가두면서 운동도, 집필도, 서신의 수발도 금함으로써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이중삼중으로 가하니, 오히려 감옥에 가둔 것보다 더 가혹하게 다룬 셈이었다.[47] 이를 보다 못해 김대중의 아내 이희호는 1978년 9월 1일 법무부 장관과 서울구치소 소장에게 병실 감금을 견딜 수 없으니 다시 감옥으로 보내 달라는 이감신청서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권측에서는 이에 더 심한 감금으로 답하여, 1978년 9월 5일 서울대병원이 신축 공사에 들어가자 낡은 방을 감옥처럼 개조한 병실에다 김대중을 옮겼다. 병실로 가는 입구에 이중으로 경찰 감시구역을 설치하고 병실 부근 100미터 떨어진 곳까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김대중은 교도소로 보내 달라는 이감신청서를 다시 보내고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이때 문익환 등이 김대중 석방요구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투쟁에 동참하자, 유신정권은 이들까지 다시 잡아들였다. 결국 단식 7일째에 장출혈로 상태가 급속히 나빠진 김대중은 단식을 중단했다.#

한편 박정희는 1978년 12월 27일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바로 그날, 김대중은 서울대병원에서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됐다. 김대중은 “도둑이 아닌 다음에야 밤중에 나갈 수 없다”고 버텼으나 교도관들이 막무가내로 밀어냈다. 그 후 김대중은 1979년 3월 4일, 윤보선의 자택에서 재야 세력의 연대 투쟁 기구 연합체인 국민 연합을 구성하고 윤보선·함석헌과 함께 3인 공동 의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김영삼총재 후보로 지지하였다. 당시 동교동계에서 박영록·조윤형·김재광 등이 총재 경선에 후보로 나섰으나, 김대중은 그들에게 후보를 사퇴하고 김영삼 총재 당선에 나서라고 설득했다.[48] 그리고 김대중은 아서원의 단합대회장에서 다음과 같이 웅변하였다. “왜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 동지가 총재가 되는 것을 한사코 방해하며 싫어합니까? 그것은 김영삼 동지가 총재가 되면 민주회복이 촉진되고 유신체제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김영삼의 총재 시절 행보에 대한 말들이 있었지만, 김대중은 적어도 10대 국회 이후 김영삼의 활동은 나무랄 것이 없으니 유신에 맞선 투쟁에 함께 하자고 호소했다. “반독재의 선두에서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이철승의 당권파로부터 온갖 박해를 받고 있는 김영삼 동지가 이번 경선에서 당선되는 것이 신민당을 살리는 길이고 국민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에 나는 김영삼 동지를 지지합니다.” 이때 김대중의 웅변으로 아서원의 단합대회장은 쇳물이 끓어 넘치는 듯한 용광로로 바뀌었다.#

이로써 이철승이 당연히 이길 것으로 예상된 당대표 선거에 김영삼이 당선되었다.[49] 1979년 후반기 제2차 오일 쇼크가 몰려오고, YH 사건,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데 힘입어 강철 같던 유신체제도 몰락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결국 얼마 안 가 10.26 사건이 터졌고,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해제되었다.


4.5. 투옥과 망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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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음모 사건으로 투옥된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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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도소에 구속수감 되었을때 촬영된 머그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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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을 구하라, 사형 반대"라 적힌 팻말을 든 국제앰네스티 영국 지부 소속 노인 시위자
1979년 12월 9일 최규하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밝힘에 따라 김대중 역시 가택 연금 상태에서 벗어났다. 김대중은 공화당 총재로 선출된 김종필, 신민당을 지키고 있던 김영삼과 더불어 유력한 대권 주자로 다시 떠오른다. 그러나 각 세력은 규합하지 못했고,[50] 12.12 군사반란을 통해 박정희의 친위 군부 세력이었던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권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한다.

서울의 봄 시기인 1980년 4월 16일 한국신학대학 시국강연에서는 “유신세력은 10·26 사태로 독재의 장벽에 조그맣게 열린 돌파구를 다시 막으려고 온갖 계략을 꾸미고 있다. 유신세력들의 흉계를 국민의 힘으로 단호히 분쇄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4월 18일 동국대 강연에서는 “군은 반드시 중립을 지켜야 한다.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계엄령을 더 연장할 이유가 없다.”면서 동시에 “우리가 성급하게 혼란을 일으키는 일에 말려들어 가면, 그런 일을 노리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절호의 구실을 주게 된다.”고 군부에 빌미를 주는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4월 26일 관훈클럽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은 "현 정국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우려가 된다.", "평화적으로 불행한 사태없이 민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90% 이상의 목표이다."는 등의 발언을 했으며, 지난 정권의 공과 과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는 "박정희 정권의 과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다. 잘한점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국민들이 "우리도 하면 된다. 하니까 되더라"는 자기가능성을 발견토록 한 것이다. 물론 우리 국민의 높은 능력과 본질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쨋든 이점은 지난 정권의 공이다. 앞으로 나올 정권도 이를 더욱 발전시킬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

5월 12일에도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열어 “만약 여기서 소동이 일어나면 민주주의를 저해하려는 세력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게 된다”며 학생들의 침착한 대응을 호소했다. 하지만 5월 13일부터 학생들은 교문을 열고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교내 시위 등의 온건 투쟁으로는 군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학생 지도부의 생각이었다. 신군부는 학생들의 시위가 북한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는 말을 유포하고 ‘북한 남침 위협’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시키는 한편, 김대중을 내란 음모 혐의로 긴급 체포했다.[51]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참조. 다음 날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조치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그 결과는...

광주에서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는 동안, 김옥두, 김상현 등 DJ의 측근들은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벙커로 연행되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았으며, 김대중 자택에 방명록을 남겼던 전남대학교 복학생 정동년까지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날벼락을 맞았다.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도 남산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으며, 심신의 고통(부친이 자칫 내란사범이 될 수 있으니)을 견디지 못하고, 책상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머리를 들이받아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하는 바람에 파킨슨병에 걸려 평생을 투병생활을 하며 살았다.[52]

이러한 고문과 조작으로 점철된 군사 재판의 결과, 김대중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전세계에서 구명 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미국의 지미 카터-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53] 김대중에 대한 사형이 집행될 경우 양국 관계에 파국이 올 것이라고 거세게 압박했고,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서한을 보내어 선처를 호소했다.[54]

또한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가, 미국의 레이건 신정부를 통해 신군부를 압박[55], 여기에 정당성을 세계적으로 인정 받고자 했던 정권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1981년 1월 DJ는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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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 인사 시절의 DJ[56][57]. 96년 이경규김영희 PD촬영차 DJ 자택에 방문하기 전까지는, 신문-방송에 이런 찌푸리거나 화를 내는 듯한 모습 위주로 실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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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 전두환에게 올린 탄원서
1982년 12월, 무릎이 좋지 않은 김대중의 신병치료를 명분으로 5공 측에서 다시 미국 출국을 권유, 정권의 요구에 따라 전두환에게 국내에서 정치활동을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탄원서를 쓰고[58] 2년간의 미국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59]

1985년 2월, 대한민국 국회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고, 그 직전에 정치 규제에서 풀린 수많은 야당 인사들이 신한민주당을 만들어 출마한다고 하자, 김대중은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귀국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2년 전 필리핀의 베니그노 아키노가 미국 망명 후 귀국하다가 공항에서 암살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 정가에서는 김대중의 암살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강했고 전두환정권의 폭주를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김대중의 안전 귀환을 전두환정권이 보장하지 않을 경우 예정된 전두환의 방미를 무산시키겠다고 재차 압박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할 수 없었던 미국의 몇몇 의원들과[60] 저명 인사[61]들이 김대중의 귀국길에 자진 동행하였다.
김대중이 김포 공항 입국장에 들어서자 국가안전기획부 요원들이 곧바로 나타나 김대중을 연행했다. 그리고 김대중을 동교동 자택에 연금해버렸다. 김대중의 귀국 덕분에 며칠 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고, 제1 야당으로 올라섰다.

이러한 민의에 힘입어 신한민주당의 총재였던 이민우가 김대중에 대한 사면 복권을 요구하자, 김대중에 대한 가택 연금은 곧 해제되었다. 다만 사면, 복권은 5공 측에서 격렬히 반대하면서 무산되었기 때문에, 김대중의 정당 복귀는 늦어졌고, 그 대신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 추진 협의회 공동 의장에 취임하여,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식으로 정치를 재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민주화 추진 협의회에 참여하고 신한민주당 창당에도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대중이 김영삼과의 라이벌 의식 때문에 사사건건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김상현과 갈등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거나, 1985년 11월 민주정의당정동성 의원이, 김대중이 미국 망명 당시 올린 글을 폭로하면서 문제 삼는 등 이미지 타격을 노린 집요한 반대 공작이 이어졌다. 김대중 직선제 반대발언 모함사건 참조.


4.6. 거듭되는 대선 낙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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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역대 대통령 선거별 포스터. 좌측부터 7대 - 13대 - 14대- 15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전두환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면서[62] 대한민국 제5공화국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민주화 가능성이 열리자, 김대중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또 다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이 지난 몇 년 동안 오랜 미국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김영삼은 국내에서 민주화 운동을 사실상 이끌었고, 김영삼을 따르는 야당 의원 숫자도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야권에서는 김대중에게 양보를 권유하는 분위기가 상당했다.[63] 그래서 재야의 중립적인 인사들이 중심이 된 ‘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가 동교동과 상도동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끝에 김대중은 마침내 김영삼과 단일화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그 합의는 성사 직전에서 무산되고 말았다.[64] 결국 이로 인해 김대중은 김영삼과 결별, 단독 출마를 결심하게 되었다.[65] 김대중을 평생 아프게 꼬집었던 단어 중 하나인 대통령병 환자가 이 무렵에 나온 말.[66][67]

어쨌든 이렇게 지지층이 겹쳤던 양 김이 모두 출마하자,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점점 군사독재를 심판, 평가하는 자리가 아닌, 지역 간의 이권과 예산[68]의 "기득권 싸움" 성격이 가미되어 갔으며,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지역대결 구도[69]가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70] 이렇게 김대중과 김영삼이 대립한 결과, 문민 정권 교체가 확실시되던 상황에서 또 다시 군부 출신의 여당 인사 노태우 후보가 역대 최저 득표율로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토록 수많은 시민이 군부세력의 척결을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로 인해 이를 무산시킨 것 때문에 당시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진보 지식인들에게서 큰 비난을 받았다. 이에 다시 총선부터 우위를 점해 함께 노태우 정권을 견제하자는 취지의 단일화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이마저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당(민정당)의 연이은 부정 스캔들이 불거지는 호재(?)가 잇달았고, 각 대학 운동권이 김영삼보다 김대중을 더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김대중의 평민당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과 호남을 석권, 김영삼의 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올라서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민정당 125석, 평민당 70석, 민주당 59석, 공화당 35석의 여소야대 국회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이다.

이후 정대철, 조세형, 박상천, 신기하, 이해찬, 이상수, 조윤형, 한광옥 등 평민당 국회의원들은 각종 청문회에서 활약하고, 개혁 입법에 앞장서는 등, 민주화 정국을 주도하였다. 또한 노태우 대통령이 갈등 대신 여-야 간 협력의 온건노선을 선택함에 따라, DJ는 제1야당 당수로서, 국정운영의 동반자로서 그 어느 때보다 정부에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었다.[71]

하지만 1990년, 3당 합당이 이루어져, 여소야대 → 여대야소 국면으로 판도가 달라지자 상황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노태우의 합당제의를 거절한[72] 김대중에게, 이제는 단독 개헌선을 넘을 정도로 강해진 슈퍼 여당, 민자당이 더 이상 손을 내밀만한 여지는 없었던 것.[73] 그래도 4.19의 상징적인 인물인 6선의 이기택 의원이나, 유능한 법률가이자 영남권의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던 노무현[74] 등 3당 합당에 반발해 잔류한 8명의 민주당 의원이[75]과 김상현이 DJ의 민주당으로 합류하는 등의 인적(人的)인 소득은 김대중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 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의 민주당은 민자당의 과반확보를 저지하는 등 선전을 거두면서 YS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수도권과 호남에서 우위를 점하는 등 기염을 토하였다.[76]

이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대화합정치'를 기치로 한 <뉴DJ플랜>을 내세웠다. 그는 기자의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 비리 등에 대해 진상은 밝히되 정치 보복은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과연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건 저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나쁜 제도는 고치되 사람은 처벌하지 않는게 30년 군사통치가 갈갈이 갈라놓은 우리 국민을 재결합시키는 길입니다."라는 입장을 밝혔으며, '뉴DJ'에 대해서는 "시대 변화에 맞추어 중도우파적 온건노선을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77]## 하지만 결국 라이벌 YS를 넘지 못하고 8% 차이로 패하고 말았다. 이미 예순아홉의 고령이었던 DJ는 아내 이희호 여사와 함께 쓴 정계 은퇴선언문을 읽었다.[78] 이듬해인 1993년 1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4.7. 4수 끝에 당선[편집]


1993년, 새로 출범한 문민정부의 지지율이 90%를 넘을만큼 여권의 기세가 수승(殊勝)하였지만 DJ에게도, 새로 출간한 책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79]가 65만 부가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고, 1994년 5월 긴장 일로에 있었던 대북 문제에 대해 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국제적으로 알려져 이북에서도 신뢰할 만한 인물(지미 카터)의 중재 필요성" 을 역설하여 6월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 및 7월 남북정상회담이 성사 직전까지[80] 가게 되어 국내 여론과 클린턴 정부의 주목을 받았으며, 11월 중국 방문에서 권력 서열 4위 리루이환(李瑞環) 전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을 만나 국빈에 준한 예우를 받는[81] 등 의미있는 이벤트가 연이어 발생한다. 이렇게 오히려 은퇴 전보다 더 호의적인 시선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얻은 김대중은 정계 복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김대중임동원을 실무 책임자로 하는 아태재단을 설립해, 젊었을 적부터 관심을 둔 통일 연구에 매진하는 한편, 모친상을 당한 박태준 포항제철 前 회장에게 아태재단 명함을 지닌 이동진 의원을 보내 조문하도록 하였다. 또한 최양락, 이원승, 손숙, 정한용 등 문화계 인사들과 자주 만남을 가지며 얘기를 들었으며, 이들의 작품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진지하게 물어보는 김대중에게 호감을 갖는 문화계 인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82] 스크린 쿼터제에 대한 공부나, 은퇴한 "서태지의 복귀에 힘써달라."며 편지를 보낸 팬클럽 회원들에게 정성들인 편지로 답했던 것도(CD 아래부터) 이 시기의 일.

1995년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1995.06.27)가 실시되는 뜻 깊은 해였으며[83], 이미 선거전에 돌입한 민주당 지지 선언을 하며 정계 복귀를 타진하던 김대중에게도 중요한 시험대가 된 해였다. 민주당은 이 지방선거에서 승리해 제1야당의 지위를 다진 한편, 같은 시기, 14대 대선 승리에 기여하고도 자의반 타의반 민주자유당에서 나오게 된, 김종필자유민주연합을 창당, 충청도강원도에서 승리하며 재기해, 정국의 변수로 떠오르게 된다.


1997년 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 선거 광고 영상.

1995년 7월 18일, 마침내 김대중은 다 내려놓은 것만 같았던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84] 정계 복귀를 선언했으며, 동년 9월에는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신당을 창당[85][86]해 본격적인 대선 행보를 시작하였다.

신당에는 천용택, 이동원, 임동원보수 진영 인사들을 적극 영입하였으며[87], 미국 클린턴영국 블레어 등 정권 교체 성공 사례 연구가 반영된 'New DJ Plan'으로 보수 & 진보 양 표심을 공략하고자 노력하였다. 무엇보다 97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 때, 경제 문제가 부각될 것임을 포착해 말단 당원부터 간부들까지 경제 얘기를 자연스레 꺼낼 수 있을 만큼 경제 지식을 늘리고, 김대중 본인도 경제 관련 책을 다시 쓰면서 관련 공부에 매진하였다.

1996년 4월 15대 총선에서는 예상보다 부진하였으나,[88] 김대중"큰 싸움에서 이기면 된다"는 요지의 발언으로 분위기를 다잡았으며, 1995년 말부터 분위기가 있었던 김종필과의 연대가 1997년 7월에 최종 성사, DJP연합이 이루어졌다. 반면 당시의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은 1997년에 연이은 악재(정초 비정규직을 합법화시킨 노동법 날치기 통과, 한보그룹 부도, 7월 기아자동차 사태, 11월 IMF 사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지리멸렬한 상태였던 반면, 김대중의 지지율은 고공 행진하며 대선 후보들 가운데 1위 자리를 2년 연속 고수하고 있었다.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로 뽑힌 이회창은 기존 통합민주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으로 재출범시키고 무섭게 김대중을 추격하였으나,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이회창과 격렬한 접전을 벌였다가 졌던 이인제가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에 독자 출마하는 바람에 부울경 지역의 표가 나뉘어 결국 김대중의 승리를 막지 못하고 말았다. 김대중이 마침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김대중의 득표율은 40.3%, 이회창의 득표율은 38.7%, 이인제의 득표율은 19.2%였다. 같은 여권 후보였던 이인제가 19.2%나 득표했는데도 김대중이회창의 득표율 차가 겨우 1.6%에 불과한 아슬아슬한 승리였다.[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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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당시 김대중 후보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다음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이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보수층과 충청 지역의 표를 얻기 위해 내각제 시행을 조건으로[91] 정적 김종필손을 잡았으며, 박정희 기념관 건립[92] 관련 기사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은 한국사에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이래로 권위주의통치, 경제 위기 등 수많은 일을 겪은 국민들에게 민주화 세력의 계승자가, 그것도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평화적인 여•야 정권 교체를 실현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의미가 있었다.


4.8. 제15대 대통령 취임[편집]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 취임식[93]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저는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정부 수립 50년만에 처음 이루어진 여야간 정권교체를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면서 온갖 시련과 장벽을 넘어 진정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국민 여러분께 찬양과 감사의 말씀을 드려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김영삼 전임 대통령, 폰 바이츠제커 독일 전 대통령,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전 대통령,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 토마스 맥라티 미국 대통령 특별 보좌관 등 내외 귀빈을 비롯한 참석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드려 마지 않습니다.

오늘 이 취임식의 역사적인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땅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교체가 실현되는 자랑스러운 날입니다 여러분. 또한 민주주의와 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키려는 정부가 마침내 탄생한 역사적인 날이기도 합니다. 이 정부는 국민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참된 국민의 정부라는 것을 저는 이 자리에서 4천 5백만 국민 앞에 선언하는 바입니다. 모든 영광과 축복을 국민 여러분께 드리면서 제 몸과 마음을 다하여 봉사할 것을 저는 굳게 여러분 앞에 다짐하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3년 후면 새로운 세기를 맞게 됩니다. 21세기의 개막은 단순히 한 세기가 바뀌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혁명의 시작입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탄생한 인간혁명으로부터 농업혁명, 도시혁명, 사상혁명, 산업혁명의 5대 혁명을 거쳐서 인류는 이제 새로운 혁명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유형의 자원이 경제발전의 요소였던 산업사회로부터 무형의 지식과 정보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지식정보사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보화혁명은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만들어 국민경제 시대로부터 세계경제 시대로의 전환을 이끌고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는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손쉽고 값싸게 정보를 얻고 이용할 수 있는 시대를 말합니다. 이는 민주사회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문명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새로운 도전에 전력을 다하여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에게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외환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나라가 파산[94]

할지도 모를 위기에 우리는 당면해 있습니다. 막대한 부채를 안고 매일같이 밀려오는 만기외채를 막는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95]

우리가 이 나라의 파국을 면하고 있는 것은 애국심으로 뭉친 국민 여러분과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아시아은행,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 EU 국가 등 우방들의 도움 덕택입니다. 올 한해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자는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96]

[97] 도대체 우리가 어찌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냉정하게 돌이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정치, 경제, 금융을 이끌어 온 지도자들이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에 물들지 않았던들 그리고 대기업들이 경쟁력 없는 기업을 문어발처럼 거느리지 않았던들 이러한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확실히 단언해서 마지 않습니다.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 놓고 고통은 죄없는 국민이 당한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여러분과 같이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파탄의 책임은 장래를 위해서도 국민 앞에 마땅히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저는 이 자리에서 강조해서 마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의 어려움 속에서도 국민 여러분께서는 놀라운 애국심과 저력을 발휘하셨습니다. 우리는 IMF 시대의 충격 속에서도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의 위업을 이룩하였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국민 여러분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 모으기에 나섰습니다. 이미 20억 달러가 넘는 금을 모아주셨습니다. 330만이 넘는 분들이 이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지금도 매일 수만명씩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황금보다 더 귀중한 국민 여러분의 애국심을 한없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면서 여러분 정말로 감사합니다.

한편 우리 근로자들은 자기 생활의 어려움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임금을 동결하는 등 고통분담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수출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지난 3개월간 연속해서 큰 규모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인의 애국심과 저력에 대해서 세계는 지금 경탄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와 사용자, 그리고 정부는 대화를 통한 대타협으로 국난극복의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저는 이 일을 이루어 낸 노사정 대표 여러분께 국민 여러분과 함께 큰 박수를 보내고 감사와 격려의 뜻을 표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국회의 다수당인 야당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난국은 여러분의 협력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의 난국에 여러분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협력해야 합니다. 저도 모든 것을 여러분과 같이 상의하겠습니다. 나라가 벼랑 끝에 서있는 금년 1년만이라도 여러분은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 꼭 정부를 도와주셔야 된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간절히 호소해서 마지 않습니다.

저는 온 국민이 이를 바라고 있다고 믿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지금 이 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안보 그리고 남북문제 등 모든 분야에서 좌절과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개혁이 이뤄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정치개혁이 선행해야 합니다. 국민이 주인대접을 받고 귀인역할을 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돼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국정이 투명하게 되고 부정부패도 사라집니다. 저는 국민에 의한 정치,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를 국민과 함께 반드시 이루어내겠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하고 다짐하는 바입니다.

국민의 정부는 어떠한 정치보복도 하지 않겠습니다. 어떠한 차별과 특혜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무슨 지역 정권이니 무슨 도 (道) 차별이니 하는 말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을 여러분께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정부가 고통분담에 앞장서서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중앙정부에 집중된 권한과 기능을 민간과 지방자치단체에 대폭 이양하겠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데에는 더욱 힘쓰겠습니다. 환경을 보존하고 복지를 증진시키는데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작지만 강력한 정부 이것이 국민 정부가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국민의 정부가 당면한 최대 과제는 우리의 경제적 국난을 극복하고 우리 경제를 재도약시키는 일입니다.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병행시켜서 해 나가겠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이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결코 분리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다같이 받아들인 나라들은 한결같이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시장경제만 받아들인 나라들은 나치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참담한 좌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들 나라도 2차 대전 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같이 받아들여 오늘과 같은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발전하게 되면 정경유착이나 관치금융 그리고 부정부패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확실히 보증하는 바입니다.

저는 우리가 겪고 있는 오늘의 위기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해서 실천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습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물가를 잡아야겠습니다. 물가안정 없이는 어떠한 경제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대통령으로서 저의 확실한 신념이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들께 말씀드립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똑같이 중시하되 대기업은 자율성을 보장하고 중소기업은 집중적으로 지원함으로서 양자가 다같이 발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철저한 경쟁 원리를 지켜나갈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품질좋고 가장 값싼 상품을 만들어 외화를 많이 벌어들이는 기업인이 존경받는 그런 나라를 저는 만들겠습니다. 기술입국의 소신을 가지고 21세기 첨단산업시대에 기술강국으로 등장할 수 있는 정책을 과감히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벤처기업은 새로운 세기의 꽃입니다. 이를 적극 육성하여 고부가 가치의 제품을 만들어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겠습니다. 벤처기업은 일자리를 창출해서 실업문제를 해소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가 대기업과 이미 합의한 5대 개혁 즉 기업의 투명성, 상호 지급 보전의 금지, 재무 구조 개선, 혁신 기업의 선정과 중소기업의 협력 그리고 지배자와 경영자의 책임성 이것을 반드시 관철시켜서 이 나라 기업의 오랜 고질을 청산하고, 우리 경제를 개혁하겠다는 것을 저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서 약속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개혁이야말로 기업이 살고 우리 경제가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길입니다. 정부는 기업의 자율성을 철저히 보장하겠습니다. 그러나 기업의 자기개혁 노력도 엄격히 요구할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는 수출 못지 않게 외국 자본의 투자 유치에 힘쓰겠습니다. 외자 유치야말로 외체를 갚고 국내 기업들을 경쟁력을 강화하며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길입니다. 농업을 중치하고 특히 쌀의 자급자족은 반드시 실현시켜야겠습니다. 농어가 부채 경감, 재보상, 농축수산물 가격의 보장 그리고 농촌 교육 여건의 우선적 개선 등 농어민의 소득과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 나가겠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500만 농민 여러분들에게 약속하는 바입니다.

애국심과 의욕에 충만한 자랑스러운 국민 여러분들과 같이 올바른 경제개혁을 추진해 나간다면 우리 경제는 오늘의 난국을 반드시 극복하고 내년 후반부터는 새로운 활로를 대체해 나갈 수 있다고 저는 확실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약속하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를 믿고 적극 도와주십시오.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해 내겠다는 것을 저는 자신을 가지고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 건강한 사회를 위한 정신 혁명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존중되고 경의가 최고의 가치로 강조되는 정신 혁명 말입니다. 바르게 산 사람이 성공하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실패하는 그런 사회가 반드시 이루어져야합니다. 고통도 보람도 같이 나누고 기쁨도 함께 해야합니다. 땀도 같이 흘리고 열매도 함께 거두어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정신 혁명과 바른 사회를 구현해 모든 것을 바쳐 앞장서겠습니다.

노인이나 장애인들도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을 주고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따뜻하게 감싸줘야합니다. 저는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고 한숨이 있는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그러한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우리 민족은 높은 교육 수준과 찬란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은 21세기의 정보화 사회에 큰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우수한 민족입니다. 새 정부는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가 지식 정보 사회의 주역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컴퓨터를 가르치고, 대학 입시에서도 컴퓨터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 나가겠습니다.

교육 개혁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상당한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대학 입시제도를 획기적으로 개혁하고 능력 위주의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청소년을 과외로부터 해방하고 학부모들은 과중한 사교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일을 반드시 실현시키겠습니다. 지식과 인격과 체력을 똑같이 중요시하는 지덕체의 전인 교육을 실현시키겠습니다. 이러한 교육 개혁은 만발을 무릅쓰고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것을 저는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께 굳게 약속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민족 문화의 세계화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의 전통 문화 속에 담겨 있는 높은 문화적 가치를 계승 발전시키겠습니다. 문화 산업은 21세기의 기간 산업입니다. 관광 산업, 회의체 산업, 영상 매체 산업, 문화적 특산품 등 무한한 시장이 기다리고 있는 부호의 보호이기도 합니다. 중산층은 나라의 기본입니다. 봉급 생활자, 중소 기업 그리고 자영업자 등 중산층이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것을 저는 여러분께 다짐하는 바입니다.

국민의 정부는 여성의 권익 보장과 능력 개발을 위해 적극 힘쓰겠습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남녀 차별은 그러한 벽은 제거되어야합니다. 청년은 나라의 희망이자 힘입니다. 그들을 위한 교육 문화 그리고 복지 향상을 위해서 정부는 아낌없는 지원 대책을 세워나가겠다는 것을 또한 약속하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21세기는 경쟁과 협력의 세기입니다. 세계화 시대의 외교는 냉전시대와는 다른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외교의 중심은 경제와 문화로 옮겨갈 것입니다. 협력 속에 이루어지는 지식 정보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해 무역, 투자, 관광, 문화교류를 확대해 나가겠습니다.

우리의 안보는 자주적 집단 안보가 되어야 합니다. 국민적 단결과 사기 넘치는 강군을 토대로 자주적 안보 태세를 강화하겠습니다. 동시에 한미 안보 체제를 더욱 굳건히 다지는 등 집단 안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것을 여러분께 약속하는 바입니다.

한반도에서 평화 구축을 위해 4자 회담을 반드시 성공시키는데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남북 관계는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 정착에 토대을 두고 발전시켜 나가겠습니다. 분단 반세기가 넘도록 대화와 교류는 커녕 이산가족이 서로 부모 형제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냉전적 남북 관계는 하루 속히 청산되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과 더불어 소리 높이 외치고자 하는 바입니다. 1천 3백여년간 통일을 유지해 온 우리 조상들에 대해서도 한없는 죄책감을 우리는 금할 길이 없습니다. 남북 문제 해결의 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1991년 12월 13일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이 바로 그것입니다.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 협력 그리고 불가침 이 3가지 사항에 대한 완전한 합의가 이미 남북 당국자간에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토대로 실천만 하면 남북 문제는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통일의 대로를 열어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북한에게 당면한 3원칙을 밝히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북한에 의한 어떠한 무력 도발로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확실히 선언하는 바입니다.

둘째. 동시에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다는 것도 분명히 이 자리에서 밝히겠습니다.

셋째.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가능한 분야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는 것은 이제 그런 시대를 열겠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하고 다짐하는 바입니다.

남북간의 교류 협력이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북한이 미국, 일본 등 우리의 우방 국가나 국제 기구와 교류 협력을 추진해도 이를 지원할 용의가 있습니다. 새 정부는 현재와 같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경수로 건설과 관련한 약속을 이행하겠습니다. 식량도 정부와 민간이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서 지원하는데 인색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북한 당국에게 간곡히 호소합니다.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나이 들어 차츰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남북 가족들이 만나고 서로 소식이라도 전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저는 북한 당국에게 간절히 호소해서 마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관해서 최근 북한이 긍정적인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점은 예의(銳意) [98]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와 학술 교리, 정경 분리에 입각한 경제 교류도 확대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남북기본합의서에 의한 남북간의 여러 분야에서의 교류가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선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의 교환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북한이 원하면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새 정부는 해외 동포들과의 긴밀한 유대를 강화하고,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우리는 해외 동포들의 거주국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면서 한국계로서 안정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적극 돕겠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선언하는 바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전진과 후퇴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오늘을 가로막고 있는 권한을 딛고 힘차게 전진합시다. 국난 극복의 재도약의 새로운 시대를 여러분 같이 열어갑시다. 반만년 역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조상들이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민족 수난을 고비마다 불굴의 의지로 나라를 구한 이 민족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이어서 우리도 오늘의 고난을 극복하고 내일을 실천하는 그런 위대한 역사를 우리 다같이 힘을 합쳐서 창조하자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호소하고 부탁해 마지 않습니다.

오늘의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저는 삼을 수 있는 자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 또한 이것을 해낼 수 있습니다. 6.25 폐허에서 일어난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선두에 서겠습니다. 우리 다같이 굳게 손잡고 힘차게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이 국난을 극복합시다. 그리고 세계 무대의 선진국으로서의 재도약을 이룩합시다. 그래서 5천년 역사에 빚나는 이 대한민국의 빚나는 영광을 다시 한번 세계 만방에 드높이자는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해서 마지 않습니다.

여러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4.9.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시절[편집]



4.9.1. IMF 외환위기 극복 및 경제 성장[편집]


김대중이 취임했던 1998년 3월 초반 대한민국1997년 겨울에 불어닥친 외환위기 파장이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는 위기 국면이었다. 전국이 돈가뭄에 시달렸다는 점은 똑같지만, 서울-경기 지역이 그나마 97년 하반기 ~ 98년 전반기에 최하점에 도달하고 생존을 모색하는 시기였던 반면, 지방은 3 ~ 6개월 정도 늦게 한파가 불어닥치며 고난의 길이 시작되었던 것. 은행 금리 29.5%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는 뼈를 깎는 수준의 고강도 구조 조정의 일환으로 1차로 공기업 108개를 민영화했으며[99], 14만 명의 공공부문 인력을 감원하는 등[100] 공공 부문을 쇄신하였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의 긴급 자금을 수혈하는 한편, 단기 외채 채권국인 일본과 협상해 중-장기외채로 전환하고자 하였으며[101] 외환보유고 확충 및 국무위원단의 해외 투자 유치 영업[102], 주요 30대 기업 구조조정 지시[103], 물가 관리 등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차근차근 시행하였다.

특히 IT 산업과 문화 산업 등을 장려하여 우리 경제를 지식경제 시스템으로 상당 부분 전환하고 한류를 일으킨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기업 재무 구조를 개선하고, 금융에 보다 더 자유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것도 빼놓을 수 없다.[104] 그리고 재임 초기 IMF 측이 지시한 고이자율 정책[105][106]을 시행하는 한 편, 적극적인 외자 유치 정책을 병행하여 저축과 투자를 늘렸고, 생산과 고용이 다시 늘어나게 하였다. 그 결과 1998년 - 6.9%이었던 경제성장률이 그 이듬해이던 1999년에 9.5%, 2000년에는 8.5%까지 급격히 상승하였고, 8년 연속 적자이던 무역 수지는 1998년 390억 달러, 1999년 239억 달러, 2000년 118억 달러, 2001년 93억 달러를 기록하는 등 대규모 흑자로 돌아섰다.

그에 힘입어 2001년 8월에는 IMF 구제 금융 195억 달러를 전액 상환하였다. 외환 위기가 발생한지 3년 8개월, 그러니까 취임 후 겨우 2년 6개월 만에 외환 위기를 극복한 셈이다. 사실 1997년의 외환 위기는 우리 나라 역사상 최악의 외환 위기였다.[107]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도 외환위기를 겪었고, 비록 빚을 갚지만 그 대가로 극심한 빈부격차와 왜곡된 산업구조라는 문제점을 안겨주었으며 특히 아르헨티나는 외환위기를 극복할때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2001년2002년에는 이자율을 낮추고 물가를 잘 관리하면서[108] 안정적인 경제 정책을 유지하였다. 2001년에는 경기가 좀 침체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경제성장률은 4.0%를 기록했으며, 2002년에는 월드컵 특수에 힘입어 경제 성장률이 7.2%를 기록했다.

이 무렵 전국 (고속)도로에 무인단속카메라를 설치해 신호위반률과 고속도로 단속하는 인건비, 그리고 물류비를[109] 줄이기도 하였다.


4.9.2. 외교 & 대북 관계[편집]


외교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지명도를 바탕으로 미국, 중국, 일본 등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북 외교에 있어서 운신의 폭을 넓혔고, 결국 현대 그룹 회장 정주영을 앞세워 남북 민간 교류의 물꼬를 트는 데 성공했다. 특히 1998년 6월, 83살의 정주영 회장이 500마리의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육로로 강원도의 고향까지 간 일은 당시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드디어 남북 간에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후로 남북 경제 협력은 확대되었고 2000년 6월 15일에는 남북정상회담이 실시되었다.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 정상들 간에 회담이 열린 것이었다. 그 회담에서 결의된 6.15 공동선언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선언한 것이었는데, 이는 여태껏 남한을 미국의 괴뢰 정도로 보아 동등한 대화상대로 여기는 것조차도 거부하던 북한이 드디어 남한을 동등한 대화상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고, 남한 역시 북한을 흡수통일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과 협력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북한은 적화통일을 포기하고, 남한은 흡수통일을 포기하며, 남북한이 앞으로 공존과 화해, 그리고 협력을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110]

2000년 10월에는 북한 조명록 차수의 방미와 뒤 이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으로 북한과 미국이 북핵의 완전한 제거 및 북미 수교를 논의하는 성과를 도출했다.[111] 이러한 평화 외교에 대한 노력, 그리고 대한민국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공로를 인정 받아, 2000년말 김대중은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노벨상의 엄격한 심사 기준을 고려하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112]

재임 중 측근이 불법적으로 북한에 세금을 송금'한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하여 비판이 있다.

물론 김대중 정권 집권기간 동안에도 다른 대통령들의 집권기간처럼 수차례에 걸쳐 북측의 무력도발이 감행되었다. 그러나 1999년 이후에는 제1연평해전제2연평해전 외에는 이렇다 할 도발이 없었고, 그 연평해전조차도 연평도 해역의 군사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일어난 측면이 컸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어쨌든 북한으로부터 입사과라도 받아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말부터 출범한 조지 워커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의 여파로, 다음의 노무현 정권기에는 북한이 기존의 약속을 뒤집고 핵실험을 강행하기에 이른다.[113] 또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햇볕정책이 후퇴하자,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중 박왕자 씨 피격 사망 사건, 2009년 11월10일 서해교전(대청해전), 2010년 3월 26일 백령도해상에서 천안함 피격침몰사건, 2010년 11월 23일 북한 연평도 포격사건 등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러한 햇볕정책과 대북관계에 대한 논란에 관해서는 햇볕정책 항목 참조.)


4.9.3. 임기 후반기의 외교적 악재[편집]


2000년 11월에 조지 W 부시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2001년 1월에 백악관으로 들어간 이후, 클린턴 행정부와 김정일 정권 간의 모든 합의는 무효화되었다. 부시 정부가 대북 강경 정책으로 입장을 선회하여, 대북 압박 페달을 밟게되면서, 김대중의 대북 정책은 난항을 거듭하게 된다. 조지 W 부시 정부는 클린턴 정부의 제네바 북핵 동결 합의를 일종의 항복으로 보고, 북핵 문제에 대해 ABC[114] 정책을 취했다.

미국의 북한 경제 봉쇄가 날로 강도를 더해가고, 군사적 위협도 점점 더 날카로워지자, 북한의 대외 정책도 강경한 쇄국, 대미 군사 항전 분위기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런 상횡변화의 여파로, 2001년 3월 김대중이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조지 부시와 공화당 정부는 유화책(햇볕정책)을 고수하고자 하는 DJ 및 수행한 국무위원단(임동원, 정세현 등)과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여기에 일부 공화당 의원들까지 나서서 각종 간담회에서 김대중을 공격적으로 몰아세웠고, 이념 공세를 퍼붓기까지 하였지만, DJ 본인이 "젖먹던 힘까지 다해 부시 대통령을 설득시켰다."고 말할만큼 진력한 결과, 이듬해인 2002년 2월 한국 도라산을 방문한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발언하기에 이르렀다. [115]

또한 2000년에 착공된 개성공단의 설립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2002년 11월 23일에 금강산 지역이 금강산 관광 지구라는 특별 행정 구역으로 명명되는 등 임기말까지 꾸준히 성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김정일 간의 합의가 네오콘의 개입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화 됨에 따라, 한반도 평화정착 및 북미수교라는 측면에서 햇볕정책은 표류하고 있는 상태. 게다가 2002년 10월 2차 북핵 위기가 터져나오면서 김대중의 햇볕 정책 목표 중 하나인 "한반도 비핵화"는 원점[116]에서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117] 하지만, 유사시 군수물자 수송, 전쟁을 감당할만한 경제력, 그리고 무기 수준까지 이미 남한의 군사적인 우위가 확고해진 현실인만큼, 우리 정부에 의한 대북 정책의 성패 관건은 첫째가 북-미관계 증진이고, 둘째가 북한의 핵무장 포기 셋째가 (南이 열쇠를 쥔) 남-북 경제협력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정치적 지위 및 역할을 특히 대북정책의 주도권과 관련지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후 노무현참여정부에서 햇볕 정책을 지속해 나가고자 하였으나, 2006년 말 북한이 기어이 "미국(네오콘)의 위협에 대한 자위수단"이란 명분 하에 핵실험을 성사시킴으로써, 안보 환경이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게다가 정권 막판이라 레임덕이 극심해졌던 2007년에야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하는 악수[118]를 둠으로써 적절한 시기를 놓쳤고, 보수 정권이 연이어 집권하고, 남북교류의 유일한 보루였던 개성공단까지 문을 닫으면서 햇볕 정책은 점점 사장되고 있다...

심지어는 막대한 비용과 희생을 치르더라도 북한 정권을 기어이 무너뜨려 한다는 흡수 통일 관련 발언이 힘을 얻을 만큼 강경론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상황.


4.9.4. 내각제 논란[편집]


"내각제 약속은 내 인격을 걸고 약속하는 것이며 대통령에 당선된 뒤 2~3년 더 대통령 하기 위해 약속을 안 지키는 일은 없을 것"

김종필과의 정치적 연합 조건 중 상징적인 조건이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이고, 정치적인 조건은 의원 내각제 시행이었다.

내각제 시행에 대한 요지는 임기의 반이 지난 후에는 정부 구성을 의원내각제 체제로 바꾸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DJ는 대선 후보 시절 내각제 공부를 통해, "시행한다면 정부와 의회 모두 일정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독일식 내각제[119]가 바람직하다."는 결론까지 내려둔 상태였다.

김대중은 결과적으로 내각제 약속을 어겼다. 당시에는 JP가 지극히 말을 아끼며 좀처럼 관련 심정을 내비치지 않았는데, 훗날 JP가 직접 밝힌 견해가 있다. JP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내각제 철회를 이해한다고 밝히며, 김대중 대통령의 내각제 철회 이유에 대해 과장과 축소가 없는 당대의 현실적 고뇌의 결과물로 회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각제를 추진했다고 해도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반대로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을 덧붙인다. 이는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김종필 증언록을 통해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이후의 민주당-자민련 결별에 대해서는 2000년 총선에서의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의 과반 실패에 따른 결과로 분석하는 이들도 있다. 내각제 개헌을 위해선 개헌 발의에 필요한 반수 이상의 의석 수를 확보해 놓아야 했지만 1996년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미 국민회의 79석, 자민련 50석으로 공동 여당은 129석 밖에 확보가 되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새천년민주당 115석(+호남 무소속 4석=119석), 자민련 17석으로 또 할 수가 없었다. 즉, 내각제 개헌 불이행은 김대중의 의도적인 번복이라기 보다 여건 불충족으로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


4.9.5. 정권 말기의 곤욕[편집]


정권 말기에는 ‘홍삼 트리오’로 불린 세 아들이 모두 권력형 게이트에 휘말리면서 큰 곤욕을 치렀다. 먼저 그의 장남인 김홍일이 로비로 1억 5천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고, 측근(?) 최규선[120]이 각종 이권에 개입한 혐의로 구속된 '최규선 게이트'가 발생했다. 3남 김홍걸도 2002년 ‘최규선 게이트’ 수사 당시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36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차남 김홍업은 이용호 게이트를 수사하던 검찰이 그의 이권 개입 의혹으로 수사를 확대하면서, 청와대 비서관들을 통해 인사에 개입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고 댓가를 받은(알선수재)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문제가 될만한 자금은 철저하게 피하는 기민한 처신 덕분에, 검찰에서 차남의 주변인물 수백명을 샅샅히 뒤졌지만[121] 제대로된 금전적 물증은 찾지 못했다.[122] 이 스캔들의 여파로 2002년 5월 6일, DJ는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야 했다.[123]

2002년 6월, 2002년 월드컵에서 축구 대표팀의 4강 진출 성공에 온 국민이 기뻐하였지만, 그 날은 대통령의 아들 3형제가 홍삼게이트 때문에 교도소로 이송되는 날이기도 하였다. 이날 김대중은 광주월드컵경기장을 찾았는데, DJ와 고락을 함께한 주민들의 축하와 격려가 쏟아졌지만, 카메라에 잡힌 그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4.10. 퇴임 후[편집]


한국 갤럽 조사에서 퇴임하는 해 지지율이 30%를 넘는 유이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124], 최저 지지율 역시 24%로 17년 기준으로 가장 높은 기록이다. 퇴임 이후에도 김대중평화센터를 설립하고 김대중도서관을 개장하는 등 고령의 나이에도 대내외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과거의 애환을 풀어나가는 활동도 진행하였는데,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기도 했으며, 선술한 대로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에게서 아버지의 탄압에 대한 사과를 받기도 했다. 이때 김대중은 박근혜를 가리켜 "동서 화합의 적임자"라는 덕담을 해주기도 했다.

원로 정치인으로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와 북한 핵실험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으며,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당적으로는 임기 말기였던 2002년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으며, 그 이후로는 사망일까지 쭉 무소속이었다. 그 대신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을 지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김대중은 퇴임을 한달 앞둔 2003년 1월, "향후 퇴임 뒤 국내 정치문제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고, 퇴임 이후 실제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열린우리당이나 새천년민주당에서 인사를 와도 덕담만 할 뿐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는 하지 않았다.[125][126] 하지만 이후 2007년열린우리당은 하락세를 견디지 못하고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당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때 김대중은 열린우리당을 비판한 바 있다. 민주당 분당 사태, 대북송금 특검, 안기부 X파일 사건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86세대 정치인들에게 "국민들의 뜻에 부응하지 못했다.", "86정치인들이 정치를 계속하고 싶으면 가방을 메고 대중 속으로 뛰어들어가 국민에게 잘못한 것은 사과하고 직접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127]

고령에다가 과거 고초를 겪었던 후유증으로 다소 잔병치레[128]를 하긴 했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강골인데다 아내 이희호 여사가 헌신적으로 도운 덕분에 퇴임 후에도 건강하게 잘 지낸 편이었다. 그러나 2009년 5월 23일, 후임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큰 충격을 받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던 도중 노무현의 소식을 접하자 한 말이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다."라고 인터뷰를 했을 정도였다.

민주정부 10년(1998년 ~ 2008년)의 가치를 재발견해 계승하고, 극복할 것이 있다면 그 대안을 만들어내서, 결국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고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가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ㅡ2009년 5월 29일, 동교동 자택에서.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095484297.jpg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때는 휠체어를 타면서까지 참석했다. 그리고 비서들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헌화를 스스로 하면서 오열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다소 무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5. 사망[편집]



파일:Kim_Dae-jung_presidential_portrait.jpg

김대중 대통령 공식 영정

결국 불과 3개월도 채 안되어 폐렴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때 전직 대통령 김영삼, 전두환[129], 한때 경쟁자였던 이회창박근혜, 반기문을 비롯한 거물 정치인들이 문병을 왔다. 그러다가 2009년 8월 18일결국 병세가 악화돼 사망했다. 향년 85세.

이희호 여사가 서거 2주기 관련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 사망 이후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한동안 서재에 앉아서 책만 읽을 정도였고, 병원에 입원하던 며칠 전부터는 죽도 제대로 못 먹을만큼 상태가 심각해졌다고 한다. 재택비서에게 "건강이 안 좋으니 병원으로 모셔가자"고 권유해서 병원으로 데려갔고, 입원 치료 초반에는 어느 정도 회복되는 듯 보였으나 나중에 악화되어 결국 의식을 잃고 사망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의식을 잃기 전 따로 유언은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서면으로 남긴 유언은 본인의 일기장에 마지막으로 남긴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였다.

장례는 국장으로 진행되었으나 대통령의 생전 요청과 경제 상황을 고려하여 비교적 간소하게 치뤄졌다. 생전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음이 반영되어서 입관식 등의 절차는 천주교(가톨릭) 방식으로 치러졌다. 각계 주요 인사들이 조문을 왔으며, 북한에서도 애도의 뜻을 밝히며 조의 방문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시신은 평소에 살던 집(사저) 가까운 곳에 묻히고 싶다는 말이 있었고, 유가족들이 참배를 용이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말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을 요구해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이 되었으며, 단독 묘역에 안장되었으나 차후 이희호 여사가 사망한 후 합장되어 더 이상 단독 묘역이 아니게 되었다.

삼김 중 처음으로 고인이 된 인물이다. 김영삼[130]은 2015년에, 김종필은 2018년에 차례로 사망했다.

6. 묘역[편집]


앞서 서술했듯 국립서울현충원 부지에 안장되었는데, 굳이 국가원수묘역이 많이 비어 있는 대전광역시 국립대전현충원을 내버려두고 당시 기준 생존자 가묘 1개를 제외하면 만장인 서울특별시에 안장 된 것이 논란이 되었다. 이 결정은 최종적으로는 당시 이명박 정부에 의해 내려진 것인데, 본인이 평소에 살던 집(사저) 가까운 곳에 묻히고 싶어했으며, 박지원이 DJ 서거 이후 정부와 장례 절차를 협상하면서 내걸었던 조건이기도 하며, 동작동에 안장되는 다음 차례가 본인이 될 것을 예상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간접적 동의를 받은 결과물이었다. 동아일보 기사

이 때문에 넓게 조성된 이전 대통령들 묘역과 비교하면 상당히 좁은 편이다.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보이는 다른 대통령 묘역과 다르게 일종의 숲길 비슷하게 되어 있으며[131] 오른쪽에 난 작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바로 묘소가 나오므로 계단을 올라야 하기에[132] 참배하기도 전에 녹초가 되어버리는 타 대통령 묘소들에 비해 힘 덜 들이고 참배할 수 있다. 단, 다른 대통령들에 비해 좁아서 답답하다는 사람들도 간혹 존재한다. 사실 안 그래도 좁은 부지였는데, 이후 영부인 이희호 여사까지 합장되면서 더 좁아진 느낌을 주기도 한다.


6.1. 사망 이후[편집]


감옥에서도 책을 읽으며 학식을 쌓은 모습, 과거 정권에 대한 단죄명분이 확실했지만[133] 단죄 대신 화해와 통합이라는 대의(大義)를 선택한 모습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특히 정치적 지지기반이었던 호남 지역에서는 사후(死後)에 DJ의 이름을 딴 큰 건물이나 거리가 조성될 만큼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민주당계 국회의원들이 주기적으로 이희호 여사를 찾는 게 다른 이유가 아니다. 또한 후신 중 하나인 더불어민주당은 자신들이야말로 DJ의 적통이라며 호남 민심에 구애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역대 대통령들의 여론조사에서 박정희, 노무현과 함께 항상 두 자릿수를 기록하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134] 또한 무사히 퇴임하고, 퇴임 이후에도 (임기 중의 정치적 비판과는 별개로) 개인적인 추문에 크게 휩쓸리지 않은 채 그럭저럭 평화롭게 세상을 떠난 몇 안 되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생전에는 오랜 고난 끝에 영광을, 고인이 된 후에는 통일 정책의 지표로써 남북기본합의서(91년) 이후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이후 김대중 본인이 숨지고 10년 후, 2019년 4월 20일에는 장남 김홍일 전 의원이 사망했고, 이로부터 2개월 뒤인 2019년 6월 10일 오후 11시 37분에는 부인 이희호 여사도 별세했다.

굽시니스트가 시사인에 김대중의 일생을 추모하는 만평을 그린 바 있다. #, #, #

[1] 2006년 10월 전남대 강연, 2007년 4월 전북대 강연 등에서 행동하는 양심과 더불어 삶의 여러 차례에 걸쳐 발언한 말이다. 사실 무려 1960년대부터 꾸준히 말해온 그의 오랜 정치 철학이다.60년대 80년대 대통령 재임 중[2] 삼성 이건희 회장 앞에서 "수출 잘 하는 기업은 업고 다니겠다"고 말하기도 했다.[3] 일자리 및 자금줄이 급격히 줄어든 IMF 체제를 따르는 와중에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다. 이에 전전임 노태우 정부 시절 케인지언 성향 관료들이 구축한 복지 체제를 바탕으로, 사회안전망 구축을 보강한 복지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이러한 빈부격차를 극복하고자 한 그의 노력도 무시해선 안될 것이다[4] 이 밖에 보복명분이 확실했지만 보복이 아닌 대의(화합)를 택한 점도 있다. YS와 더불어 보복명분이 제일 확실한 정치인이었으며, DJ의 경우는 본인이 겪은 일 외에 + 장남까지 고문으로 지팡이 짚는 신세가 된 고난도 겪었다.[5] 신분상으로는 1926년생이며 이 생년으로 계속알려져왔는데 김대중 사망당시 측근에서 언론사마다 공식적으로 양력 1924년 1월 6일이며 이 생일로 표기하도록 부탁하였다. 밝혔다.[6] 모친의 이름은 원래 장노도였으나 장수금으로 개명했음을 자서전에서 밝혔다.[7] 1894년 5월 13일생. 신안 하의면 내당동(內堂洞)에 묘가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김관일(金貫一)인데, 족보명과 일치하는 이름은 아닌 듯, 광산 김씨 인터넷 족보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김해 김씨 족보에 김대중의 으로 1920년생 김대봉(金大奉)이라는 인물과 그 자손들이 기록되어 있다. 김대봉은 3남 1녀를 두었고 1971년에 사망했다.[8] 사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돈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첩을 두는것이 흔하던 시절이었고, 일제강점기까지도 처첩제가 법적으로 인정되었다. 물론 김대중의 아버지인 김운식의 경우에는 커다란 부와 권력을 지녔던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전까지의 영향을 받아왔던 것. 처첩제가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박정희 정부 때부터다.[9] 조선중기부터 하의도가 결혼지참금 격으로 홍씨 일가에게 땅이 넘어가면서 이런저런 착취가 많이 이루어져서 이런저런 트러블이 많았는데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일본지주에게 땅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소작료가 크게 높아지고 착취도 더욱 잦아지자 이런저런 쟁의가 많았다. 김운식도 이런 쟁의의 중심인물이었다.[10] 김대중의 고향인 신안이 예나 지금이나 낙도 오지이다 보니 엿장수가 간단한 잡화나 공산품을 함께 파는 보부상을 겸했다고 한다.[11] 아버지 오시거든 드리라고 했다고 한다.[12] 출처-김대중 자서전, 1장[13] 현 목포북교초등학교[14] 5년제였으며, 현 목상고등학교의 전신이다.[15] 국내 웹에선 어째서인지 '도요타 다이쥬'라는 표기로 알려져 있다.[16] 풍요로운 곡창지대인 호남의 특성을 따서 창씨했다는 얘기가 퍼져있었으나, 도요타로 창씨한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다.[17] 해운회사들은 일본군의 물자수송에 동참했기 때문에 관련직종자들을 징집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이 역시 일제의 전쟁에 동참했다고 볼 수 있지만,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과도한 비난을 할 만한 행보는 아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도 이 당시 자동차 정비 사업을 하다 징집을 피하기 위해 광산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다른 업자들의 견제를 버티지 못하고 사업을 접은 적 있다.[18] 좌우대립은 차제로 미루고, 일단 정부부터 구성해 산적한 현안을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 이상주의자라는 비판과 "어쩌면 오늘의 남북분단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혜안"이라는 상반된 평이 있다.[19] 신민당은 참고로 당시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론 이데올로기를 추구하는 당이었다.[20]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다른 사람의 똥은 더럽다 하고, 블라디미르 레닌의 방귀는 향기롭다고 한다."고 비판한 적도 있었을 만큼, 과거 조선의 악습을 비판한 무리들이 정작 조선의 신앙적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했던 한계가 있었던 것. 이들 소련추종세력들은 훗날 독자세력을 구축하고자 한 김일성이 자신의 세력기반 "갑산파"를 밀어줌에 따라 숙청되거나, 파벌을 바꾸었다고 한다.[21] 1948년 동양해운, 1951년 목포상선주식회사, 1952년 흥국해운주식회사로 각각 상호변경되었다.[22] 한편 김대중은 장인의 권고에 따라 한국민주당 목포지부에 입당해 시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23] 이들의 패악질이 얼마나 심했는지 인민재판의 실태를 알게 된 스탈린"김일성 동지는 이런 짓을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인가. 대체 뭘 하고 있는가. 당장 이를 중지하라."고 격노했다고 한다.(출처 : 박헌영평전) 사회주의 혁명의 노선을 따른다면 현지인들의 인심을 얻는 것이 중요한데, 인민군이 남한 점령지에서 벌인 인민재판과 학살은 인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한 점령지 주민들의 민심을 차버리는 짓거리였다. 더군다나 스탈린은 레닌의 측근으로 일하며 러시아 혁명에서 활약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민심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을 것이고, 김일성의 어리석은 행동이 더더욱 못마땅했을 것이다. 김대중의 "남한 사람들이 공산당을 알고 정말 반공의식을 갖게 된 것은 6.25 동란 때문"발언 역시 이걸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겠다.[24] 쉽게 말해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기자 출신 사업가 출신 대통령이기도 했던 셈이다.[25] 일생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젊은시절 DJ의 받아적는 습관을 인상깊게 보았다고 한다.[26] 총재인 DJ가 늘 뉴스를 면밀히 검토했기 때문에, 뭔가 소식거리를 가져오거나 이에 대해 제대로 연구해오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중용되었다는 후문이다. 어떻게 보면 신문사 사장이 취재 잘해오는 기자들을 아끼는 것과도 비슷한 이치.[27] 정병국이 처음 상도동계로 들어가서 일했을 때 얼을 타는 걸 보고 김영삼"저 김대중이처럼 좀 꼼꼼하게 일좀 해라"고 했다고 한다.[28] 문화방송(MBC) 뉴스 진행자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한 정동영이 입문 초기의 보좌관 시절 했던 첫 업무는 아예 DJ의 측근 박지원과 함께 새벽 6시에 총재 자택으로 출근해 김대중에게 뉴스를 일일 브리핑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생활이 고됐는지 정동영은 6개월 후 자신의 후임자가 정해지자 속으로 '만세'를 외치며 반겼다는 후문.[29] 재택근무비서였었던 장성민의 증언에 따르면, DJ는 "정치는 50%가 돈이고, 50%는 '정보!"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으며(장성민, 김종혁 기자 공저, <김대중, 다시 정권교체를 말하다>, 214쪽), 이 정보를 얻기 위해 매일 일본 신문을 포함해 10여 가지의 신문을 꼼꼼히 살피고, 토막소식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30] 해군본부의 직할부대[31] 심지어는 장사상륙작전처럼 최소한의 병적기록과 작전 문서마저도 남기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997년에 이분들이 탑승한 함선 잔해가 발견되기 전까진,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었다는 후문.[32] 1946년 김장훈(金長勳) 제독이 창설에 관여한 해안경비대 목포조직(= 목포경비부). 김성은 전 국방부장관이 당시 김장훈 제독 밑에서 참모장으로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해안경비대 목포조직의 초창기 사령관 숙소 역시 DJ의 장인인 차보륜이 본인 소유가 된 적산가옥을 제공한 것이라고[33] 명동성당과 함께 있다. 명동성당이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이기 때문.[34]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에게도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소년 시절 정 추기경은 신앙이 흔들렸던 적이 있는데, 1947년 초(사순시기) 명동성당에서 윤 신부의 강의를 듣고 다시금 신앙심을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고 한다.[35] 아이러니하게도 1997년 대선에서 겨룬 상대 후보 이회창이 가톨릭 신자가 된 원인이 장면 때문이었다고 한다.[36] 지금은 무소속 후보만 주민들의 추천서가 필요하고 정당 공천 후보는 소속 정당의 공천장만 제출하면 되지만, 제1~2공화국 때까지만 해도 정당 공천제가 법에 없어 모든 후보가 오늘날 무소속 후보와 마찬가지로 주민들의 추천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렇다보니 공천 탈락자들이 경선에 불복하고 출마를 강행하는 일이 훨씬 흔했던 것은 덤.[37] 이때 김대중은 후보 등록조차 하지 못하자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그 당시 인제 지역 군 부대 사령관까지 찾아가본다. 그러나 마침 사령관이 출타 중이었고,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 오고 만다. 만약 그 사령관과 만나서 의기 투합했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사령관은 5년 뒤에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였다. 어찌보면 참 질기기 그지없는 인연이다.[38] 연이은 낙선으로 궁핍해진 살림을 보태고자, 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미용도구들을 집에 가져다 놓고 미용실을 운영하였다.[39] 이희호도 여성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는데, 용모와 지적인 면을 모두 갖춘 DJ에게 반했다는 후문이다. 사실, 삼김시대의 주역이었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세 사람은 모두 지적으로도 외모로도 뛰어나고 준수한 미남들이긴 했다.[40] 이 기록은 2016년 2월 23일 저녁 7시부터 시작된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에서 더불어민주당김광진 의원이 5시간 34분으로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문서를 참조.[41] 정치인이기 전에 서울대학교 개교 이래 제일가는 수재라 일컬어진 법학자였다. 법 전문가답게 정부 수립 후 초대 법제처장을 지냈다.[42] 일국의 대통령은 그 악수 횟수, 같이 사진 찍는 사람 및 위치(대통령 주변에 있는지 여부), 등장하는 장소 하나하나에 의미가 실려있는 경우가 많다. 즉, "여권 후보를 지지해주시면, 여기서 확인한 민원들을 돕는데 더 힘을 실어드리겠다."고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43] 사실 참모였던 선거의 귀재 엄창록이 없었다면 당선되기 힘들었다. 나중에 엄창록을 잃은 것을 자서전에도 아깝다고 썼다. 아버지 조지 H. W. 부시한테 리 애트워터라는 선거 전략가가 있었다면, 김대중한테는 엄창록이 있었다. 엄창록은 중앙정보부 자료에 따르면 6.25 당시 심리전 업무를 담당한 북한군 고급하사관 출신으로, 전후 약방을 운영하다가 김대중을 만나 선거 참모로 활약했다. 네거티브 전략의 고수로, 선거에서 점조직 운영 및 선거 피켓을 국내 최초로 활용한 선거전략가였다고 한다. 엄 씨의 재능에 주목한 중정에게 영입, 폭발물 자작극 소동으로 김대중 캠프를 떠났다. 엄 씨의 방법론 중에는 진평을 방불케 하는 교묘한 비방 및 모략, 심지어 지역감정 조장까지 어두운 면도 많았는데, 특히 1971년 대선 구도의 지역감정 조장 건은 엄 씨의 작품이라 의심한 민주당(신민당) 사람들이 많았다고. 선천적으로 폐가 약했으며, DJ와 결별한 후에는 1988년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대중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44]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을 완곡하게 내보낸 것이다[45] 그 국회의원은 당시 변협회장이던 홍승만이다. 공화당 전국구 8번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46] 허경만은 검사 사직 후 민주당계 정당에 들어가 국회의원 및 초대 전남도지사를 지내게 된다.[47] 당시 김대중은 병실에서 치료다운 치료도 받지 못했다. 검진하러 오는 의사는 체온만 재고 건성으로 몸을 둘러보고는 돌아갔다.[48] 조윤형은 김영삼을 당선시키면 큰 화근이 될 것이라며 절대로 지지해서는 안 된다고 버텼다. 김대중은 김영삼과 자신의 관계는 사적인 것이고 유신 종결은 국가와 민주주의의 존망에 관련된 문제이니 이해해 달라고 끈질기게 이야기했다. 조윤형이 계속 뜻을 굽히지 않자 마지막에 김대중은 “자네, 내 말을 안 들을 거면 형·동생 사이 의를 끊세”라는 말까지 했다. 조윤형은 눈물을 머금고 후보를 사퇴했다.[49] 참고로 이철승은 1971년 대선 후보 경선 마지막에 김대중을 지지해서 대선 후보로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김대중이 탄압 받을 때 김영삼은 외면했지만 김대중 측근들을 보살펴 준사람도 이철승이었다. 개인적으로 이철승은 김대중에게 고마운 사람이었지만, 김대중은 대의 명분을 우선하여 당시 유신체제에 중도타협론을 내세우며 온건야당으로 이끌던 이철승보다 훨씬 격렬하게 저항하여 강성투쟁으로 이끈 김영삼을 밀어주었다.[50] 김대중이 신민당에 자신이 이끄는 재야 세력과 함께 입당하려 했으나, 김영삼은 입당 심사를 거론했고 김대중 역시 군부가 협조적이지 않을 테니 대선 출마를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듣지 않는다. 김종필은 김종필대로 여당 총재인 자신이 미래 권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51] 5월17일 밤 10시, 계엄군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으로 이동하여 소총 개머리판으로 대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들은 '김대중과 경호원이 저항하면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52] 2004년 17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었을 때 즈음 파킨슨병 징후가 있었으며 2009년 선친의 장례식장에 참석했을 당시에는 휠체어에 앉은 채로 당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된(겨우겨우 아버지....를 불렀다고.)상황이었다. 10년을 더 투병생활을 하다가 2019년 별세하였다.[53] 카터 행정부가 정권을 인계하면서 레이건 측에 김대중 구명을 요청했고, 레이건 측 역시 동의했다.[54] 가장 대표적인 구명 운동만 적었을 뿐, 이외에도 많은 구명 활동이 있었다.[55] 이 무렵, 미국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공수여단이 투입되는 사태를 방관했다는 도덕적인 부담을 안고 있었다. 5.18 이전까지만 해도 운동권에서는 미국에게 6.25 전쟁때 한국을 도와주었다는 점과 박정희 정권의 독주를 견제해주었다는 점 때문에 미국에게 우호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5.18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미국이 신군부를 암묵적으로 승인해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미국에 대한 실망감과 반감이 급속히 커졌으며, 많은 학생들이 자국 이익을 철저히 관철시키는 외교를 뼛속 깊이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부 학생들은 사회주의 체제를 대안으로 여기고 몰두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문서들이 기밀해제된 지금에 와서야 미국의 신군부에 대한 승인은 역설적으로 전두환정권의 폭주를 저지하고 전두환정부를 자신들의 손안에 감시하기 위한 수단임이 밝혀졌지만, 어쨌든 이 사실을 알 턱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반미 운동이 확산된다.[56] 이 무렵의 DJ는 투옥 생활 중 이런저런 군것질로, 이 항목 맨 위의 사진처럼 체중이 눈에 띄게 늘어난 상태였다. 10년 후 아나운서 출신의 차영 전 비서관이, 대선캠프에 합류하여 제시한 DJ의 스피치 개선점 1호가, "살을 빼시라"는 내용이었을 정도.[57] 차영 비서관이 방언(사투리) 사용 부분도 바꿔 보자고 건의해, 실제로 효과를 보았지만 -> '사투리 쓰는 일이 흠이 되는 모습 역시 옳지 않다'고 판단한 DJ가 거절해, 방언 부분은 뺐다고 한다.[58] 일베(...) 등 극우 사이트에서 소위 '앙망문'이라 하며 김대중이 정치 생활을 은퇴했다 비열하게 복귀 했다고 까이는 요소이긴 하나, 그땐 말 한 번 잘못하면 온가족이 끌려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대였다. 앙망이라는 표현도 지금은 쓰이지 않는 한문투의 고어에다 그 발음이 묘해서 그렇지 당시 한문교육을 받았던 기성세대들 간에는 편지글 등에 흔히 쓰이는 표현이었다. 무엇보다도,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이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를 찾아가 김대중을 설득해 미국에 망명할 것을 설득했으니, 앙망은 김대중이 전두환에게 한 게 아니라 안기부가 김대중한테 한 셈이다.[59] 미국 망명 기간 중에 만났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뉴욕 한인회장 출신인 박지원이다. 박지원은 12.12 사태5.17 내란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주장하는 등 전두환을 찬양하던 인물이었으나 김대중과의 만남을 통해서 민주세력과 연을 맺게 된다.[60] 으르렁거리던 공화당, 민주당 의원들이 함께했다. 그 유명한 에드워드 케네디도 이때 김대중을 호위하면서 내한했다.[61] 대표적인 인물이 2005년 세계 100대 석학 중 5위에 선정된 언론인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미국 국무부 차관보 Pat Derian[62] 노태우가 발표한 6.29 선언.[63] 김수환 추기경 역시 양보를 권유했다. 김 추기경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가 단일후보로 추대되면 군부가 용인하지 않으면서 아예 대선후보에서 강제사퇴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내용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64] 당시 추진위원회 대표의 한 사람이던 장을병 전 민주당 대표의 회고에 따르면, 재야에서는 김대중에게 양보를 하라는 쪽으로 계속 설득했고, 마침내 김대중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김영삼이 대선 후보를, 김대중이 당권을 맡는다는 합의가 이뤄져 기자회견만 앞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영삼이 딴소리를 하고 나왔다. 1971년 선거 때 대선 후보는 김대중, 당권은 유진산이라는 식으로 분리하다 보니 당과 선대위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았던 예도 있으니까, 후보도 당권도 자신이 전부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단일화는 성사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관련기사 링크[65] 민정당 후보로 출마한 노태우가 과거 DJ의 선거참모를 지낸 선거의 귀재 엄창록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지만, 엄창록은 "양 김이 모두 나온다는데 내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며 거절했다는 후문.[66] DJ가 과거 웅변교습실을 운영했을 시절부터 함께한 동지 김상현이 이때 실망감을 표하며 김영삼에게 갔다가, 3년 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다시 돌아오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관계가 되고 만다.[67] 특히 줄곧 여론조사 선두를 달리다 막판에 뒤집힌 YS 측은 데이터 분석 역량의 한계를 느끼고 김현철의 주도로 여론조사 및 정책개발 기관인 여의도 연구소를 설립한다.[68] 이기기만 하면 이름 모르는 예산도 내려보낼 수 있었으니...[69] PK 지역은 김영삼을, 호남 지역은 김대중을 지지.[70] 당시 DJ 측에서는 4자 필승론을 내세워 호남을 결집시킨 뒤 격전지 수도권에서 이기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보고 수도권에 공을 들였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경기지역 민심은 여권의 노태우에게 가장 많은 표를 주었으며, 결국 김대중은 3위로 낙선하고 말았다.[71] 총선 후 YS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정권 중간평가에 DJ가 제동을 걸었던 것도 이 무렵이다.[72] 노태우 대통령과 인척이자 6공화국의 실세였던 박철언 의원(법조인 출신)의 주장으로 DJ에게 먼저 제안이 들어왔었다.[73] 일례로 1991년에 이미 합의되었던 지방선거마저 새로운 여당(민자당)측이 연기하려고 하자, 평민당 측이 이를 결사저지해, 겨우 1991년에 기초의원선거와 광역의원선거를, 1995년에 전국 지역자치단체장을 선출하는 제1회 지방선거를 치르는 것으로 결정되는 해프닝이 있었는데,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세인들은 이미 정국의 주도권이 거대 여당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74] 김영삼이 노무현을 공천하여 정계에 입문했으며, 사적으로도 김영삼이 노무현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75] 잔류 초기에는 평화민주당과도 선을 긋는 독자노선을 추구하며 1991년 지방선거에서 단일화없이 따로 기초-광역 의원 후보를 냈지만, 민자당에 대한 여론이 나빴음에도 저조한 투표율로 인해 수도권에서 예상 못한 참패를 하였다. 이를 계기로 Main-stream을 벗어난 조직력의 한계를 실감, 강한 단일 야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의를 선택했던 것.[76] 5년 전 DJ 측에서 4자 필승론으로 주장했던 바로 그 구도이다.[77] 이에 대해 일부 진보그룹 출신 의원들은 당의 색깔을 너무 우경화시키려 한다는 불만을 보였다고 한다.[78] 조선일보같은 대표적인 보수 언론사도 92년의 은퇴 순간만큼은 민주화의 거장에 호의적인 보도를 내보냈다. 그러나 강준만등이 언급했듯, 보수 언론사가 92년의 은퇴를 호의적으로 보도한 것은 김대중이 다시는 정계에 복귀하지 말 것을 내포한 뜻이었고 그렇게 되면 야당은 정권을 잡을 수 없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기에 서술한 논평이라는 시각도 있다.[79] 이때까지 김대중이 쓴 책들 중 유일하게 정치적 메시지가 담기지 않은 책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이 김대중의 저서들 중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한다.[80]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산.[81] 신화통신을 위시한 중국 언론들은 김대중에게 차기 대선 출마 여부를 집중적으로 질문했다.[82] 이들 중에는 나중에 인기 그룹 DJ DOC의 노래('DOC와 춤을')를 개사해 만든 선거광고(DJ와 춤을)에 출연한 사람도 있었다.[83] 이전까지는 중앙에서 시장, 군수를 정부에서 내정해 내려보냈다.[84] 달변의 김대중도 이때만큼은 기자들 앞에서 맥을 못췄다. 갖은 대권 도전 후에 정계 은퇴를 했기 때문인지 보수 언론에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달관하는 분위기였기에, 이를 깨고 나온 DJ의 정계 복귀는 최초 보도에서 어떻게 다뤄주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마지막 불꽃, 4수, 노욕 등 기자들이 1, 2면에 쓸 단어가 남은 (정치)인생을 좌우할 수밖에 없기 때문.[85] 민주당 의원 53명이 신당에 합류했으며, 김대중과 가장 마찰을 빚던 당시 민주당 대표 이기택김원기, 노무현, 이부영, 제정구, 박계동(노태우 전 대통령의 4,000억 원 비자금을 폭로한 사람), 김부겸 의원은 민주당에 잔류하였다.[86] 민주당 잔류파들은 1996년 총선 패배 이후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다가 둘로 갈라서게 된다. 정권교체에 비중을 두는 쪽은 통합추진회의(약칭 통추)를 구성해서 야권재통합을 요구하다가 15대 대선 직전 김대중 지지를 선언하면서 국민회의에 가담하였다. 대표적으로 노무현은 통추 활동을 하다가 국민회의에 입당해서 부총재 겸 지원유세단장으로 김대중 후보의 지원유세에 나섰다. 반면에 3김정치 청산에 비중을 두는 쪽은 15대 대선 직전 전격적으로 이회창의 신한국당과 합당해서 한나라당을 창당하였다. 이기택, 조순, 이부영, 제정구, 김부겸 등이 한나라당에 참여하였다. 한나라당이란 당명도 조순이 직접 지은 것이다.[87] 임동원은 본래 군인 출신으로 노태우 정부에서 대북정책 실무를 맡았던 사람이다[88] 겨우 79석을 얻는 데 그쳤고 김대중 본인도 낙선했다. 특히 서울에서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야당이 패하는 일이 일어나 관계자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예를 들어 종로에서는 이명박이종찬노무현을 꺾고 당선되었고, 중구에서는 박성범정대철을 누르고 당선되었으며, 성동구 을에서는 김학원조세형을 이기고 당선되었다.[89]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90] IMF 사태, DJP연합, 그리고 이인제의 출마 중 하나만 없었어도 김대중은 끝내 청와대에 가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15대 대선은 문민정부와 한나라당이 IMF 사태라는 전대미문의 사고를 쳤고, 이인제가 표를 깎아먹는 등 호재가 겹쳤으며, 야권의 영입 대상으로 포항제철 설립자이자 원리원칙에 입각하는 경영자로 명망 높았던 박태준 전 회장 외에, 과거 정적 관계였던 JP에게까지 연대의 손을 뻗고 심지어 전두환노태우의 사면 복권에도 동의하며 5공 6공 출신 TK인사 엄삼탁, 박철언을 영입하는 등,[89] 40년 가까운 민주화 투쟁 세월동안 쌓은 덕망과 명예까지 송두리째 날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이 이회창에게 39만 표(시군市郡 1곳 차이)라는 아슬아슬한 표차로 신승을 거두었던 선거였다. 이 때문에 15대 대선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보수 세력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나라인지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예로 거론된다.[91] 집권 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선 확보에 실패했다는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김대중은 당선 후에 이를 지키지 않았고, 이로 인해 김종필과 다시 결별하게 된다.[92]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예산 200억 원이 책정됐지만, 참여정부 출범 후, 추가 모금 문제로 인해 기념관 건립은 무산, JP가 서운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단,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 기념관 건립 비용으로 배정한 예산(200억)은 그대로 집행되었고, 2002년 1월 건축공사가 착공됐으며, 2012년 서울 상암동의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으로 개관됐다. 김종필 역시 2015년 그의 회고록 격인 중앙일보 연재 소이부답에서 '내가 박정희를 대신해 당신을 도울 테니 당신은 박정희기념관을 세워달라'라고 부탁했고 김대중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실제로 이행하여 200억 예산을 책정하여 이를 바탕으로 박정희 기념관이 세워졌다고 언급하며 이를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93] 당시 취임식에는 마이클 잭슨도 취임식 소식을 듣고 직접 전세기를 타고 한국까지 날아와 참석했는데 김대중은 마이클 잭슨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관계였다.[94] 뭉개진 발음 때문에 "파항"으로 들리는데 맞춤 설정에서 재생 속도를 낮게 설정하면 "아~으아이"로 들린다.[95]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니할 수 없습니다."로 들리기도 한다.[96] 독재와 탄압을 이겨냈음에도 슬픔을 감추지 못한 장면은 국민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고, 민주당 지지층 사이에서는 지금까지도 명장면으로 회자하기도 한다.[97] 처칠의 하원 연설에서의 언급을 인용한 것.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1201/110556968/1[98] "예이"로 들린다.[99] 이 중 포항제철과 한국중공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 후 KT와 담배인삼공사, 한국전력공사, 한국가스공사 등을 민영화했다.[100] 1997년 말 70만 명이던 공공부문 인력을 55만 9천명으로 줄였다. 총 14만 1천 명, 전체 인력의 20%를 감축한 것이다.[101] 대표적인 지일(知日)인사인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이 나섰다. 박태준 회장의 노력으로 협상이 성사되었지만, 이윽고 일본이 "우리도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다."는(= 외압이 있다는 말로 해석 가능) 모호한 말을 남기며 협상을 틀었으며, 우리나라 상황이 호전된 99년에야 제대로 된 협력을 제공했다는 후문[102] 70년대 석유파동 당시와 비슷한 풍경이다. 이때는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총대를 메고 미국에 달러貨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경제관련 기관 관료들은 돈줄을 쥔 미국인들을 만나는게 중요한 일과였다.[103] IMF 요구한 사안과 직결된데다, 30대 재벌의 절반이 부도나고 매월 2,000 ~ 3,000개의 중소기업이 도산하며 은행의 자금도 말라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반쯤은 따를 수밖에 없는 권고였다. (대선자금을 대준) 대우그룹처럼 배짱있게 버틴 경우는 정말 드물다[104] 총 8천 1백 개의 행정규제를 폐지하였다.[105] "시중의 자금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명분이었지만, 현실은 최고 연 29.5%까지 치솟은 시중 금리로 인해, 실직 후 창업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퇴직자들 및 기존 기업인들을 크게 압박하는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났다. 결국, 정책 시행 5개월도 안 되어,"국내 금융회사들을 인수가능"하게끔 금융시장을 개방하는 조건으로 겨우 이자율을 낮출 수 있었다. DJ가 당선자 신분으로 자택에서 면담을 가졌던 조지 소로스도 이 금융시장 개방 6개월 뒤인 99년 1월 15일에 본격적으로 한국투자 의사를 밝히고 이득을 보았지만, 우리 국민들의 금모으기 운동 여파로 국제 금값이 하락함에 따라 전체적으로는 예상을 많이 밑도는 이익을 건지는 수준이었다고 한다.[106] 예상을 밑도는 수준이었다고는 하지만, 유태인 상인들의 셈법은, 우리가 "2배 이익을 보았다.(100% 이익)"고 여기는 걸, "50%밖에 못건졌다."고 볼 만큼 우리의 상식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저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107] 물론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9년, 1974년, 1979년에도 외환 위기가 있었으나, 1997년만큼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1979년 외환 위기의 경우, 그 당시 박정희 정권이 밑바닥부터 붕괴될 정도로 경제가 뒤흔들렸지만, 국제수지 적자 폭은 겨우 40억 달러에 불과했다.[108] 김대중 정부 시절 연평균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3.5%로 노무현 정부 때의 3.0%에 이어 우리 역사상 두 번째로 낮았다. 물가 상승률은 노태우 정부 때 7.4%로 가장 높았고, 전두환 정부 6.1%, 김영삼 정부 5.0% 등이었다.[109] 이전에는 고속도로에서 갈길바쁜 운수회사 차량들이 벌금을 미리 꼬깃돈으로(지폐를 던지기 좋게 접은 것) 단속 나온 순찰대원들에게 던지고 갔는데, 이렇게 벌금을 물더라도 운송시간을 단축하는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공돈이 될 수도 있었던 관계로, 한동안 고속도로 단속은 나름 로비까지 거쳐야 하는 노른자 보직이었다고 한다.[110] 그러나 6.15 공동선언은 노무현 정권 말부터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근래에 들어서는 남측의 강경대응 기조에 대한 북한의 대응 카드로 사용되고 있다는 냉소적 시각도 있다.[111] 만약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W 부시가 아닌 앨 고어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면, 북한에 대한 대규모 투자와 김정일 정권의 존립이 보장된다는 조건 하에 북미 수교는 결국 이루어지고, 북한의 전쟁도발, 핵개발위협 등도 중단되며, 남북경협이 대폭 확대되고, 남북간 자유왕래까지 조기에 실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112] 노벨위원회 기재된 내용으로는, 출생지가 당시 기준인 무안군이나, 현재 기준인 신안군이 아닌 목포시로 작성되어 있다.[113] 집권 7년 차에야 Anithing But Clinton 정책을 폐기하고 클린턴 시절의 유화정책을 일부 취했지만, 이미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가동 후 핵실험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 이전까지는 자국민의 시선에 잘 들어오는 강경책을, 김대중-노무현 두 우방국 대통령에게 외교결례를 범하면서까지 우악스러울만큼 밀어붙였다.[114] Anything But Clinton의 약자. '클린턴 식으로만 안 하면 된다'[115] 2001년 방미 때 미국의 네오콘들에게 얼마나 십자 포화를 맞으며 고생했는지, 김대중은 이후 측근들에게 "내가 혼자서 그들과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 아는가? 그동안 그대들은 뭐하고 있었는가?"라는 말로 당시의 심적 고통을 표현하기도 하였다.[116] 단, 이 원점의 시간대가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수립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대결국면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경제적인 부담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검토되어야 한다. 김대중(화해협력), 노무현(화해협력), 이명박(강경) 정부까지 모두 이 남북기본합의서를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대북정책을 추진하였다. DJ의 남북정상회담 성과인 6.15 공동선언문남북기본합의서 + 추가항목 약간 + 국가정상의 서명이라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117] 북한은 1차 핵 위기 이후 플루토늄 핵 개발이 동결되자, 늦어도 1996년부터 파키스탄의 '칸 네트워크'를 통해 별도의 우라늄 농축 핵 개발을 추진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즉, 햇볕 정책 진행 중에도 김정일은 핵무장이 가능한 옵션을 갖고 있었던 것.[118] 나이 80에 애를 낳은 격이란 비판이 있었다.[119] 이 독일식 내각제가 총리 = 대통령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엄연히 독일 연방의 대통령이 존재한다. 다만, 한국처럼 경제, 행정, 군사, 외교, 인사 전 분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는 것. 이는 총리도 마찬가지지만 총리는 장관급 및 실무자들을 정무상 직접 대면하며 국정을 조율할 수 있다.[120] 이 사람은 기발한 이벤트 연출과 박학다식, 그리고 남의 말을 잘 경청해주는 사교술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제인 전경환부터, 팝가수 마이클 잭슨, 김홍걸, 이명박 캠프의 일부 인사까지 인맥을 넓혀 영달을 누려온 처세의 신이라 할만한 사람이다. 특정 정권 인사의 측근이라고만 부르기에는 그 네임밸류가 아까운(?) 인물!![121] 개중에는 검사가 회사를 운영하는 김 씨 동창생을 협박해 김 씨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한 의혹도 있다. 이 동창생은 2007년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겪은 일을 녹음해두었다고 한다.[122] 2005년 사면 조치를 받은 김홍업이 2007년 국회 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돼 재기하고 당내활동도 활발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부분에서 기인한다.[123] 참고로 1999년 옷 로비 사건 역시 김대중 정부의 도덕성에 타격을 가한 것이었으나, 파괴력 측면에서는 정권말에 검사들이 "의욕적으로" 덤벼든 3형제 스캔들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124] 또다른 한 사람은 같은 민주당계 정당 소속 대통령인 문재인이다.[125] 반면 장남 김홍일새천년민주당 당적을 계속 유지했다. 이를 두고 정치적 해석이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노무현 탄핵 사태 때 탄핵에 반대함으로써 새천년민주당과는 다른 입장을 걷기도 했다.[126] 여야, 전직대통령에 구애 경쟁, 정치권 "DJ를 우리쪽으로‥"[127] 열린우리당 대통합때 사과할 건 했어야[128] 당뇨, 고혈압, 고관절염 등 각종 성인병에 시달렸다. 물론 팔순이 훨씬 넘은 몹시 많은 나이에 고문 후유증, 수감 후유증까지 생각하면 병이 없는게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129] 김대중의 사면여론 그리고 과거 용서 덕분인지 대통령이 된 이후 사이가 많이 호전되었다. 양김 모두 전두환에게 많은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죽는 날까지 전두환과 악감정이 심했던 김영삼과는 달리 김대중은 전두환과의 관계가 호전되었다. 전두환을 용서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가끔씩 청와대로 초청하여 국정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래서였는지 전두환은 김대중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고, 이후 영결식 때도 직접 조문을 왔다.[130] 공교롭게도 김대중이 사망한 그 해에 뇌졸중 판정을 받았다. 두 사람이 평생의 친우이자 라이벌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아이러니한 부분.[131] 추모록이 배치되어 있는데, 많은 시민들이 메시지를 남기고 간다.[132] 당장 이승만, 박정희 같은 경우는 계단이 적지 않게 있으며, 김영삼은 언덕을 올라야 한다.[133] 이미 직전의 재판에서 전두환 정권을 탄생시킨 12.12가 군사반란이라는 것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위시한 여러 반인권 범죄들의 실질적 책임자라는 사실이 인정된 바 있다. 게다가 전두환은 같은 독재자인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비교하더라도, 단 한 차례도 선거를 통해 국민에게 선택받지 못했기에 집권의 정당성 자체가 전무했다. 거기에 김대중은 개인적으로도 2차례의 감옥살이와 3차례의 가택연금에 더해 반대세력에 의한 죽을 고비만 3차례 넘겼고, 장남까지 고문으로 지팡이를 짚고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전두환 정부에서도 경제를 비롯하여 고평가받는 정책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통령에 대한 종합적 평가와 죄과에 대한 법적 처벌은 별개의 문제다. 널리 알려진 죄과만 치더라도 법적으로는 실제 판결이 그러했듯 사형도 충분했고, 정치적 부담을 고려하더라도 감형이면 모를까 딱히 사면을 시켜줘야 할 당위성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선택한 건 결국 정치적인 당위나 개인의 복수심보다는 사회 통합의 대의를 보았기 때문이며, 이는 일국의 지도자로서 고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134] 공교롭게도 이 세 대통령들은 각자 정치적인 유산을 확실히 남긴 인물들이다. 박정희는 산업화를 이끈 공으로, 김대중은 대한민국의 민주화햇볕정책을 이끈 공으로 각기 좌우 진영을 상징하는 정치인으로 꼽히며, 각자가 남긴 공적들은 국내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노무현은 지역감정 해소와 탈권위주의 지향, 지역 균형 발전을 통한 사회 통합이라는 이상을 제시하며 진보 진영에 새로운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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