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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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 관료.
2. 생애[편집]
2.1. 정치 입문 전[편집]
1941년 전라북도 익산군 오산면 신지리에서 태어나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합격한다. 하지만 졸업반이던 1964년에 문리대 학생회장으로 6.3 항쟁을 기획 및 주도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구속되면서 서울대에서 제적된다.
이후 김영삼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상도동계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때 여러 차례의 투옥, 정치규제 등을 겪었다.
2.2. 정치 활동[편집]
1980년, 김영삼 총재의 후광으로 신민당 이리시·익산군·군산시·옥구군 지구당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나, 5.17 내란으로 인해 정치규제 대상이 되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3당 합당에 동참하여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소속으로 제17대 국회의원 임기 종료인 2008년까지 해당 지역구에서 내리 5선을 하였다.[2] 자신의 비서를 지냈거나 자신의 밑에 있었던 인물로 안희정, 이광재, 김영춘, 이성헌 등이 있다.[3]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정무 제1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시절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의 발호를 막아야 한다고 건의하다가 김영삼의 눈 밖에 났다. 정무 제1장관에서 물러난 이후 1994년 민자당 서울시지부장, 1995년 민자당 사무총장 등 주요 당직을 역임했다. 민자당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 지방자치제의 완전한 정착에 큰 역할을 했으나[4] 민자당이 지방선거에서 대패하면서 사무총장에서 물러났다.[5][6] 이후 96년 총선에서 당선된 직후 그해 말까지 정무1장관에 다시 기용되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에서 대권 후보 9룡[7] 중 한 명으로 불렸으나 경선에서 민주계의 단합된 지원을 받지 못하고 4위에 그쳤다. 이후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해 만든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 조순 및 이회창 총재 체제에서 당 부총재를 역임하였다.
1997년부터 9년간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4대 회장을 맡았고,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이회창 총재가 개혁이란 명분으로 단행한 공천 학살에서 계파 보스로는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러나 계파 보스를 탈락시키고 계파원들이 대부분 생존했던 다른 계파와는 달리 소위 DR계는 거꾸로 계파원들이 대부분 공천에서 탈락했다. 16대 총선 직후 실시된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총재 후보로 나섰으나 이회창의 벽을 넘지 못하고 2위에 그쳤고 이회창 총재가 지명직 부총재를 제안했으나 거절, 평당원으로 돌아갔다. 이후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패배한 이후 실시된 임시전당대회에 대표 후보로 나섰으나 4위에 그쳤다. 한편, 2002년부터 2017년까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이사장을 역임했다.
2004년 총선에서 탄핵 역풍을 뚫고 5선에 성공, 17대 국회 제1야당 첫 원내대표에 선출되었다. 그가 역임했던 당직 중에서 임명직이 아닌 선출직은 원내대표가 처음이자 마지막. 그러나 신행정수도 특별법 위헌 판결에 따라 열린우리당이 후속입법으로 추진한 행정도시 특별법이 통과됨에 따라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한·중 의원협의회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이명박을 지지하였다. 이명박 후보 선거 캠프의 지휘부였던 6인회[8] 의 일원으로 대선 승리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똑같이 이명박의 BBK 의혹을 변호하고 이명박 당선에 상당히 기여했던 고승덕한테 서울 서초 을 공천에서 밀려서 탈락하였다.[9]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약칭 민화협) 상임의장과 대통령실 국민통합특별보좌관을 역임하였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강삼재, 문정수, 김정수, 박희부, 심완구, 이신범, 노병구, 최기선 등 같은 옛 김영삼계 정치인 중 일부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이 주최하려던 민주당 창당 60주년 행사에 대해서는 김대중계 정치인이 아닌 친 노무현계가 주도하는 행사이므로 불참하겠다고 하였다.
2017년 초, 김영삼민주센터 신임 이사장에 선임되었고,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안철수 후보의 러브콜에 고심하다가 결국 4월 16일 김영삼의 차남인 김현철 국민대학교 특임교수와 함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6월 26일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내정되었고, 8월 29일에 부의장직 임명장을 받아 2019년 8월까지 수석부의장직을 수행한다.
2018 남북정상회담 평양에서 각계각층의 인사들로 구성된 특별수행단에 포함되면서 오랜만에 언론에 모습을 비췄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악수하며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보인 것은 덤이다.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직에서 용퇴한 뒤인 2019년 12월, 월간중앙과 단독 인터뷰를 했다. 문재인 정부의 실정과 86세대의 장기집권에 대해 가감없이 비판하면서도 "다시 2012년으로 돌아가도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을 것이다"라면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을 거두지 않으며 문재인 대통령의 각성을 촉구했다.[10]
3. 논란[편집]
2006년 한나라당 공천 헌금 비리 사건에 박성범 의원과 더불어 현직의원 신분으로 연루되어 부인과 사건 관련자 등 6~7명이 검찰의 수사를 받게되었다. 김덕룡 본인은 무혐의로 결론이 났고 부인이 구속수감돼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박스로 공천 헌금을 나르는 장면이 아파트 CCTV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검찰은 이를 증거로 포착했다.
4. 여담[편집]
- 사실 젊은 시절에는 염색을 하지 않은 백발 미남으로 유명했다. 그러다가 17대 총선을 앞두고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검은색으로 염색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 그래서 선거운동에서 '머리가 하얀남자'를 밀었었다. 자서의 제목도 '김덕룡,머리가 하얀남자'...
- 드라마 제5공화국에도 나온다. 배우 정명환이 연기했으며, 김영삼의 최측근 포지션으로 김영삼의 등장이 꽤나 많은 관계로 이 인물의 등장도 상당히 많다. 드라마 내의 포지션은 전두환 옆의 장세동, 노태우 옆의 박철언과 비슷하다.
- 2007년 경에 서초동 반포대로에 있던 사무실[11] 에 도둑이 들었던 적이 있다. 사무실 내에 있던 컴퓨터 본체들을 모조리 도둑 맞았다고 한다.
- 보수정당 지지 성향이 강한 서초구에서 마지막으로 민주당 당적으로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된 정치인이다. 동시에 보수정당 당적으로 서초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첫번째 정치인이기도 하다.
- 전라일보 2023년 1월 20일자에서 인터뷰를 했다.
5. 소속 정당[편집]
6. 선거 이력[편집]
7. 둘러보기[편집]
[1] 現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오산면 신지리[2] 그 뒤를 이은 제18대 서초 을 지역구 국회의원이 바로 고승덕이다.[3] 그러나 셋 다 자신의 곁을 떠났다. 안희정은 3당 합당에 반발해 노무현 의원실로 옮겨 그의 가신이 됐고, 김영춘은 2003년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다가 2012년에 재회했으며, 이성헌은 2004년 친박계로 전향했다.[4] 당시 기초단체장 및 기초의원 정당 공천을 놓고 여야가 팽팽히 맞섰는데 민자당은 정당 공천 배제를, 민주당은 정당 공천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황낙주 국회의장이 한남동 의장 공관에 연금되고 김기배 국회 내무위원장이 민주당 의원들에 이끌려 속초로 강제동행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결국 여야의 합의로 기초단체장만 정당 공천하는 것으로 결론났다.[5] 1995년 지방선거는 김영삼 정부 출범 2년을 맞은 중간선거 개념이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김종필의 자민당 탈당 및 자민련 창당으로 처음부터 어려운 선거였다.[6] 당시 이춘구 대표가 선대위원장, 김덕룡 사무총장이 선대본부장을 맡았으나 선거 패배가 이들의 책임은 아니다.[7] 나머지 8명은 이회창, 이수성, 이홍구, 박찬종, 최형우, 이인제, 이한동, 김윤환.[8] 이명박, 이상득, 최시중, 이재오, 박희태, 김덕룡.[9] 비록 한나라당 공천에서 밀려나기는 했지만, 고승덕 또한 이명박 前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했던 인물이며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도 그렇고, 타 기관의 상임의장에 임명된 것을 봤을 때 이후 김덕룡의 태도에서도 딱히 불만은 없었던 듯 하다.[10] 다만 20대 대선 정국을 기점으로 국민의힘 내에서 친박이 대대적으로 몰락하고 윤석열을 중심으로 한 친윤은 대다수가 상도동계와 밀접한 구 친이계 출신들이 대부분이라 향후에는 윤석열 쪽으로 돌아설 가능성도 높다. 더군다나 김영삼의 아들인 김현철이 국민의힘으로 복당하면서 상도동계 원로들도 국민의힘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아졌다. 실제로 김현철의 아들인 김인규의 개소식에도 참석하는 등 사실상 민주당과는 완전히 멀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11] 공교롭게도 해당 사무실은 13년 뒤 그의 지역구였던 서초구 을에 출마한 박경미 후보가 사용하였다. 낙선하고 재빠르게 방을 빼서 현재는 공실이다.[12]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3]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4]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15] 문재인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16]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17] 1990 민주자유당 합류 (3당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