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윤(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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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덕윤.jpg
출생
1918년 8월 3일
평안남도 대동군 서천면 인흥리[1]
(현 평양직할시 모란봉구역 민흥동)
사망
2006년 6월 10일
캐나다 밴쿠버
묘소
밴쿠버 한인 천주교 묘지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편집]


김덕윤은 1918년 8월 3일 평안남도 대동군 서천면 인흥리(현 평양직할시 모란봉구역 민흥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의 숭인상업학교 재학중이던 1936년 6월 동교생 박윤옥, 연광용(延光榕) 등과 함께 농민의 계몽지도 및 민족의식의 고양을 목적한 항일결사 일맥회(一麥會)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일맥회의 활동이 부진하자, 이들은 보다 강력한 결사를 조직할 것을 뜻하고 1937년 2월에 동지 지광호(池光浩)의 집에서 비밀결사 열혈회(熱血會)를 결성하였다. 이때 그는 열혈회의 재무의 일을 맡았다.

열혈회는 독립을 목적한 결사로서, 그 행동방략으로는 농민대중의 지도를 통한 민족의식의 배양과 농업기술 및 경영을 지도하여 경제적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후 이들은 실행에 앞서 동지포섭에 힘을 쓰면서 동지간의 단결을 강화하였다. 그러던 중 졸업을 앞두고 1938년 2월 최병무(崔秉武) 회원의 집에 모여 졸업 후의 구체적인 활동방침을 정하였는데, 이들은 각자 농촌개혁에 필요한 지식을 10년간 연구한 뒤 이를 바탕으로 독립달성을 촉진하기로 하였다. 이때 그는 작물부문의 연구를 맡았다.

그리고 이들은 회원간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각자의 성명대신 한글문자 한자씩을 암호로 정하였으며, 또 매년 3월 1일, 8월 29일을 열혈회의 기념일로 정하고 이날에는 조국독립을 위한 기도 및 단식을 행하여 항일정신을 기르기로 했다. 1938년 3월 숭인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김덕윤은 열혈회의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차성현의 국민(國民)고등학교를 마친 뒤 1939년 4월에 도쿄니혼대학 전문부 척식과(농업전공)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같은 목적으로 도일했던 박윤옥·김동순(金東舜) 등 열혈회 회원들과 계속 모임을 가지며 동회의 사업을 추진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고 말았고, 그는 1939년 11월에 붙잡혔다. 이후 2년 동안 미결수의 상태로 있다가 1941년 11월에 동경형사재판소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항소하여 2심에서 징역 4년·집행유예 5년형을 받았다.

8.15 광복 후 캐나다로 이민가서 밴쿠버에서 조용히 지내다 2006년 6월 10일에 사망했다. 사후 밴쿠버 한인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김덕윤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1] 1939년 평안남도 평양부에 편입되어 평양부 인흥리가 되었다.